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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묵상글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인성과 신성의 교환 대축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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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60323 강론글 말미에 적으시다.>
내일부터 부활 때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올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사순 시기 잘 보내시길 바라고 빕니다.
위에 따라 오늘 분을 4시 반 ~ 5시까지 안 올리실 경우
지난 강론글 중 1편을 아래와 같이 올리고
5시 또는 5시 20분 이후 7시 반까지 올해 글을 올리실 경우
지난 글 아래에 올리도록 합니다.
<05:20~07:20 중에는 새벽미사 참례로 글 못 올릴 수 있음>
^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05:00 현재 아직 /
*** 08:55. 현재 강론글 올리지 아니하심
어제 순례중에 강론글을 올리셨기에 추가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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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5 05:21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인성과 신성의 교환 대축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진다는 얘기이고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오늘 히브리서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고,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어도
우리 인간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이루실 수 없는데
예수님도 마리아도 그 뜻에 동의하셨고
우리도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전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천사의 알림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의 동의 없이는 하느님도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럴 뜻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뜻을 존중하시어 당신 뜻을 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스스로 꺾고 당신 뜻을 스스로 따르도록
당신도 당신의 뜻을 능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우리의 사랑의 응답을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아무리 오시려고 해도 오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마리아께서 주님 뜻에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리아에게 수태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주님을 수태하신 것입니다.
두 분의 응답은 능동적인 수동태이고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사랑의 응답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이 있었기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성탄도 그렇고 마리아의 수태도 신성과 인성의 교환이고,
그래서 오늘 전례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모태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구세주의 신비를 찬양하고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신성을 잉태함으로써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 신성의 참여에 초대받는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까지 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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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05:00 현재 아직 /
*** 08:55. 현재 강론글 올리지 아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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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순례중에 강론글을 올리셨기에 추가하여 올립니다.
김레오나르도 2026.03.24 13:36
오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다가 하느님께 불평하고,
불평하다가 죽게 되고 죽게 되자 다시 사는 길을 찾게 되는 얘기를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길 얘기이고 우리 인생길에서 흔히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는 것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길에는
방황의 길도 있고,
여행의 길도 있고.
순례자와 나그네의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순례자와 나그네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형제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다닐 것입니다.”
방황의 길을 빨리 끝내고 여행자의 길도 끝내고
이제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방황의 길이란 말할 것도 없이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길은 어렸을 때 끝내야 하고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합니다.
여행자의 길도 방황의 길보다는 낫지만 끝내야 하는 길입니다.
여행이란 어딘가를 구경하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그런 길이고,
뭔가 즐기기 위한 길이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길을 가면서 목적지를 확실히 정하고
그곳을 향해 갈 때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목적지가 하느님 나라라면 우리의 길은 어디를 가든 성지순례의 길입니다.
로마에 와도 하느님 나라 가는 것을 목적으로 오면 성지순례이고,
그 목적은 없이 관광하러 오거나 문화 탐방하러 오면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성지순례라면
오늘 민수기의 사람들처럼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첫째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지가 아무리 좋아도 너무 빨리 도착하길 바라서는 안 됩니다.
힘들 때 빨리 도착하고 싶은데 실은 빨리 힘든 것을 끝내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 순례의 길은 그렇게 빨리빨리 도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리고 성인들이 다 그렇게 힘들게 가신 길이 아닙니까?
둘째는 불평 불만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민수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했다고 하는데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라고 하며 불평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잘것없다고 불평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잘것없이 여긴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만과 불평이 거의 다 이런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불평을 잠재우려고 주님께서는 불뱀을 보내 죽게 하시고
살려 달라고 하는 백성에게는 구리 뱀상을 달고 우러러보라 하십니다.
말하자면 극약처방을 내리신 것입니다.
모든 불만과 불평이 사실은 배부르고 살만하니까 나오는 것이기에
이렇게 배부를 때는 쫄쫄 굶겨봐야 맛이 있네 없네 불평하지 않고,
살만하기에 불평할 때는 죽게 해야 살려만 달라고, 불평하지 않겠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이런 정신으로 바라보며
사순절도 보내고 성지순례도 해야겠습니다.
저는 지금 성지 순례 중에 어제 로마에 왔습니다.
다행히도 인터넷이 연결되어 늦었지만 글 올립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안 되는 곳에 가면 못 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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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유배 중에 우리의 그림자 자아를 발견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국가적 성찰은 반드시 자기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시편 : 유배 시기의 노래
유배 중에 우리의 그림자 자아를 발견하기
2026년 3월 24일 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제국과 국가가 여전히 만들어내는 두려움, 폭력, 억압의 현실을 성찰하며 우리에게 응답을 촉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는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두려움과 분노가 있다는 사실을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부정할 겁니다. 이 두려움은 특히 가장 약한 이들, 곧 사회적 약자들에게 깊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제자로서, 저의 도덕적 시선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이들의 안녕에 맞추어져 있지 않고, 먼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삶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미 취약한 이들이 더욱 취약하게 된 현실 앞에서, 저는 애통해하며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서겠다고 약속합니다.
국가적 성찰은 반드시 자기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찾는 해결책이나 정책적 대안은 흘러내리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국가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비추어 주는 지도자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니다. 그들은 우리 공동체의 그림자 자아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고통스럽고 긴 유배(기원전 596–538년)를 겪기 전과 그 기간 동안 바로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배의 시기는 오히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깊은 성찰을 통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견한 때였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등과 같 예언자들이 권력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정치적·종교적 지도자들에게서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체험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에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일부는 순진하게도 특정 정치적 의제나 정당에 충성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족이나 군마, 전차"(시편 20,7; 33,16-17)에 결코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에만 신뢰를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변화 자체가 복음이 세상에 선사하는 참된 선과 사랑, 그리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실패하고 우리를 실망시키도록 허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종 참된 지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적 사고방식은 누가 합당한지, 누가 합당하지 않은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보편적 소속감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다른 형태의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의 삶의 터전이지, 이 세상의 "권세와 권력", 곧 세속의 왕국이 우리 삶의 터전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혼란은 우리 유배의 때를 의미하며, 이는 우리 안에 활동과 관상에 대한 긴급한 투신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확고하게 해 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투신이 더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회적 실천을 관상적 의식에 뿌리내리는 것은 일부에게만 허락된 사치가 아니라, 분명히 문화적으로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미국 사회의 영성은 깊은 치유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저는 이 말을 결코 가볍게 하지 않으니다.
오직 관상적 정신만이 우리의 두려움, 혼란, 취약함, 그리고 분노를 품어 안고 사랑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도전받고 변화되도록 허락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정화의 유배 이후 다가올 역사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창조의 목소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이 구절은 제 내면에 의해서나 제 주변의 세상에 의해 인해 압도되던 지난 수년 동안 제가 붙잡아 온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로 하여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단순히 "존재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 나의 역할을 이해하거나, 그것을 바꿀 능력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결국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기게 됩니다.
—Barbara B.
References
Adapted from “Rebuilding from the Bottom Up: A Reflection Following the Election,” Daily Meditations, November 11, 201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hael Sturgeon, untitled (detail), 2020,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타악기는 유배가 지워버릴 수 없는 내적 리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리듬은 시편 속에 메아리치며, 음악이 억압을 드러내고, 고향을 기억하며, 망각을 거부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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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가 겪는 시련들 안에는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요한 14,6 참조)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육화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마음을 다진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가끔씩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 온전하며 끊임없는 자기-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 12,24 참조).
성모님께서 주님을 잉태하시는 순간에 당신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하시면서 그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루카 1,38). 당시 이는 성모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그 잉태가 불륜에 의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었고, 약혼자 요셉과의 관계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을 때, 그분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며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까지 외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두렵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의 신비로 들어서는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순 시기에 맞이하는 이 주님 탄생 예고 축일에 우리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깊이 숙고하고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기도를 정말로 '내' 삶에서 육화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즉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그 뜻이 실현되도록 '나'를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때마저 그 뜻을 마음에 새기며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대개는 하느님의 뜻이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애를 쓰기보다는 어떻게든 탓을 주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물론 저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또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성모님처럼 '내'가 원치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수양을 해 보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각자 약함을 지니고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결함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안에는 우리의 관계성의 끈을 놓치지 않게끔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상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절대 이런 위험 속에 홀로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의 독서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던 천사의 방문(루카 1,8-20)과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이야기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사제로서 하느님께 분향을 드리기 위해 민족의 중심 성소 한가운데(지성소)에 서 있었고, "온 백성도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름 없는 작은 인물로서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누군가의 기도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던 분도 아니셨습니다.
마리아의 태도 또한 즈카르야와 대조됩니다. 즈카르야는 논쟁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했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믿음의 모범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마리아도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질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질문은 "내가 무엇으로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keka ti;)라는 것으로서 확인을 요구하는 닫힌 질문이었지만, 마리아의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pos;)라는 열린 질문이었습니다. 닫힌 "왜"(혹은 어떻게)는 문을 잠그는 것처럼 답을 조건에 맞출 것을 요구하지만, 열린 "왜"는 아이처럼 더 깊이 들어가고자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왜"는 분명히 열린 질문이었습니다.
성모님이 완전한 빛 속에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모의 덕행 때문에 큰 영예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인사가 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케카리토메네) 기뻐하여라!" 그러니까 마리아에게 주어진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지 마리아의 공로나 선업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카리스"는 은총, 곧 하느님의 호의와 선물이지, 덕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은 은총이지 그 은총을 받기 위한 시험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을 허락하시지만 먼저 우리에게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겪는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들을 한 번 깊이 숙고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먼저 그러한 은총을 주시지 않고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시기 위해 우선 시련을 주신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 대처할 힘을 나중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은총 속에서 그런 상황을 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먼저 은총을 내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시련들 안에는 이미 하느님의 은총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내 안에 이미 주어진 은총의 불씨를 찾는 데 시선을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선을 두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늘 원망이나 불평의 삶이 아닌 감사의 정을 마음 깊이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참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이 그리스도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셨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이런 은총을 잉태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정말 정성스럽게 만들어 가겠지요?! '내' 안에 은총의 아기가 잉태되어 있는데,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했을 때 가지는 마음가짐을 "태교"라고 하지요.
이 태교에 대해 [한국민족백과대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 일부를 옮긴다면 이렇습니다. "그래서 잉태한 여인은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 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좋은 말씨를 쓰고 남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임신부는 뱃속의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좋은 행위를 많이 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좋은 것을 보고 듣고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임신부는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고 적당히 운동을 해야한다. 몸가짐을 바로 하고 맑은 공기를 쐬며, 좋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독서도 한다. 길을 갈 때는 몸을 세우고 바르게 걸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바르게 앉아 조용한 마음으로 천천히 먹는다. 누워 잘 때에도 반듯하게 누워 태아가 뱃속에서 부자유스럽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임신부로서 올바른 행동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의 관상적 삶의 자세요 온갖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명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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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 과정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첫째, 먼저 그분 면전에서 신원을 알아차리는 일이었습니다. 일을 벌이시는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 앞에 대면하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그분의 사랑에 자신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자신 안에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셋째, 그분의 은총이 자신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자신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러 제가 왔나이다.”(시편 40, 8ㄴ과 9ㄱ 참조)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습니다.
넷째,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곧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희망 안에서 그분과 그분의 뜻과의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이 크고 큰 은총을 입었음에,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구세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기쁨보다 하느님의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 기쁨이 큰 까닭은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그 사랑을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은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여 사랑의 감실, 거룩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그리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 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놀라운 일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기쁘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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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을 통해서 게임이 등장하면서 아이들은 거리에서 하는 놀이를 잊어버렸습니다. 저는 어릴 때 친구들과 밖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땅따먹기, 비석 까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다방구, 술래잡기, 오징어게임, 제기차기, 썰매 타기’ 하루 종일 놀아도 재미있는 놀이가 많았습니다. 가까운 동네 뒷산으로 놀러 가기도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바쁘기도 하고,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지내니 그런 놀이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문명의 발전으로 많은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지는 세상입니다. 그런 문명의 발전이 우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양날의 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검은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해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수많은 도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도구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동시에 우리를 위태롭게 하기도 했습니다. 인류는 증기를 발견하며 산업혁명을 이루었습니다. 증기 기관은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렸고 세상을 빠르게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 무기와 식민지 확장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발전은 빛이었지만, 그 그림자도 컸습니다. 전기의 발견은 밤을 낮처럼 밝히고, 병원을 살리고, 도시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전기는 전쟁과 대량 살상의 기술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등장은 세계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정보는 손끝에서 오갔습니다. 그러나 가짜 뉴스와 혐오, 중독도 함께 퍼져 나갔습니다. 스마트폰은 우리를 편리하게 했습니다. 은행 업무, 식당 예약, 항공권 예매, 정보 검색, 문자와 메일 확인까지 손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책 읽는 모습은 사라지고, 가정에서 대화는 줄어들었습니다.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 인공지능까지 등장했습니다. 지식은 넓어졌지만 깊이는 얕아질 위험이 있습니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얕아질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문제는 도구가 아닙니다. 도구는 중립적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양날의 검을 쥔 손이 누구의 손인가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냅니다. 갈릴래아 나자렛의 한 젊은 여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맡기셨습니다. 마리아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도구를 만들어 왔지만, 인류를 구원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순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한 사람의 자유로운 ‘예’라는 응답이었습니다.
증기 기관이 세상을 바꾸었지만, 마리아의 ‘예’는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인터넷이 세계를 연결하지만, 마리아의 순명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정보를 처리하지만, 마리아의 믿음은 구원의 신비를 받아들였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도구는 세상을 빠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만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사제인 저 자신도 돌아봅니다. 저 역시 기술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술에 끌려가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정작 기도의 시간은 줄어들고 있지 않은지, 정보는 넘치지만, 침묵은 사라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저 역시 양날의 검을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인공지능도 모두 양날의 검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도구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힘에 감싸여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 삶 안에 오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종 마리아를 본받아 이렇게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도구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기술이 우리의 영혼을 빼앗지 않도록,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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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았던 마리아!
여러분들 혹시 누군가로부터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그러니까 각별한 사랑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에 따르면 나자렛의 마리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다니, 마리아는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었던 한결같은 겸손의 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하루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 줄 알아?
내가 사순시기를 맞아 얼마나 많은 보속과 참회, 자선을 행하는 지 알아?’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서는 추상같은 불벼락을 내리십니다.
“너희 이 위선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았던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 자신이 탄생하실 메시아께서 머무르실 거처요 궁방으로 간택 받았지만, 스스로를 향해 언제나 주님의 비천한 종일뿐이라는 신원 의식을 마음 깊이 간직했던 마리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자신을 낮추는 마리아를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녀를 총애하시고 애지중지하십니다. 그녀를 높이 높이 들어 올리십니다.
그녀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주시고 찬란한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격상시키십니다.
놀랍게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마리아를 하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으로 임명하십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의 첫 출발은 마리아의 지극한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용기 있는 순명이었습니다.
겨자씨만큼 작은 신앙, 그러나 무럭무럭 성장해나간 신앙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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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6–38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는 놀라고 두려워하지만,
천사는 다시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마리아는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천사는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마침내 마리아는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육화의 신비를 말할 때
인간의 이해로 다 붙잡을 수 없는 깊이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그레고리오에게 마리아의 “예”는
순종의 예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새로 시작하실 수 있도록
자기 삶을 통로로 내어드린 용기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믿었기에
자기 존재를 맡깁니다.
이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 진지하게 살아냅니다.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이
내 계획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계획을 넘어서는 은총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성 주간의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가능한가’를 따지느라 멈추는가,
아니면
두려움 속에서도 “예”라고 말하며
한 걸음 내딛는가.
마리아의 “예”는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그 “예”는 거창한 말이 아니라
조용한 신뢰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자비를 선택하라는 부르심,
용서를 시작하라는 부르심,
돌봄을 멈추지 말라는 부르심.
그 앞에서
우리도 말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주님,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려다
당신의 은총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도
마리아처럼 “예”라고 응답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뜻이 머무는 자리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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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30546&menu=4770
■ 현대인들의 선택! 과연 옳은 행동일까?
** 현대인들의 선택! 과연 옳은 행동일까?
우리들 현대인들은 지극히 건강하고 이기적인 인류 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룩한 문명은 인류사상 가장 풍요롭고 놀랍습니다
지구를 손아귀에 넣고
모든 생명체를 발아래 두고 군림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 들에게는 강하게 드러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또한 현대문명의 특징 이기도 합니다
우리 현대인들의 선택과 행동은 무엇이며
과연 올바른 것일까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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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 사고방식, 생활양식
우리들 현대인들은 공정거래의 원칙에 익숙 합니다
기브 앤 테이크, 공정한 거래.. 뭐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여 이겨서 승리를 쟁취하자
풍료로움을 만끽하고 잘먹고 잘살자. 쾌락을 즐기며 살자
법률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 성실과매너는 우리의 미덕이다
자선과 구휼은 의무 만큼만..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목적으로..
돈돈돈, 돈이 최고이다
돈버는것이 삶의 목적이자 행복이다
희생과 보속은
미개했던 유럽 중세 사람들이나 하던 짓이다.
우리는 풍요로운 세대이니 잘먹고 쾌락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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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V, 바보상자? 거짓말상자? 바알신전?
우리 현대인들은 매스미디어에 너무 노출된 상태 입니다
신문,잡지,TV,유투브, insta 등 많은 대중매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촌의 거의 모든 집들에
TV가 중심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마도 거실 앞 중앙에..
그리고 사람들은 매일 몇시간씩 신청합니다
재미있는 드라마, 신나는 스포츠 중계, 세상소식을전하는 뉴스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TV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TV는 "풍요로운 세상 잘먹고 잘살자" 를 전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TV 는 바보상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거짓말상자, 바알신전으로 보입니다
매일 날마다 TV 시청을 하는것이
마치 바알신전에 경배하는것과 비슷하다는 느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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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 최후의 수단? 게임플레이?
불행히도 인류는 계속 전쟁을 해왔습니다
권력자들인 노인들의 욕심, 명예, 범죄은닉의 방법으로
전쟁이 선택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큰 불행 입니다
실제로 전쟁에 투입돼서 죽는것이 그들의 운명이지요
특히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무기들이 극도로 발달하여
전쟁을 하는것이 마치 게임을 하는것과 비슷합니다
모니터를 보고 마우스를 움직여서 사람을 죽이는것이
익숙한 게임플레이를 하는것과 비슷합니다
국가간의 분쟁이나 갈등의 해결방법으로
전쟁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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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하느님) 은 (필요) 없다
4.1 현대인들은 대부분 신은 추상적인 개념이라 말합니다
실제 살아있는 하느님은 없다 라고 말합니다
4.2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갰다
아무튼 신은 나에게 필요없다.
신은 나의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 나에게 신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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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현대인들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우리들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는 무엇일까요?
1) 문명의 발달 우주문명으로 전개
2) 인류 문명의 몰락
3) 하느님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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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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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25 추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1)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아서, “우리는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을 본받아야 한다.” 라고 말하면 간단한데, 실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성모님을 본받아서,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을 만났을 때에는 “그것이 정말로 ‘하느님의 뜻’일까?” 라고 물으면서 순종하고 응답하기를 망설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선 먼저, 천사가 나타났을 때,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는 것, 또는 천사라는 것을 믿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로 천사일까?” 라고 반신반의 하는 상태라면, 천사가 전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도 의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선뜻 순종하고 응답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그렇게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을까?
그리고 천사의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로 알아들었을까?
우리는 자세한 상황을 모릅니다.
그러나 “평소에 늘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첫 번째로 본받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늘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 것”이고,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다.” 라는 믿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었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루카 1,6), ‘상식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았으면서도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루카 1,18-20).
2) 이사야 예언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다(이사 6,8).”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이사야가 그 부르심에 응답했는데, 이사야는 ‘수동적으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먼저 지원함으로써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맡기실 때, 그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사야 같은
‘능동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제 이 말을 그대로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일방적인 통고’가 아니라, 성모님의 동의를 미리 구한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천사의 말은 실제로는 ‘명령’이 아니라 ‘의논’에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도 이미 결정되고 지시된 일에 ‘수동적으로’ 따른 일이 아니라, 이사야처럼 “그 일을 저에게 맡기십시오.” 라고 ‘능동적으로’ 지원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장상이 어떤 ‘어려운 임무’를 맡기고 파견할 때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도 순종이긴 한데, 자신이 먼저 능동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3) 성모님의 응답을 뜻에 따라 재구성하면, “저는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서 이루어지기를.”입니다.
순종과 응답은 그처럼 ‘열망’에서 나옵니다.
만일에 속으로는 원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순종하고 응답한다면, 그것은 거짓 순종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순종과 응답을 ‘스스로’ 원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응답하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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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00 추가
루카 1,26-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살던 마리아가 가브리엘 대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세주를 잉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저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어떤 마음으로, 왜 순명했을까 하는 겁니다. 단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 즉 전능하신 하느님께 그 일을 이룰 ‘능력’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그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힘들고 부담스러운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지요.
그렇기에 그것 말고 다른 믿음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 있어 마음이 흔들리거나 그 뜻을 다른 이에게 미룰 수 없는, 꼭 내가 받아들이고 따라야만 하는 강력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이 세상도, 내 삶도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분께서 바라시는대로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습니다. 하느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 구원의 빛은 어차피 내 작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으니, 내가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 그 빛을 널리 퍼뜨리는 쪽을 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두려워 마지못해 따르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역사에 나도 ‘주역’이자 ‘일꾼’으로 참여하고 싶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지요. 그래야 내가 그분 뜻 안에서 참된 행복과 보람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에서 마리아의 그런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자기 뜻을 이루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습니다. 종이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듯,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기꺼이 따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서 마지못해 따르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서 그분 뜻을 따르는 겁니다. 그런 바람을 갖는 건 기본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과 믿음이 내가 받아들이고 따른 하느님 말씀을 열매 맺게 합니다. 그분 뜻이 나의 행동과 삶을 통해 실현되게 합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믿음과 순명으로 내 안에 잉태하고 실천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게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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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09:00 추가
■ 생활묵상 : 화려한 부활과 실패한 부활
23년 전에 다녔던 서울 개신교 교회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산부인과 교수임이시고 은퇴를 앞두고 다시 영국으로 석좌 교수로 임용돼 3년간 계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의대를 다녔습니다. 미국에서 교수를 하다가 한국에서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영국에 가셔서 강의를 할 자료를 한국에서 제작하는 데 제가 참여했습니다. 특별히 영국 비비씨 방송팀이 촬영을 하고 편집은 한국 방송 제작 프로덕션이 했었죠. 저는 자막 처리와 삼차원 영상 그래픽으로 처리하는 부분과 동시 더빙을 해야 돼서 참여한 것입니다. 생명 탄생의 신비를 6개월간에 걸쳐 촬영을 하고 90분짜리 dvd 30장에 다 담았습니다. 내용이 방대합니다. 무려 약 45시간 정도의 분량입니다. 임신 3주차부터 출생 후 3주까지를 그린 것입니다. 이걸 제작하는 데 참여하면서 처음엔 제작하면서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보통의 출산을 그린 건 그렇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는데 난산일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산모가 내지르는 고통 소리는 한 2년 정도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자막에 그 고통을 표현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엄청 고민했습니다. 장로님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 성경의 관점으로 표현하려고 하셨습니다. 팁을 하나 주셨습니다. 오랜 현장 경험 끝에 산모의 출생을 예수님의 수난에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그땐 어린 나이라 그게 뭔 내용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내용이 있었던 거죠. 오늘은 그 내용과 함께 제가 묵상한 내용을 가미해서 한번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사순시기를 좀 더 은혜롭게 보냈으면 합니다.
교수님은 산모의 진통을 예수님께서 골고타를 오르실 때 흘리신 피와 땀에 비유하셨습니다. 산고 끝에 탄생한 태아의 생명을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산모의 산고와 매치가 되는데 태아의 탄생은 부활과 좀 연결이 잘 안 됐던 거죠. 저는 전문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의사의 눈으로 보면 부활과 완전 동일하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남자의 몸에 있는 거 다 아시는 거 있죠. 그게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데에는 결국 한 개체만 생명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여자의 몸에서 말입니다. 그 만남의 과정에서는 치열한 고통이 수반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그냥 결과만 보면 별로 신비롭지 못합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서 결국 최종 승자만이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다 온전히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다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산도를 잘 타고 나와야 하는데 이게 경우에 따라서는 어려운 길입니다. 쉽게 표현해 산도가 잘 나 있는 산도가 있고 좀 난해한 산도가 있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이걸 비포장도로로 비유했습니다. 잘 나 있는 산도는 부드러운 흙길로 비유하셨습니다. 이건 정말 태아의 운명입니다. 이 길을 잘 걸어야만 세상에 잘 나갈 수 있는 것이죠. 산도가 부드러우면 산모는 순산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나마 이게 정말 난도가 되면 난산이 된다는 것이죠.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그렇지만 예전에 원래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생명으로 탄생이 되느냐 마느냐는 여기서 결정이 되게 되는 것이죠.
조선시대 같은 자료를 보게 되면 역사적 사료도 이런 부분에 관한 것은 연구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라 잘 모르는데 여기에 아주 신비한 게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산도를 따라 나올 때 그 고통을 잘 이겨낸 놈만이 생명으로 탄생된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 때문에 출산을 하나의 부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부활을 묵상하다 보니 그런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엄마 씨와 아빠 씨가 만나 생명이 수정되는 그 치열한 과정과 또 산도를 잘 통과해야 하는 그 어려운 산고 끝에 생명이 탄생하는 것인 거죠. 우린 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고난을 뚫고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새로운 생명으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어머니 태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어머니의 태를 따라 나오는 그 산도가 바로 우리가 걸어가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난산이 되느냐 순산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산도의 표면이 흙처럼 부드럽느냐 아니면 비포장이냐인데 말입니다.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비포장 같은 산도를 잘 달린 태아는 생명 탄생의 기쁨을 맞이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부드러운 흙길 같은 산도를 따라 나온 태아는 어머니는 순산을 하긴 해서 좋지만 그렇게 해서 탄생한 태아는 건강 면에서 보면 유전자로 비유했을 때 좋은 건강한 유전자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내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려면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 이 세상에 나올 때 험난한 산도가 있으면 그 산도를 잘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좁은 산도를 통과하려면 말입니다. 바로 우리의 부활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가는 인생 여정, 신앙의 길은 어머니의 태를 통과하는 산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산도는 무난한 산도가 아닙니다.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찰이 생겨서 아프고 고통이 따르는 것이죠. 이 비포장도로가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인생과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 길을 잘 통과했을 때 세상에 첫 신고식을 하는 게 바로 태아는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는 것이죠. 제대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을 잘 이겨내야만이 화려한 부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활을 해도 건강한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골골한 몸이 될 것입니다. 아까 표현한 것처럼 건강한 유전자를 가지지 못하면 말입니다. 건강한 유전자는 그런 놈만이 가질 수 있는 거죠. 정말 감동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부활을 맞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몸을 입을 수 있습니다. 부활을 해도 완전한 부활을 하지 않으면 그건 또 고통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한 몸으로 영원을 산다고 생각하면 그건 얼마나 고통이겠습니까? 그 고통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 현세에서 마치 엄마 뱃속에서 험난한 산도를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잘 이겨내야 비로소 완전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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