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에서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하려나 봅니다. 첫 글인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박대재씨의 글입니다. 산동 지역의 동이는 우리조상과 관계없다는 제목으로 글을 썼네요. 어제(3.23) 시민강좌에서 이런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더니 똑 같은 얘기입니다. 예맥족, 韓족만이 우리조상이라고 하는군요. 夷자도 폄하하여 표현을 합니다. 산동지방의 동이가 우리와 관계없다고 하는 주장은 한사군평양설과 상통합니다. 단군조선시대의 강역인 하북성(더 하여 산동반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요. 더구나 동이족의 분포지역이 단군조선의 세력범위가 아니라면서 아래의 저 지도를 교과서에서 볼 수없게 되었다니 첩첩산중입니다.
"산동 지역의 東夷는 우리 조상과 관계없다"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1] 동이族은 우리 조상인가
"동쪽의 여러 이민족 부르던 통칭 특정 종족에 대한 지칭 아냐… 예맥족·韓族만 우리 조상"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동이족은 한민족의 조상인가.'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 내에 있었나.'
고대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조선일보는 우리 고대사의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시민강좌를 열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이강래 전남대 교수)와 함께 핵심 쟁점을 짚어보는 공동기획을 마련했다. 강좌는 지난 9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 올림픽공원 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개최된다. (02)2152-5800
동이(東夷)는 고대 중국에서 동방의 이민족을 낮춰 부르던 호칭이다. 초기에는 서이(西夷), 남이(南夷) 등의 호칭도 있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동이,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으로 방위에 따라 구분하게 되었다. '이(夷)'는 상나라 갑골문에서부터 '尸'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尸·夷)의 뜻에 대해선 '죽은 사람' '키 작은 사람' '꿇어앉은 사람' 등 설이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주변 이민족을 낮춰보는 중화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는 그 동방인 중국 산동반도와 강소성 북부에 분포하던 우이(嵎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등의 이민족을 묶어 동이라고 통칭하였다. 동이를 포용했던 상과 달리, 주는 동이를 대대적으로 공략하였는데, 주가 제(齊)와 노(魯)의 제후를 세운 것도 동이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이가 제의 영역에 편입된 것은 전국시대였지만 그 정체성은 전국 말까지 이어졌다.
왼쪽 위는 중국식 동검. 오른쪽 위는 요령식 동검. 왼쪽 아래는 산동반도 청동기 문화에서 주종을 이루는 다리가 셋 달린 토기. 오른쪽 아래는 요동반도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바닥이 평평한 토기. 뚜렷이 대비되는 이 유물들은 고대 산동과 만주 지역의 주민이 같은 계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가 제를 정복해 중국이 통일된 후 산동 지역은 동이 지역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산동의 동이는 중국의 민호(民戶)가 되었고, 대신 가장 동쪽의 중국 군현인 요동군 동쪽의 세력이 동이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부여·고구려·예·옥저·읍루·삼한·왜인 등이 바로 새로운 동이였다. 우리 민족이 동이와 관련되어 언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중국 역사서에서 우리 민족이 동이의 범주에서 서술된 것은 '한서(漢書)'부터였다. '동이 예의 군장 남려(東夷濊君南閭)'가 위만조선 우거왕을 배반하고 한의 요동군에 투항했다(기원전 128년)는 것이다. 예는 예맥(濊貊)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고조선의 근간이 된 종족이었다. '사기(史記)'에서 위만조선을 가리켜 '예주(濊州)'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조선의 예맥족은 삼한의 한족(韓族)과 함께 우리 민족의 근간이 되었다.
1987년부터 2009년까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렸던 역사지도. 동이족의 분포 지역과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함께 그려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기원전 2000년대 후반 산동반도의 진주문(珍珠門) 문화는 악석(岳石) 문화를 계승한 대표적인 청동기 문화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요동반도의 청동기문화인 쌍타자(雙駝子) 문화와 비교해 보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보인다. 산동에서는 민무늬의 다리가 셋 달린 토기가 주종이며, 요동에서는 지(之)자 무늬나 줄무늬가 있는 바닥이 평평한 토기가 주종이다. 산동에서는 지하에 구덩이를 판 움무덤이, 요동에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 돌무덤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들 돌무덤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은 중국식 동검과 전혀 다른 형태여서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차이는 두 지역의 주민이 동일 계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선진(先秦) 시기의 동이는 산동 지역의 여러 이민족에 대한 통칭이며 특정 종족에 대한 지칭이 아니었다. '삼국지'의 동이는 예맥족뿐 아니라 삼한의 한족, 읍루, 왜인까지 포괄한 개념이었다. 부여·고구려·예·옥저가 말이 통한 것과 달리 읍루는 말이 달랐다. 일본 열도의 왜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동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투영된 주관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며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충주고구려비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는 또 다른 동이였던 것이다.
첫댓글 저 또라이 새끼네요.
저런 것들 안잡아가고
귀신은 뭐하고 사나
ㅉㅉㅉ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고
전부 중국어로 적와 놓은
저 지랄같은 치밀함,...
ㅋㅋㅋ
생긴것도 지미씹같이 생겼구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역사학계가 심각해진 거같습니다.
다른학문은 몰라도 역사, 민족사만큼은
사명을 가진 분들이 해야하는데...
다른 나라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같아
속이 탑니다.
저런 반민족자들 조만간 청소될 날이 옴니다.
지금이사 극우자본 받아멍는 재미에 혼도 민
족도 팔아멍는 재미가 솔솔하겠으나 숨길
막힐때 코앞인걸 인식못하니 다행이지요.
저런 반민족 근거를 남겨주니 다행이지요.
세상이 재편될 때 삿된 사관 팔아먹은 죄를
뭘로 갚게 될지 모를 때가 좋겠지.
코앞이다 이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