|
|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57편)*
*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甲戌換局) *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힘겹게 집권한 후 민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이 노래에서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의미한다.
그리고 양쪽에서 왔다갔다 날아다니는 호랑나비는 숙종을 말한다.
(나 같으면 호랑나비가 오락가락 하지 않게 꽉 붙잡을겨~ 안되면 다리 몽둥이라도 부러뜨릴꼬야! 크하하~)
궁궐에서 쫓겨난 인현왕후 는 친정집 이었던 안국동에 거주하며 임금이 계신 창덕궁을 늘 바라보면서 살았고,
왕의 마음도 노래와 같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숙종(肅宗)은 조강지처(糟糠之妻)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희빈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거봐~ 무조건 젊고 이뻐야 한다니께!)
또한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고 방자하게 행동한 장희빈의 태도는 더욱 숙종(肅宗)의 마음을 떠나게 했고,
여기에 숙종의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니, 짜자자잔~~~ 그녀가 바로 무수리 최씨였든것이였다.
(누가 여자의 마음을 갈대라 했누? 이제부터 남자의 마음은 억새풀이라 하겠🐂)
무수리는 궁궐의 최하층 천민이었다.
최씨는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는 천민이었고, 야사에 의하면 그녀는 인현왕후 의 직계 몸종 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숙종 은 헛헛한 마음으로 궁궐을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방에 촛불이 켜져 있어 호기심에 가 보니 웬 어린 무수리가 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오늘이 인현왕후 생신인데 궁궐 밖에 계시니, 이렇게라도 중전마마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고 답하였다.
숙종은 무수리 최씨의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그날 밤 그 방에서 그녀에게 술 한 잔을 따라 보라고 했다.
장희빈이 찬 밥이 되는 순간이었다.
숙종의 환심을 얻은 무수리 최씨는 훗날 아들 연잉군을 낳고 숙빈이 되었다.
숙종의 마음이 장희빈에게서 멀어지자 이러한 마음을 눈치 챈 서인들은
재빨리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했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에 오르게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1694,甲戌換局) 이었다
요대목에서 잠깐 갑술환국 에 대하여!!
갑술환국(甲戌換局) 은 1694년(숙종 20년)에 일어난 대규모 정치적 전환점으로, 숙종 재위 기간 중 발생한 여러 환국 중에서도 서인이 남인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장악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인현왕후 복위 운동*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면서 남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숙종은 장희빈에게 점차 싫증을 느꼈고, 폐비된 인현왕후를 동정하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때 서인 세력(특히 소론)을 중심으로 폐비 복위 운동' 이 전개되었습니다.
*함이완의 고변*
남인 세력의 영수였던 우의정 민암 등은 서인들의 복위 움직임을 탄압하기 위해 서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이 서인들을 무고하려 한다고 의심하며 마음을 돌렸습니다.
당시 서인 김춘택 등이 복위 자금을 모으는 등 움직임을 보이자 남인이 이를 가혹하게 수사하려 했으나,
숙종은 갑작스럽게 남인 관료들을 대거 파직하고 서인들을 다시 등용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남인 세력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영의정 남구만을 비롯한 서인(소론과 노론)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귀하였으며, 왕비였던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기사환국 때 서인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남인은 이 사건 이후 중앙 정계에서 힘을 크게 잃었으며,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갑술환국은 숙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 수단이었습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 특정 붕당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반대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견제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붕당 간의 비판과 공존의 원칙이 무너지고, 상대 당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일당전제화 경향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인은 장희빈과 세자(경종)에 대한 처우 문제를 놓고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됩니다.
요대목에서 또 기사환국(己巳換局) 이
나오니 다시한번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년) 조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계 개편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인 세력이 완전히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인 희빈 장씨(장희빈) 와 송시열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린 변곡점이기도 합니다.
기사환국의 주요 흐름과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자(元子)' 정호 문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숙종의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숙종의 고민: 당시 정비인 인현왕후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 소의 장씨(훗날 희빈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았습니다.
숙종은 이 갓 태어난 아들을 나라의 본뿌리인 '원자'로 정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격상시키려 했습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적자를 기다려야 한다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특히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이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느낀 숙종은 서인 세력을 가차 없이 내치기로 결심합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조용하게 녹봉이나 받으면서 살면되지 껄떡그리다가 사약을 받고 사망했으며, 수많은 서인 관료들이 파직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서인이 물러난 자리를 남인 세력이 차지하며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서인 편에 서 있던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임금들은 본처를 마음대로 잘라내도 되는갑네요 임금할만하넹 ㅎㅎ)
그 자리를 희빈 장씨가 차지하며 정식 왕비가 되었습니다.
숙종은 '환국(정권 교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신하들 사이의 붕당 정치를 이용하고, 결과적으로 국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인시켰습니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서~~~^^
서인 김춘택이 인현왕후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남인들에 의하여 숙종(肅宗)에게 알려졌다
그간 무능하고 편파적인데다 뻑하면 상대를 모략하는 남인에게 신물이 난 숙종은 이 모함을 기회로 남인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며, 왕비 장옥정 을 폐비하여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하여간 주관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숙종(肅宗)의 변덕도 알아줘야 한다.
숙종(肅宗)은 즉위한 후 20여 년에 걸쳐 정국을 뒤집어 엎기를 여러번,
남인과 서인은 서로 모함하고 역모를 고발하여 정정은 개판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 정치인들 하는짓거리가 숙종을 본받아서그런가???
숙종(肅宗)이 서인과 남인이 벌이고 있는 음모와 모함의 한 가운데서이를 해결할 대책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한 채,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잔머리를 굴리는 동안 조선의 병은 시름시름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장옥정(張玉貞), 사랑에 살다 죽다 *
장옥정(張玉貞)이 희빈으로 강등되면서 그동안 잘 나가던 오빠 장희재 도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귀양길에 올랐다.
장희빈 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후 질투심과 원한으로 이를 갈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숙종도 정이 다 떨어졌는지 더 이상 장희빈의 처소를 찾지 않았으며,
장희빈 도 왕과 왕비에게 후궁들이 날마다 올리는 문안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일종의 냉전이었으며, 이후 장희빈
은 거의 8년간 잊혀진 후궁이 되었다
(이룬! 독한 남자를 보았나? 8년씩이나... 우쒸~지독한넘)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희빈은 취선당 골방 한 구석에 신당을 차려놓고 두세 명의 무수리와 함께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전으로 복위하기를기도하고 무당을 불러 저주하는 굿을 하게 했다.
이러던 중인 1701년 인현왕후가 덜커덕 종기로 죽었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다시 중전에 올랐을까?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희빈의 바램을 이루어주기보다 오히려 그녀를 궁지로 몰아 세웠다.
인현왕후 가 저주로 죽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숙종은 장희빈이 중전을 홀대하고 저주하는 일을 벌였다면서 장희재를 처단하고 장희빈을 자진시키라고 명했다. (무고의 옥)
이유는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 무고의 옥(巫蠱의 獄)에 관련하여 저주의 밀고를 한 인물이 바로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였으며,
당시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이윤(李昀)은 14세였다
장희빈 처소의 계집종들과 장희재의 처가 잡혀와서 고문을 받았으나,장희빈은 절대 목숨을 끊을수 없다고 버티었다.
대신들이 자진을 시키는 것은 너무하다고 말렸으나 숙종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사람을 죽여 나갔다.
결국 장희빈 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그녀의 종10여 명은 맞아죽거나 능지처참을 당했다
장희빈의 죽음은 그녀를 소재로 한 사극의 백미를 이룬다.
사극을 본 사람이라면 발악하며 사약을 거부하는 장희빈의 모습을 또렷이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에서는 장희빈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대신 서인에 의해 쓰인 <수문록>에 의하면 장희빈이 죽기 전에 세자에게 위해를 가해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장희빈
의 최후는 악녀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극적인 요소를 위해 각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상 장희빈은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 희생된 불쌍한 여자였을 뿐이다.
재수없이 변덕스러운 숙종을 만났던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이룬~ 호랑나비 같은 숙종..)
숙종 28년, 장희빈 을 사사시키고 10개월이 지나자43세의 숙종(肅宗)은 왕비 간택령을 내렸다
세번째 왕비였으며, 간택된 여인은 숙종보다 27세나 어린16세의 인원왕후 김씨였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58편)*
독살설의 한가운데 있었던 경종(1688~1724)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다(1688년)경종 이윤(李昀)은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 유명한 장희빈 장옥정 이윤(李昀)이 태어났을 당시, 숙종(肅宗)의 나이는 27세였다.
지금 생각으로는 '적당한 나이에 아들을 얻은 거 아닌가?'
라고 볼 수 있지만,14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肅宗)의 입장에서는 남인과 서인의 갈등 속에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시급했으므로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윤(李昀)은 태어난 지 겨우 100일만에 원자로 책봉되고 3세에 왕세자가 되었다
이윤(李昀)은 훗날 무수리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延㭁君)이 태어나기 전까지 숙종의 유일한 외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더구나 경종(景宗)의 유년시절은 남인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안정적이었고, 아마도 이때가 경종 이윤(李昀)이 가장 행복한 시절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숙종 (肅宗)이 환국을 통해 신하들을 갈아 엎으며 왕권을 강화했고, 3번째 환국이던 갑술환국 이후,
이윤(李昀)은 자신을 지지해주던 남인 세력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중전이었던 어머니가 희빈으로 강등되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
당시 이윤(李昀)의 나이는 9세,
어느 정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였다.
친모인 장희빈은 계모인 인현왕후를 미워하고 저주했지만,
이윤(李昀)은 새어머니인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권되면서 이윤(李昀)은 그녀의 양자가 되었다
(세자 이윤)엄마 없는 하늘 아래 (1701~1720)
친모인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어서 이윤(李昀)의 세자 자리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자 이윤은 31년 동안 세자생활을 하고 결국 아버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0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죄인의 아들인 이윤(李昀)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숙종(肅宗)에게 왕비 소생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왕비를 3명이나 두었지만 그 사이에서 아들이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후궁 장희빈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장자의 권한은 무시할 수 없었고 게다가 법적 으로는 인현왕후가 어머니로 되어 있어서 왕위계승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라 할지라도, 친모가 죄인임이 명백했으므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약 15년간 세자 이윤(李昀)은 고립되어 있었다.
1701년에 어머니 장희빈이 죽고 1720년에야 왕위에 올랐으니, 인고의 세월 19년을 더해 31년 이라는 세자생활을 했던 사람이 바로 경종(景宗)이었다.
(그 인고의 세월에 토닥토닥..)
사춘기에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를 여의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어머니의 처리문제로
서인이 노론(보수파)과 소론(진보파)으로 갈라져 소수인 소론만이 경종(景宗)을 지지하고 있었으니,
홀로 암투가 심한 궁궐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경종의 고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말조심을 하고 과묵해지기 시작해 실록에까지 기록될 정도였다.
"깊이 침묵하셔도 우레소리가 나는 듯하였으며, 말하지 않고 행동하는 가운데 지극한 감화를 운용하시는 것은 진실로 신민(臣民)이 엿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한 왕의 자리(1720~1724)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표현할 수 없었던 경종(景宗)은 왕이 되고 나서도 왕위에 대한 압박을 더욱 받았다.
인현왕후의 죽음 이후, 3번째 왕비가 된 인원왕후는 16세로 경종보다 1살 많았고 숙종의 나이는 42세였다.
숙종(肅宗)과 인원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선조와 광해군 때처럼 왕비 소생의 아들이 후궁출신의 세자를 충분히 몰아낼 위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인원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사실 경종(景宗)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이복동생 연잉군(延㭁君) 이었다.
6살 터울의 이복동생 연잉군은 숙종의 늦둥이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었고,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그를 지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경종(景宗)이 즉위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노론의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아직도 후계자가 없으시니 연잉군(延㭁君)을 왕세제로 삼으소서!"
전하의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후사를 두지 못하시니, 삼가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자성(慈聖)께서는 커다란 슬픔으로 애구(哀疚)하시는 중에도 반드시 근심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선왕께서도 반드시 정성스럽게 돌아보며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 경종수정실록 2권 -
(개소리엔 뭐가 약이지? ㅋㅋ)
당시 경종(景宗)의 나이가 34세였고, 왕비의 나이는 불과 17세였다.
아직 자녀가 없으나 그래도 즉위한 지 1년밖에 안 된 왕에게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삼으라 하니,
경종 입장에서는 매우 건방진 이야기인 데다 대놓고 하는 역모 인지라 모조리 처형감 이었으나,
노론이 꽉 잡고 있는 조정에서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더군다나 왕실 최고의 어른인 인원왕후도 연잉군(延㭁君)을 지지하고 있던 터라 경종(景宗)은 매우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차기 왕을 신하들이 택하는 '택군(擇君)'은 사실 그 자체가 역모였다.
하지만 현재 노론의 입장에서 왕세제(王世弟) 책봉 결과는 자신들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의 판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잉군(延㭁君) 또한 이러한 노론의 추세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즉 연잉군(延㭁君)이 왕위에 관심이 없었으면 궁궐을 떠나든지, 노론과 등을 지고 술이나 퍼마시면서 유유자적하면 그만이었으나, 연잉군(延㭁君)은 왕의 자리에 야심이 있었다
결국 경종(景宗)은 연잉군
을 왕세제 에 책봉했으나, 노론은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어쭈구리~한 술 더 뜨는데?)
설상가상으로 대리청정은 왕이 명령을 내려도 신하들이 울고 짜며 반대해야 되는 일인데
(영화 '사도'에서 보셨쥬?)
신하들이 나서서 이를 주청하니,
이는 완전히 경종(景宗)을 물로 보는 처사였다.
심신이 모두 쇠약해 말도 하기 싫었던 경종(景宗)이 그만 노론의 윽박지름에 밀려 연잉군(延㭁君)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이번에는 야당인 소론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노론의 대신들이 왕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대리청정을 요구했으니 처벌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안 그래도 너무 거세게 밀어붙이는 노론 세력에 만정이 다 떨어졌던 경종(景宗)은 소론의 지원 속에 즉각 노론의 4대신 김창집, 이건영, 이이명, 조태채 등을 삭탈관직한 후 유배 보내고 그 자리를 소론들로 채웠다.
*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 *
정국이 이렇게 노론에서 소론으로 전환을 이루었을 때 서얼 출신 남인 목호룡의 고변사건이 일어났다
목호룡이 고변한 내용은 노론 측에서 숙종이 죽기 직전에 세자인 이윤 (李昀) 을 3가지 방법, 즉 '삼급수'로 죽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삼급수란 자객이 칼로 죽이는 대급수, 약으로 살해하는 소급수,
모해하여 폐출시키는 평지수
를 의미했다.
놀란 경종(景宗)은 즉시 국청을 열 것을 명했고, 관련자들이 줄줄이 잡혀왔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배되었던 노론 4대신은 사사되었고,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된 사람이 170명을 헤아렸다
이 고변서에 연잉군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어 연잉군은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형인 경종에게 자신이 무관함을 눈물로 호소하여 죽음의 문턱을 벗어 아사리판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사람의 명은 타고 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이렇게 왕족이 역모에 연루되었을 때 살아 남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경종(景宗)이살려 주는 바람에 연잉군(延㭁君)은 여든 살 넘어까지 장수했던 것이다.
* 게장과 감을 먹고 죽은 임금 *
경종(景宗)은 14세 때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고 충격을 받았던 탓인지 이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야사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포악을 떨다 마지막으로 아들 보기를 청했고,이에 세자 윤이 오니 이왕 죽을 바에야 네가 살아 무엇하랴?"
하면서 세자에게 달려들어 거시기를 움켜잡고 힘껏 잡아당겼다고 한다
세자 이윤 은 거시기가 왕창 늘어난 탓에 병을 얻고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고 하나,이 스토리가 노론의 '카더라 통신인지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종(景宗)이 재위 5년 가까이 되자 병세가 심각해져서 거의 식사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대비 김씨와 연잉군은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景宗)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그날 밤 부터 경종ㅈ은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왔으며,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환후는 차도가 없는 채 설사만 계속했다.
게장과 생감은 의가에서 매우 꺼리는 상극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게장과 생감을 올린 지 5일 후에 연잉군은 다시 의원들과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 이공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강한 처방을 써서 명성을 얻은 의원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공윤은 자신이 처방한 약을 먹고 인삼차를 마시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나, 연잉군(延㭁君)은 화를 벌컥 내며 인삼차를 올렸다.
일개 어의가 왕세제(王世弟)와의 말다툼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인삼차를 마신 후 얼마 있다가 경종
은 숨을 거두었다.
연잉군이 상극의 음식과 금하는 인삼차를 올린 의도는 경종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이래서 연잉군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경종 독살설에 휘말렸고,
경종비의 동생인 심유현이 경종의 시신을 직접 보고 독살임을 확인했다고 발설하면서 세간에 경종의 독살설이 퍼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