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준호 회원은 경북 안동 출생(1948년)으로 고향 중학교와 검정고시를 거쳐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대 초 서울우유에서 근무하던 중 경기도 산사(山寺)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함께한 박수환 회원의 알선으로 중진공에 영어 전문직으로 입사하여 1998년 명예퇴직을 하고, 정부 해외원조 사업 관련 에콰도르,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산업협력관으로 근무하였다.
대학교 때 기독교에 입문하여 당초 명예퇴직 때 가졌던 목사의 꿈을 이루고자 서울 광장동 소재 장신대학교 신학대학에 지원하였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까지 독실한 신자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고, 대학교 영어전공에 평생을 영문 타임즈 등을 꾸준히 구독하면서 영어를 생활화하여 중진공 재직 중 3급 부장 승진 자격자 영어시험에 96점을 얻어 승진 시험을 기획하고 추진한 당시 인사부 4급으로 미국 메릴랜드대학 4학년 재학 중인 2등(76점)을 상당한 격차로 따 돌리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준호 회원은 본성이 조용하고 타인을 배려와 존중으로 대하였으며 누구보다도 주위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였다. 또한 금전에 대한 욕심도 많지 않았으나 운 좋게도 남은 가족에게는 상당한 유산도 물려줄 것으로 보인다. 이준호 회원에게는 사업을 한 두 형님이 계시었고 그분들의 재산이 자신보다 4~5배 이상 많았어도 본인이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늘 얘기를 하곤 하였다.
조용한 성품은 산업협력관 임기를 마치고 키르기스스탄에 주택까지 매입하여 혼자 거주하였으며, 코로나로 국내에 있을 때는 고향도 아닌 추풍령 근방에 농가주택을 매입하여 홀로 생활한 것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코로나 후유증으로 요양 중일 때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하고 집에서 조용히 독서를 즐겼다.
이준호 회원이 고향 중학교 시절 서로 같은 반에서 1~2등을 겨루던 고향 지역유지 딸이 있었는데, 이준호 회원은 홀로 좋아하면서도 집안의 경제적 격차 등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 흠모하였다고 한다. 우연히 대학교 때 재경 안동 대학생 모임에서 상대 여성을 만나 서로 사귀었는데, 이준호 회원은 상대 여성에 대한 책임감과 집안의 환경 등을 고려하여 사법고시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30세가 될 때까지 사법시험에 실패하여 오로지 상대 여성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마음에도 없는 이별을 얘기하였고, 상대 여성은 체 한달도 되지 않아 고향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20년이 지난 후 고향 모임에서 상대 여성을 만나 그때 당시의 결혼에 대해 물었고, 여성은 너무나 낙담하고 오해한 배신감으로 낙향하여 처음 맞선본 남자와 바로 결혼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준호 회원이 지금 다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상대 여성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였을 까? 인생이란 후회의 연속이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다는 아쉬움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당시에 최선의 선택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 독서 등으로 생각과 사고 폭을 넓히고, 나이 많은 경험자들의 조언이 필요할까? 자신의 일생에서 너무나 중요하고 영향이 클 선택과 결정을 당시의 가볍고 짧은 미 성숙한 생각으로 정한다는 것은 정말 아쉽다고 할 부분이다.
이준호 회원은 기독교를 맞이한 대학생 이후 믿고 있는 하느님의 곁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는 부디 건강하고 편하게 지내시길 바란다. 남은 가족들도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생활에 빨리 복귀하여 행복하시길 기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