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가슴을 나누는 위대한 자선을 하여라
동양학에서는 운명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가 자선이고, 두 번째가 풍수고, 세 번째가 명상 혹은 독서라고.
오래전 어떤 기사에서 본 기억이 난다.
한 중년 남성에게 갑자기 유산이 상속됐다.
전혀 모르고 있던, 조상이 물려준 땅이 발견돼 큰돈이 생기게 된 것.
남자는 그 막대한 돈을 한 대학에 몽땅 기증했다.
그러면서 그가 한 말.
“별거 아닌데요. 저는 영원히 갖는 법을 선택한 겁니다.”
충격이었고, 감동이었고, 어떤 예술 작품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구겐하임과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이름만으로 무엇이 떠오르나?
금수저 출신들의 유산과 상속에 관련된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다.
먼저 위대한 현대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년)의 자선 행보를 살펴보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영미분석철학과 일상언어학파 선구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카네기’로 불리는 철강 재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냥 부자 정도가 아니라 억만장자 가문 태생으로, 부친은 오스트리아 경제사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로도 유명했는데, 로댕을 비롯해 클림트와 빈 분리파를 후원했다.
어머니는 대단한 음 애호가로 브람스, 슈만, 말러 등이 집안을 드나들며 연주했고,
넷째 형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됐다.
이처럼 외형만 보면 전혀 부러운 것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이 억만장자 가족에는 우울증과 자살과 광기의 기운이 맴돌았다.
첫째, 둘째, 셋째 형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피아니스트였던 막내 형은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아마 형들의 죽음은 진로 문제로 인한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동성애 문제 등이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도 내내 우울과 자살 욕구 그리고 동성애 갈등에 시달렸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아버지의 바람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공학도의 길을 걸어왔지만,
우연히 ‘수학 원리’라는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 저자를 찾아간다.
바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철학을 배우다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홀로 철학을 연구하겠다며 노르웨이 시골의 오두막집에서 은둔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전쟁에 참전했고 여기에서도 철학 일기를 쓰며 연구했다.
그리고 포로 신분으로 ‘논리철학논고’ 집필을 완성한다.
포로 석방 후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아이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파면당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정원사로도 일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런던의 병원에서 약품 배달부로 일했고,
케임브리지대 교수로도 근무했다.
무엇보다 1913년 스물셋의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는다.
그는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렇지만 그 재산 전부를 예술가와 형제들에게 줘버린다.
재능은 있으나 가난한 예술가에게 지원할 것을 ‘횃불’지 편집자에게 일임하고 기부했다.
수혜자로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게오르크 트라클,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건축가 아돌프 로스 등이 있다.
정작 자신은 방 한 칸과 몇 개의 가구가 전부였는데,
이유인즉슨
“가파르고 높은 산을 올라가려면, 무거운 배낭은 산기슭에 놔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
가파른 산이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대한 은유였을 것이다.
평생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열한 행위며 성급한 자기방어라고 생각하는 한편,
동시에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불시에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다.
원래는 탈장 때문에 징집에서 면제됐으나,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즉 죽음과 가까이 마주하려는 욕구로 인해 군복무를 지원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마침내 최전방에서 가장 위험한 곳,
포격 대상이 될 첫 번째 장소인 관측소에 배치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암에 걸렸다는 말에 너무나 기뻐했던 비트겐슈타인은
62세인 1951년 세상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멋있었다고 전해주오.”
재산 전부 예술가와 형제에게 줘버린 비트겐슈타인
미국을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만든 페기 구겐하임
또 다른 별난 후원가는 페기 구겐하임(1898~1979년)인데,
사실 그녀의 빛나는 예술가 지원은 아버지를 벤치마킹한 행위였다.
페기는 유명한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이자 미국이 현대 미술의 중심지가 되도록 만든,
‘미술계의 쉰들러’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미술가들을 망명시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페기는 전운이 짙어지자 모두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향하려고 했던 1940년 12월,
유대인 유럽 탈출을 위한 비상구조위원회에 50만프랑을 기부해 유대인 구조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그녀를 통해 뉴욕에서 피난처를 찾은 미술가로는
샤갈을 비롯해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쿠르드 셀리히만 그리고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이르지만
이혼하게 된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다.
페기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뉴욕에서 정착할 때까지 1년 동안 매달 200달러씩을 제공했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돈이다.
이런 페기의 예술가 후원 유전자는 아버지 벤자민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아버지는 페기가 사춘기였을 때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 침몰로 사망한다.
형제 중 여성 편력이 가장 심했던 페기의 아버지는 특별히 애인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했다.
페기는 훗날 기자들에게
“나는 아직도 여기저기 내 아버지의 애인들에게서 유산을 물려받는다.
아버지가 그 여자들을 위해 신탁계정을 개설해놔 그들이 죽으면 나에게 돈이 돌아온다”
아버지의 실종은 심각한 트라우마였지만, 몹시 사랑했고,
듬뿍 사랑받았던 페기에게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데 최상의 기제였다.
페기의 남성 편력은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의미다.
그것도 예술가 성향이 다분했던 아버지처럼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사업가는 단 한 명도 없었고,
한결같이 문학가와 예술가였다.
그렇게 페기의 아버지와의 동일시는 예술과 사랑,
남성(예술가)과 후원으로 합치돼 미술사에 영원히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