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현경준
분야: 어문 > 소설 > 중·단편소설
저작자: 현경준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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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사흘째다.
무슨 일로 결석을 하는지 이웃에 사는 녀석들과 물어도 모른다고 하며 집도 어느 모퉁인지 딱히 안다는 녀석이 없다.
시골 농촌과 달라 한반에 다니는 동무라도 피차 서로 주소를 모르고 지내는 것쯤은 보통사라 하겠지만 그러나 인규에게 한해서만은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공부를 잘하고 동무 사이에 쌈 한 번 하는 일 없고 운동도 잘하고 게다가 급장까지가 아닌가?
누구든지 그에게 대해서만은 악의를 가지는 일 없고 서로 다투어가며 친하게 지내려 애쓰는 반 내의 인기자(人氣者)인데 어째서 그의 주소를 모를까?
근방에서 사는 줄은 알지만 어느 모퉁이가 그의 골목이며 어떤 집이 그의 거주하는 집인지는 통히 모른다니 그러면 이때까지 그가 반 내의 인기자였다는 것은 전부가 자기의 잘못된 추측이었던가?
만약 그것이 자기의 잘못된 추측이었다면 그러면 사흘 동안의 그의 결석에서 반 내 동무들이 모두가 섭섭해하며 자꾸 외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확한 단정은 얻을 수가 없다.
영식은 다시 한번 빽하니 들어찬 중대가리들의 얼굴들을 둘러본 다음 창밖을 내다보며 속으로 오늘은 방과 후 백사불고하고 인규의 가정 방문할 것을 궁리했다.
그러는데 하학 종소리가 울려온다.
바로 마지막 시간인지라 중대가리들은 영식의 명령이 내리기가 바쁘게 도구들을 책보에다 걷어 싸며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다.
방 내에는 이내 보오야니 먼지가 일기 시작한다.
옆방에서는 벌써 ‘기립’ ‘예’ 소리의 뒤를 이어 책상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인다.
한시바삐 뿔뿔이 흩어져가려고 초조해하는 녀석들을 교정에 정돈시켜놓고 매일 되풀이하는 내일의 주의를 형식대로 판에 박은 듯이 일러준 다음 해산을 시키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무의식중에 긴 한숨이 흘러나오며 늘어진 기지개가 켜진다. 시계를 쳐다보니 10분 전 4시다.
제각기 서로 떠들며 몰려드는 동료들의 얼굴에도 피곤한 빛깔이 역력히 들어나보인다.
영식은 잠시 그 모양들을 바라보다가 자기의 자리에 가서 학적부를 펼쳐들고 인규의 주소를 조사했다.
번지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다.
수첩을 꺼내 적은 다음 그는 곧 교장에게 가서 사유를 말한 다음 총총히 책보를 싸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방과한 뒤라 골목은 아이들의 물결로 터질 지경이다.
처처에서 번갈아 하는 인사 소리들을 대강 귓등으로 받아 흘리며 큰 거리에 나서니 비로소 우리에서 풀려난 듯 가슴속이 후련해진다.
그는 걸음거리도 가볍게 도로 위를 한참 가다가 다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수첩에 적어논 ××구 인규의 주소를 찾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골목이다.
가끔 만주인 마차가 덜칵거리며 지날 뿐 꽤 한적한 음침한 골목이다.
수첩에는 번지가 적혀 있지만 집집마다 문패는 바로 달려 있질 않다.
언제나 아동들의 가정 방문 때면 반드시 느끼는 것이지만 만주는 문패가 바로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처음 방문할 때는 매우 곤란하다.
하는 수 없이 물어갈 수밖에.
그러나 몇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야 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자니 그쪽은 전부가 술집 판인지라 그런 골목일 것 같지는 않고 도로 서서 망설이는데 마침 우편배달부가 지나간다.
다짜고짜로 지나가려는 것을 붙잡고 수첩을 들이대니 이상하게도 배달부는 영식의 아래위를 수상스레 훑어보다가
"저 건너편 막다른 골목에 뵈는 저 집인데 영춘옥이라고 간판이 붙은 저 집에 가 보시오.“
하고 퉁명스레 볼멘소리로 가르쳐준 후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영식은 제 귀를 의심하며 한동안이나 선 자리에서 배달부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해본댔자 영춘옥이란 그 말은 두 귀에 또렷하니 남아 있지 않은가?
[2]
몇 번을 주저거리며 망설이다가 결국 큰맘을 먹고 문 앞에 다가섰으나 또다시 문제되는 건 주인을 찾을 그것이다.
술집에 와서 주인님 계십니까 하기도 쑥스럽고, 그렇다고 색시를 부를 수도 없고, 저 혼자 애꿎은 얼굴만 붉히는데 힐끗 내다본 색시 하나가 술손님인 줄 알고 화닥닥 뛰어나오며 반긴다.
"어서 오십시오.“
영식은 당황하여 얼굴을 바로 못 쳐드는데
"얘 안방 좀 치워라. 손님 오셨다.“
하고 색시는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어서 들오시오.“
"네…… 저…….“
숫색시 모양으로 얼굴이 빨개지며 어룸거리는 영식의 그 모양에 색시는 쑥인 줄 알았는지 방싯 웃어놓으며 다짜고짜로 손목을 끌어당긴다.
영식은 등 뒤에서 수다한 행인의 눈들이 쏘아보는 것 같아 더 한층 얼굴을 붉히며 넋없이 방안에 들어섰다.
"아이 손님두, 얼굴을 다 붉히구.“
색시는 제법 목에라도 매달릴 듯이 바짝 코앞에 다가서며 책보를 받으려 한다.
"이리 주시오.“
"아닙니다. 난 술 먹으로 온 사람이 아니라.“
"술 안 잡수시면 뭣하러 술집에 오셨어요. 색시만 보러 오셨군. 이왕이면 뽕두 딸 겸 님두 볼 겸이라는데 색시두 보시구 술두 잡수셔야지요. 천만에 말씀 그만허시구. 술은 무슨 술을 가져올까요. 언니 안방 얼른 좀 치워줘요.“
수다스레 떠들어대는 색시의 모양에 영식은 덤덤히 서서 어쩔 바를 모르다가 겨우 옆으로 비켜서며
"여보시우. 난 술 먹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이 집에 볼일이 좀 있어서 왔는데요."
하고 애걸하듯이 말했다.
색시는 그제야 웃음을 슬쩍 거두며 의아스레 쳐다본다.
"무슨 일인데요.“
"저 이 집에 오학년에 댕기는 인규라는 생도가 있어요?“
"네? 학생이오?“
"네 그렇습니다. 난 그 애의 반 담임인데요."
색시는 한동안이나 영식의 아래위를 살피다가 무색한 듯이 슬그머니 물러서며
"언니 학교 선생님이 오셨어요."
하고는 훌쩍 다음 칸으로 나가버린다.
뒤이어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들어서는 여자는 나간 여자보다도 서너 살 위인 듯 나티가 나 보인다.
그러나 활짝 핀 모란꽃과도 같이 시원스럽고도 탐스러운 얼굴이다.
영식은 얼굴이 화끈 달아가며 가슴속이 두근거려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여자는 조심스레 나직한 목소리로
"학교 선생님이십니까?"
하고 치마꼬리를 여미며 날씬한 허리를 살짝 굽힌다.
"네 인규의 담임인데, 요즘 인규가 사흘째나 결석하길래 무슨 까닭인지 알아보러 왔어요."
"미안합니다."
하고 여자는 나직히 한숨을 짓는다.
"어디 무슨 병에나 걸리지 않았는지요."
여자는 다시 한번 나직히 한숨 지은 후 조용히 고개를 쳐들며
"네 앓지는 않아요."
하고는 이내 눈물이 글썽하여 외면한다.
"아니 그런데 어째서 학교에 안 옵니까. 지금 있습니까?"
"없어요."
"없다니요? 어디 갔어요?"
"네 갔어요."
"어디루 갔어요?"
여자는 아무말도 없이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비로소 깨달은 듯
"좀 앉으시죠"
하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더니 방석을 가지고 들어와 권한다.
"괜찮아요."
영식은 금시 뛰어나갈 상으로 문 앞에서 주춤거린다.
"잠깐만 앉으세요. 일부러 오셨는데 자세한 말씀 드리지요."
하고 간곡히 권하는 바람에 영식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밖에서 누가 엿보는 것 같아 심중은 불안하기 짝 없다.
여자는 영식의 맞은 편에 사뿟 모로 비켜 앉으며
"이렇게 일부러 찾아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진작 벌써 알려드려야 할걸."
"천만에 말씀입니다. 사실은 첫날 찾아온다는 것이."
하고 말끝도 맺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 수다를 떨어놓던 색시가 술상을 들고 들어와 영식의 앞에 놓고 나간다.
영식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뒤로 물러앉았다.
"노여 마시구 약주 좀 드시며 말씀 들으세요."
"아니 전 술은 못 먹는데요."
"그럼 비루 가져올까요?"
"아닙니다. 그것두 못 먹어요."
"선생님 너무 그러시지 마시구. 천천히 약주 드시며 제 사정을 좀 들어주세요. 자, 한잔 드세요."
하고 여자는 익숙한 솜씨로 술병을 들어 따른다.
[3]
하도 설은 사정이길래 못 먹는 재간에 권하는 대로 잔을 기울인 것이 어찌나 취했던지 눈을 떴을 때엔 밤도 초저녁은 훨씬 지난 때였다.
골속이 띵하고 입 안이 바짝 말라서 한동안은 기동할 수가 없었다.
방은 확실히 자기의 방인데 어떻게 찾아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누운 자리에서 두 눈만 멀뚱거리며 술 먹던 일을 생각하는데 미닫이 소리가 나며 주인아주머니가 얼굴을 들여 보낸다.
"깨셨어요?"
"물 좀 주시오."
영식은 겨우 고개를 쳐들고 일어났다. 눈앞이 핑 돌아가는 것 같다.
주인아주머니는 이내 냉수를 떠가지고 들어와서
"아니 어디서 그렇게 취하셨어요. 한 잔두 못 하시던 어른이."
하고 빙긋이 웃는다.
"몹시 취했습디까?"
"몹시 취하시다니 선생님 취하신 걸 첨 봐서 그런지. 그렇게 취하시구두 집을 찾아오신 것이 용치요."
영식은 냉수 한 그릇을 다 들이켜고나서
"도무지 찾아온 기억이 안 나요."
"날 리가 있나요? 그렇게 취하시구야, 진지 가져오리까."
"저녁을 안 먹었던가요?"
"저녁이 다 뭡니까? 문턱을 요행 넘어섰는데요."
영식은 어색하게 웃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밥상 차리러 부엌으로 나갔다.
영식은 골머리가 지끈거려 다시 드러누웠다가 책보를 깜짝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 우선 책상 위부터 살핀 후 방 내를 둘러보았으나 통히 보이지 않는다.
"아주머니, 나 올 때 뭐 가진 것 없습디까?"
"없던데요."
"뭐 책보 같은 것이 없습디까?"
"아유. 책보가 다 뭐예요. 아주 녹초가 돼 왔던데."
영식은 하는 수 없이 도로 누워버렸다.
별로 아까울 것은 없지만 책자들과 교수안들이 들어 있고 더구나 교수안에는 자기의 이름까지 적혀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찾으면 학교로 보내주겠지만 그러나 술에 취해서 잃었다는 것은 아무리 호의로 해석한대도 불미로운 일이다.
혹시 술집에다 그냥 팽개치고 왔다면 별 문제지만, 그러나 그럴 리는 도저히 없을 것 같다.
주인아주머니가 밥상을 보아가지고 들어왔다.
"아니 책보를 어떻게 하셨길래."
"글쎄요. 아마두 길에서 잃은 것 같습니다."
"아이 선생님 큰일나셨네. 책보를 다 잃어버리시구."
주인아주머니는 놀려대며 빙글거린다.
영식은 하는 수 없이 웃어버렸다.
그 이튿날 아침이다.
아직도 선명치 못한 머리를 억지로 쳐들고 깁떠 일어난 영식은 세수도 겨우 하고 대강 입맛 없는 밥상을 물린 다음 문 앞에 나서려는데 마침 행길 쪽에서 이쪽을 향해 가까이 오며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여자가 있다.
영식은 대번에 어저께 인규를 찾아갔다가 만난 그 여자인 줄 알고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었다.
그리고 한쪽 옆에 낀 것을 보니 틀림없는 자기의 책보다.
"어젯저녁에 너무 취하신 듯해서 맡아뒀던 건데요."
하고 여자는 먼저 변명하듯 말하고 나서야
"괜히 약주를 많이 권해드려 죄송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천만예요. 너무 실례해서 대할 낯이 없습니다."
영식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진정으로 부끄러워했다.
"아니예요. 지가 되려 실례했어요."
여자의 얼굴도 이상하게 붉어진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서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다가 여자 편에서 먼저
"그럼 시간이 바쁘실 텐데, 전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사뿟 허리를 굽힌다.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댕겨가십시오."
하고 여자의 뒤에 따라 나서는데 부엌 문을 열고 주인아주머니가 씽긋 뜻있는 듯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영식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