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신자가 미사를 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미사는 보는 것이 아니라, 참례(參禮)하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는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전례 헌장 14항은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하도록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명백하게 참여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능동적인 ‘참여(participatio)’를 잘못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독서를 하는 일, 성가대를 지휘하거나 선창하는 것 혹은 보편지향 기도를 바치는 일과 같은 전례 봉사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러한 직무에 참여하는 일은 그 자체로 가치와 품위를 가지고 있지만, ‘능동적인 참여’의 전부는 아닙니다. 전례 안에서 보이는 것들에만 집중하고 피상적으로 다룰 때, 전례의 각 부분에만 매달리게 되고 그 안에서 역할을 맡지 못할 때는 전례 거행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례 안에서 근본적인 행위인 ‘참여’는 무엇일까요? 교부들은 참여를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질서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교부들은 외적으로 전례 행위를 한다 해도 이 행위가 오직 거룩함에 참여할 때만 근본적인 참여가 이루어진다고 여겼습니다. 교부들은 일차적으로 ‘참여’라는 단어로 성찬례 안에서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영성체를 표현했습니다. 위-디오니시스에게 “거룩한 성찬을 받아 모심은 예수님께 참여함을 나타낸다.” 고백자 막시무스는 「신비 교육」에서 “ 그(성찬례) 모임에서 온전히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순결하고 생명을 주는 신비들을 거룩하게 받아들임은 그리스도께 참여함을 드러내며 그 결과로 인간은 하느님이 되기(deificatio)에 합당하다고 여겨지게 된다”라고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우리가 주님의 인성과 신성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룬다는 사실을 통하여” 친교와 의화(義化)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또한 몹수에스트의 테오도로에게 ‘참여’는 신비들(성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나눔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는 것 즉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결합하는 것을 참여의 근본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로마 전례서인 레오니안 성사집을 통해, ‘참여’의 대상과 의미 그리고 전례 거행 안에서 이 근본적인 행위가 드러내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사집 안에서 ‘참여하다’가 사용된 표현 중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리스도 곧 우리의 인성(人性)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불리신 분”입니다. 여기에 ‘참여’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전제가 담겨 있는데,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신성(神性)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인성에 참여하심 곧 강생(降生)의 신비가 그 시작이며 토대라는 것입니다. 성사적인 그리고 그와 연결된 전례적인 차원에서 ‘참여’는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 안에서 기원하고, 사람이 되신 말씀에 끊임없이 기대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여하다’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또한 전례서 안에는 “전능하신 신성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라는 표현도 나타납니다. 이는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참여’를 접붙이기처럼 신비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동반자인 교회 전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곧 공적 예배인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게 됩니다.
‘참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내적인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 전례 거행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신비에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시길 바라봅니다.
[김형민 안토니오 신부(미원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