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69]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金顯承 1913~1975)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그림=이철원
마지막 두 행의 여운이 길다. 아버지의 ‘때’ 혹은 ‘죄’는 어린 자식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로 씻김을 받는다니. 어느 아버지인들 때가 없으랴. 분단된 조국, 격동의 현대사를 ‘아버지’로 살며 처자식을 부양하느라 밖에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굴욕과 수모를 감내했는지 자식들은 모른다. 아버지가 홀로 흘린 눈물을 우리들은 모른다. 나중은 없다. 지금 부모님에게 잘하시라.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가을의 기도’)라는 명구를 남기고 플라타너스를 사랑했던 시인. 일제 말기에 타협을 거부하고 십여 년간 침묵을 지켰던, 영웅이 되려고 몸을 던지지는 않았으나 양심을 지키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신 김현승 선생님. 그 깨끗하고 겸허한 모국어로 새긴 시들이 오래오래 겨레의 마음에 살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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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시 원문)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金顯承 1913~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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