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34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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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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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trTvLsnN2U
[예수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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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인간 측의 교만입니다!>
바깥 일을 하다보면 틈만 나면 만나게 되는 것이 벌레요, 구더기요 지렁이입니다.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습관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려니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뱀이나 두더지, 고라니 정도 되면 호기심을 갖고 유심히 들여다보곤 하지만, 벌레나 구더기나 지렁이는 하찮은 미물로 여기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정녕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갈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야서 41장 13~14절)
하느님께서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눈여겨보시겠답니다. 하느님께서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오늘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 친히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아주시겠답니다. 만사 제쳐놓고 우리를 도와주시겠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며 황홀한 말씀인가요?
아마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미천한 존재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특별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름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존재들은 사정없이 내리치십니다. 대신 벌레나 구더기같은 미물인 존재들, 가련하고 안쓰러운 존재들을 눈여겨보시며 알뜰살뜰 챙기십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나 죽음, 실패나 좌절은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며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심연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들, 한꺼번에 불행이란 불행이 들이닥쳐 주저않아 있는 사람들을 각별히 눈여겨보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 친히 십자가를 나눠 짊어지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자리를 듬뿍듬뿍 받고 싶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큰 존재, 엄청난 존재,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신학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멸망,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인간 측의 교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오만, 주님을 향한 신뢰의 심각한 결핍이 결국 유다 왕국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신탁’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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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9nRzYurH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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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개념은 사랑받지만, 구체적 진리는 폭행을 부른다>
엘살바도르의 성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평화를 이루십시오라고 추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독재 정부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듣기 좋은 모호한 사랑 노래에는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구체적인 정의로 바꾸어 선포한 날, 상황은 변했습니다. 그는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사격을 중지하시오! 형제 살인을 멈추시오!"
이것은 모호한 권고가 아니라, 악을 정확히 지목한 명령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그는 미사를 집전하다가 제대 위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은 환영받지만, 구체적인 정의는 총알을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가 당하는 폭력"의 실체입니다.
진리가 모호할 때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진리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펴고 "바로 당신이 문제다, 지금 멈춰라"고 지목할 때, 세상은 그 입을 막기 위해 폭력을 휘두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극찬하십니다. 왜 그토록 칭찬하셨을까요?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 말씀은 비난이 아닙니다. 요한이 진리를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냈기에, 어둠 속에 있던 세상이 발작하며 하늘 나라(예수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지목했습니다. 또한 헤로데 왕의 죄를 향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정확히 찔렀습니다.
요한이 적당히 두리뭉실하게 말했다면 그는 존경받는 원로로 늙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진리를 구체적으로 지목했기에 그는 감옥에 갇히고 목이 잘리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하늘 나라가 세상의 표적이 되도록 만든 요한의 이 거룩한 용기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당하는 운명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분의 은총로운 말씀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책을 덮으시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포하시자 분위기가 돌변했습니다. 즉,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라고 진리의 실체를 드러내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동네 밖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옛날이야기 속의 메시아는 환영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서서 내 삶의 주권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메시아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고 했다면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불을 내려 참 하느님을 명확히 증명하고, "바알은 가짜다"라고 악을 지목했을 때, 이제벨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겠다"며 살의를 드러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경험도 그렇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이나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아무도 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책을 통해 "우리도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신화 교리)"라고 가톨릭의 핵심 진리를
선포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거센 반대와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말이 너무나 명확하고 구체적이라서,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말이 너무 모호해서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날선 검과 같아서, 드러나면 반드시 어둠을 찌르게 되고, 찔린 어둠은 비명을 지르며 폭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폭력을 당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좋은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대림 시기를 맞아 냉담 교우들을 방문하려 합니다. 만약 제가 성당 안에서 "냉담 교우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만 한다면 저는 안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형제님, 주님이 기다리십니다. 나오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호소한다면, 저는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욕설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가 당하는 폭행입니다. 하지만 그 폭행을 감수하고 초인종을 누를 때에만, 누군가는 구원됩니다.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보십시오. 그가 구약의 역사를 길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조용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에 "너희가 바로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인 자들이다!" 라고 죄를 지목하자,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나 명확한 진리가 뼈아팠기에, 귀를 막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하게 하십시오. 점잖게 믿지 마십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선포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미움을 받는다면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가진 신앙이 모호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세상의 어둠을 찌르는 진짜 빛이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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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에 ‘영화 시청’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비행기에서 보여주는 영화를 함께 봐야 했습니다. 요즘은 좌석 앞에 모니터가 있어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영화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영화는 장르별로 모여 있습니다. 10시간이 넘는 긴 장거리 비행도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3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했던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담아낸 ‘노량’을 보았습니다. 2018년에 제작되었지만 코로나 여파로 상영이 중단되었다가 개봉한 ‘바이러스’를 보았습니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던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Mickey 17)’을 보았습니다. 노량에서는 이순신을 연기한 김윤식 배우의 카리스마를 보았습니다. 이로써 명량, 한산, 노량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빛난 3대 해전을 모두 보았습니다. 바이러스에서는 배두나 배우의 멋진 연기를 보았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때로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미키 17의 감상평을 나누고 싶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생체 프린팅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윤리적인, 종교적인 문제가 있어서 지구에서는 금지되었지만, 다른 행성에서는 실행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습니다. 지구의 삶에서 생존하기 어려웠던 미키는 생체 프린팅 사업에 지원합니다. 기억은 매번 업그레이드되면서 죽으면 다시 몸이 프린팅됩니다. 이렇게 17번 죽었습니다. 미키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의 작업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영화는 미키 17이 죽지 않았는데 미키 18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됩니다. 멀티플 상황이 됩니다. 영화는 생체 프린팅 기계를 폭파하면서 마무리됩니다. 미키를 사랑하는 주인공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과연 인간에게 축복인가!’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보면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축복인가!’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같은 물을 마시지만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됩니다.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같은 칼을 사용하지만, 요리사가 사용하면 맛있는 음식이 됩니다. 강도가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됩니다. 인류는 과학이라는 물을 발전시켜 왔고, 문명이라는 칼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때로 과학은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멍에와 짐을 가볍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끔찍한 폭력과 전쟁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 문명은 종교와 윤리의 꽃을 피웠습니다. 문명은 예술과 문학의 꽃을 피웠습니다. 인간의 품위를 높였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명은 야만과 폭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서구 문명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하였고, 자원을 수탈했습니다. 유럽의 제국주의 문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하였습니다. 문명이라는 당위성을 내세워 소수 인종의 문화와 언어를 파괴하였습니다. 문명 건설을 이유로 많은 생명이 멸종되었고, 소중한 지구의 자연이 파괴되었습니다.
한문으로 ‘宗敎(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영어 단어 Religion은 “엉킨 관계를 다시 묶는다”라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엉켰을 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종교는 그 실타래를 다시 잇는 역할을 합니다. 그 핵심은 ‘비움’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참된 평화와 깨달음에 다가갑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회개와 회심을 통해 새롭게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는 성적이나 순위로 결정되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 양심에 충실한 삶, 이웃을 위한 사랑과 봉사가 그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절대평가의 나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오늘, 이 말씀은 경쟁과 업적, 권력으로 천국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심을 경고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으로 이뤄지는 공동체입니다. 과학이 만든 세상이 하느님 나라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세계가 하느님의 지혜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힘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입니다.
“주님, 우리가 가진 지식과 문명, 과학의 힘이 서로를 지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우리의 마음과 세상 속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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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41,14) 벌레와 구더기라는 표현 자체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라는 말씀에서 그 표현들이 애틋한 사랑에서 나왔음을 알아차리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할머니나 엄마가 아기에게 볼을 비비면서 “아이구, 내 강아지! 내 새끼! 요 못난이!”라고 하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기에게 말할 때 스스로 아기가 되어 아기처럼 말하고 아기의 몸짓을 합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다가가면서 아기가 되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벌레 같은 야곱, 너는 작은 벌레 같은 존재, 아주 조그만 존재이지만. 나는 너를 많이 사랑한단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시고자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겸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구원자”(41,14)는 히브리 말로는 ‘고엘’입니다. 고엘은 살해당한 친족을 위하여 대신 복수하는 자(민수 35,19 참조), 과부의 보호자를(룻기 2,20 참조)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몸소 이 몫을 맡으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방식대로, 자신을 낮추는 겸양과 다정함과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다가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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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1-15: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사명을 밝혀주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말씀하시면서, 요한이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인물임을 선언하신다. 그는 구약에서 예언된 엘리야의 영과 힘으로 와서(루카 1,17 참조) 그리스도의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사람이었다. 성 예로니모는 요한을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끝이며,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 같은 인물이다.”(Commentarii in Matthaeum 2,11,11) 즉, 요한은 구약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동시에 신약의 시작을 열어주는 경계에 선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이는 단순히 요한을 낮추려는 말씀이 아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주석하듯, “요한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그보다 큰 것은, 요한이 아직 하늘의 신비를 완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Homiliae in Matthaeum 36,1) 하늘나라의 은총과 성령의 충만 속에 사는 이는 이미 구약 시대의 가장 큰 인물보다 더 큰 은총을 누린다는 뜻이다. 곧, 우리도 세례와 성령을 통해 요한보다 큰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한다.”(12절) 이 말씀은 종종 오해되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풀이한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는다. 이는 곧 큰 열망과 열정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전환하는 이들이 차지한다는 뜻이다.”(De consensu evangelistarum 2,26,54) 즉, 하느님의 나라는 게으르고 미온적인 태도로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뜨겁고 열렬한 믿음,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끈질긴 노력으로만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니모 역시 “하늘나라는 거룩한 이들이 열망과 노력으로 폭력적으로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주해, 「마태오 복음」 2,11,12)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이 사람이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4-15)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요한은 바로 엘리야 자신은 아니지만,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온 이입니다. 예로니모는 분명히 말한다. “요한은 인격 안에서가 아니라 영과 힘 안에서 엘리야라 불린다.” (Commentarii in Matthaeum 2,11,12)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 건너가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길을 닦는 것이었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신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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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게으르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게을러서 공부하는 것을 미루는 것이고, 게을러서 운동하는 것을 미루고 있으며, 게을러서 기도하는 것을 미룬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따지면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뒤로 미룰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르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일에 게으를까요? 아마 이런 부분에서 게으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 가는 것에 게을러요.”, “저는 숨 쉬는 것에 게을러요.”
생존에 필요한 일에 게으르면 우리는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기에 절대로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결국 게으르다는 것은 자기가 하려는 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모두 이런 마음 때문에 미루는 게으름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자기 존재 자체가 위험해 질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따르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당신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세상일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세상일이 먼저고 주님 일은 나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아직도 주님 일을 하기에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시간이 무한대로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주님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인물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와 율법을 마무리하고 메시아를 직접 가리킨 인물이기에 옛 계약안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이 새로운 질서에 속한 신앙인은(비록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이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구원의 실체를 소유하고 있기에, 신분상으로 요한보다 더 큰 은총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은총(성체성사, 하느님의 자녀 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거대한 특권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지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일을 미루고, 동시에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기에 급급합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의 시민 모습에서 벗어납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많은 은총을 받으면서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여정을 그만두는 것이 아닐까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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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다운 사람>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늘나라다운 사람>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2)
하늘나라를
붙잡으려 하지 마세요
하늘나라가
붙잡게 하세요
하늘나라를
가지려 하지 마세요
하늘나라가
가지게 하세요
하늘나라를
차지하려 하지 마세요
하늘나라가
차지하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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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1)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 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 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야 한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먼저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루카 4,18). <“온갖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마태 11,28)>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구원’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 생명은 ‘메시아’이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 현세적인 복만 빌고 있다면, 또는 세속의 부귀영화만 청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목적과 방향이 잘못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가 다 무의미하고 쓸모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데, ‘일용할 양식’은 분명히 현세의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마태 15,32)
우리가 아플 때 아프다고, 슬플 때 슬프다고, 힘들 때 힘들다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또는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그곳까지 갈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고,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우리를 그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예언자’ 라는 뜻입니다. 그가 ‘위대한 예언자’인 것은,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구원사업’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지상에서만’ 위대하다는 뜻은 아니고, ‘메시아 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한 것은 분명히 위대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12절의 ‘폭행, 폭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포함해서 모든 박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뜻으로는 ‘세상 끝 날까지’입니다.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를 막으려고 한다.”입니다.
<사탄과 사탄의 추종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끈질기게 방해하고,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가 완성되는 날은, 사탄과 그 추종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0,10-15).>
4)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인데, 이 말씀에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라. 나를 믿는다면 내 뒤를 따라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그 길은 ‘편안하고 쉬운 길’이 아니고, ‘좁은 문’을 향해서 가는 ‘좁고 험하고 힘든 길’입니다.(마태 7,13-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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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1,13-14)
여기서 ‘벌레’와 ‘구더기’는 비참함과 경멸을 뜻합니다(시편 22[21],7 참조). 이스라엘이 유배로 벌레와 구더기처럼 비천하고 경멸당하는 대상이 되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오른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여전히 그들을 잊으시지 않고, 포기하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증언한 예수님께서는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죄로 내 처지가 벌레나 구더기와 같아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음을 당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나아가 모든 죄인에게도 이 사랑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 사랑이 ‘나에게만’ 이루어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폭력으로 빼앗으려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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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 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 곧 ‘하늘 나라’는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 ‘하늘 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니 누가 더 큰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새 시대’, 곧 ‘하늘 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하늘 나라’는 거부되고 배척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박해당하고, 또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하늘나라’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 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된 엘리야라면(말라 3,23; 집회 4-10 참조),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된 구세주’심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 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방치하거나 빼앗겨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한갓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겨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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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당신의 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우상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계신 당신을 거부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게 하소서.
세상이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고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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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도 하늘나라 폭행자?>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오심과 함께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셨는데, 세례자 요한이 주님과 하늘나라를 증언하니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며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개념 정리를 먼저 한다면 폭력을 쓰는 자들이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고, 하늘나라가 폭행당한다는 것은 이들에 의해 하늘나라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처럼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 권력자들이 왜 하늘나라 백성들을 폭행하는지 보게 됩니다..이 세상 권력자들이 아무리 폭력을 좋아한다고 해도 괜히 폭행하겠습니까?
하늘나라 백성이 가만히 있는데도 폭행하겠냐는 말입니다. 권력자가 하는 짓이 하느님 뜻이 아니라고 하니 하늘나라 백성을 폭행하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 이뤄지는 하늘나라를 하늘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세우려고 하니, 그것을 자기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나라 백성을 폭행하는 겁니다.
제가 세상 권력자라도 그럴 것입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그래서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데 하느님 뜻대로 하라 하면, 또 이 세상은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하느님 나라라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폭력을 쓰는 자에 대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고, 내가 바로 폭력을 쓰는 자가 아닌지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 권력자가 아니니 폭력을 쓰는 자가 아니고,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힘을 가진 사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기 힘을 가진 사람, 자기가 가진 힘을 내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폭력자입니다.
달란트를 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내게 힘을 주셨는데 그 힘을 하느님 뜻대로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아내에게 남편이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도 폭력자들입니다.
사랑이 없이 힘만 있을 때 가정 폭력이 일어나고 하느님 뜻대로 힘을 쓰지 않을 때 가정 폭력이 하늘나라 폭행입니다.
가정도 이러하니 단체 안에서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하느님 뜻을 거스르겠다고 작정하고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다 보니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공동체를 결과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요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원장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구성원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진 힘을 하느님 주신 뜻대로 쓰지 않고 자기 뜻대로 쓰려고 하면 다 폭행자이고, 힘을 더 가진 사람보다 덜 가진 사람이 덜 자기 뜻대로 쓰는 차이일 뿐이겠습니다.
아무튼 나도 내 사는 곳에서 하늘나라 폭행자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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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 11,11-15)은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어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11,9)이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ㄷ)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아 놓는 사명을 갖고 파견된 하느님의 예언자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예수님에 앞서 태어났고, 예수님에 앞서 순교했습니다.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간은 '세례자 요한의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을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교회는 지금 '사회교리주간'(12.7-12.13)을 보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하신 권고 말씀이 떠올라 함께 나누어 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배척'입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배척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53항)
우리의 현실을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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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오늘도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는
가장 큰 힘은
폭력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폭력은
하느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깊은
불의(不義)입니다.
하느님의 주권을
인간의 욕망의
질서 안에
집어넣는
모진 행위가
바로 폭력입니다.
하늘 나라는
힘을 통해
오지 않고,
내어맡기는
겸손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진실로
큰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의
위대함은
은총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늘 나라는
지배로 빼앗는
대상이 아니라,
내려놓음으로만
열리는
은총의 영역입니다.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폭력은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할 때
일어납니다.
하늘 나라를
내 방식으로
움켜쥐려는 것이
영적 폭력입니다.
잡으려 할수록
사라지고,
지배하려 할수록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메시아의 시대는
폭력의 종식으로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폭력과 지배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 안에서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폭력을
내려놓을 때
열리는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하늘 나라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비폭력은
서로를
살아나게 하는
가장 깊은
하늘 나라의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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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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