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Empire of Japan)
수도: 도쿄
정부형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덴노 히로히토
정부수반: 이누카이 츠요시
인구: 약 9,700만 명
역사
1921년의 소위 '명예로운 평화'가 조선반도를 포함한 일본의 해외식민지를 공인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쟁이 끝난 이후의 일본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의 붕괴는 이른바 '대전쟁 충격(Great War boom)'을 가속화해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죠. 1918년의 쌀 폭동을 시작으로 다이쇼 시대의 끝자락은 경제위기와 사회혼란으로 점철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내의 아나키스트들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틈타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혁명을 모방한 사회변혁을 꾀했습니다. 그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12월 27일 난바 다이스케라는 아나키스트 활동가가 히로히토 황태자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은 이를 더더욱 증폭시켰죠. 이 사건의 여파로 수상을 맡고 있던 야마모토 곤노효에 제독이 사임하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집니다.
정국을 안정시킬 후임은 '원로(元老, Genro)'들의 추천을 받은, 조슈번 출신의 전(前) 육군상 '다나카 기이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명을 둘러싸고 일본 정계는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정권을 잡고 있던 '입헌정우회'는 둘로 쪼개져, 친(親)다나카 세력이 '정우본당'을 만들어 뛰쳐나가기에 이르죠. 1925년 총선에서 정우본당은 압승을 거두고, 다나카 수상은 치안유지법을 별 무리 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국체를 부정하는 모든 세력 및 개인에게 최대 사형까지 내릴 수 있게끔 했던 이 악명높은 법은 다나카의 철혈통치를 상징하는 심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1925년 영국에서 혁명이 터지고, 독일이 유럽시장을 독점하고, 미국 경제가 파탄나는 등의 상황은 일본의 수출위주 경제에 끝없는 악영향만을 주었습니다. 1926년 초 소위 '지진공채'와 대만은행을 둘러싼 스캔들이 터지자 은행들마저 줄도산하는 지경에 이르죠. 외교 면에서도 다나카는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우유부단한 정책결정 탓에 독일과 중국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중국에서의 이권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죠. 다나카 철혈통치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926년 4월, 두 야당, 입헌정우회와 헌정회가 연합하여 '2차 호헌운동'이라 불리는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황태자의 암묵적 지지와 폭넓은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 이들은 다나카 내각을 끌어내릴 수 있었죠. 훗날 '1926년 헌정복고'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두 정당은 '입헌연립내각'을 구성했고,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그리고 보통선거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연정은 중국 사태의 처리 문제를 두고 붕괴하고 맙니다. 정우회는 독일의 대륙 독점을 막기 위해 장작림의 군대를 도와 중국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헌정회는 중국에 세워진 '신질서'를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신정부와 협력함으로써 오히려 독일의 영향력을 서서히 배제하는 방안을 선호했죠. 연립내각이 붕괴하자, 수상 이누카이 츠요시는 다시금 정우본당과 접촉, 둘로 나뉘었던 정우당을 다시 합치게 됩니다.
정우당의 계획대로, 일본군 병력은 남만주철도를 통해 전개되어 독일의 만주 진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독일 본국에서의 외교적 압박 탓에 두 나라 간의 직접적인 교전이나 일본군의 직접개입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 파병은 만주 내에서의 일본의 입지를 확고히 만들고 장작림의 통치기반을 다져 '안국군(安國軍)' 정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다사다난했던 1926년은 다이쇼 천황의 붕어, 그리고 그의 아들 히로히토가 '쇼와 시대'를 열어젖힘으로써 비로소 그 끝을 맞이합니다. 이누카이 내각은 9년간 개입주의 정책을 통해 경제를 서서히 회복시켰고, 정국을 평화로이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죠. 그러나 극단주의 세력이 발흥하는 등 어려움은 아직 상존합니다. 1936년인 지금, 일본은 독일의 지배가 약화되는 틈을 타 그 괴뢰왕조인 청의 영토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것도 국내의 불안정과 갈등을 봉합한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하겠죠.
정치
1890년 반포된 '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을 '현행 헌법에 의거하여 주권을 가지고 이를 행사하는 제국의 수반'으로 규정합니다. 이에 따라 천황은 군 통수권과 각료를 해임할 권한을 가지며, 내각은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천황은 혼자만으로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신성불가침의 황권과 만세불변의 왕조는 국가주권과 권위의 유일무이한 원천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국가'원수'일 뿐 국가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천황은 '헌법에 규정된 바대로' '국가의 뜻을 따라' 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지, 그의 개인적인 뜻을 실현하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군부와 우익세력들은 이 황권과 국권의 분리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들은 천황을 정책결정에서 배제하는 태도를 '이단적'이며 모독적인 것으로 여기죠. 천황이 절대적 권리에 따라 절대왕권을 행사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당연히 이는 현재 일본에서 시행되는 의회제도에 정면으로 상충되는 입장이죠.
귀족원(House of Peers)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나뉘어진 제국의회(Imperial Diet)는 국가의 입법기관이자 대의기관입니다. 귀족원은 주로 황족, 화족, 부유층, 과학자, 정치가 등 사회 상층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고, 하원은 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의 투표로 선출되며 천황의 임명을 받지 않습니다. 헌법 상 제국의회는 입법권을 행사하고 예산안을 검토하며 헌법을 개정하는 등의 권한을 지니며, 추밀원 등의 '자문기관'보다 높은 지위를 가집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추밀원(Privy Council)은 천황을 '보좌'할 권리를 핑계로 제국의회와 내각을 거슬러 정책을 임의집행하기 일쑤이죠.
1900년에 창당한 입헌정우회는 일본 정치의 지배정당입니다.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의 지도 아래 정우회는 1926년 이래 세 번 치러진 총선거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우회와 달리, 야당인 민정당은 자유주의자를 대표하는 정당이죠. 그런데 사실 두 정당은 원래 이렇다 할 이념적 차이점이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정우회는 메이지 시대의 '통치파벌'의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만든 당파이고, 민정당의 전신인 헌정회는 가쓰라 다로 공작이 주도하는 또 다른 파벌, '입헌동지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당파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가쓰라의 후계자인 가토 다카키에 대한 원로들의 노골적인 반감과 정우회의 권력독점은 헌정회로 하여금 점점 자유주의에 경도되게 만들었습니다. 재벌과 지주계층들은 집권세력인 정우회를 지지했고, 정우회가 점점 우경화됨에 따라 헌정회는 그 밖에서 지지세력을 알아봐야 했죠. 1926년의 헌정복고와 일련의 정치재편은 두 주류정당의 구도를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나카 수상 시절의 집권세력이었던 '정우본당'이 정우회에 재흡수되는 한편, 헌정회는 새 총재 '하마구치 오사치'의 지휘 아래 민정당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첫댓글 번역 감사합니다.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게 있다면 마지막 문단의 가토 타카키는 가토 다카아키 인듯 합니다.
여튼간에 일본은 다른 나라랑 다르게 역사의
흐름이 우리 세계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듯 합니다.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왕정복고와 권위주의가 휩쓰는 가운데 대중강경+권위주의인 다나카 기이치가 물러나고 약간 독기가 빠진듯한 면모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