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힌 고궁의 고저넉한 모습은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재경산우회의 23.송년 산행 길은, 눈덮힌 서울 고궁을 예상한 선택이었다. 마침 이 날 아침 눈이 내리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었다. 제법 쌓일 것 같더니 지하철 공간에서 목적지 국립고궁박물관 밖을 빠져나오는 순간 햇볕이 쨍하고 있다. 흰눈은 온데간데 없이 찬바람만 불어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모두 자주 와본 곳이었겠지만 그래도 친구들끼리 왁자지껄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았다. 해설사 태용군과 민성군이 있어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솔솔했으니.
납회산행이고 해서 좀 많이 참석해주기를 바랬다. 기우였다. 그나마 6+1명이라도 참석해주었으니 위안을 삼아볼까한다. 년말, 모두가 바쁠 때이니 말이다.
[목적지] 서울 고궁
경복궁 → 창덕궁 →창경궁 → 종묘 → 종로3가 족발골목 최부자
[일 시] 2023. 12. 16. 토
[참가자] 신민성, 안병식, 안대우, 양진석, 이운식(식사), 하태용, 황영삼 (7명)
[수지]
전월잔액 2,146,603
고군산군도 여행 회비 2,480,000
고군산군도여행비 2,480,000
여행비지원 - 284,590
수수료 -180
잔액 1,861,833
12월
이자 533
회비 210,000
점 심(안국역 주변 라면) -38,000
회식비 1차 (종로3가 족발,최부자) -171,000
2차 (만남의 광장) -93,000
23.12.16 이월잔액 1,770,366
[사진]
경복궁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광화문,흥례문,근정문) ,3조( 외조, 내조, 연조)로 구성되었다.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
수문장 교대 의식 행사 ↓
광화문과 새로 복원된 월대 ↓
경회루 ↓
수정전 ↓
건천궁과 곤녕합, 향원정 ↓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고종은 이곳을 처소로 주로 사용했으며 양반가 저택의 형식으로 세운 건물이어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이곳은 아시아 최초로 전깃불이 켜진 곳이다. 1882년에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보냈는데 이때 미국을 다녀온 보빙사가 미국은 밤이 대낮 같다고 고했다. 이는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미국 대도시 전구로 된 가로등이 설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빨리 미국에 연락해 전기 가로등을 설치하라고 명했고, 이에 1887년에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전기회사 직원들이 조선에 와서 발전기로 전력을 얻는 전기 가로등을 건청궁에 설치해 밤을 환하게 했다. 총 설치 비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4,525달러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재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건청궁 곤녕합은 이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고종과 왕실이 경복궁을 떠나자 건청궁은 빈 건물이 되었다. 1909년(융희 3년) 이후 철거되었다가 훗날 복원, 수리 작업을 거쳐서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어 오늘에 이른다.
점심시간
창덕궁 ↓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1399년(정종 1년)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다.
낙선재 ↓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건물로 1847년 헌종13 때 건립. 왕이 책을 읽고 쉬는 공간, 즉 서재 겸 사랑채로 조성.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이용되었고,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순종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창경궁 ↓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거처한 궁)이 있던 곳이다. 성종 15년(1484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한씨, 예종의 계비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1592년(선조25년)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8년)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일본이 창경궁을 놀이공원 창경원으로 만든 후, 1930년대에 헐었다. 1983년에 창경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후 1984년에 발굴 조사를 했고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종묘 ↓
종묘의 건물은 1395년 10월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종묘는 사적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영녕전(보물), 종묘제례악(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건물들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정전↓ 정전은 지금 현재 수리 중이라 관람하지 못했다.
영녕전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16실이 들어 있다.
송년 회식
종로3가 족발골목 최부자. 그야말로 이 골목은 족발집으로 가득차 있다. 손님 또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이 이어져 있다.
2차 BEER & COFFEE 만남의 광장
우리 동연배인 윤병숙 마담의 유식한 입담에 술과 커피가 동난다.
벽에 온갖 그림과 붓글이 붙어있다. 윤병숙 젊은 시절의 풍만한 누드 그림이 걸려 있는가 하면 벽에 걸린 붓글 중 '海不讓水' 라는 글귀가 눈에 쑥 들어 온다. '넓은 바다는 강물을 사양하지 않는다' 는, 모두를 포용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간 산우회 회원 여러분들의 협조와 동기회 여려분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에 우리 산우회의 존속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일흔이 넘은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즐거운 취미 생활과 건강 관리, 그리고 친구 만나는 일 말고 더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부드러운 둘레길 중심의 산행길이 될 것입니다. 많이 참여하셔셔 건강도 다지고 친구들도 만나 즐거운 세월을 만들어 나갑시다.
2024년도 좋은 산행길 추천 받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께서는 각자 좋은 길 2곳 이상 추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참고하여 24년도 연간계획표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 12. 19
재경산우회 회장 안병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