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까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실어 묵을 먹고
술을 마리소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한국일보』, 1965년. 12. 5)
[작품해설]
신경림의 문학적 관심은 농촌에 대한 관심, 즉 농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관심과 애착으로부터 출발한다. 농민의 실상을 도외시한 농민문학이란 그 어떤 존재 가치도 있을 수 없음을 직시한 끝에, 문학에 있어서도 농촌이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당위’로 자신의 창작 지침을 삼게 되었다. 이 시는 그가 등단 이후 거의 10년 동안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농촌의 공돛체적 삶을 체험한 이후, 다시금 시를 쓰기 시작한 무렵의 작품으로, 그이 문학적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장날을 앞두고 장터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추운 겨울밤을 술과 놀음으로 지새우며 고달픈 삶의 회포를 푸는 모습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담담하게 고백하듯 진술한다. 즉 시적 대상인 ‘우리’가 전혀 분리되지 않은 채 제싣힘으로써 화자에 의해 관찰된 농민들의 현실적 삶은 고스람히 화자의 내면에 수용됨으로써 솔직한 감정 표현으로 융화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농민들의 삶의 대변자로서 시인의 존재를 부각시킬 때, 작품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회한의 정서나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과 비원(悲願)의 행위들은 모두 집단적인 정서로 보편화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화자가 진술하는 이야기들은 그들의 삶의 현장이자 생활 주변의 현실호서 진실성과 전형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농신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정서와 결합하여 개인의 목소리로써 드러날 수 있는 형태가 바로 신경림의 ‘농민시’의 본질을구성하게 되는 것이며, 후일 「농무」라는 작품을 탄생하게 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경림은 우리 고유의 ‘이야기꾼’으로서 전통적인 시가의 원형을 간직한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방법론은 이야기의 전달이라는 차원에 국하되어 있지만, 농촌의 현실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그의 상상력이 농촌 민중들의 정서에 일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민중의 노래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소개]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청북도 중원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탑」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현의회 창립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시집 :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저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