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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큰 섬이 이어져 동서(東西)로 활처럼 길게 뻗어 있는 일본은 행적구역상 주요 수도권을 제외하곤 43개 현(縣, 우리나라의 도 개념)으로 나뉘어 있다. 또 기후나 문화에 따라 주부(中部), 도호쿠(東北), 간토(關東), 규슈(九州) 등 8개의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호쿠리쿠(北陸地方)는 그중 주부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도상으로 보면 일본의 거의 중앙에 있으면서 동해안을 끼고 있는 해안지역이다.
여행 일정은 첫날 이시카와 현의 중심도시인 가나자와시(金市)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도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전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가나자와시는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전란도 겪지 않아 에도시대(1603~1868) 이후의 옛 도시 모습과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호쿠리쿠 최고의 관광도시다.
- ▲ 1 170년이란 세월 동안 공을 들인 겐로쿠엔은 매화와 벚꽃, 제비붓꽃 등 차례로 피는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4월 겐로쿠엔을 뒤덮은 벚꽃. 2 가나자와시 중심부에 위치한 21세기 미술관은 지역사회와의 공생을 외치며 지역민과 관광객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주고있다.
- 겐로쿠엔과 21세기미술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 직후까지 일본 5대 도시 안에 들었다는 가나자와는 볼거리가 많다. 그중 겐로쿠엔은 일본 3대 정원(庭園) 중 하나로 에도시대부터 이곳을 지배하던 마에다(前田利家) 영주 가문이 170년에 걸쳐 만들 인공정원이다. 정원은 약 9만9,174m² 넓이로 여의도 면적(18만2,000㎡)의 절반이 조금 넘으며, 여러 개의 작은 숲과 연못, 다리, 폭포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 공원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숲마다 잔디대신 파릇한 이끼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공원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끼 관리자만 20명이 넘는다고 한다.
겐로쿠엔 바로 앞에는 가나자와성 공원(金城公園)과 21세기미술관(金21世紀美術館)이 있다. 가나자와성은 에도시대의 성(城)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외침에 대비해 성 주변에 인공연못을 만들어 놨으며, 특히 흰빛이 감도는 기와는 유사시 총알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납을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 ▲ 카이카로의 붓 체험.
- 겐로쿠엔에서 신호등 하나 건너 있는 21세기미술관은 2004년에 문을 연 시민을 위한 공간이다. 21세기미술관이라는 이름처럼 미래지향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곳은 외관상으로 봐도 일반 미술관과 다르다. 미술관 모양을 원으로 만들어 앞뒤 구분이 없으며, 외벽 또한 유리로 돼 있어 안과 밖이 서로 보인다. 설계에서부터 소통이라는 주제를 담았기 때문이다.
야외에도 여러 가지 조형물이 전시돼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좋은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수영장 모양의 설치작품이다. 수영장에 마치 물을 채워 놓은 듯, 투명 재질 안에 일정 양의 물을 담아 위에서 보면 물 안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밑에서 보면 물 위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이 작품 또한 소통이 주제인 듯싶었다. 발길을 따라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크기가 다른 14개의 전시실과 2개의 갤러리, 카페 등이 있다.
에도시대의 정취, 히가시챠야가이
가나자와시에서 에도시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히가시챠야가이(ひがし茶屋街)다. 우리가 생각하는 차(茶)를 파는 거리라는 개념과는 다르게 과거 게이샤(藝者)들이 손님을 맞이하던 곳으로 2층 목재로 된 고급요정들이 나란히 서 있다. 이곳의 한 찻집인 카이카로(懷華樓)는 182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입장료(700엔)를 내면 녹차 시음과 함께 부채에 붓으로 직접 이름이나 글을 써서 가져갈 수 있으며, 내부 견학과 함께 게이샤들과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곳에서의 모든 영업은 예약제로 운영되었으며, 술값은 그날 받지 않고 추석이나 연말에 청구서를 보내서 받았다고 한다. 손님 또한 그날 마신 술값이 얼마인지 모른 채 청구서가 오면 그 액수대로 지불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상류층이기에 지금까지 한 번도 술값을 떼인 적이 없다고 한다.
- ▲ 1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는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2 카이카로에서 바라본 히가시챠야가이. 멀리 히가시챠야가이 풍경이 보인다.
- 가나자와에는 이곳 말고도 관광지가 많다. 일본 전통 무사의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나가마치 부케야시키아토(長町武家屋敷跡), 16세기 말부터 시작돼 현재 일본에서 소비되는 모든 금박의 약 99%를 생산하는 가나자와 금박공예 등도 좋은 구경거리다. 이 모든 것들이 가나자와성을 중심으로 반경 2km 내에 집중돼 있다. 때문에 도보로 여유롭게 들러볼 수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사형을 당한 윤봉길 의사의 묘도 있어 우리에게는 근대 한국역사의 아픔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도시이다.
일본 북알프스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
다음날 일찍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다테야마역(立山)이었다. 해발 475m에 있는 이 역은 일본의 북알프스라고 불리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에 오르는 출발지다. 우리가 서둘러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날이 바로 겨울 동안 쌓였던 눈길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부분적이나마 높이 6~20m의 설벽(雪壁) 코스를 개통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설벽을 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계단 형태로 산을 깎아 만든 철로 위를 달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비조다이라(美女平·977m)까지 올라가야 한다. 시간에 맞춰 왔는지 마침 고원버스들이 서 있는 한쪽 광장에서 관계자들이 모여 엄숙하게 개통식을 하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산신제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산으로 오르는 고원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진 산악도로를 천천히 달려갔다. 차안 모니터에서 각 지점에 대한 관련 사진과 설명이 나오지만 관광객 대부분은 그보다 창밖의 풍경을 보기 위해 정신이 없다. 창밖 풍경 중 대표적인 곳은 폭포 줄기가 350m로 떨어진다는 일본 최고의 쇼묘(稱名)폭포다. 하지만 아직은 눈이 녹지 않아 그 웅대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30분을 올라가면 해발 1,930m의 미다가하라고원이 나온다. 한라산 높이의 이곳은 미다가하라호텔이 있어 관광객들이 잠시 발길을 멈추기도 한다. 설벽을 보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해발 2,300m 높이의 텐구다이라까지 올라가야 한다.
- ▲ 1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의 제설작업 모습. 도야마현 관광과의 협조로 20m에 이르는 눈의 벽을 촬영했다. 2 영화나 CF 촬영 중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치리하마 나기사 드라이브 웨이.
- 텐구다이라에 도착하자 사방이 온통 눈이고 높이 6~10m 이상의 설벽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 관광객이 아닌 일본 현지인들 또한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웅대한 광경이 분명했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그곳에서 설벽 개통식을 취재하러 나온 일본기자들과 함께 산악용 차를 얻어 타고 불도저로 눈길을 뚫고 있는 무로도(室堂·2,450m)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정상이 가까웠음을 나타내듯 맑은 날씨에도 약한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올라와 본 산 중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산행은 거기까지였다. 눈앞에서 두께를 알 수 없는 눈 위를 천천히 오가며 눈을 깎고 밀어내는 불도저와 가까운 거리인 듯 선명하게 보이는 설경 속의 다테야마호텔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해발 2,450m에 있는 다테야마호텔은 12월부터 4월까지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치리하마와 게타타이샤
다테야마를 뒤로하고 이동한 곳은 이시카와현에 있는 치리하마(千里浜) 나기사 드라이브 웨이였다. 모래가 곱고 단단해서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8km의 모래해변을 차로 달리 수 있는 이곳은 영화나 CF 촬영장소로 자주 이용된다고 한다.
치리하마에서 노토(能登)반도 쪽으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게타타이샤(氣多大社)라는 유명한 신사(神社)가 나온다. 토착신앙이 생활화된 일본에는 약 8만 개 이상의 신사가 있는데, 이렇게 신사가 많은 이유는 일본인들이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사는 그 신들을 모아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게타타이샤 신사는 그중 기(氣)가 강해 남녀의 인연을 맺어 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 ▲ 1 인연을 이어주는 신사로 유명한 게타타이샤. 2 도야마현에서 유일하게 옛날 방식을 그대로 지켜가고 있는 다카시와양조장.
- 노토반도와 와쿠라온천
지진이 많은 일본은 그만큼 유명한 온천도 많다. 그러나 일본 전역에 걸쳐 바다에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노토반도에 있는 와쿠라온천(和倉溫泉)은 해수(海水)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1,200년 전부터 온천수가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목욕을 즐겨하는 일본인에게 해수온천은 몸을 담가 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와쿠라온천에는 유명한 료칸(旅館·일본 전통 숙박시설)이 많다. 그중 가장 이름이 나 있는 곳은 가가야(加賀屋)다. 100년 이상 역사를 지닌 이곳은 일본 천황도 다녀갔을 만큼 유명한 료칸이다.
와쿠라온천에서 하룻밤 피곤을 풀고 나면, 노토반도 끝에 있는 와지마 아침시장(輪島朝市)을 가보는 것도 괜찮다. 오전 7시부터 12시까지만 장이 서는 이곳은 1,000년 전, 어부와 농부들이 물고기와 채소 등을 들고 나와 팔기 시작하면서 오전장이 서기 시작했으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곳이다.
와지마시장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센마이다(千枚田)도 관광객에게는 좋은 볼거리다. 해안의 가파른 급경사면에 1,004개의 고만고만한 논이 기하하적 무늬를 그리며 계단식 형태로 펼쳐져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본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사케(酒)다. 쌀을 누룩으로 발효시킨 후 여과해서 만든 사케는 일본인들도 그 브랜드를 다 알 수 없을 만큼 종류가 많다.
때문에 물이 좋기로 소문난 노토반도에도 대(代)를 이어 사케를 만드는 양조장이 많다. 그중 1872년에 개업해서 7대째 대를 이어오고 있는 다카시와양조장은 지금도 옛날 방식을 고집하며 매년 5만 병 정도의 사케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 ▲ 1 가카오카역에 도착한 도라에몽 전차. 2 해변과 마주하고 있는 센마이다. 4월 중순부터 모내기가 한창이다.
- 사케와 도라에몽
일본에서 만든 만화캐릭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도라에몽이다. 고양이 모양의 이 로봇캐릭터는 후지코 F 후지오라는 만화가에 의해 1960년에 만들어져 1970년대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캐릭터가 됐다.
후지코 F 후지오가 태어난 도야마현 타카오사키시에 가면 이른바 도라에몽 전차라고 부르는 만요선이 인기다. 전차 외부와 내부에 도라에몽 캐릭터를 부착한 것으로 여행을 끝내고 도야마 시내에 묵게 된다면 재미삼아 한 번쯤 타볼 만하다.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언제나 눈과 마음의 차이다. 낯선 곳에 가면 눈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지만, 마음은 그보다 편안한 것을 찾는다. 예년에 비해 봄꽃들이 빨리 피고 지던 4월 어느 날, 일본 호쿠리쿠 지역에 다녀오면서 나는 이국(異國)의 낯선 풍경을 구경하는 즐거움과 동시에 언어가 통하고 몸이 익숙한 것이 좋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된장이다.
도야마현 여행 팁
도야마현, 이시카와현 가는 길
인천국제공항에서 도야마현 (도야마공항)과 이시카와현 (고마츠공항)으로 직접 가는 비행기는 매주 월·수·금 출발한다. 일정상 다테야마 설벽이 우선이라면 도야마 공항이, 가나자와시 관광이 우선이라면 고마츠공항이 가깝다. 혹 돌아오는 길에 두 공항에서 날짜가 안 맞는다면 1시간 이내의 도쿄 하네다공항을 거쳐 귀국하면 된다.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하지만 다테야마 설벽이나 알펜루트에 갈 경우에는 해발 2,000m가 넘는다는 점에서 따뜻한 옷은 필수다. 또한 일본은 100V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출국하기 전에 공항에서 일명 ‘돼지코’라고 부르는 100V용 전환코드를 사가는 것이 좋다. 참고로 다테야마 알펜루트에서는 호텔을 제외하고는 거의 신용카드 사용이 어렵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