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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우수영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진도섬이 펼쳐진다. 진도는 보배섬으로 많은 보물들이 있지만, 그 보다는 임진 정유왜란의 격전지로 한국인에게 각인되었다. 그 격전지는 바로 진도 대교가 설치된 그 아래 좁은 해협으로 명량대첩의 역사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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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를 넘어서면 언덕위에 세워진 진도타워가 있다. 이 탑형식의 건물 맨 위에 오르면 주변이 다 보이고, 명량해전이 펼쳐진 바다가 자세히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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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타워 앞에는 광장이 있고, 그 앞에는 배형상을 한 조각상에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청동조각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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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형상의 조형물과 장수와 수병들이 싸우는 모습의 조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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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타워 광장에서 본 진도대교.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그 울돌목으로 기관선이 힘차게 오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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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의 왼쪽 바다. 작은 섬들과 멀리 육지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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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 오른쪽 바다. 거센 조류를 이용하여 조력발전시험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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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타워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명량해전이 벌어진 날을 세겨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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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당시 진법도. 앞에는 장군선이 있고, 뒤로는 12척의 판옥선이 1자로 서있다. 그림에는 없지만 그 뒤로 멀리 어선들이 100여척이 병선처럼 서서 응원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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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군단이 거센 울돌목으로 빨려즐고 있다. 뒤에는 더 많은 군단이 대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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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려드는 왜선들이 울돌목 거센조류속에 싸움은 커녕 도망도 못치고 침몰하고 있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남을 거쳐 새로 설치한 진도대교를 건너면 보배섬이란 이름이 붙은 진도가 나온다.
진도는 그 말뜻이 보배진(珍)자를 쓰고 있는 보배의 섬이다.
섬의 이름처럼 수많은 보배들이 즐비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진도는
임진 정유왜란당시의 이순신장군이 거둔 명량해전의 격전장이 우선 생각이 난다.
그리고 지난해 300여명의 무고한 생명을 싣고 제주로 가다 수장된 세월호가 생각난다.
그런데 진도대교와 팽목항은 진도로 치면 거의 남과 북으로 반대위치에 있으니,
그 거리가 약 40km나 되는 먼 거리이다.
울돌목(鳴梁)은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해협에 있다.
이곳은 물살의 흐름이 바뀌고 거세졌다가 잠잠해졌다가,
다시 물길이 바뀌기를 하루에 2차례씩 반복하는 천혜의 요새다.
이순신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를 가장 적절히 활용하여,
원균삼도수군통제사가 해전에서 패하여 괴멸했던 조선 수군을 다시 세운 전투였다.
이 때 모든 장수들과 백성들 그리고 조정의 임금까지도 전투할 선박도 없는 상태에서
바다에서는 더이상 싸우지 말고 차라리 육군으로 싸우라 할정도로
참담한 패배의식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러나 오직 이순신장군만이 그래도 저에게는 12척의 전함이 있다며 전투준비를 했고,
그 준비가 그대로 들어맞아 승리했던 명량대첩이었다.
살고자 도망치는 자 죽을 것이요,
죽기로 싸우면 살수 있다는 신념으로 싸워 이긴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였다.
하지만, 이런 참혹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바다는 말이 없지만,
역사와 문화를 찾는 여행자는 당시의 상황을 상상한다.
이때 절망적 현실속에 희망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었던 이순신장군과
그를 따르던 장수들과 왜란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고기잡이 배를 선뜻 이순신장군을 응원하는 호위선으로 내주어
전함들의 뒤에서 마치 후방주력선처럼 위장한 어민들이 있었다.
이런 군민이 합심했던 당시 백성들을 생각하니 진실한 지도자와
그에 호응하는 백성들이 함께 한다면 아무리 절망감이 드는 위기라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믿음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은 1597년 9월 16일 이었다. 한가위가 지난지 1달이 되었다.
이제 쌀쌀한 바람이 불어닥치는 가을이라 바닷물은 차가워지고,
지난 패전의 아픔은 컷지만,
적이 코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이런 회상에 잠겨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수백척의 적선들이 바로 앞 진도의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벽파진은 울돌목과는 불과 4~5km의 거리에 있는 진도의 작은 항구다.
그러니 이들이 언제 들이닥쳐
그나마 남은 12척의 조선 함대를 몰아칠지 알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을 당하면서 건조했던 수백척의 조선함대는
칠천량해전에서 무참히 유인되어
통제사 원균과 수만은 역전의 장수들과 군졸들이 대부분 바다속에 수장되었고,
이제 겨우 남은 판옥선들도 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고 항복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거대한 함선을 이끌고 바로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왜장에게 항복하고
차라리 일본의 장수가 되는 것이 어쩌면 쉽게 사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모함에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지만 포기하지도 배반하지도 않았고,
절망의 위기를 또다른 기회로 만들었다.
그것은 전공으로 입신영달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공도 몰라주는 조선의 임금을 위해서도 아니었으며 오직 자신을 의지하는 조선 백성들과,
수천년 동안 선조들이 가꾸어 왔던 조선민족의 나라를
왜적에게 내주고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사명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명량해전이 있은지 300년 후에 조선말이 되자
조선의 봉록을 받아서 잘 살던 대신들 중에는 보다 더 잘살고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물려주기 위해서
앞장서서 나라의 주권을 팔아서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되었던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 인물 5인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그런 도둑놈들도 자신들이 무슨 큰 애국이라도 하는 듯
백성들 앞에서는 국가백년대계를 외치며 설치고 다녔고,
일본 왕에게는 머리를 조아린 댓가로 후작 백작의 작위도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댓가로 조선의 산천을 소유하고,
그때 받은 산천의 임야와 전답으로 자식들을 공부시켜 지금 한국의 주류사회의 주인공으로 키워냈다.
그러니 청산하지 못하는 일제잔재가 아니라
청산할 수 없는 일제의 후예들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기 보다 그의 공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에 전쟁이 그대로 끝난 후 이순신을 어찌할 것인지 두려움과 고뇌속에 살았다.
만약 장군이 살아있게 된다면 그를 따르던 군사만 되돌려 한양으로 온다면
자신의 왕위는 누구도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말없이 흐르는 명량앞바다의 조류는 하루에 2번씩 그 물길이 바뀐다.
그 물길의 방향이 흐르는 방향과 정 반대로 바뀌기 전에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여
건너편에서 보면 진도대교와 진도타워가 깨끗한 거울에 비치는 듯 반영이 뚜렸하다.
하지만, 조수의 물길이 바뀌기 시작하면 협곡의 센 물길이 요동치고,
가장자리에서는 물이 빙빙돌면서 회오리치는 것이다.
그런 명량해협을 너무도 쉽게 불과 1분도 안되는 시간에 자동차를 타고 건너서
진도타워가 설치된 곳으로 올라가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것은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비록 아름답게 펼쳐진 지금의 울돌목과 전라우수영의 산천이지만
그 사연을 아는자는 그냥 경치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내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 절박한 시간을 외면하면 나 또한 역사의 죄인이 되는 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