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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과 유월절 규례
출 12:37-51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4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 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며
51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출 12:37-51 /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침내 라암셋을 출발하여 숙곳으로 향하였다. 이때 떠난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빼놓고 모두 60만 명쯤 되었다. 38) 그 밖에도 엄청나게 많은 식구들이 따라나섰고 양 떼와 소 떼 등 가축들도 수없이 몰고 나왔다. 39) 그들은 부풀지 않은 반죽으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구웠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나오느라고 다른 음식을 준비할 경황이 없었던 까닭이다. 40) 이스라엘 사람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다. 41) 430년이 끝나던 그날 여호와의 군대는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 42) 이날 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밖으로 이끌어 내시려고 밤새 그들을 지켜 주신 밤이었다. 곧 이날 밤은 여호와께서 거동하시던 밤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대로 이날 밤을 여호와를 생각하는 밤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43) [유월절 규정]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셨다 `유월절 잔치를 벌일 때 지켜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방 사람들은 제물을 함께 먹지 못한다. 44) 다만 돈 주고 사들인 노예가 할례를 받은 뒤라면 그는 함께 먹을 수 있다. 45) 몸붙여 사는 사람과 날품꾼들과는 함께 먹지 못한다. 46)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을 때에는 집안에서만 먹어야 한다. 절대로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된다. 또 뼈를 꺾어서도 안 된다. 47) 이스라엘 공동체는 모두 이것을 꼭 지켜라. 48)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이방인이 있을 경우 그가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 싶어한다면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다음에야 유월절 제물을 드릴 수 있고 본국인과 함께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고서는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함께 먹을 수 없다. 49) 본국인인 너희나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이방인들이나 모두 이 법 앞에 동등하다.' 50)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대로 실천하였다. 곧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대로 따라서 실천하였다. 51) 바로 그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군대로 조직을 편성하여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셨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 규례를 순종합니다.
애굽 땅에서 나오다(37-39)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이릅니다. 숙곳은 나일 강 동쪽 델타 지역으로 가나안으로 가는 첫 번째 야영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정만 육십 만 가량이었고 전체 인구는 이백 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는 ‘수많은 잡족’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인들과 이방인들로 여호와께서 애굽의 신들보다 강하심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따랐을 것입니다. 이 많은 인구가 숙곳에 이를 때까지 바로와 애굽의 군대는 아무런 방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 양식도 없이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숙곳에서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워 먹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40-4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정확히 사백삼십 년 만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대로였습니다(갈 3:17).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는 구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주도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나타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시 3:8). ‘애굽 땅에서’(42)라는 말이 이 시점 이후로 성경에서 56회 반복되는데, 노예들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암시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것처럼, 또한 약속하신 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대대로 기억하듯이, 우리 또한 십자가 은혜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 규례(43-51)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이며, 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회중들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예배 공동체로서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이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 회중에 편입되었고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행사는 가족 단위로 이행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유월절에 각 가족이 어린 양을 잡아 함께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는 꺾지 말아야 했으며, 이는 십자가에서 뼈가 꺾이지 않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합니다(요 19:31-36). ‘바로 그 날’(51)은 유월절이며 ‘그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였습니다.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몫이며,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평생 우리의 몫입니다.
적용: 유월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목표가 어디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면 인생은 허망하게 끝이 납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살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 안에서 충만해질 것입니다.
< 설 교 >
출애굽의 영적 의미
박덕기 목사
지난 두 주일에 걸쳐 ‘유월절의 의미’와 ‘무교절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강퍅한 바로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열 번째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사람은 물론 짐승 한 마리도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곧 유월절 규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의 대재앙에서 살 길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유월절 규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곧 흠 없는 일년 된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실 그 피를 보고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Pass Over’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 온 천지에 사망의 곡성이 가득 찼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는 한 가정도 죽음을 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장자 재앙으로 바로는 마침내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날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구약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유월절 양이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양은 어린양 가운데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병들었거나 온전치 못한 것은 결코 유월절 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든 구약 시대에 희생된 모든 양이 다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 때에 심판이 지나가고 죽음이 넘어갑니다. 어린양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는 곳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의 문설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가족들의 심령의 문설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재앙이 넘어가고 저주가 지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심판이 넘어가고 죽음이 지나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시기를 우리의 유월절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월절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절기가 곧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인 정월 14일부터 21일까지 칠일 동안 지키는 절기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인 무교병만을 먹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교절 기간 동안 온 집안에서 누룩을 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죄와 부패를 상징하는 누룩이 있는 유교병을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여 집안에 누룩이 없도록 하라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철저한 경계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집안에서 조그만 누룩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세심히 집안을 살펴야 했겠습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서 누룩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살펴야 했듯이, 우리의 삶을 샅샅이 살펴 죄악의 모습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무교절 기간 동안에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끊쳐 진다는 것은 곧 영육간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로부터 떠나지 않고 그것을 사모하여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마침내 구원의 대열로부터 제거를 당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에는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즉 죄에서 떠난 거룩한 삶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준엄한 신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유월절을 통하여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일주일은 신자의 일평생을 상징하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죽임을 당하시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으므로, 모든 성도들은 도덕적 의미에서 명절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곧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과 같은 생활로서, 일생 동안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교절의 규례가 오늘날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은 한 마디로 거룩한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함을 받은 성도는, 정녕 자신을 죄로부터 철저하게 구별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 기업도, 영원한 생명도 모두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출애굽의 영적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애굽의 장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던 밤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몰아가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여 년 간의 고달픈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출애굽하기에 이릅니다. 3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랑이요”라고 했습니다. 라암셋 지역은 요셉 당시에 바로로부터 하사받은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요 거주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일 강 하류에 있던 라암셋에서 홍해를 건너기 위해 숙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 가량이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여자들과 노약자들을 다 포함하면 200-300만 명으로 추정을 합니다. 야곱의 후손 70여 명이 애굽에 건너간 지 430년 만에 이렇게 거대한 인구로 번성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이행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이미 굳게 약속하였고 이삭과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언약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신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중다한 잡족이 그들과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잡족’이란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압제받던 다른 소수 민족들로, 이들은 아마도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으로 깨닫고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들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혼혈된 자들과 여호와를 믿는 신앙으로 개종한 셈족들과 애굽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출애굽에 참여한 사람은 순수 이스라엘 백성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약속의 성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후에 할례 의식을 통하여 정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혈통에 의한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누구든지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편입될 수 있는 열린 공동체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혈통과 민족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종의 차별도 없고 신분의 고하도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일에 그 누구도 이에 대해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급히 나왔으므로 발교 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을 준비케 하시면서 어린 양 고기를 먹을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명하심으로, 출애굽이 아주 급박하게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셨는데, 실제로 그 말씀대로 출애굽이 급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성도가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어서는 지체할 수 없음을 교훈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와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에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구원의 초청에 응할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 나가는 시간에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도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육신의 먹는 문제를 영혼의 구원 문제보다 앞세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 죄와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굶는 한이 있더라도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 더 시급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더 중요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부르고 평안함을 누릴지라도 영혼이 마귀와 죄와 사망의 올무에 사로잡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여 육신의 양식을 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쳐 양식을 준비하지 못하고 출애굽 하여 굶주리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사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43절부터는 유월절에 대한 보완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면서 양 고기를 먹는데 “이방인은 먹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혈통적인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할례를 받고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 된 사람에게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며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지 못했던 원인은, 그들이 돈을 위해서나 다른 계약 관계로 이스라엘에 잠시 동안 머물렀을 뿐, 그들을 머물게 한 그 요인이 해소되면 언제든지 이스라엘 공동체를 떠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할례 받은 자는 영구히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머물며 유월절 예식에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안에도 임시 거주자나 품꾼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것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때로 이 땅에서의 고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임은 모르고, 단지 물질적인 또는 세상작인 복을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성찬 예식에 동참해서도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양을 먹을 때에는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한 집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유월절 예식을 치른 믿음의 집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다 그분의 지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한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어려움을 함께해야 합니다.
또한 유월절 양의 뼈는 절대로 꺾지 말도록 했습니다. 이는 유월절 예식에 사용되는 어린 양이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뼈가 꺾이지 않으실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안에 꺾여질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 병정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꺾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제정하시되, 모든 것을 구속사의 최대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그 초점을 맞추어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유월절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며 그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고 신음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바로로 하여금 항복케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430년이라는 기나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풍성한 하늘나라의 상징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한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유월절 양의 대속적인 죽음이었던 것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핀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구속적인 사건, 즉 출애굽적인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눅 9:31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란 물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별세’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 보면 ‘Εξοδοσ’(Exodus) 곧 '출애굽’이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같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와 사탄 그리고 사망의 쇠사슬에서 풀어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별세를 Holy Bible에서는 ‘departur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departure’란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 역시 의미가 심장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크로스웨이 교재의 그림으로 설명할 것)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이나 애굽의 고달픈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동안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날 사람마다 거리로 뛰어나와 낯선 사람끼리도 서로 얼싸안고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귀와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늘나라 시민이 되고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다면 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런 일이겠습니까? 구원받은 우리 모두 이러한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애굽과도 같은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으니, 죄악 된 세상을 다시는 뒤돌아보지 마시고, 일편단심 오직 저 하늘나라만을 바라보고 전진하여,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그 복되고 영화로운 나라에 다 들어가게 되시기를 우리의 유월절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월절 규례 - 최후의 만찬
출애굽기 12:43-51, 마태 26:17-30 / 이상호 목사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로 지켜오는 삼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삼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어디에 살아도 이 세 가지 절기를 꼭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이 세 절기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이름을 제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70인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자손들이 400년을 지내는 동안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애굽 사람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 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모세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굴레에서 풀려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굴레에서 풀려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남의 나라의 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굴레에서 해방된 사건은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일은 모세가 지시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1월 14일 밤이 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일년 된 흠없는 수양을 잡았습니다.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고기는 날 것으로나 삶아서 먹지 않고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그 고기를 이튿날 아침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날 밤에 애굽 땅에는 큰 곡성이 들렸습니다. 집집마다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앉은 여종의 장자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곡성을 들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왔습니다.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규례는 애굽을 떠나오던 날에 하던 대로 행하게 했습니다. 유월절은 매년 1월 14일 저녁부터 21일 까지 이레 동안 지켰습니다. 그 이레 중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로 모여 일을 하지 않고 제사드리는 일만 했습니다.
이레 기간 중에는 누룩을 성회 사방에서 일체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누룩은 죄의 상징이었습니다. 누룩이 한 덩어리만 들어가도 반죽 전체를 술로 뜨게 하는 것 같이 죄는 한 조각만 있어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부패시키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는 첫째 준비는 죄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마음속이나 눈에 띄지 않게 되었을 때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 음식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린양이었습니다. 양을 잡을 때에는 그 뼈를 꺾지 않도록 했습니다.(46절, 시 34:20, 요 19:36) 양의 고기는 첫 유월절 때와 같이 날 것으로나 삶아 먹지 아니하고 불에 구워서 쓴 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역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으로 죄를 없이한 순결을 의미합니다.
쓴 나물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양의 고기는 14일 저녁에 다 먹고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지 않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고기는 성물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 어린양은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곳 성전에서만 잡게 하고 백성들이 사는 성안에서는 유월절 양을 잡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전국에 흩어진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에는 다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유월절 양은 성전에서 잡되 유월절 음식은 가정에서 먹었던 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은 것을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유월절 음식은 누구나 다 먹을 수 있었나요? 이방인은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거류인과 외국인 품꾼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게 했습니다. 동거인이나 타국인이라도 할례를 받은 자는 누구나 유월절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이것은 민족적 차별이나 인종적 차별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왜 먹지 못하게 했을까요? 이방인은 죄에서 구원 받은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받은 사람이 성찬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류인과 외국인 품꾼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류인과 품꾼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의 고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할례를 받은 자는 종이나 외국인이나 동거인이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서약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구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월절 음식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별 만찬입니다. 이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은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만찬에 초대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구원 얻을 사람입니다.
이 만찬에 초대를 받지 않고 참례하려고 하는 사람은 쫓겨나고 맙니다. 가롯 유다가 그래서 쫓겨났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참례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영생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판가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할례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생과 상관이 없나요?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와 상관없던 유월절이 우리와 상관있는 유월절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성찬식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은 나의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바 곧 나의 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받은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는 것과 그 상징성이 같습니다.
고전 5:7-8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그 뼈를 꺾지 않으므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 고기를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지 못함 같이 오늘 우리는 성찬상에 올라간 떡과 잔은 내려서 깨끗한 곳에 처리해야 합니다. 그 고기를 날 것으로나 삶아서 먹지 않고 불에 구워서 먹는 것 같이 불같은 고난을 참고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은 것처럼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합니다.
유월절 음식을 이방인과 거류인과 품꾼은 먹지 못하게 한 것 같이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례 받았더라도 죄와 벌 아래 있는 사람은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을 수가 있습니다. 세례 받은 여러분들은 성찬에 참례하고 주의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유월절은 애굽을 떠난 지 일년이 되는 정월 십사일 저녁에 시내광야에서 실시했습니다.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유월절과 같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베푼 유월절 잔치에 참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침 사람이 죽어 시체를 만지고 시체에 가까이 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정케 되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시체로 인해 부정케 된 사람이나 먼 곳에 여행 중인 사람은 2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키라. 그러나 부정케 된 일도 없고 여행 중에 있지 않으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성찬식이 있다고 광고를 하면 가능한 성찬식에 참석하도록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성찬식에 참석할 수 있음에도 고의적으로 회피한다던가 성찬식에 참례하기는 하나 뜻도 모르고 참석하는 사람은 성찬식의 거룩한 뜻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성찬식에 떡과 잔을 뜻있게 받으면 복이 되고 성찬식의 떡과 잔을 뜻없이 받으면 저주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전 11:29-30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했습니다. 삼가 조심함으로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첫 유월절을 여리고 평지에서 지켰습니다. 첫 유월절을 지킨 이튿날 40년 동안 먹은 만나가 그쳤고 그 날부터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실로에 모시고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는 성전에서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믿음을 저버리게 되자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유월절은 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월절이 끊어진 때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왕은 왕이 되자마자 성전을 청결케 하고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중단된 유월절을 부활시켰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었을 때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말하자면 남북 통일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는 수송아지 1,000과 양 7,000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1,000과 양 10,000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습니다.(대하 30:24) 칠일 제사가 모자라 다시 칠일을 연장하여 십사일 동안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요시야왕은 왕이 된지 18년에 성전을 청결케 하고 성전을 청결케 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전 국민에게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요시야왕은 자기 소유의 양떼 중에서 어린양과 어린 염소 30,000과 수소 3,000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바쳤습니다.(대하 35:7) 요시야왕이 지킨 유월절은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가장 성대한 유월절을 지킨 것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킬 때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을 때가 신앙이 타락한 때였습니다. 오늘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 때가 언제입니까? 성찬식에 뜻있게 참여할 때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입니까? 성찬식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 때가 아닐까요?
마태 26:17-30을 읽고
오늘 우리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묵상하며 성찬식을 하려고 합니다. 성찬식의 의미를 바로 알고 성찬식의 뜻을 좇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음으로 새 생명을 얻어 생기에 넘치는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주는 교훈으로 놀라운 충성과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자의 복
출 12:43-51 / 임덕순 목사
유월절에 죽은 어린양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상징이었고, 그 양이 죽어 피를 흘려줌으로 이스라엘을 죽음과도 같았던 300년 이상의 노예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양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서 삼삼오오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들은 육신의 가족별로 모인 것이 아니라 양 고기의 분량을 따라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모여 양고기를 함께 먹다가 함께 구원을 받아서 구원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가족이나 연고를 따라 모인 것이 아닌, 구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죽어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의 영의 양식이 되어주신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어린양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이고, 그 유월절에 양고기를 먹으면서 해방의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주님을 먹고 마시듯이 믿으면서 우리 주님의 재림과 그때의 유월절 해방보다 더 크고 영원한 행방인 자신의 부활과 영광의 날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형편을 살펴봅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네 가지 특별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쉽게 영어의 첫 자를 따서 4P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Pardon, Peace, Purpose, Power입니다.
첫째, 사죄 (Pardon)를 받았습니다.
첫 번 유월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양 한 마리씩을 잡아서 죽이고, 죄지은 너 대신에 이 어린양이 대신 죽었다는 표식으로 네가 사는 집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그 집에 모여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문에 발라진 피를 보고 그 집은 심판하지 아니하고 넘어가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참 특별합니다. 그들은 죄인인데, 죄 없는 양이 대신 죽으면, 그 양이 희생당한 대가로 죄인의 죄를 사해주고 그가 당할 절망과 죽음에서 구원해 준다는 약속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특별합니까? 이것은 그때 그 양이 그렇게 능력 있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인류구원을 위해 오셔서 인류 대신에 죽어주실 위대한 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그런 능력자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날 어린양의 피는 문 밖에 칠해져 있었고, 사람들은 방안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피를 볼 수 없었고, 희생을 피를 보는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심판의 천사가 밖에서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집 문에 희생의 피가 있는가? 없는가 였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안에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 아들이신 예수의 희생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없는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양의 피는 사람들이 보라고 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의 천사가 쳐다 보라고 바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효력을 가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인본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가책을 받아서 ‘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각성운동을 벌여 인간이 새롭게 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각성시킨 도덕적 스승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거룩하게 될 수가 없으며, 되어 본 적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우리에게 발라져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당신 외아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고 넘어가 주시는 것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피를 보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확실하게 "내가 피를 볼 때에 너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선행이나 공로나 그 무엇을 보는 보지 않고 다만 피만 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가슴에 뿌려져 있는 당신 아들의 피를 보실 때, 당신의 외아들의 희생을 생각하사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로인해 우리가 지은 죄는 제거 되었고,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되었고,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은 어린양의 피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표식입니다. 피 가 있고 없음은, 죄인이 용서받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심판의 천사가 애굽의 모든 가정들을 찾아가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감옥의 죄수의 장자까지 모두 치셨습니다. 양의 피가 발라지지 않는 곳에는 그 어디나 철저한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죽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심판은 지나가 버렸고, 맛있게 구운 양고기를 먹으면서 평안히 찬송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양이 죽은 그 날 밤에, 하나는 심판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하나는 그 칼날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은혜의 귀한 음식으로 배불리는데, 하나는 진노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하나에게는 넘실대는 파도가 비켜가고, 또 하나는 그 파도가 삼켜버렸습니다. 그 엄청난 차이가 무엇의 차이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들은 다 똑같은 죄인이지 차이가 없습니다.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도덕군자나 감옥의 죄수나, 다를 바가 없이 다 같이 죄인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은 들키고 잡혀간 죄인일 뿐이고 밖에 있는 사람은 들키고 잡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죄인인가, 그것도 바르지 않은 죄인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똑같은 죄인들 중에서 당신 아들의 피를 바른 죄인을 용서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언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히9:2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아니했기에 죽었고, 하나는 그 피를 믿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시는 초점은 단지 피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보시겠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것만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셨고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양되신 주님의 공로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모든 죄로부터 참된 용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철저히 의지하여 온전한 용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안 (Peace)을 받았습니다.
첫 유월절 밤은 애굽 전역에 심한 공포와 두려움과 절규와 통곡이 휩쓸고 지나가는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밤에, 양을 잡아서 피를 뿌린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주 평안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그 집에 모여 양고기를 먹고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뿌렸는데도, 그렇게 순종한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이라도 죽임을 당했더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어린양의 피가 아무 쓸데없다는 증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피 뿌린 집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은 흠 없는 어린양에게 떨어졌고, 그 양은 처참하게 죽어 나갔으며, 그 양이 처참하게 죽은 대가는 심판받을 죄인들을 살리는 엄청난 효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상한 자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될 뿐 아니라, 참된 평안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내게는 임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용서 받은 줄을 확신하는데, 무엇이 불안하고 왜 두렵겠습니까? 그들은 태연하게 구운 양고기를 먹으며 평안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안은 절대로 안전하다.” “그리스도의 피는 안전을 보장해준다.” 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나는 절대로 안전하다." 라고 주관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심판의 불안과 절망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참되고 근원적인 평안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왜 그렇게 많은 고민과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자주 절망감과 실망을 느끼십니까? 그의 피 공로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은 불안을 잠시 잊게 만드는 평안이 아니라, 불안의 근원을 온전히 제거시킨 참 평안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를 근거로 이렇게 약속하시고 당부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여러분, 우리 대신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믿고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아무리 벼락이 쳐도 곁에 높은 피뢰침이 있으면 안전합니다. 피뢰침이 벼락을 맞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은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과 형벌을 이미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형벌은 주님이 대신 받으셨고 우리는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형벌이 없고 지옥이 없으며 영원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실패도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들과 날마다 함께 하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며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이 말씀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는 참된 평안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삶의 새로운 목적(Purpose)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에는 그들에게 희망이나 목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유가 없는 그들에게 무슨 삶의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맞아 죽지 않거나 굶어 죽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하심으로 노예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고, 평화와 희망을 주시자, 그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옛날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땅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며, 자유와 평화가 있는 땅을 가서 차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이들이 갖게 된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습니다.
헛된 삶에서 구원하여 목적 있는 삶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면, 사람에게는 참된 목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누구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살고, 누구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살고, 누구는 쾌락을 위해, 누구는 권력을 위해서 살면서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공천헌금을 몰래 주다가 현장에서 잡힌 사람들의 목적은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한때 그보다 숭고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공산혁명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세계의 공산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사회마저도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고, 더 은밀하고 더 심각한 계급사회를 만들다가 붕괴되었습니다. 그들은 온전하지 못한 목표를 위해서 진실과 인권존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도 팽개치고 거짓 선동과 폭력적 혁명 운동을 하다가 붕괴되었습니다. 공산화의 비전은 잘못된 목표였습니다.
부자들을 끌어내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서 경제적인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정부도 올바른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중. 고등학교를 평준화하여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도 올바른 목표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정치적 사상은 인간에게 참된 목표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은 참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물을 이유도 없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나도 남을 사랑하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삶은 이룰 수도 없거니와, 남을 해롭게 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이웃에게 사랑과 복음과 기쁨을 주기위해 살아가는 삶,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사는 삶에는 전능하신 주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어 그 뜻을 이루도록 도우시지만, 자기만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에는 악마가 함께하여 그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야 마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삶의 목표를 부여잡고 힘써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힘(Power)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피 뿌린 집에서 그 양고기를 불에 구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에게 해방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음식을 다 먹은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싸놓았던 짐들을 들고, 아이들을 업고 짐승들을 몰아서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진군나팔과 함께 모세를 따라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늦은 밤에 출발했지만 서둘러서 짐을 지고 아이들을 붙들고 걸어서 애굽 국경을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너무나 힘겨운 행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밤늦도록 양고기를 구워 먹었는지라 아이들까지도 힘이 든든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뜬히 애굽 국경을 넘어 멀리 홍해 바다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그날 밤에 목숨을 건졌다고 할지라도, 밤중에 어린양 고기를 먹지 아니했었다면, 그 밤에 과연 탈출에 성공했을까요?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기진하여 길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고, 그들을 보낸 뒤 생각을 바꾸어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에게 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늦은 밤에 양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기 때문에 먹은 양고기가 든든히 힘을 받쳐주어서 그 밤에 멀리 멀리 도망쳐 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도 얻었고 올바른 삶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내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험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진실하게 살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시는 힘이 아니면 우리는 삶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도우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성령이 우리와 날마다 함께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으며, 누가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으며, 누가 절망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힘겨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며, 누가 실패를 당하고서도 굴복하지 않고 또 다시 도전해서 그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만드는 힘을 가졌습니까?
그런 힘은 오직 희생당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 안에 오시는 성령에게서만 나옵니다.
사40장에 “소년이라도 넘어지며 장정이라도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피 뿌린 집인 교회를 중심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새 힘을 주십니다.
시 29:11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양의 피 공로로 구원을 받았고 피 뿌린 집인 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지금의 연약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시는 정죄가 없으며 용서와 사랑만 있습니다. 두려움 없는 평안의 삶을 누립시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날마다 진리로 살아갈 수 있는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사죄의 평안과 삶의 새로운 목적과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날마다 행복하게, 날마다 반듯하게 살면서, 날마다 승리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참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37-51 / 조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열 번째 재앙 곧 장자 재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 재앙에서 구원받은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보혈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함을 받고 드디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유아 외에 장정만 육십만 명쯤 되었습니다. 이때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한지 사백 삼십년 만이었습니다(40; 참조. 창 15:13-14).
그런데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합니다.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41).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로 출애굽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군대의 존재 목적은 전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로 불러내신 것입니까?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정신이 없는 세상을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곧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 15:12-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죄를 심판하는 방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가나안의 죄가 단지 윤리 도덕적인 죄만이라고 본다면 이스라엘이 그들을 공격하여 진멸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반하며 원망하며 불신하였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정복한 것은 어린 양의 피 아래, 즉 유월절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은 세상의 힘을 가지고 하는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정복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1-15절을 보면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넌 후에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시기를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곧 모든 군사는 광야에서 죽었고, 광야 노중에서 난 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명에 순종하여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길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할례, 유월절, 하나님의 군대장관, 이것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적을 눈앞에 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인이 돌칼로 생식기 끝을 자르고 낫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다함께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로 돌칼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다고 해서 여호와의 완전한 군대라고 자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또 앞장 서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앞장 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눈을 들어보니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었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수 5:13).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고 했습니다(수 5:14a). 이에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수 5:14b). 이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기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하셨습니다(수 5:15). 이에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편도 아니고, 가나안 사람의 편도 아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 5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호와의 군대가 유월절 밤을 통하여 만들어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란 두 가지의 구성 요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월절과 할례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면 이것을 다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군대가 나서는 길에 누가 함께 따라 나오는 것입니까? 38절을 보면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행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중다한 잡족이 함께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애굽이 유대 사람들만 종으로 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서 자기의 종들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에는 애굽의 종살이 하는 것보다는 자유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다한 잡족이 함께 이스라엘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여호와의 군대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여호와의 군대에 참예하려면 무엇을 행하여야 합니까?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대가 되기 위하여, 곧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유월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인데 할례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창세기에서 할례에 대하여 보았습니다만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최초로 할례를 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전에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후손이란 사람의 행위가 들어간 그러한 이스마엘 같은 자식이 아니라, 온전히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고 나서 이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사람의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되어진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가운데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사라의 태가 닫혀 있었고, 이미 폐경기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너의 생식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오는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3-4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군은 먹지 못하리라.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찌니라.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이 유월절에 참예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종으로 산 자는 할례를 받게 한 후에 유월절에 참예가 됩니다. 그리고 타국인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면 그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본토인처럼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방인도 유월절에 참예할 수가 있는데 참예하려면 반드시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할례를 통하여 옛 인간의 혈통, 인간의 가치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방식들이 모두 단절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고 인정하는 자만 유월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이 되지 않은 자들이 광야에서 계속하여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집단적으로 모세에게 대들게 만들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참조. 민 11:4). 그들은 형식적인 할례를 행하였을지 몰라도 아직 애굽과의 온전한 단절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하여 그들의 마음이 애굽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유대인이 볼 때에는 이방인이요, 잡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나의 육정, 나의 옛 사람의 사고방식이 다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인간적인 생각, 행위, 방법들을 다 잘라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단절되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로 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로 난 자는 무엇을 믿게 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 분이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임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할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나에게서 어떠한 가능성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입니다. 흑암의 권세에 붙들려 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을 보면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두움의 일에 대하여 살아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 위하여 구약에서 유월절을 통과하고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 유월절에 참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과 할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유월절 규례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46절을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라고 했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밖으로 내지 말고’라는 말씀은 주님의 살과 피를 함부로 먹고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성찬 예식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을 세례 받은 사람으로 제한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의미를 아는 자만 그 고기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곧 세례인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님의 몸이 된 것입니다(롬 6:3-4). 이것이 구약의 여호와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못하게 한 것이 성취되는 것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9:31-37절을 보면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리가 꺾이지 아니함이 출애굽기 12:46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뼈가 꺾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심으로 그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는 자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를 받아야 유월절에 참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의 몸이 된 우리도 여호와의 군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여호와의 군대는 어떤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까?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함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요 16:9).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것은 결국 애굽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믿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고 있다면 몸은 할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잡족의 근성과 습성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아 옛날이 좋았다고 합니다(민 11:4-6).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는 온갖 즐길 것들이 많았는데, 이제 말씀만 듣고 가려니 밋밋하다는 것입니다.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군대로서 무엇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였지만 그들이 다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던 자들은 다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론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편에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건을 통해서 오늘날 내가 과연 주님의 군대로서 제대로 싸우고 있는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2:4-5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것을 더 가지기 위한 싸움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따르기 위한 싸움입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여호와의 군대가 되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여호와의 군대로서 오직 주님을 따르기 위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해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