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1786년 9월부터 1년 7개월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남긴 기행문과 편지 모음집. 이 책을 읽고 나면 한편으로는 대문호 괴테의 깊은 성찰과 사색의 글들이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장기간 동안 그렇게 좋은 유적과 예술품과 공연과 풍광들을 감상하면서 여유롭게 자기 반성과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괴테의 `팔자`를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부러워 하게 된다.
당시의 괴테로 말하자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친 촉망받는 작가이자, 과학 분야에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학자이자, 십년간 바이마르 공화국의 존경받는 정치가로 명예와 재부를 함께 누려 온, 이미 만천하에 그 천재성이 검증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의 괴테는 승승장구였지만, 내면의 괴테는 이미 고갈될 대로 고갈된 정신적 마모상태에 있었다.
이 책은, 37세 생일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새벽 3시의 괴테가,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벼르던 지인들 몰래, 여행 가방과 오소리 가죽배낭 하나만 달랑 맨 채 어릴 적부터 동경의 대상이던 로마로 떠나는 데서 시작한다. 이유는, 요즘 말로 하자면 심신의 재충전을 위하여.
요즘보다는 여러 모로 그 시절이 시간적 여유가 있었겠지만, 정상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그렇게 모든 것을 훌훌 던지고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괴테가 이 재충전의 시간동안 얼마나 열심히 새로운 문화를 익히고 견문을 넓히려 했는지, 얼마나 겸허히 자신을 되돌아보고 채찍질 했는지는 이 책에 소상히 나온다.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사회상과 문화 수준 같은 것을 들춰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지방도시들에서까지 활발하게 이뤄지는 연극공연, 곳곳에 산재한 박물관과 전 유럽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관광안내지도의 존재, 망원경을 통한 도시 전경 조망 등등 독자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현대화` 된 이탈리아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3천부 나가면 족히 성공이라는 출판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정통 인문서로서는 보기 드물게 6만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다. 산문 문장으로 쉽게 쓰여져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부담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아무 데나 펼쳐 보면서 사색의 여유를 갖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정공법이다.
그러한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고 싶은 사람, 비록 뭔가에 매인 몸일지언정 마음이나마 훨훨 자유롭게 날아 근대 이탈리아의 활기 속으로, 고대 로마문명의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독자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거머쥔 독자라면 생각해볼 것 없이 여행 배낭 속에 이 책 한 권만큼은 일단 챙겨넣는 것이 좋겠다.
단, 쉽게 쓰여졌다고 해서 가벼운 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숙지해야 한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그윽한 커피 향을 맡으며 책 속에 몰입할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책이다.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 내릴 생각일랑 아예 접어두는 것이 좋다.
ㅡ 조유식 (1999-04-22)
책소개
저명한 작가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정치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옭죄는 궁정 생활을 탈출하여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 익명의 자유를 만끽하며 보낸 1년 9개월의 여정에서 그는 진정한 예술가로 변모해가는 내면적 성숙의 과정을 상세하게 전한다.
"이제 짐을 꾸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게 그토록 사랑스럽고 소중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떠나왔지만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 많은 준비를 한다는 말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내일이면 우리는 나폴리로 간다.
나는 저 낙원 같은 자연 속에서
새로운 자유와 기쁨을 얻을 것이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8월 28일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아마 나를 붙잡아둘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만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행 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꾸린 채 홀로 역마차에 몸을 싣고 7시 30분에 츠보타에 당도했다. 안개가 자욱히 낀 아름답고 고요한 아침이었다.
9월 17일, 베로나
이곳 사람들은 아주 활기차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며, 특히 상점들과 수공예품 가판대가 밀집해 있는 몇몇 거리는 정말 유쾌해 보인다. 이곳의 가게나 작업실은 앞문이 없이 건물 전면이 거리 쪽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가게 안쪽까지 다 들여다보이고 그 안에서 하는 일을 모두 볼 수 있다. 재봉사가 바느질을 하고 구두장이가 가죽을 펴고 망치질을 하는데, 모두들 반쯤은 거리로 나와 있다. 불을 밝히는 밤이 되면 그런 광경은 아주 생동감 있게 보인다.
10월 11일, 베네치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을 지키며 즐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나는 마침내 어느 프랑스 노인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말을 한 마디도 못해서 마치 버림받은 것같이 느끼고 있었고 여러 가지 추천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느 정도 지위도 있고 몸가짐도 훌륭했지만 구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11월 1일, 로마
마침내 나는 이 세계의 수도에 도달했다! 만일 내가 좋은 길벗과 함께 아주 견식 있는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15년 전쯤에 이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행운아라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수도를 안내자도 없이 혼자서 방문할 운명이었다면, 이러한 기쁨이 이렇게 늦게서야 베풀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티롤 산맥을 마치 날아서 넘어온 것 같다.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베네치아 같은 곳은 충분히 둘러보았지만, 페라라, 첸토, 볼로냐 등지는 대충 훑어보았고 피렌체는 거의 아무것도 구경하지 못했다. 로마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렬했고 순간순간마다 더욱 높아졌기 때문에 잠시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3월 20일 화요일, 나폴리
나폴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용암이 분출해 오타야노 쪽으로 흘러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배수비오 화산을 세 번째로 등정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 마리의 말이 끄는 이륜마차를 타고서 산기슭에 이르자마자, 이전의 등반 때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람은 친숙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 한 사람은 신뢰할 수 있어서 나는 그들을 한 명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며, 그들 역시 여러 가지 편리한 조건 때문에 나를 택했던 것이다.
ㅡ 괴테 지음 / 박영구 옮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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