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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4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마태오 13,54-58
기도를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 것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확 달라져 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그들은 서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잘 압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코로나도 그 성장을 꺾지 못한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국민 가게라 불리는 ‘다이소’입니다.
보통 다이소는 일본 것이라고 여기고 팔리지 않는 싸구려 제품을 파는 곳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000원짜리로 질 좋은 제품을 팔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이소가 전국 모든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을 합친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1,500여 매장에서 연 매출 3조 원에 달하는 성과를 냅니다.
1,000~5,000원짜리를 팔아서 그정도 매출이 나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1997년 천호동에 1호점을 열 때, 한국에서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팽배했고 ‘1,000원짜리 팔아서 뭐가 남겠어!’라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50대 이상보다 2330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숍이 되었습니다.
저도 ‘1,000원짜리가 뭐 품질이 좋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 방문해보고는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없는 게 없고 가격에 비해 품질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소 신화를 이룩한 박정부 회장의 그러한 지혜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지혜와 힘은 자신 안에서 샘솟지 못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저절로 똑똑해지는 사람 없고 음식을 먹지 않고 에너지가 솟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지혜와 힘은 외부로부터 온 것입니다.
박정부 회장은 45세에 회사를 사퇴하고 먹고살 일이 막연하여 무역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일본 100엔숍을 접하게 됩니다.
미국엔 1달러숍이 있고 유럽에도 그러한 회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일본 다이소에 납품하며 배운 것과 유럽을 다니며 공부한 것들을 바탕으로 10년을 준비하여 천호동 1호점을 엽니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가게가 될 리가 없다고, 특별히 서울 잘 사는 동네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말렸지만,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용기는 오히려 잘사는 나라에서 더 건전한 소비를 한다는 지혜를 획득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입니다.
이런 지혜와 힘은 분명 이미 그러한 사업으로 성공하고 있는 선진국의 상황을 보고 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적은 믿음의 힘으로 이뤄집니다.
믿음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박 회장의 지혜와 기적 같은 힘은 바로 외국의 성공을 믿고 잘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노력한 결과가 지금의 다이소를 만들었습니다.
박정부 회장이 한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역업을 하며 외국의 상황을 공부하고 배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고향에만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배우고 공부하셨습니다.
그런 시간을 무엇이라 할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바로 이 기도의 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으로 잘 살 수 있을까요? 기도는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기도의 힘을 믿을 수 있어야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에게 한 수녀님이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할 때 “그럼 가서 성체 앞에서 기도하세요” 라고 하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러자 정말 학교 파업으로 남게 된 부식을 수녀원에 가져온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기도를 믿는 것은 하나입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믿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도하면 다 깨달을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음을 믿읍시다.
기도를 믿음과 주님을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악령을 쫓아내시고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4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마태오 13,54-58
사제로서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성사 집전에 충실함을 통해 성화의 길을!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여기저기 본당 특강을 다니면서, 제2의 비안네 신부님들을 많이 만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신부님들 머릿속에는 오로지 본당 교우들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긴급 병자 성사나 장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할까봐, 잠시도 본당을 비우지 못하십니다.
뭐라도 하나 생기면, 도움이 필요한 교우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교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교우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드리고 희망을 드리기 위해 밤잠을 쪼개가며
강론을 준비하십니다.
이런 신부님을 목자로 모신 교우들 표정은 다들 환한 보름달 같습니다.
교우들 표정 보면 즉시 딱 견적이 나옵니다.
그런 분위기에 감동 받은 제가 한 마디 인사치레라도 할라치면, 즉시 하시는 말씀, “우리 본당 교우들이 정말 착하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의 탁월한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비안네 신부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부족한 사제이지만, 이정표로 삼을 모델이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비안네 신부님께서 탁월한 성인(聖人)으로 자리매김하신 배경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분이 성인이 되신 비결은?
뭐 엄청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제로서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성사 집전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특히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오늘 저희 사제들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은 고백성사에 그렇게 충실하셨고, 목숨을 거셨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고백성사의 탁월한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교우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거룩한 영적 생활로 인도하는 데 있어 고백성사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제 생활 내내 고백성사에 올인하신 것입니다.
잘 나가실 때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하루 24시간 중에 15~17시간 동안 고백소 안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분에게 고백성사를 보는 교우들의 숫자는 1년에 평균 2만 명이 달했습니다.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혹한이 찾아오는 아르스의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고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교우들은 하루 온종일, 혹은 이틀, 사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41년간의 혹사에 시달리던 비안네 신부님은 1859년 7월 29일 17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외치셨답니다.
“여기까지! 나는 이제 그만이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그는 닷새 후 8월 4일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주된 업무인 성사 집전에 충실함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2023. 8. 4. 금)(마태 13,54-58)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나자렛의 겨자씨>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또 예수님 자신도 목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6,3).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 어떤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운 적 없는 학력에 대한 편견 등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고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에 ‘목수’는 천대받는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라는 말은, 표현만 보면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인정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목수 따위가 예언자 행세를 하는군.” 이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전체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는 아닙니다.
나자렛에서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몇 명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라고 기록했고,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나자렛에서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그 몇 명의 병자들은 황무지처럼 척박한 땅 나자렛에 예수님께서 심으신 ‘겨자씨’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겨자씨가 나중에 어떻게 자라서 어떤 나무가 되었는지, 얼마나 열매를 맺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심으신 일이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과 마주쳤습니다(마르 5,1-9).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고(마르 5,10-12),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해버렸고, 마귀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마르 5,13).
그것을 본 게라사인들은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마르 5,17).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지방을 그냥 떠나시게 되었는데,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마르 5,18-20).”
복음화의 관점에서 보면, 게라사인들의 지방은 사막과도 같은 불모지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으셨습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한 것은 분명히 겨자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에서의 선교활동’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활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실패’인데(사도 17,16-33), ‘완전한 실패’는 아니고, 몇 명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7,34).”
그 몇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 지역에 심은 겨자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분명히 자기들만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복음의 겨자씨’ 역할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먼저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신앙인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하면서, 항상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