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같은 신앙 고백을 매주 반복해야 할까요? 세례 때 한 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우리는 매 주일마다 성당에 와서 “예, 저는 이 모든 것을 계속 믿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까? 신경을 시작하는 첫 단어는 이어서 나오는 여러 신앙 진술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 단어인데, 이 단어가 매 주일 미사 중에 신경을 반복해서 낭송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빛을 비춰줍니다. 그 단어는 바로 “믿나이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0항에 따르면 신앙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지성적 차원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측면은 신경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믿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또 “성령”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에 우리의 정신은 “오케이!”라고 동의를 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동의를 표할 때 많이 사용하는 “아멘”(진실로 그러하다)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어 아만(aman)에는 머리에서 오는 지성적 동의 말고도 ‘믿어 의지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지성적 확신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내 삶의 진짜 근본 바탕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제가 무서워 떠는 날 저는 당신께 의지합니다. 하느님께서 제 편이심을 저는 압니다.”라고 외치는 시편 저자의 마음과 같습니다(시편 56,4.10).
신앙의 두 측면 - 인격적 측면과 지성적 측면 -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수학 등식과 혼인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 진술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는 당신을 믿어.”라고 한다면 그는 아내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어. 나는 나 자신을 당신에게 맡기고 있어. 나는 내 삶을 당신에게 주고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에서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팩트’를 넘어 우리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단순한 확신을 넘어 - 물론 이것도 확실히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 우리는 한 분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맡겨 드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 주일 미사에서 신경 낭송을 반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사랑해”라고 말하며 자주 자신들의 신뢰와 서약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경을 통해서 매주 주님에 대한 서약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께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께 드린다고 거듭거듭 말하며 우리의 삶 전부를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의 깊은 속뜻입니다. 신경이 우리 마음에 와닿을 때 우리 영혼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공명합니다. “내 삶의 진짜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내가 진짜 신뢰하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으로 내 삶과 내 모든 관심사를 하느님 섭리에 맡겨 드리고 있는가?” 누구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신경을 낭송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 커지길 바라는 - 우리 삶의 더 많은 부분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길 바라는 - 소망을 표현합니다.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