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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예배에 대한 개선안
제 1 장 서 론(序論)
제 1 절 연구동기(硏究動機)와 목적(目的)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예배를 통해서 자유의지에 의한 이성이 있는 인간과 교제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 목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도리(道理)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각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찬양하고 예배하면서 역동적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인도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승모하기 위함이다.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부었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며, 일상의 생활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께 하듯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2)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예배를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나, 은혜를 받거나, 평안함을 얻는 것만을 예배의 목적으로 삼는 것을 본다. 오늘날 예배자들의 목적이 되어 버린 이러한 것들은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위하여 숭배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思考)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예배를 통하여 무엇인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복적인 신앙에서 나왔다. 또한 이런 상태의 예배정신은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인가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인간의 본질과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참된 자세가 예배를 통해서 나타나야 할 것인데, 예배자는 자기중심적인 이러한 마음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해야 한다.
예배는 “최상의 존재”인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경의와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서 인간은 당연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을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3)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서는 사람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순서나 시간들이 조정되어지고,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기쁨과 행복만을 추구함으로서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형식이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가 관건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준은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말씀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다는 뜻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일부의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뜻에 맞도록 조정하거나 잘못 해석하여 사람의 뜻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으며, 성도들에게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고, 또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생각이지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7장 42~43절에서는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심으로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에 어떤 예배도 드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참조: 암5:25~26). 이렇듯 자기중심적인 예배나 사람중심적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뿐더러 그것을 가증하게 생각하신다.
예배자로서 서게 된 성도들은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이든지 여러 지체들이 모여서 하나가 된 교회로서 드리는 예배이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올바른가를 살펴야 할 것이며 단 한 번을 드릴 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서 예배자로서의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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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W. Tozer., 이용복 역, [성령님], (서울: 규장, 2006.) P.70
2)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15
3) John MacArthur., 한화룡 역, [참된 예배], (서울: 두란노서원 2005.) P.7
제 2 절 연구(硏究) 방법(方法) 과 연구 범위(範圍)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지극히 당연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성경 중심적인 연구를 통하여 예배의 정의와 예배의 기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찾아내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적용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만족이 되고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사람의 사람됨을 인정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진정한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용서와 힘이 나타난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은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로 인하여 비 신도들도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4)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목사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됨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회중은 시청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실정이다. 이렇게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듣고 지켜보는 것으로 끝나는 인간 중심적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되며, 드라마의 한 프로그램처럼 예배의 진행자가 따로 있고, 그것을 시청하는 자가 따로 있는 그런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배의 심오한 체험이다. 우리는 예배의 단순한 관찰자로서 멈추지 말고 오감(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고)과 움직임을 사용하면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5)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드리는 것이 바른 예배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인지에 대하여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구의 동기가 되며 또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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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16
5) Robert E. Webber., 황인걸 역, [살아 있는 예배], (포항: 예본 출판사, 2006.) P.21
제 2 장 예배의 기원 및 역사
제 1 절 인류 최초의 예배
인류 최초의 예배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교제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보다 더 아름답고 완전한 예배는 인류 역사상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완전한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야 회복되어져 완성 될 것이다. 최초의 예배는 아담이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가 숨쉬고 살아있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순전하고 살아있는 예배였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대화가 단절 되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의 역사를 이룩하셨다.6)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예배를 받으시기 이전에도 천사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셨다(참조: 느9:6, 욥38:4~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드려지는 이성이 있는 자발적인 예배를 받기 원하셨고, 문화적, 예술적요소와 같이 인간의 최선의 것들이 표출되는 창조적인 예배를 받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창조의 능력을 주셔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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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16
제 2 절 인류에 죄가 들어온 뒤의 예배
인류 최초의 예배인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 아담과의 교제로 이루 어진 아름다운 예배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변질됨으로서 예배가 단절 되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자로 만든 사람에게 죄가 들어와 정상적인 상태에서 그들과 어떤 만남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자로 만든 사람들에게 다시 다른 형태의 예배를 제시하시고, 인류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은 인류의 죄 값에 대한 피의 제사이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다시 이루기 위해서는 생명을 드리는 피의 제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아담에게 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서 피의 제사를 통해 그의 죄를 가려주는 은혜로서의 제사법을 제시하셨다. 그로 인하여 인류에게는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만나 교재를 이루는 것이 다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르쳐주신 예배의 방법에 따라서 하나님께 제사하도록 하셨는데,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열납되어지는 예배와 그 반대로 열납되지 않는 예배를 그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믿음과 순종으로 드려진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아오셨으며, 이러한 예배의 방법이 후에 모세를 통해 성문화 되었고 이스라엘을 통해 그 맥을 잇게 되었다.
제 3 절 족장 시대의 예배
족장시대의 예배는 주로 개인 제단과 가정 제단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예배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이고 창세기 8:20~21에서 노아가 드린 제사가 족장시대의 최초의 예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제사가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을 홍수에 의한 세상 심판에서 구원하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만큼의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부르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준비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참예 할 수가 있었다.
창12:1~8, 22:1~7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 그리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시는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감사의 예배로서 여기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드려지는 예배와 그 예배를 통해서 복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의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의 경배로 나타나는 예배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
이렇듯 족장시대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교통 가운데에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피 흘림의 희생의 재물이 전제되고, 예배의 중심이었다(예수님의 중심 예배의 예표). 예배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전제되면서, 제사행위는 곧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7)
제 4 절 성막 예배
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재정하신 언약의 축복과 선포로 구성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고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으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전달되어 짐으로서 율법시대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이 율법 시대의 예배는 규정된 예배로서 성전에서만 드려야 했고, 대리적이며 위탁적이었다. 또한 의식적이었으며, 상징적이며 모형적인 예배였다.8)
계명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한분, 즉 여호와 하나님이므로 다른 어떠한 사상과 문화도 개입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예배해야 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이런 사상을 전수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율법시대에 있어서도 족장시대처럼 가족단위의 예배가 계속하여 존속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예배의 장소로서 지정하신 성막을 중심으로 공적인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9)
이 때에도 예배의 근본정신은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과 순종이며, 이렇게 드려진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흠향하시고, 열납하시며, 예배자들에게 복을 주셨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제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으셨을 뿐 더러 그들에게는 징계가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결과에서 온 것이거나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위한 예배, 또는 인간의 교만에서 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결국 하나님을 멸시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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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최운산.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 본 예배학], (고양: 진리총회신학교, 2005.) P.10
8)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35
9) 최운산.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 본 예배학], (고양: 진리총회신학교, 2005.) P.10
제 5 절 성전 예배
모세로부터 이어져 오던 성막 예배가 솔로몬 왕 때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됨으로서(왕상6:1~8) 성전예배가 시작 되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속죄하는 희생제사와 같은 제물을 통한 제사였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렸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배자 스스로의 소원을 드렸는데, 성전제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악기를 사용하고 레위인들 가운데 구별하여 찬양대를 두어 노래와 시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 성전 예배의 근본정신은 성막예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과 순종이다. 성막예배와 다른 것이 있다면 성가대와 악기를 동원한 찬양의 예배를 드렸다는 것과 예루살렘이라는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성지화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지에 살게 되었어도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했고 기도를 할 때도 예루살렘 성전 쪽을 향해서 기도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공적 예배는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어 회당 예배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안식일 마다 회당에 모여 공적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의 일반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10)
① 쉐마(Shema) 낭독[신6:4,9; 11:13~21; 민15:37,41등 3곳에 있는 성구들을 합하여 만든 것]
② 기도[제 18의 축복기도(Shemone Esre)와 축도의 전부 또는 일부], 이때 회중은 기립하고(마6:5) 각 축복 기도가 있은 후에 아멘이라 제창 했다.
③ 율법의 낭독(행15:21)[감사의 기도로서 낭독을 시작하고 기도로 낭독을 마쳤다.]
④ 구약의 예언서를 낭독하였다(행13:15).
⑤ 강해와 권면(행13:15~16; 눅4:16~22)
⑥ 축도: 제사장이 있는 회당에서는 축도를 하였고, 축도가 끝나면 회중들은 아멘으로 폐회하였다.
⑦ 찬미가 예배의 일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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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37
제 6 절 예수님시대의 예배
예배는 오랫동안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말의 교회 행사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예배의 방법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어디에서 누구의 것을 예배해야 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11)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사람들과 더불어 예배를 드렸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복종으로 일관하셨다(빌2:6~7). 그는 기도 하셨고(막1:35), 가르치셨으며(막1:39; 눅21:57), 설교 하셨고(막1:38), 세례를 받으셨으며(막1:9), 자신을 주셨다(막12:17). 그분은 유혹을 이기셨고(눅4:8), 금식하셨으며(마4:2), 아버지께 순종하셨고(히12:2), 성경도 읽으시고 인용도 하셨다(마21:42; 22:37). 그분은 노래 하셨고, 아버지를 찬양 하셨으며(마26:30; 마11:25; 요12:28)), 매일 예배를 드렸다(막14:49).12)
즉 그분은 삶은 예배 자체였다(마26:39).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예배는 회당에서 거행됨과 동시에 성전에서도 예배를 드렸는데, 예수님은 성전에서의 가르침과 회당에서의 안식일 예배에 출석하셨으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스라엘의 예배를 인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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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25
제 7 절 초대교회의 예배
(1) 예배의 요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계기로 구약시대에 드려지던 예배의 형식이 변하게 되었는데, 짐승을 죽여서 피로서 드려지던 예배의 형식이 예수님의 피로 대체되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진정한 의미의 산 예배로서 완성되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예배의 중심은 예수님이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마26:26~29, 고전11:22~29),과 세례식(마28:19~20)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정 되었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임재 하셔서 그의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그의 백성은 예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면에서 구약의 예배 정신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예배의 정확한 순서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예배의 요소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알려졌는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마음을 주께 노래하였으며(엡5:8~21, 골3:16), 성경의 낭독(눅4:16)과 기도(행2:42), 그리고 설교(행2:40)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성도들은 아멘으로 인도자가 한 말에 찬의를 표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권면은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였으며(히10:24~26),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으며(막12:42), 송영(빌1:2)과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딤전6:12)하였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세례와 성찬 예식이 포함되었다(마28:18~20, 행2:38~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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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Ibid, P.91
13) 최운산.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 본 예배학], (고양: 진리총회신학교, 2005.) P.24
(2) 예배의 본질
초대 교회의 모든 예배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심으로, 언제나 그분만을 찬양하고 설교하며 기념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또한 공동체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실재를 타나내는 가운데 사실상 예배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따. 세상을 향하여는 개방된 열린 예배를 추구하여 세리나 창기처럼 버려진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모두에게 열려진 예배였다. 그리고 종말론적 신앙을 사모하는 예배로 현세에 받아들인 구원과 믿는 자들과 지상에서의 교제에 대한 감사로서 드려졌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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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Ibid, P.50
(3) 예배의 원리
예배는 인간들이 계획하고 목적을 정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예정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출발은 하나님이 인간을 죄의 상태에서 구속하시려는 주권적 구속 사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예배는 계시와 응답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계시를 먼저 주시고 인간은 예배로 응답한다. 그런데 참된 예배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15)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완전한 사랑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사랑 속에 거할 때 평안을 느끼도록 만드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예배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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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24
16)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57
제 8 절 로마교회의 예배
313년 로마제국의 통치자 콘스탄틴(Konstantin)과 리키니우스는 동맹을 맺고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을 공포함으로서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자유가 보장 되었다. 밀란의 칙령이 공포되기 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에서 성찬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드렸으나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성찬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의식과 형식에 치중하는 예배로 변질되었다.
종교의 자유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급성장하게 되었으나, 그로인해 교권이 강화되자 교회가 부패하게 되어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정통성을 기독교가 이어가게 되었다. 이렇듯 시대를 불문하고 형식과 외형에 치중하는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과 중심을 다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요4:24)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하는 마음에 따른 경건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 9 절 종교개혁 이후의 예배
중세로마 카톨릭 교회가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미사 중심으로 성례화하여 이끌었던 것을 반박하여 루터는 비 성례화를 위해 설교를 제정하였고, 자국어로 예배를 진행함과 참여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직접 찬양하고 성찬의 잔을 나누는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성만찬의 신학적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는 다른 개혁자들과 성찬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후에 칼빈은 성령의 임재 설을 강조하게 되어 성찬신학을 세우게 됨으로서 루터의 땅 독일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칼빈의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생겨나게 되었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의 예배 순서는 개회의 선언 다음에 참회의 기도와 사면의 선포 그리고 회중의 시편 찬송과 중보의 기도 그리고 회중의 시편 찬송과 주기도문 그리고 설교 전에 설교자의 자유로운 기도와 설교, 그리고 설교 후의 기도와 주기도문의 석의와 회중의 시편 찬송과 아론의 축복 서원(민6:24~26)으로 되어있고 성찬의 순서는 설교 후 목회의 기도가 끝나면서 노래로 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시작되는데 그 사이에 집례 자가 빵과 잔을 식탁 위에 준비하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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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최운산.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 본 예배학], (고양: 진리총회신학교, 2005.) P.74
제 10 절 현대의 예배18)
18세기에는 교회의 예배 제도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교회는 새로운 각성 운동이 일어나서 형식적이고 전통적인 예배 의식보다 영적 부흥 운동에 주력하는 등 예배의 참다운 특질을 추구하였다. 영국 교회에서는 아침 예배가 교회의 대중 예배로서 성찬식과 성찬 전 예배의 양자를 대신하여 행세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다른 교회 단체들의 예배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1) 현대 예전 운동19)
예배 의식의 혼란, 쇠퇴, 무질서 등이 극에 달하였던 근세 시대를 지나 현대에 와서는 예배 의식에 대한 연구와 의식에 대한 갱신 운동이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의 예배는 교회의 내적 생명에 가장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세상에 유행되는 신학적 격동과 건축, 예술, 음악의 널리 유행하는 양식은 예배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교회가 그 예배에서 신학과 윤리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신학과 윤리는 자신들을 예배와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예전 운동은 초대 교회의 모형을 회복시키는 가운데서 성경적 근거와 기독교 전통을 배경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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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58
19) Ibid, P.59
(2) 현대 한국교회의 예배20)
① 저녁 예배
초대 교회가 탄생하기 전에 제정된 주님의 만찬도 전통적으로 밤에 지켜졌으며, 그것은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와도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밤에 여러 가지 종교적 행사를 실행한 이유는 당시에 낮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위험하였고, 그것은 생명을 건 믿음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는 반문화적, 반사회적 활동으로 오인되어 박해와 멸시를 받으면서 신앙을 지키는 가운데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313년)한 이후에 와서 주일은 거룩한 날(Holiday)이 되었으며 주일 저녁에 모여든 것은 복음적인 분파들을 제외하고는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초기 미국 교회사에서도 청교도들은 주일 아침과 주일 저녁에 각기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근대에 와서 주일 저녁 예배가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8C', 19C', 심지어 20C'에 들어와서 까지도 부흥 운동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밤 집회가 열렸다. 그런데 1930년대 와서 저녁 예배 참석률이 저조해 지기 시작했고, 오늘날과 같이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안방에서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저녁예배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 부흥과 성장은 열심히 모여 예배드리며 성경공부와 기도에 힘쓰고 나가서 전도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기독교 전반에 있어서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요즘 도시 교회의 70% 이상이 저녁 예배대신 오후 2시~3시 예배들 드리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 한국 교회 예배에 어떤 변화가 닥쳐올지, 문제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② 수요 저녁 예배
수요 예배는 한국 초대 교회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한국 교회가 수요 예배를 시작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사모한 한국 초대교인들의 신앙적인 열정이 그 동기이다. 이렇게 좋은 전통과 좋은 믿음은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 교회에서는 수요일 예배를 부담스러워하는 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1995년도 예장총회가 대구 동부 교회당에서 회집되었을 때 모 총대가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였지만 수요일예배 폐지를 주장한 발언이 있었다. 우리가 시간에 쫓기고 영 육간에 고달파도 영적으로 새 힘을 충전하기 위해서는 수요일에도 하나님께 나와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감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③ 금요일 저녁 철야 기도회
한국 교회는 금요일 구역예배를 계속하면서 한 가정씩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려왔는데, 1960년대의 사회적 혼란기에 영적 기갈과 때를 같이 하여 영성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순복교회운동). 서울 창신 교회에서 시작한 금요일 밤 11시에서 익일 새벽 5시까지의 철야기도회가 현제 전국의 교회로 확산되었는데, 우리는 예배와 기도회를 혼돈하여 신비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④ 새벽 예배
새벽 기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상 33년 생활에서(공생애) 모범을 보여 주신 것으로 한국 교회는 철저히 새벽시간을 하나님께 먼저 바치는 신앙으로 훈련되어왔다.
⑤ 구역 예배
한국 교회의 구역 예배 제도는 성도의 교제와 신앙적인 연합과 협력의 훈련을 위한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의 세심한 기획과 지도,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구역 예배의 인도자가 직접 훈련을 받고 인도하지 않고 준비 없이 아무나 예배를 집례나 인도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폐단은 예배 후의 친목 활동에서 잘못될 경우 남의 집 이야기, 비판적인 언사, 그리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목회자, 중직 자들을 향한 비판적인 말들이 모임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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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Ibid, P.61
제 3 장 예배의 정의
제 1 절 예배란?
(1) 경험(체험)하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예배의 정의를 한마디로 내리기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졌으니 사람이 실제로 말 못할 경험이로다.”(고후12:3~4)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배가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며, 예배의 경험 가운데는 남에게 전달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배의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 있는 반면에, 사람들이 함께 예배드릴 때 영혼의 통일과 이해의 통일을 맛보는 공통적이고도 대중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록 예배의 뜻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존엄성과 거룩성, 그리고 경외심을 엄격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하나, 예배에 대한 깊은 분석과 이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예배 경험을 더욱 뜻 깊게 할 것이며, 예배를 의미 있게 드릴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21)
(2)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다.
예배는 택함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 최대의 예의를 갖춘 경배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도리라고 정의 할 수가 있다.22)
또한 하나님과 택함 받은 인간과의 교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예배의 형태에는 택함 받은 성도들이 삶 속에서 드리는 생활의 예배가 있고, 공적인 목적을 가지고 각 지체들이 모여서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주일 예배는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들의 희생이 있는 예배라고 할 수가 있다.
(3) 인격적, 상호적 만남이다.
구약시대에 성소는 제사장들이 예배 의식을 집행하게끔 구별되어 있었던데 반해 지성소는 대제사장 한 사람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장소였으며, 그나마 일년에 단 하루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이미 천상의 성전에 봉헌했으므로(히9:23~28),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그분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지성소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제사장들조차도 접근할 수 없게끔 휘장이 쳐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의 온전한 접근이 허용되었다(히4:16). 장막을 통해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당시에도 그를 찾는 이들에게 제약이 있었지만 인격적 만남을 허락하셨다.(출33:11)23)
그러나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예배했던 행위를 너무 긴밀히 연관시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양자 사이에는 심오하고도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24)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도가 온전히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지만, 그 상태가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드리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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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Ibid, P.14
22) T. W. Tozer., 이용복 역,[예배인가? 쇼인가?], (서울: 도서출판규장 2005.)P.25
23) Craig S. Keener., 정옥배 외, 역, [성경 배경 주석(신약)], (서울: IVP 2006.) P.776
24) John H. Walton ., 정옥배 외, 역, [성경 배경 주석(구약)], (서울: IVP, 2006.) P.1055
25) John MacArthur., 한화룡 역, [참된 예배], (서울: 두란노서원, 2005.) P.28
제 2 절 예배에 관련된 용어26)
(1) 샤하(Shachah)
경외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부복하는 것을 의미(출4:31)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2) 할렐(Hallel)[헬=알렐]
“자랑스럽게 여기다” “찬양하다” “경축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160번 정도 발견되어진다(시편113~118).
(3) 야다(Yadah)
“감사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이 단어의 어근은 “손을 뻗다.”이며 그것은 손을 들고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창29:35).
(4) 토다(Todah)
“감사하다”라는 뜻으로 이 단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사의 찬양
을 부르는 배경에서 사용되어졌다(시42:4).
(5) 테힐라(Tehillah)
찬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을 특별히 찬양하는 노래로서 시편의 히브리어 타이틀이기도 한 테힐림은 하나님의 행적과 그 성품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신10:21)
(6) 바라크(Barak)
“송축한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말하며 찬양하는 표현이다(창14:20).
(7) 자마르(Zamar)
문자적으로 하프나 수금의 “현을 켜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화음과 악기 반주를 수반하여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시108:1~2).
(8) 샤바흐(Shabach)
“축하하다” “칭찬하다”라는 뜻으로 승리를 경축하고, 영광을 돌리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암시한다(시117:1).
(9) 사마흐(Samach)
“즐거워하다” “기뻐하다”라는 뜻으로 육체적 행동으로 표출하는 자발 적인 기쁨에 의한 노래와 춤과 악기 연주로 즉흥적 감정의 표현을 의미한다.
(10) 시스(Siys)
“밝다” “환희를 느끼며 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로 향한 기쁨에 의한 감정의 표출이다(시40:16).
(11) 길(Giyl)
“기뻐하다”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다”라는 뜻으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여호와께 찬양의 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말한다(합3:18).
(12) 루아(Ruah)
“소리를 지르다”“구호를 외치다”“기쁨의 환성을 울리다”라는 뜻(삿7:18).
(13) 쿠아라(Quara)
“외치다” “선포하다”라는 뜻이다(시40:9).
(14) 프로스퀴네오(Proskyneo)
예배를 나타내는 매우 흔한 신약의 단어로서 앞으로 나아가 입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친밀감과 동경을 표현하는 내적인 마음의 자세이다.(요4:24, 마2;2, 눅4:8, 계4;10, 22:9)
(15) 세보마이(Sebomai)
존경과 두려움 때문에 신들로부터 물러선다는 개념으로 하나님 앞에서 존경과 경외의 감정을 강조한다(행18:7).
(16) 라트류오(Latreuo)
“예배하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빌립보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다(빌3:3, 롬9:4, 히9:1,6, 롬12:1).
(17) 카이라(Chaira)
“기뻐하다”라는 뜻으로 잔치의 기쁨을 암시하고 있다(마5:12, 눅1:14, 빌1:4, 2:28~29, 3:1, 4:10).
(18) 아가일로(Agaillo)
“크게 기뻐하다” “기뻐 날뛰다” “정신적으로 고양시키다”라는 뜻으로 이 기쁨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진다(행16:34, 눅1:47, 벧전1:8).
(19) 호산나(Hosanna)27)
히브리 단어의 그리스식 음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유대인의 초막절에서 관습적으로 쓰였으며 환영과 숭배의 외침이다.(마21:9)
(20) 아멘(Amen)28)
“그렇게 되도록 하라”는 뜻으로 “믿다”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관련이 있으며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의 표현이다.[참조: 민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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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Dave Fellingham., 홍원팔 역, [온전한 예배], (서울: 비젼북, 2005.) P.116
27)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80
28) Ibid, P.80
제 3 절 예배라는 단어의 성경적 의미29)
①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창22:1,2; 롬10:17)
②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창22:3; 히11:7)
③ 하나님께 값진 선물을 바치는 일도 포함된다.(창22:4; 삼하24:24; 히13:15)
④ 예배는 성별의 결단을 요구한다.(창22:5; 히10:21,22)
⑤ 예배는 철저한 자기부인을 요구한다.(빌3:3; 마3:17, 17:5)
⑥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창22:16~18; 시50:23)
⑦ 예배는 예배자에 대한 축복으로 끝난다.(창22:16~18; 창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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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Alfred P. Gibbs., 정병은 역,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고양: 전 도 출판사, 2000.) P.19
제 4 장 예배의 방법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예배에 솔선하셨다. 존재의 근거로서의 그는 생명의 원천이시고 보존자이시다. 하나님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난다. 또한 그는 예배에 합당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임하시고, 사람에게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애정 어린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3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공적 중보자로서 예배에 임재하시는 예배의 완성자이 시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 필요한 규정은 다양한 문화와 상황에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예배의 방법 중에 자신에게 적당한 예배 원칙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다양하듯 예배도 일률적이거나 획일적으로 똑같은 예배를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문화를 인정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민족성이라든지 그들의 습성에서 예술적 표현이나 감성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어 예배할 수 있게 하셨고, 창조의 능력을 주셔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창조적인 능력으로 연구하고 개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하나님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며, 이러한 형태로 드려지는 예배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배격해서는 안 된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긍국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한 그러한 예배를 드리자는 것은 아니며,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개인 개인에게 받으시고자 하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세겜에서 드린 예배 보다는 벧엘에서 드리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배를 지혜롭게 인도하는 것이 공중 예배에 필수적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은 항상 준행되지 못해왔다. 그런데 오순절 예배에서는 최소한의 질서와 최대한의 자유를 가지고 능력 있는 이적을 행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정도의 형식을 인정하시고 사용하셨던 것처럼, 형식과 자유는 참된 예배를 돕는데 서로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자발성 없는 질서는 활기가 없고, 생명이 없다. 또한 질서 없는 자발성은 주관적이고 파격적인 것이 된다. 방임과 의식, 자유와 전통, 자발성과 질서 이런 것들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 형식과 자유, 전통과 자유는 항상 창조적이고 적응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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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70
31) Ibid, P.79
제 1 절 은사적 예배
성경의 시편 말씀은 가르침과 더불어 유대인의 예배에 정규적으로 포함이 되었으며, 계시나 방언이나 통역은 특별히 기독교적 예배의 모습이었다. 이런 은사 중심적인 예배(charismatic worship),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영감 받는 예배는 구약 선지자들의 공동체에서도 드려졌다(삼상10:5; 참고: 왕하3:15). 후에 성전에서의 예배로 전환되면서(대상25:1~5), 이러한 예배는 시편에 나오는 많은 시를 만들어 냈다. 비록 방언으로 드리는 예배가 구약에서 실시되지는 않았다 해도,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은사적인 예배는 존재했던 것이다.32)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은사적, 예언적 예배에 대한 구약의 본문(특히 삼상10:5; 대상25:1~6)뿐만 아니라 고대 유대교에서 흔히 성령을 예언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셨을 것이다. 예언적 성령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믿음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고대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미래의 때는 미래뿐 아니라 현재도 포함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재 삶에서 미래 세계의 특성을 맛볼 수 있도록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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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Craig S. Keener., 정옥배 외, 역, [성경 배경 주석(신약)], (서울: IVP 2006.) P.559
33) Ibid, P.315
제 2 절 공적 예배
공적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로서 형식을 갖춘 하나의 형태로써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며(요4:23), 온 정성과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하고 자신을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예배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를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만이 참 예배라고 할 수 없으며, 전신(全身)을 다하고 전력을 다해서 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드려지는 희생과 그의 부활에 참예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예배, 즉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자신의 정욕과 세상의 관습에 따라 살던 모습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을 죽이는 희생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장차 있게 될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며 거듭난 성도로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자세는 기쁨과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즐거움으로 드려야 한다.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죽은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서 드려지는 살아있는 예배이기 때문에 마음과 뜻을 다하되 자신의 전체로서 드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서는 사람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순서나 시간들을 조정하고, 사람들의 즐거움과 기쁨이나 행복만을 추구 하는데, 이런 예배는 본질을 잃어버린 예배이다.34)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사람들의 합창이며 말로써 시인하고 행동함으로 실천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드려져야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법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다는 것이다.(시편 50:23) 그리고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먼저는 철저한 회계와 형제간의 화해를 이루고 예배에 임해야 할 것이며, 모든 봉사와 헌신 헌물과 정성으로 드려지며, 기도와 찬양으로 드려지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 행실로 나타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내제되어 있는 것이 예배이다. 고통스러운 마음이나 억지로 매여서 드리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헌신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드려지는 모든 헌신과 감사,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 예배이며,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엄위하신 하나님을 뵐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분을 찬송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즐거워 찬송하며 춤을 추며 즐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다.
우리의 모든 것(죄 짐과 삶 속에서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과 만나는 시간으로 참 편안과 안식된 상태로의 몰입이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재이다. 또한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의 나를 가식과 모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어린 아이가 그 부모를 의지하듯 순수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순간들로서 세상과 단절된 한 시간으로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여서는 안 되는데, 언제나 하나님을 하나님 인정하고 그에 따른 예후를 해야 한다는 것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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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John MacArthur., 한화룡 역, [참된 예배], (서울: 두란노서원, 2005.) P.6
(1) 예배 전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또는 교제, 그리고 공적인 만남과 교제는 성도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모두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고자 하시고 그들을 만나고자 하시며 그들과의 교제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 때문이다. 사실 성도들은 이미 다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무슨 죄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다만 그 죄들을 누르며 절제하며 그것과 싸우며 사는 것뿐이다.
우리가 중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 첫 번째 징조가 바로 회개이다.35)
이제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들은 이미 의로워졌다. 그것은 무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과를 담당해 주셨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죽었고, 또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며,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의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렀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수 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근거로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 가운데 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기 이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성도들의 마땅한 일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면제되었을 지라도 죄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 되어야 하는데, 죄의 법적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랑의 법으로 처리 된다. 구원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죄를 가지고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또한 교재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에 어떤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써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여 그 죄를 예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우리는 정말로 사심 없이(변명이나 죄로부터의 도피가 없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한다. 예배시간 이전에 우리는 반드시 이 일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헌신도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도 없고 자신의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스러울 뿐,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 상달되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를 힙 입지 않은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안식일을 신약에 와서 날의 첫날로 바꿔서 드리게 되었는데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주의 날” 이라고 부르며 성도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이 날에도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예배를 드리기 전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해결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해야 하며(메킨토시) 부지중에 지은 죄까지도 고하고 사유의 은총을 누려야 한다. 그 이유는 예배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며, 성도간의 건전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도 회개는 반드시 해야 할 필요한 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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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D. M. Lloyd Jones., 서문강 역, [로마서강해 4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P.335
(2) 예물과 함께 마음의 중심을 드려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성도가 마음의 중심을 다하고,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정성껏 예물(헌금)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과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이지,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한 조치가 아니다. 이 때에 우리는 힘을 다하여 아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그것은 물론 믿음의 분량과 형편에 따라 해야 하며 매주 계획성 있는 헌물을 드리는 것도 좋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은 우리에게서 가장 좋고 귀한 것들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예물과 예배를 받으시고 성도들에게는 풍성한 은혜와 풍성한 복으로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예배는 희생과 정성을 포함한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이름을 경망되게 부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3) 사람이 예배를 해야 하는 이유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것에 대해 매우 자주 말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수백 번 거듭해서 예배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36)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도 천사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셨으며(사6:1~2),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의 교제를 통해서 예배를 받으셨는데,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유도 천사들의 예배보다 메킨토시의 말처럼 사람들의 이성이 있는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였으며, 구속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도 그들에게 이성이 있는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도 그들에게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에게 계명을 통해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라는 것에서도 잘 나타내주고 있다(출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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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John MacArthur., 한화룡 역, [참된 예배], (서울: 두란노서원, 2005.) P.11
제 3 절 생활의 예배
생활의 예배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로서 이 예배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성령님)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이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행동 하나 하나가 또는 말 한마디까지도 심지어 살아서 숨쉬는 순간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잘 사는 방법은 세상에 없다. 회사의 일을 할 때나,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쉬고 있을 때에도 무릎을 꿇고 기도 할 때와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순간들 모두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순간들이다.37)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재능)대로 충실히 행하는 모든 것이 예배이고, 선행하는 모든 것과 구제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한 방법이다. 일상에서의 예배는 나의 행동과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이 될 수 있다.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는 죄 된 생활이 되든지 양단간에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가 있겠지만 성도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실로 전환되어지고 발전되어 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반면 옛 생활에서 떠나지 못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서도 낙망하여 넘어지거나 뒷걸음질치는 것은 불신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고 그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지 결코 완벽한 신앙을 요구 하시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성도는 완전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또한 끝없는 노력과 인내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성화의 길을 가다가 본향인 천국에 가서야 완전을 이루게 되는데, 완전치 못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들이 반드시 지나야 할 곳으로서, 이곳에서의 삶에 의해 천국에서의 상급이 결정되어 지기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려워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고, 견디며, 그 고통까지도 즐길 수 있는 것이 예배자의 삶이다. 영광이든 비천이든 헌신된 삶과 성화되어가는 삶은 인간으로의 본분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어떠한 삶을 살든지 하나님께 옳다함을 인정받음에 따라 상급이 결정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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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Tom Kraeuter., 이종환 역, [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시지], (고양: 도 서출판 예수전도단, 2006.) P.100
제 4 절 생활 예배와 공적 예배는 연결된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을 보여야 한다. 예배의 시작은 모일 때가 아니라, 사실 일상생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38)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일상의 생활에서도 어떠한 지침은 잘 알고 행함으로서 생활의 예배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만,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는 혼란에 빠져 어떻게 드려야 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가 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어떤 해답도 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를 통해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에 초점을 두고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은혜 받은 성공한 예배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러한 현상적인 것들은 예배 가운데서 나타나는 극히 부분적인 체험적 요소일 뿐이며, 진정한 예배는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함이며,39)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어는 것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음이 분명하지만 확신이 없이 돌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을 만나 주신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거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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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Ibid, P.40
39) T. W. Tozer., 이용복 역,[예배인가? 쇼인가?], (서울: 도서출판규장 2005.) P.37
제 5 절 가정 예배
가정 예배란 기독교 가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렌츠(Lentz)에 의하면 가정 예배란 감사와 찬양으로 그의 선하심을 집합적으로 다시 기억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가족 공동체의 거룩한 대면 또는 만남이라고 했다. 가족 예배에 있어서 모든 식구들은 하나님을 알고 또한 서로를 알고 있으며, 가족 예배는 한 가족이라는 가족적 유대감, 소속감, 일체감에서 시작하여 예배를 통하여 누구의 요구이든지 그들의 도움의 원천이요, 문제의 해결 자가 되시는 하나님께로 전 가족들이 향하게 된다. 또한 가족 단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주장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가정 예배의 효과는 가장 나이 어린 아이들까지도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최고의 가치는 가족 전체가 함께 한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그 심령 속에 더욱 깊이 의식하는데 있다. 무엇보다도 그 가정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의식하게 해주고, 모임을 통해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감사와 찬양 생활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가족 상호간의 유대 강화와 신앙 성장에 도움을 준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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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295
제 5 장 적 용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예배의 능력을 주셨는데,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 공백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보이는 것들로 채우려고 했다.41)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기로 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만족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이룰 수가 없고 그로인해 막연하게만 생각되는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서 내어 보내고 눈에 보이는 것들, 아니면 체험이나 자신의 이지로 생각할 때에 행운을 줄 것만 같은 느낌에 의한 것들, 또는 자연 속에서 위대함이 보이는 것들에게 의존하고 경배함으로서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다스리시며 천상천하에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신(神), 즉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많은 속성들을 지니신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신다고 인정 하고, 인간을 본연의 인간이 되게 하는 예배자로서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주신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대신해서 역사하시며, 나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길 원하셨고, 지금도 예배를 통해서 내 삶이 치료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는 더 이상 외부의 압력이나 율법적인 이유에 인한 의무 사항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기를 열망해 왔던 필수적인 우리의 영적 성장의 중심이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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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Dave Fellingham., 홍원팔 역, [온전한 예배], (서울: 비전북, 2005.) P.60
제 1 절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장소와 시간에 제한받지 않고 삶 속에서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된다. 성도가 늘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성령이 그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해 순종하는 것, 그리고 말 한마디, 노래 한 소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라는 것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예배하게 될 것이다.43)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이다. 자신의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예배 한번으로 족하다고 하는 것은 이전의 삶 속에서 자신의 여가를 즐거움을 위해서 모두 다 사용했던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은 오히려 너무나도 애처롭게 보인다. 우리는 주일날 드리는 단 한번의 축제로는 만족 할 수 없으며 최대한의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아가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야 한다.4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나 힘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의 뜻대로 할 때가 많고, 또한 자기 주변의 소리에만 너무 민감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다.45)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성도가 인간중심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생활을 하는 것과 그 마음의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한 상태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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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Robert E. Webber., 황인걸 역, [살아 있는 예배], (포항: 예본 출판사, 2006.) P.28
43) Dave Fellingham., 홍원팔 역, [온전한 예배], (서울: 비전북, 2005.) P.67
44) D. M. Lloyd Jones., 서문강 역, [로마서강해 7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P.400
45) D. M. Lloyd Jones., 서문강 외 역, [에베소서강해 2권], (서울: 기독교문서선 교회, 2005.) P.576
(1) 감사의 생활
성도는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무한하게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그 결과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성도에게 항상 최선의 것이 되도록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형편이나 처지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께로 향한 삶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어떠한 조건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 삶이 지상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으로 전개 되거나 그런 상황에서 끝나는 인생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상황이 최선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을 뿐이다.
(2) 찬양의 생활
시편은 예배에 대한 구약의 시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구약의 옛 언약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약의 새 언약 안에서도 예배에 영감을 제공해 준다.
시편은 우리에게 노래하고, 춤을 추고, 소리치고,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일어서고 고개를 숙이고, 말하라고 권고하는데, 이렇듯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는 몸을 통해서 표현되어지고 증명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마음속으로만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일지라도 마음속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 또한 받으실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표출은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즐기며 기쁨으로 하는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 있을 때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칠 수 있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찬양할 때 우리의 예배에 새로운 차원을 추가하게 되며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3) 전도의 생활
예배와 전도의 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전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자의지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서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붙는 심정이 되어 세상에 뛰어 들어가 죽어있는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헌신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런 전도가 예배의 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혼을 살리는 사업이 되기 때문이며,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소개하는 모든 것들이 다 예배와 관련이 되어 있으며, 또한 전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이 그 영광에 참예한 사람으로서 본을 보임으로서 생활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먼저 예배자로서 부름을 받은자들은 다른 예배자들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며, 예배자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복들을 그들과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예배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며, 먼저 부름을 받은자들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또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도 추수할 곡식을 만들어 내려면 협력을 필요로 하시는데, 우리를 그 협력자로 부르신 것이며 우리는 그 영광에 참예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택함을 받은 예배자들의 몫이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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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Tommy Tenny., 이상준 역, [하나님의 관점], (서울: 도서출판토기장이, 2006.)
(4) 기도의 생활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인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것은 영혼의 호흡과 같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류를 이룰 수가 있기 때문에 기도가 없는 성도의 삶이란 도무지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죽음과 삶의 양 극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영혼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고,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죽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택함 받은 성도의 기도는 다른 이들의 기도와는 달라야 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하거나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한 기도만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도에는 정도(正道)란 있을 수가 없다. 성도의 신앙에 따라, 성도의 성품에 따라, 받은 은사에 따라 주어진 조건에 따라 너무나도 많은 조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바른 길이라고 제시할 만한 어떠한 것은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 한 사람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할 아무런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것은 마구잡이로 뛰어 들어가 자신의 요구들을 들어달라고 졸라 대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마치 자신의 어떤 필요들을 채워 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한나머지 좌충우돌 하는 식으로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으로 인생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대로 그분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먼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함으로서 온전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또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총을 찬송하며, 그분께 받은바 이제까지 돌보아 주신 모든 은혜와 기도에 응답해 주셨던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에 개인적인 어떠한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아니면 자기의 소원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아뢰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인간 측에서의 응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구제의 생활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특별히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 이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구제와 선행을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신다(마 25:31~46). 그러나 구제와 선행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은 올바른 구제와 선행이 될 수가 없다.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거저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에게 거저 주어야 하며, 어떤 이기적인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받은 은혜가 커서,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생활에서 표출되어야 하며,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행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런 자라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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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John Bunyan,. 여성삼 역, [천로역정], (서울: 북프렌즈, 2005.) P.141
(6) 성화의 삶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반면에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그리고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너무 친숙하여 하나님 앞에서 재롱도 피울 수가 있겠지만 그로 말미암아서 버릇없는 언행이나 너무 경망스러운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존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꼭 닮은 생활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으며, 이제 우리는 없고 온전히 그리스도만 존재하여, 자신이 나타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옛 삶을 잊지 못하여 다시 죄 가운데로 들어가지만 죄가 이전처럼 우리에게 왕 노릇을 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이미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생활을 거듭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는 이전의 죄 된 삶의 기억들을 죽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옛 삶으로 돌아간다고 생각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단에게 속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고 있지만 죄는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법으로 다스려질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거듭난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다시 거듭나야 한다면, 우리의 복되신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수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날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넘어질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서서 다시 출발하면 되는 것이지, 넘어졌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고 생활 속에서 자신의 지위와 자신이 놓인 위치를 알게 될 때 주님이 완성시켜 놓으신 우리의 성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 혹은 연약함으로 저지르는 많은 죄들 때문에 눌리지도 말아야 할 것이며, 그것들을 율법적으로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복되신 주님이 이루신 진리의 자유 안에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숨쉬는 순간들 까지도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데,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그리스도께 드림으로서 삶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강처럼 넘쳐나길 바란다.
(7) 승리의 생활
생활 속에서의 예배이든지 아니면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이든지 모든 예배의 중심은 죄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시며, 그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다고 하는 승리감으로 도취할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세상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이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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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Robert E. Webber., 황인걸 역, [살아 있는 예배], (포항: 예본 출판사, 2006.) P.57
제 2 절 교회 예배
성도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성도는 예수님의 지체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자신의 사역지인 교회로 가서 각 지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온전하게 하나님께 상달 되어 질 수 있도록 각 지체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지도하며, 성도들 각각의 재능과 은사, 그리고 지, 정, 의가 포함된 감정이 표출되어지는 창조적인 예배를 위해서 연구하고 개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외형적인 형식에만 치중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또한 사람의 형편과 사람의 편의, 사람의 어떤 유익만을 위한 예배를 거부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의 의지에 따라 그의 기분을 맞추거나, 회중의 즐거움만을 위하는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성도들에게나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드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특정한 개인의 마음대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드려져야 한다.
(1) 예배자가 지녀야 할 예배태도49)
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참여해야 한다.
②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응답하는 자세여야 한다.
③ 복이나 어떠한 것들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마음이어야 한다.
④ 몸을 청결히 하고 복장을 단정히 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⑤ 온 가족의 참여해야 한다.
⑥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⑦ 찬송, 기도, 고백, 찬양, 말씀, 봉헌의 예배의 모든 순서에 열심 있는 헌신이 필요하다.
⑧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관자시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승리를 기뻐하는 경배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⑨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⑩ 예배 후에 세상의 구원과 화해를 위해 헌신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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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한치호. [애들이 예배에 감동하고 있어요], (서울: 기독교출판 에벤에셀, 2004.) P.26
(2) 회개의 기도와 신앙고백을 드려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므로 예배자는 자신을 성결케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보혈 피로서 정결함을 입고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데, 그것은 회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정직한 회개 기도의 하나는 “주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는 자의 기도일 것이다.50)
실상 회개의 기도는 생활에서 실천이 따르는 행동하는 기도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거듭되어지는 죄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너무나도 많은 자신의 실패로 인하여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자신을 율법으로 가혹하게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우리는 그런 모든 죄들을 이미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의 죄는 율법으로 정죄되어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법으로 통치되며, 사랑의 징계는 있을지라도 결단코 영원한 형벌인 심판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의 기도를 함에 있어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서 모두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며, 이제 우리가 해야 할 회개의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태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없이 자백하고 다시는 그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한
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의 신앙의 고백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라는 말은 곧 “하나님 사랑 합니다”라는 고백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떠한 조건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진정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다시 회개한 자의 삶의 모습이 될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생활 방식과 태도를 버리고 성화된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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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Chris A. Bowater., 정규운 역,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서울: 비전북, 2002.) P.50
51) Ibid, P.51
(3) 전 주(Prelude)
전주는 예배의 부가불이 아니며, 교인들의 자리를 정리하거나 교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전주는 오직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예배 분위기를 조성하며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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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김수학. [개혁주의예배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P.94
(4) 개회찬송
찬송은 구원의 은총 중에 있는 자의 노래인데,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서 화답하라(옙5:19)고 했다. 이때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 된 찬송을 해야 하는데, 개회찬송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능에 초점을 두고 선택하여 경건하고 경외심이 일도록 해야 한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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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Ibid, P.95
(5) 예배의 부름(성구 명상)
예배에의 부름이란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하며,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성서의 낭독, 즉 예배에의 부름이 적절하게 선포되면 예배는 더욱 은혜롭게 진행될 것이며, 예배자들은 예배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54)
(6) 성경봉독
성경 봉독은 처음부터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설교와 관련하여 예배의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설교의 안내문 정도로 사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성경 봉독은 설교보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단지 성경의 설교를 위해서 성경 봉독을 배격하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배를 일개 성직자나 설교자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고 말씀이신 주님께서 그의 사랑과 뜻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생명을 주시려고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성경 봉독만으로 주님이 자동적으로 다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 봉독에 선행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개입이 요구된다. 성령의 개입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말씀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채득할 수 있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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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Ibid, P.96
55) Ibid, P.97
(7) 기 도
기도는 흔히 예배의 혼이라고 불린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가 공중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역사를 통하여 찬양과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께 예배를 드렸다. 공적인 기도의 요소는 감사와 죄의 고백, 그리고 간구의 기도가 따르며 중보의 기도와 헌신의 기도가 필요하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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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Ibid, P.99
(8) 신앙고백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신앙의 전통을 지키게 되며, 같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공동체적 유대감을 느끼게 되고, 교리와 신조를 자각하게 된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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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Ibid, P.104
(9) 설 교
성도들이 느끼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데, 그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임재의 체험을 하는 영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 마음을 타고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성경말씀을 통해서나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서 내게 주어질 때가 많이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서 삶에 적용하여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설교 말씀을 사람의 소리로 듣게 되면 복이 없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말씀이 곧 복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복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심이나 다른 말씀과 비교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되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로 주어져 자신에게 결코 유익이 없고, 복이 없는 것이다.
(10) 찬 송
찬송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노래로 표현하는 음악이다.58)
그래서 찬송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찬송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송과 기도는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을 해야 한다.
찬송의 주인은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으며(사43:21), 십계명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찬송은 하나님 중심으로 올바른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찬양은 목적주의, 이기주의, 감상주의, 기교주의, 장식주의, 무관심주의, 몰입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우상숭배와 같이 역기능적으로 오용될 수 있다.59)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연주하거나 찬송해야 한다. 전심으로 예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도 습관적으로 하거나, 아니면 한 순서의 진행자로서 감각이 무뎌짐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무의식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60)
그리고 찬송은 회중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도 아니고, 자신이 은혜를 받기 위함도 아니며, 자신의 노래 솜씨를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시로서, 예배자의 중심에서부터 나오는 진실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혹은 감사의 표로서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곡조가 있는 찬미의 기도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행적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이야기라고 한다면, 찬송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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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김남수. [최선의 찬양을 최고의 하나님께],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P.21
59) Ibid, P.63
60) Robert E. Webber., 황인걸 역, [살아 있는 예배], (포항: 예본 출판사, 2006.) P.79
61) 김남수. [최선의 찬양을 최고의 하나님께],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P.103
(11) 감사 예물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 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 할지어다”(대상16:29)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자는 당연히 예물도 가지고 가야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표로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대하31:10). 또한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으로,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받으시고 심은데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서 풍성한 복을 내려 주신다.
(12) 축 도
성도들은 흔히 설교 말씀이 끝나면 예배가 끝이 난 것처럼 생각하는데 결단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 예배자들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제 7일에 복을 주셨던 것처럼, 주일날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그 복을 받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목사의 축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축도 도중에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도 있고, 건성으로 아멘으로 화답하고 예배를 마치는 성도들도 있다.
축도는 목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선포되어지는 시간으로서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축도 권자도 예법을 사용하지 않고“있을 지어다”(고후13:13)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시간은 하나님의 복이 선포되어지는 축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예배의 마지막 시간에 베풀어지는 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3) 성도의 교제
성도들은 예배자가 끝나면 각자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한 지체로서 하나 됨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으니, 이제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됨을 확인하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서로를 섬겨야 한다. 성도의 교제란 서로를 돌보는 가운데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부한 자가 가난 자를, 영, 육간에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가운데 각 지체가 균일하고 대등한 위치에 설수 있도록 돌보아 주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질서에 맞게 서로를 존경과 사랑으로서 해야 하며, 교만함으로 하거나, 비굴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한 몸이 된 다는 것을 알고 행해야 한다. 강하거나 약하거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강하면 강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목적에 따라 사용 되어질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나누어 질 수가 없고 온전히 하나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거나 어떤 명목으로든지 나누어져 있다면, 그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고, 병이 들었거나, 기형의 형태로서 있을 수가 없는 상태이다. 만일 그런 상태라면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 된 모습으로
세워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서 아름답고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에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것이다.
제 3 절 올바른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
생활 가운데서 드려지는 각가지 예배와 공적인 예배 전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하고,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격에 따른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예배하는 자의 마음 중심에 흘러 넘쳐야 한다. 그러나 이렇듯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 된 상태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보혈 피가 없이는 예배에 참석하거나 심지어 들어갈 수조차 없다. 아무리 값진 예물과 정성과 헌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빠지면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가 없으며,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 될 수 없다. 구약에는 짐승을 죽여서 내 대신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예배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예수님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심과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께 산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살아나는 체험 가운데 예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말씀을 받고, 그 은혜 가운데서 생활함으로서 생활과 예배가 일치되는 삶으로 가꾸어가야 한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심에 “예”라고 순종함으로 대답하여 행하는 모든 사역, 봉사, 사명, 활동을 시 작할 때 이미 예배는 시작된 것이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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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Tommy Tenny., 이상준 역, [하나님의 관점], (서울: 도서출판토기장이, 2006.) P.171
제 4 절 유기적인(살아서 움직이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다 의미가 있고 유익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 순서가 어떤 형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에 모든 순서에 우리는 유기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모든 대표성들안에 자신이 살아서 숨쉬고,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또한 각 순서를 기계적으로 순환되는 것처럼 지나쳐버리고 어떤 특정한 시간만이 강조된다면 그것은 예배의 전체성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다 중요하다. 찬송, 설교, 기도, 봉헌, 축도....... 모든 순서가 동일하게 중요한 것은 그 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일정한 프로그램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것만이 최고로 중요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 시간을 보조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에 들러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 참여하는 가담자가 되어야 하며, 모든 순서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그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교제하는 가운데 예배를 전체로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제 5 절 하나님께 예배하여 얻는 유익63)
① 장수(신6:2)
② 하나님의 자비와(습2:3) 인도하심(시25:12)
③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시27:4)
④ 기쁨(시16:11)
⑤ 용서(요일1:9)
⑥ 하나님과의 교제(시25:9)
⑦ 양식(마6:3)
⑧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고후12:9)
⑨ 유혹 당할 때의 하나님의 도우심(고전10:13; 유1:24)
⑩ 어려울 때의 희망(롬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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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133
제 6 장 예배의 장애물
성령님의 임재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마치 거울에 반사 되듯이 다시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가 아니면 받지 않으신다.64)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절대자에게 대해서 예배를 한다거나, 스스로 어떠한 존재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일치되지 않는 예배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지만 자신이 옳게 여기는 대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시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옳다고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가 없다.
창세기 2장의 아벨과 가인이 드린 제사가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세겜에서 드린 예배(창33:18~22)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야곱에게 벧엘에 가서 예배를 드릴 것을 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지 않는 예배에 대해서는 예배자의 깨달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어떠한 조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벧엘에서 드린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주셨듯이 자기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드린 예배로 인하여, 그 예배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징계를 받은 아답과 아비후(레10:1~2)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고, 사울도(삼상13:8~14) 또한 그랬으며, 웃사(삼하6:1~9) 또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릇된 태도로 예배하는 자들의 죄를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말1:6~14; 3:13~15; 4:1~6; 암5:21~27; 호6:4~7; 사1:11~20; 막7:6) 그것은 오늘날의 예배자들에게도 적용되어지는 꼭 필요한 말씀이다. 특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수많은 예배가 아무런 소용이 없고 하나님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예배는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며, 사람들이 보기에 좋고, 성대하게 치러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드리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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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A. W. Tozer., 이용복 역, [성령님], (서울: 규장, 2006.) P.71
제 1 절 자아65)
예배는 하나님의 초대로부터 시작하여 예배자의 반응으로 이루어지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예배자의 자아는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하나님의 방법대로 드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 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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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Alfred P. Gibbs., 정병은 역,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고양: 전 도 출판사, 2000.) P.207
제 2 절 세속성66)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다. 또한 세상의 문화나 어떤 창조적인 방식들이 도입되어서도 안 되며,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혼합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문화나 예술적인 것들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런 관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세상에 서 살고 있지만, 그들과 섞여서 그들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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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Ibid, P.208
제 3 절 판단67)
판단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며,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 스스로도 판단하지 않는 다고 한 것은 자신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에 자신을 내어 드린다는 말이다. 또한 부당한 비판으로 인해 상처를 입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고, 판단은 성도의 교제에 악영향을 끼침으로 성도들이 하나 되어 드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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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Ibid, P.211
제 4 절 분파주의68)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각 지체로서 하나인데, 몸이 나누일 수 없듯이 성도들 또한 나누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교회 내에서 나누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몸을 찢는 행위로서 어떠한 경우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위적인 분파로 인해 나누어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배교의 수준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나누임이 있다면, 그 상태로서는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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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Ibid, P.218
제 5 절 용서치 않는 마음69)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을 했거든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나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고(마5:23~24), 또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라고 했으며, 그리고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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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Ibid, P.221
제 6 절 이기심
예배자로 서게 된 우리는 한 지체로서 어떤 이는 강하고 어떤 이는 약한 것이 사실이며, 믿음의 분량이나, 받은 은사가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다 중요하며, 어느 분야에서 어느 일을 맡았든지 그 일에 충성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목적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며, 그 목적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의 판단으로 다른 지체와 비교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함으로서 전체의 예배에 나쁜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제 7 절 우상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게으름, 자만, 산만함 등이 리스트의 상위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욕망, 자기만족, 무관심이 그 다음 순위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들 모두는 훨씬 더 심각하고 우리 삶의 전반에 퍼져 있는 우상숭배라는 쓴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바른 예배의 요소라고 생각하는 찬양, 헌금, 기도, 말씀 듣기 등을 하면서도 마음속의 우상들을 열심히 섬길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신실함과 사랑을 놓고 다른 어떤 것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배자는 언제나 제 1계명인“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명심해야 한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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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Tom Kraeuter., 이종환 역, [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시지], (고양: 도 서출판 예수전도단, 2006.) P.89
제 7 장 결 론
성도는 예배자로 부름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허가받은 사람들에게만 천상의 권위로 주어지는 특권으로서 주어지며,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 외에는 무엇을 하든 임시직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택함 받은 성도들은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71)
그런데 예배는 영적인 자기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과 연결된 전 인격적인 행위들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드려지는 것과 그로 인해서 주어지는 영적인 체험과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내려주는 각가지 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도가 자신에게 있어서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아름다운 교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예배는 어떤 필요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께 심령이 사로잡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72)
성도는 예배자로서 자신이 곧 성전이고, 지체로서의 성전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곧 성도들의 삶의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예배와 삶의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배는 생명선과 같아서 사단이 성도에게서 하나님께로 향한 예배를 멈출 수 있다면 사단은 성도의 인생에서 무엇이든지 손을 댈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성도는 예배 도중에 가끔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에 대하여 과연 그것이 진실 된 감정인지를 시험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시험할 때에는 교회에 있는 동안이 아니라 그 다음날 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감정이라면 성도의 삶 속에서 그것이 실천의 능력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73)
성도는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다른 모든 것들이 회복 된다.74)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되고, 우리의 삶 전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성공한 예배자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 삶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방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맞추어 계속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신학적 지식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예배의 방법과 형식은 앞으로 더욱 빠르게 변할 것이지만 사람들이 이 변화에 저항하지 않고 잘 적응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다양한 예배 형식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 나가야 한다. 예배의 미래는 분명 밝다. 언젠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측하기 힘든 것이 미래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예배를 완전케 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75)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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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Tommy Tenny., 이상준 역, [하나님의 관점], (서울: 도서출판토기장이, 2006.) P.11
72) Alfred P. Gibbs., 정병은 역,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의무” 예배], (고 양: 전도 출판사, 2000.) P.16
73) D. M. Lloyd Jones., 서문강 외 역, [에베소서강해 7권], (서울: 기독교문서선 교회, 2005.) P.257
74) Tommy Tenny., 이상준 역, [하나님의 관점], (서울: 도서출판토기장이, 2006.) P.171
75) Rick Muchow., 도희진 역, [예배의 해답], (서울: 인피니스, 2007.)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