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인가 미국 영화계에 자기반성적인 영화들이 차례차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철학적 사유들은, 드디어 미국 영화가 그 얕은 깊이를 딛고 새롭게 탄생하는가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를 테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라던가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절대악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 폭력과 정당성에 대한 문제 같은 해묵은, 그러나 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화두들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제를 어마어마한 자본이 들어간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완성도를 가진 채로 말이다.
사실 ‘다크나이트’의 흥행은 이미 모두에게 예상되어 있는 바였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보여준 전작 ‘배트맨 비긴스’의 놀라운 진지함과 정교함은 배트맨시리즈를 조엘 슈마허의 수렁속에서 건져올려 시리즈가 부활할 수 있는 초석을 닦아 주었고, 그 위에 마케팅 전문가들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마케팅이 덧붙여져 관객들의 관심은 극에 달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즈 최고 인기 악당인 조커의 등장과 조커역할의 히스 레저의 극적인 죽음은 영화를 거의 신화 급의 기대로 몰고 가기 충분했다. 그리고 모두의 기대 속에 개봉한 다크나이트는 그 기대를 우습게 만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완성도를 보이며 전설에 이르는 길을 밟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다크나이트를 하나의 텍스트로 분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에는 간단하고도 극명한 주제의식 하나만으로 끌어가는 것이 집중도와 완성도 면에서 안전하다는 기본상식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 안에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이 상업영화는 그 모든 주제의식을 훌륭하게 조합하는 정교함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게 만든다. 이런 거대한 미궁과도 같은 영화에서 힘겹게나마 굳이 가장 중요한 주제를 뽑아내자면 그것은 ‘자경단’과 ‘타락’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자경단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흥미로운 화두다. 전세계 어디에도 미국처럼 히어로물이 난립하는 곳은 없다. 법과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개인이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질서를 수호 한다라는 환상. 이 짜릿하면서도 위험한 환상은 유달리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집중되어 분포한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주와 개척과 원주민 학살이라는 일종의 무법적인 상황 속에 이루어졌기 때문임을 추측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 놓여진 소수의 백인들은 국가와 법의 보호보다는 자신이 가진 총의 가치를 더 믿었고 자경단의 힘을 신뢰했으리라. 그 무수한 웨스턴 장르의 영화들 역시 이러한 자경단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며 웨스턴은 몰락했지만 대신에 그 자리를 채운 건 슈퍼맨을 필두로 한 히어로 영화였다. 그 속에서 무수한 아메리칸 히어로들은 명멸해 가며 셀 수 없는 신화를 썼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아메리칸 드림의 색도 변색되었다. 이제는 히어로들도 고뇌해야만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스파이더맨이 그랬고, 엑스맨들이 그랬고, 헐크가 그랬듯이.
다크나이트가 던지는 자경단으로서의 히어로의 역할에 대한 화두는 여러모로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과 닮아있다. 더 이상 히어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민들 때문에 퇴물이 되어버린 히어로들. 화려했던 옛날을 잊지 못하는 몰락한 히어로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왜곡된 정의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는 모습 같은 것들은 다크나이트를 만들면서 놀란 감독이 상당부분 참고했으리라 여겨질 정도로 두 작품은 유사한 부분이 상당수 존재한다. 다크나이트에서 이러한 고민은 조커를 통해 형상화 된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일어선 영웅이라는 존재가 보다 큰 악을 탄생 시킬 때 영웅이라는 존재는 과연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 말이다. 어차피 사회에 있어서 악이라는 존재는 그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에 그 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한 악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배트맨은 그 사회의 구조적 문제보다는 범죄라는 작은 틀에만 집착하며 범죄만을 박멸하려 애쓴다. 위기에 몰린 악당들이 조커라는 절대악을 소환하는 것 역시 이러한 해결책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담시의 가장 큰 수혜자인 갑부 브루스 웨인이 사회 부조리의 산물인 악당들을 처단한다는 상황은 그렇기에 매우 아이러니하다. 과연 초법적 자경단 히어로는 정당한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악역을 자처하는 배트맨은 과연 진정한 영웅인가. 곱씹을 요소는 너무나 많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화두는 타락이다. 이 주제 안에는 블록버스터 영화 역사상 최고의 절대악 조커가 자리한다. 그는 철저하게 아나키즘에 입각해 있으며 물욕도 성욕도 없는 순수한 파괴욕의 화신이다. 그는 흡사 인간이 마주하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 같은 것과 같다. 이러한 면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조커는 그보다 좀 더 광기에 차있으며 좀더 말을 잘하며 좀 더 거대한 것을 원한다는 차이점 정도가 있다고 하겠다. 이 혼돈의 사도의 목적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인간의 타락이다. 그는 러닝 타임 내내 인간을 놓고 타락의 유혹을 뿌린다. 극한 상황에 시민들을 몰아넣고 영웅을 미워하게 만들고 서로 죽이게 만들며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한다. 정의의 상징과도 같던 하비 덴트를 복수의 화신으로 타락하게 만들며 배트맨을 파괴의 사도로 만들려 분주하게 움직인다. 파괴와 혼돈만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그의 말은 분명 궤변이지만, 불평등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서 큰 울림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러닝타임 내내 그의 인간의 타락을 위한 시도들의 성공을 목도하며 불편해하고 괴로워하고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극한상황에 몰리면 언제나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그런 면에서 배트맨이 끝까지 조커를 죽이지 않는 것과, 사회 실험에 던져진 두 배들이 서로를 죽이지 못하는 장면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고 싶지 않은 놀란 감독의 자그마한 희망이 아닐까라는 씁쓸한 생각마저 들게 된다.
간만에 만나게 된 거대한 영화 앞에서 나의 문자는 갈 길을 잃은 듯 하다. 이러한 경험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예술적 완성도와 상업적 성공은 반비례하기 마련이라는 해묵은 믿음들이 가끔 깨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한 황홀한 순간에 다크나이트가 자리하고 있다. 볼 때마다 새롭고, 볼 때마다 사유하게 만들고, 그 경험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경험은 분명 괴롭도록 즐거운 것이다. 분명 우리는 지금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리라. 그 전설 속에서 길이 남을 연기를 보이고 산화한 히스 레저에게 애도의 예를 표한다.
첫댓글 엥..근데 베트맨 비긴즈 나왔을때 엄청난 악평 뿐이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오,.. 제가 기억하기엔 팀버튼이후로 줄줄히 실패하면서(물론 저는 배트맨과 로빈마저도 좋아합니다..) 끝없이 침전하던 배트맨을 다시 수면위로 끌어올린 영화라고 평하던걸로 기억하는데..
올 해 최고의 영화
히스레저가... 나랑 동갑이었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