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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 출처 :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上下山, 班荊而坐。 俄而, 淸兵被甲者數百騎馳來。 上曰: "此何爲者耶?" 都承旨李景稷對曰: "此似我國之所謂迎逢者也。" 良久, 龍胡等至。 上離坐迎之, 行再揖禮, 分東西而坐。 龍胡等致慰, 上答曰: "今日之事, 專恃皇帝之言與兩大人之宣力矣。" 龍胡曰: "今而後, 兩國爲一家, 有何憂哉? 日已晩矣, 請速去。" 遂馳馬前導。 上只率三公及判書、承旨各五人, 翰、注各一人, 世子率侍講院、翊衛司諸官,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 略倣華制。 上步至陣前, 龍胡等留上於陣門東。 龍胡入報, 出傳汗言曰: "前日之事, 欲言則長矣。 今能勇決而來, 深用喜幸。" 上答曰: "天恩罔極。"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 上行三拜九叩頭禮。 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 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龍胡以汗言, 請上登壇, 汗南面而坐, 上坐於東北隅西面, 而淸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 又淸王子四人, 坐於西北隅東面, 二大君連坐於其下。 我國侍臣, 給席於壇下東隅, 江都被執諸臣, 入坐於壇下西隅, 進茶一杯, 汗使龍骨大, 告我諸侍臣曰: "今則兩國爲一家矣。 欲觀射藝, 其各效技。" 從官等答曰: "來此者皆文官, 故不能射矣。" 龍胡强之, 遂令衛率鄭以重出射, 而弓矢與本國之制不同, 五射而俱不中。 淸王子及諸將, 雜沓竝射以爲戲。 俄令進饌、行酒, 酒三行, 命撤杯盤。 將撤, 有從胡二人, 各牽狗而至于汗前, 汗親自割肉投之。 上辭出, 嬪宮以下士大夫家屬之被執者, 皆聚於一處。 龍胡以汗言, 請嬪宮、大君夫人出拜, 觀者灑泣, 其實代以內人云。 龍胡等以汗所贈白馬, 具玲瓏鞍牽來, 上親執轡, 從臣受之。 龍胡等又將貂裘而來, 傳汗言曰: "此物, 當初意欲相贈而持來。 今見本國衣制不同, 非敢强使着之也, 只表情意而已。" 上受而着之, 入庭展謝, 使都承旨李景稷, 奉國寶以進, 龍胡受之而去。 俄而, 來詰曰: "誥命、玉冊, 何以不納耶?" 上曰: "玉冊則曾於甲子年, 因變亂失之。 誥命則送于江華, 兵戈顚倒之時, 難保其獲全, 而如或有之, 則追納何難?" 龍胡唯唯而去。 又以貂裘三領, 招三公着之; 五領, 招五卿着之; 【刑曹判書沈諿待罪不來。】 五領, 招五承旨着之, 【左副承旨韓興一則入江都, 故不與焉。】 謂之曰: "奉主上, 勤勞於山城, 故以此爲贈耳。" 受賜者皆伏謝於庭。 洪瑞鳳、張維入伏於庭, 請得尋見老母, 【其母入江都故也。】 金石乙屎怒叱之。 上地坐田中, 待其進退, 日晡後, 始令還都。 王世子及嬪宮曁二大君及夫人, 竝令留置, 蓋將以北行故也。 上退, 入見嬪宮於幕次, 留崔鳴吉, 姑令陪衛焉。 上由所波津, 乘船而渡。 時, 津卒死亡殆盡, 只有空船二艘, 百官爭渡, 至攀御衣而上船。 上旣渡, 汗隨後馳來, 由淺灘渡軍, 就桑田箚陣, 令龍胡率護行軍兵, 挾路左右, 導上而行。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人定時, 始達京城, 御昌慶宮 養和堂。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 형조 판서 심집(沈諿)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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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진실을 더 정확히 알기 위해 승정원일기도 참조한다. 실록만으로도 어느 정도 진실에 다가설 수 있지만, 승정원일기를 살피게 되면 더 완벽히 진실을 밝힐 수 있다.
실록은 1차사료인 사초를 바탕으로 간추리고 가감하여 편찬하는 공식문서로서, 더 객관적으로 기록될 수 있지만 왜곡이 있을 수 있고 자세하지 않다. 그에 비해, 일기는 1차사료 그 자체로서 비공식문서인데, 주관이 들어갈 수 있지만 왜곡의 가능성이 거의 없고 자세하다.
---면박여츤 등의 허다한 절차는 생략하고, 남염의 차림으로 서문을 통해 인조가 출성하였는데, 이는 이틀 전에 양국이 정한 의례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로는, 승전국이 패전국을 상대로 항복의 예식을 이렇게까지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이 있어,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것일까? 동국이 다시 약속을 어기고 군사적으로 저항할까 걱정하여, 여러 방지책을 실행하고, 인질도 확보하고, 출성 시에 호위병력도 없게 하면서까지, 무엇이 아쉬워 그러는 것일까? 그냥 싹 다 밀어 버리면 되지 않나? 원나라의 몽고도 그렇고, 청나라의 여진도 그렇고, 일제의 일본도 그렇고, 모두 다 밀어 버리지 않고 왜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일까? 없애는 것 보다 남겨놓음으로써 어떤 이득이 있었던 것일까?
청나라가 의례를 비롯한 여러 법제를 동국과 상의하여 정할 때, 항상 중국(명나라)과 비교하여 중국의 법제를 모방하려고 한다. 이 절차 또한 청나라가 자기들 마음대로 막 정한 것이 아니라, 옛 관습을 바탕으로 하여 동국과 상의하여(상의라기 보다는 일방적 통보에 해당하지만) 정하고 있다. 청나라(청태종)는 인조에 대해 몇몇 배려와 성의를 표하고 있는데, 면박여츤 등의 여러 절차를 생략한 것이 그러하다. 어쩌면, 모든 절차를 다 행하게 되면 자기들이 먼저 불편하고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부분은 꼭 챙기려 하고 있다. 동국은 대충 설렁설렁 요령을 부리려 하고, 청나라는 배려를 하면서도 꼭 챙길 부분은 챙기고 있다. 용포를 못 입게 하고 남문을 통해 나오는 것을 못하게 한다. 그러한 절차를 요구하는 이유는 인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 용골대는 인조를 죄인으로 만들려 하고, 홍서봉은 인조를 죄인의 모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홍서봉이 당연하다는 듯이 은근슬쩍, 인조가 용포를 입고 정문으로 출성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물어보지만, 용골대는 사정없이 단번에 거부한다.
용골대는 인조를 왜 죄인으로 만들려 하는가? 인조가 죄를 지었다 하는데, 지은 죄는 무엇이며 누구에게 죄를 지은 것인가? 지은 죄는 청나라의 말을 안 듣고 저항한 것이며, 청태종에게 죄를 지은 것인가?
---청나라의 용골대와 청태종은,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고 말한다. 명확하게 써져 있지는 않지만, 실록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문맥상 청나라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청나라의 목적은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 것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전도의 예식은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 예식이었던 것이다. 전쟁에 패배한 자가 승자에게 항복하는 예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 집안(一家)’에 있어 관계를 살펴보자면, 할아버지와 손자, 아저씨와 조카, 남편과 아내 등의 관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처럼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 한 집안이라는 것은, 부모와 자식, 형과 아우의 관계만을 뜻한다. 따라서, 동국과 청국의 관계가 삼전도의 예식 이후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또는 형과 아우의 관계,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동국과 청국의 관계는 무엇일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형제의 관계는 아니다. 청나라뿐만 아니라 역대의 중국과 동국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었다. 그리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 관계에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즉, 부모는 계속 부모이고 자식은 계속 자식인 것이지, 부모가 자식이 되거나 자식이 부모가 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동국이 부모일까, 중국이 부모일까? 어쨌든, 삼전도의 예식은 단순히 전쟁에 패한 자가 승자에게 항복하는 예식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황옥(黃屋)이란 황제가 타고 다니는 수레 형태의 집을 말하는데, 이동하는 황제의 거처이다. 인조 일행이 삼전도에 도착했을 때, 황옥을 펼치고 청태종이 앉아 있었고, 무장을 한 군대가 방진(方陣)을 치고, 또 황제의 좌우에서 옹립하고 있었다. 방진이란 군대가 정사각형으로 늘어선 대형을 말하는데, 사각형의 안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 비어있는 안에는 무엇이 배치되어 있었는가? 방진 안에는 단(壇)과 황옥이 있었는데, 그 둘의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가, 삼전도의 진실에 다가가는 중대한 첫 번째 열쇠가 된다.
단 위에 황옥을 펼치고 황제가 앉아 있었다면, 인조가 청태종에게 절을 한 것이 맞으며 기존의 지식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단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인조는 하늘에 절을 하고 중국을 교체하는 의식을 행한 것이며, 기존의 지식은 거짓말이 된다.
단과 황옥의 배치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첫째는, 단이 방진의 가운데 위치해 있고, 그 단 위에 황옥이 올라가 있으며 황옥의 좌우에 병사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즉, 황옥과 병사들이 단의 위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는, 단이 방진의 가운데 위치해 있고, 단의 아래 한쪽 면에 단을 바라보면서 황옥이 위치해 있고, 황옥의 좌우에 병사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즉, 단의 위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시각으로는, 첫 번째의 배치가 맞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단을 꽤 넓게 쌓아서, 단 위에 황옥도 올리고, 양국의 왕족 12명이 올라가고, 병사들도 올라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황옥을 단 위로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느냐, 굳이 힘들게 단 위로 올려놓을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옥좌(玉座)만 단 위에 설치하면 될 일이다. 청태종은 인조가 삼전도에 당도했을 때부터 황옥에 앉아 있었는데, 따로 자리를 옮겼다거나 옮긴 정황이 없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이 장면은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난 다음의 일로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할 시에 단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태종부터 인조, 왕자, 왕세자 등을 비롯하여 제신까지, 위치와 방향을 차례로 나열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가 어떤 곳에서 현재 설명하고 있는 위치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야 어디에서 어디로 자리를 옮겼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단 위의 황옥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을 청태종이, 남쪽을 향해 앉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단과 황옥의 배치는 두 번째가 맞다. 무장한 병사들이 사각형으로 진을 넓게 형성하고, 진의 가운데에 단이 위치하고, 진 안의 서쪽 또는 북쪽 편이나, 진 밖의 서쪽 또는 북쪽 편에 황옥이 위치하고, 황옥의 안에 청태종이 앉아 있고, 황옥의 좌우에 무장한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단 위에 청태종이 없었다. 아니, 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조가 단을 향해 절을 했는데, 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인조가 절을 한 대상은 하늘이 되는 것이다.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실록)
至碑石前, 望見皇帝設壇於麻田浦, 上張黃屋而坐,
비석 앞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황제가 마전포(麻田浦)에 단을 설치하고서 위에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승정원일기-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의 번역을 살펴보자. ‘단을 설치하고서 위에 황옥(黃屋)을 펼치고’라고 하여, 上張을 ‘(단의) 위에 (황옥을 올려) 펼치고’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상장(上張)은 ‘위로 펼치다, 위가 열려있는’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황옥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으나, 황옥의 지붕은 위로 개폐하게끔 되어있는 구조로 추측된다. 문장의 구조상, 上張+黃屋으로 해석해야지 上+張+黃屋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다. 뜬금없이, 上이 저 앞에 있는 壇을 끌어와서 上=壇上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단 위의 지면=壇上, 단 아래의 지면=壇下, 단을 오르다=上壇, 단을 내려가다=下壇, 제례 절차상 단을 오르다=登壇, 제례 절차상 단을 내려가다=辭}
至碑石前, 望見皇帝設壇於麻田浦, 上張黃屋而坐
至+碑石+前, 望見, 皇帝+設壇+於麻田浦, 上張+黃屋+而坐
이르러+비석+앞에, 멀리 바라보니, 황제가+단을 설치하고+마전보에, 위로 펼친+황옥에+앉아 있다
따라서, 上張은 ‘위로 펼치다’ 또는 ‘위가 열려있는’의 뜻이 되어, 이 날의 황옥은 평교자(平轎子)와 같은 모양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황옥을 펼치다, 펼친 황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지붕이 있는 가마의 문과 창문을 열어 놓은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멀리서 바라보았는데, 전후좌우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전후좌우의 문이 열려있는 가마와 평교자를 비교해서, 어느 쪽을 펼쳐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 대범함이나 용맹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평교자와 같은 형태의 황옥이 맞지 않겠는가? 上張은 ‘위가 열린’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단 위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단 위에 청태종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어렵게 증명하려 하였지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壇이라는 글자의 뜻만 살펴도, 황옥이 단 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은 ‘지면보다 높게 흙으로 쌓아 편평하게 만든 땅’을 가리키는데, 주로 제사(제례)를 행하며 조회(朝會), 맹서(盟誓), 봉배(封拜) 등의 대전(大典)을 행하는 장소이다. 사실, 조회 맹서 봉배 등도 제례의 한 종류이다. 쉽게 말하자면, 삼전도에 쌓은 수항단은 그 모양이 사직단과 같은 형태로서 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쌓은 제단(祭壇)이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임금이 앉는 의자를 옥좌(玉座), 용좌(龍座), 어좌(御座) 등으로 불렀다. 그 옥좌의 아래 부분을 상(床) 또는 탑(榻)이라 하는데 옥상, 용상, 어상, 옥탑, 용탑, 어탑 등으로 불렀다. 즉, 황제나 왕의 의자가 놓인 아래 부분을 단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황제나 왕의 의자를 단 위에 설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단(壇)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삼전도의 단은 제단이며, 황옥이 올라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직단의 구조를 살펴보자. 사직단의 구조를 알게 되면, 이 날의 예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동방의 세계관이 담긴 천하도를 살피면 사직단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천하도는 지리적인 지식의 부족으로 그렇게 그려진 것이 결코 아니며, 천원지방의 우주관을 지상에 구현한 것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적인 명분을 집어넣은 지도이다. 사직단은 세 개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아주 넓게 둘러싸인 제일 바깥쪽의 담장은 아무 의미 없는 그냥 보통의 울타리이고, 네 신문(神門)이 달려있는 두 번째 담장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원으로 표현되는 것이 맞으며, 제일 안쪽의 낮은 담장(壝)은 사각형(正方形)의 땅끝을 표현한 것으로서, 천하도의 환대륙에 해당한다. 그리고, 유의 안쪽으로 바다에 둘러싸인 정방형(正方形)의 구주(九州)가 자리하고 있다. 왜 사단과 직단으로 나누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상식으로는 구주를 나타내는 하나의 단이 자리해야 한다. 천하도나 사직단의 구조가 말하는 바는, 현실에서는 동방과 서역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도 포함하지 않은 중국만을 구주라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외국뿐만 아니라 서역도 구주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환빠라는 이들이 주장하는 옛날에 존재했다는 환국(桓國), 세계제국, 세계정부의 이상이 천하도와 사직단에 담겨 있는 것이다.
삼전도의 단은 사직단의 단과 그 용도가 다르고, 구조도 조금 다르다. 원래는, 천하도를 구현한 것이라 같은 구조여야 하지만, 급히 임시로 만든 것이어서 생략한 구조물이 있다. 생략한 구조물은 땅끝의 지평선을 상징하는 유(壝)인데, 천하도의 구주, 바다, 환대륙 등을 합하여 하나의 사각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전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직단의 구조물은, 네 신문(神門)이 달려있는 하늘을 상징하는 담장과 판위(版位)와 어로(御路)이다.
---수항단(受降壇)은 수강단(受降壇)이다. 여기에서의 降은 항이 아니라 강으로 읽어야 한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항복을 받는 단(壇)’이 아니라, 동국의 임금이 ‘하늘의 뜻을 내려 받는 단’이 되는 것이다. 사실, 항복(降伏, 降服)이라는 것도 원래는 천신에게 항복하던 것, 하늘의 뜻에 복종하던 것을 확대해석하여, 사람끼리 상대방의 뜻에 복종하는 것도 항복이라 하는 것이다. 즉, 항이나 강이나 발음만 다르지 뜻은 원래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단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방(方)인 천하(天下)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모양이 정사각형이다.
---일기의 번역을,
[上步從至陣外, 龍骨大等, 留殿下〈坐〉於東作門外
상이 도보로 따라서 진 밖에 이르자, 용골대 등이 전하를 동쪽 작문(作門) 밖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라고 하여, 殿下를 임금(전하)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일기의 기사에서, 청태종은 일률적으로 皇帝라고 표기했고, 인조도 일률적으로 上이라 표기했다. 딱 이 부분만 殿下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임금이라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의 殿下는 말 그대로 ‘전의 아래’이다. 즉, ‘상이 도보로 따라서 진 밖에 이르자, 용골대 등이 동작문 밖에 있는 전의 아래에 머무르게 하였다’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삼배고두는 ‘전의 아래’에서 행한 것이다.
임금의 호칭인 전하(殿下)는 ‘전(殿)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황제(天子)의 호칭인 폐하(陛下)는 ‘천폐(天陛)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황제를 알현하는 계단의 아래에 서있는 신하’가 황제를 부르는 데에서, 기원한다고 말하는데, 아무리 한문의 해석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전(殿)은 가장 고귀한 자가 머무르는 집(지붕)을 말하고, 폐(陛)는 하늘궁전의 계단을 말한다. 하늘궁전은 하느님이 머무르는 집이고, 황제는 하늘아들이므로, ‘하늘궁전의 계단 아래에서 하느님을 알현하는 자’가 바로 천자(天子)인 황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늘궁전의 아래에 있는 가장 고귀한 자’ 즉, 하느님을 가리켜서 전하(殿下)라 부르는 것이다. 殿은 우리가 운동회나 행사를 할 때 본부석에 설치하는 천막 즉, 바닥이 없는 지붕만 있는 건물을 가리킨다.
따라서, 천제(天帝), 천황(天皇), 천군(天君)이라 일컫던 동국의 임금을 가리켜 전하(殿下)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다가, 전하가 폐하 보다 아래의 호칭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원래는 전하가 폐하 보다 높은 위치였다.
---삼전도의 예식에서 단(壇)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 있는데, 바로 진(陣)이다. 필자가 방위놀이라 이름붙인 유신의 제례에서, 방진은 신문(神門)이 달린 사직단의 바깥쪽 담에 해당한다. 또, 동작문(東作門, 陣門, 陣東門)은 사직단의 동신문(東神門)이다. 삼전도의 단은 국가사업에 의해 계획적으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급하게 임시로 만든 것이다. 더구나 동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만든 것이다. 단 뿐만 아니라 예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청나라에서 준비하고 실행했다. 인조를 비롯한 동국인들은 몸만 참가했다. 그래서, 단만 조성하고 사직단의 바깥담이나 신문(神門) 등의 구조물은 만들지 못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담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진이다.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실록)
甲冑而帶弓劍者, 各方陣而擁立, 旗矛[旌旄]劍戟, 森列四周, 張樂鼓吹(일기)
일기를 보면, 각방진(各方陣)이라 하여 방진(方陣)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몇 개의 방진을 쳤는지, 방진끼리 어떤 형태로 구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단을 둘러싼 하나의 진이 있었고 그 진에 동문(東門, 東作問)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추정하면, 전체를 둘러싼 아주 큰 둘레의 방진이 있었고, 그 안의 가운데 부분에 단이 조성돼 있고, 그 단을 둘러싸고 동문이 달린 담의 역할을 하는 진이 쳐져있고, 진의 너머에 또 다른 방진, 또는 좌우로 병사가 나열해 있었고, 거기에 청태종이 앉아있는 황옥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사들 외에 제례악을 연주하는 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을 둘러싼 동문이 달린 담장의 역할을 하는 진만이 구조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나머지 진은 구조물이 아닌 그냥 군대이다. 그리고, 동문은 실재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병사들이 틈을 만들어 문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최소한 두 개의 방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큰 둘레의 방진과 단을 둘러싼 방진이다.
---실록에서는 上行三拜九叩頭禮라고 하였는데, 승정원일기에서는 上三拜叩頭, 上復三拜叩頭라고 하였다. 일기의 두 번째 삼배고두는 실록의 삼배구고두례와 같은 것이지만, 첫 번째 삼배고두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일기가 실록보다 자세하다 하지만, 일기에 기록된 내용 중에서 실록에 없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러면, 첫 번째 삼배고두는 누구에게 한 것일까? 왜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을까? 먼저, 누구에게 절을 한 것인지 알아보자.
[龍骨大等下馬, 上亦下馬, 坐碑石下。龍骨大等先入報, 已而出來, 先導而行。上步從至陣外, 龍骨大等, 留殿下〈坐〉於東作門外。上三拜叩頭。龍骨大等入報出傳曰, 前日之事, 欲言則長, 勇決出來, 深用喜幸。上答曰, 天恩罔極。龍骨大等, 引入, 由東作門以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淸人臚唱。上復三拜叩頭。龍骨大等引出, 由東作門而出,
용골대 등이 말에서 내리니, 상 또한 말에서 내려 비석 아래에 앉았다. 용골대 등이 먼저 들어가 보고를 하고는 이윽고 나와서 선도하여 걸었다. 상이 도보로 따라서 진 밖에 이르자, 용골대 등이 전하를 동쪽 작문(作門) 밖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상이 삼배고두례(三拜叩頭禮)를 행하자, 용골대 등이 들어가 보고한 다음 나와서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나왔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천은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동쪽 작문을 통해 들어가니,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여창(臚唱)하자, 상이 다시 삼배고두례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나와 동쪽 작문을 통해 나와서는]
(일기)
사실,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동쪽 작문(作門) 밖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상이 삼배고두례(三拜叩頭禮)를 행하자, 용골대 등이 들어가 보고한 다음 나와서 전하기를~’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다.
첫 번째 삼배고두의 대상은 청태종이 아니다. 설령, 백번을 양보해서 청태종에게 절을 했다고 치더라도, 직접 대면해서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적 사실이다. 한번 더 양보해서, 체면이 어쩌고 예법이 어쩌고 하여, 직접 대면하지 않고 절을 한 것이라 치자. 그러면, 두 번째 삼배고두례는 누구에게 한 것인가? 거짓말쟁이 사기꾼들아! 그대들이 지금까지 말하길, 인조가 청태종을 직접 대면하고 절을 하였다고 말하여 왔다. 두 번째 삼배고두는 인조가 청태종을 직접 대면하고 절한 것이라, 말하여 왔다. 묻겠다. 첫 번째는 진 너머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절을 하고, 두 번째는 직접 대면하고 절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예법이 어쩌고저쩌고 하여 대면하지 않고 절을 한다면서, 직접 대면하고 절을 한 것은 무엇이냐?
그대들의 말대로 하더라도, 첫 번째 절을 한 다음에 청태종이 ‘기쁘고 다행이다’라고 하고, 인조가 ‘천은이 망극이다’라고 하여, 인조가 항복을 하고 청태종이 항복을 받았는데, 또 다시 절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절은 항복하는 절이고 두 번째 절은 신하로서 청태종을 대면하기 위한 절인가? 억지도 정도껏 부려라. 그러면, 두 번째 절을 한 다음에는 청태종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인조는 두 번째 절을 하고 나서, 왜 진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가? 이것은, 진 안의 단 위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며, 두 번째 절은 하늘에 행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행한 첫 번째 절도, 하늘에 행한 것이 된다. 첫 번째 삼배고두도, 두 번째 삼배고두도 모두 다 하늘에 절한 것이다. 청태종에게 절을 한 것이 아니다.
승정원일기는 확인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가? 그대들의 거짓말이 영원히 탄로 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가? 이제 양심선언을 하라. 더 이상 역사를 왜곡하지 마라. 동국의 역사를 복원하라. 그것이 박애의 시작이다. 그것이 인류를 살리는 첫걸음이다.
---두 번 절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첫 번째 절이 실록에 기록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실록에는 기록되지 못한 첫 번째 절이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실록을 편찬하면서 누락한 것일까? 실수일까, 고의일까?
첫 번째 절은 용서를 구하는 행위였다. 인조가 죄를 지었기에, 남염의 차림으로 서문을 통해 성을 나옴으로써 죄지었음을 표현했고, 그 행위를 계속 이어 용서를 구하는 절을 하였고, 절을 하고 나서 “천은이 망극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용서 받았음을 표현하여, 청죄(請罪)를 마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하기 쉬운 것이,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지 청태종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 청태종에게 죄를 지었고 청태종이 죄를 용서하였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청태종이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나왔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라고 하니, 인조가 답하여서 말하길
“천은이 망극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청태종의 말은, 용서를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청죄를 하느라 수고를 한, 청죄를 하느라 고생을 한, 청죄를 하느라 욕본 인조를 위로하는 말이다. 사실상 청태종이 용서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형식상 하늘이 용서한 것이다. 청태종을 거부하였으니, 청태종에게 죄를 지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냥 청태종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받은 청태종을 거부하였으니,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다.
예를 들어, 어명을 받은 어사가 어명을 전달할 때, 그 순간에 어사는 임금이 되는 것이고, 어사를 거역하는 것은 임금을 거역하는 것이다. 어명을 받은 어사를 거역하였다면, 그것은 어사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죄를 지은 것이 된다. 따라서, 그 죄는 임금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 어사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천명을 받은 청태종을 거역하는 것은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늘뿐이다. 여기서의 천명은 청나라가 중국이 되라는 하늘의 명을 말한다.
청나라가 주장하는 인조가 지은 죄는, 중국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명나라를 대신하여 청나라가 중국이 되는 것이 천명인데, 동국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청나라를 거부하고 명나라를 붙잡고 늘어진 것이, 천명을 어긴 것이 그 죄이다. 즉,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된다. 그래서, 저렇게 복잡한 절차를 행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차는 모두 하늘에 대해 행하는 것이다.
청나라가 중국이 되는 것이 하늘의 뜻인데도, 인조가 이것을 계속 거역하여 하늘에 죄를 지었기에, 천명을 실현하고 천벌을 주기 위해, 청태종이 하늘을 대신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 된다. 따라서, 청죄의 행위를 하지 않고 천하를 유신하게 되면, 인조가 자발적으로 유신한 것이 되어, 청태종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이 없어지게 되고, 천하를 태평하게 한 청태종의 공적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어지럽힌 죄인이 되며, 폭력으로 중국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 패륜아가 된다. 그래서, 인조를 죄인으로 만들려고, 남염의 차림으로 서문으로 통하게 한 것이며, 면박여츤 등은 어쩌고저쩌고 한 것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여 임금이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태종의 명분이다.
따라서, 동국인들이 삼전도의 일을 왜 치욕으로 여겼는지, 왜 실록에서 빼버렸는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청죄를 한다는 것은, 단종이 노산군이라 불리는 것과 같으며 연산군과 광해군이 끝내 군으로 남게 된 것과 같다. 햇볕정책이 잘못된 정책이었다며,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용서해달라고 사과하는 행위와 같고, 4대강사업이 잘못된 정책이었다며,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용서해달라고 사과하는 행위와 같다.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이다. 삼배고두의 절을 하면서 항복을 하였기에, 이마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삼배고두를 하였기에 삼전도의 굴욕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청죄의 예식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에, 동국 안에서 이러한 청죄의 예식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반드시 임금이 바뀌는 큰 사건이다. 인조(仁祖)를 군(君)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다. 다행히, 부모인 동국과 자식인 청나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사실, 임금이 바뀐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조가 자신의 자리를 걱정하고 청나라로 끌려갈 것을 걱정한 것이, 단순히 전쟁에 패배했기 때문은 아니다. 하늘에 죄를 지었기에 그러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단순히 전쟁에 패배했다면, 항복을 하면 받아주겠다는데, 자리 걱정을 왜 하겠는가. 일반적인 전쟁에서 상대가 항복을 하면, 적을 통솔하기 위해서라도 적장의 직위를 박탈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인조의 청죄를 피하려고 홍서봉이 은근슬쩍, 용포를 입고 남문으로 나와도 되느냐고 물은 것이며, 용골대는 인조가 죄인이라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여, 인조의 청죄하는 행위를 예식에 집어넣은 것이다. 청죄의 예식은 동국이나 청국이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결국, 현실적으로 청나라의 뜻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공식문서인 실록에서는 살짝 빼버린 것이다.
---청태종의 환영하는 말에, 인조가 ‘천은망극(天恩罔極)’이라 답한다. 이를, 청태종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안타깝게도 세상 모두가 저런 뜻으로 알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천은(天恩)과 황은(皇恩)은 전혀 다른 것이다. 천은은 하느님의 은혜이고 황은은 황제의 은혜이다. 종교적인 하느님은 천신(天神)이고, 정치적인 하느님은 천제(天帝, 天皇, 天君)로서 동국의 임금을 가리킨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天子)이지 천제(天帝)가 아니다. 따라서, 천은에 감사하다는 말은, 하느님 또는 동국의 임금에게 감사하다는 뜻이 된다. 다만 여기에서는, 인조가 한 말이므로 종교적 하느님인 천신께 감사하다는 말이 된다.
---첫 번째 절은 청죄이고 두 번째 절은 유신이다. 청죄는 수치이고 유신은 자랑이다. 용포를 못 입고, 남문을 통과하지 못 하는 것도 청죄의 예식에 포함될 수 있지만, 청죄의 예식은 삼배고두를 한 번 하는 것으로 청죄의 모든 예식이 끝난다. 그러나, 유신의 예식은 삼배고두를 시작으로 방위놀이1과 방위놀이2 그리고, 활쏘기 놀이와 진찬행주까지 마쳐야 유신의 모든 예식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청죄의 예식만 살짝 빼버리면 삼전도에서 있었던 예식은, 인조에게 수치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유신은 자랑이지만 스스로 한 것이 아니기에, 폭력에 의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되었으니, 삼전도의 유신도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래저래 삼전도의 일은 수치가 맞다. 삼전도의 굴욕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었던 굴욕과는 전혀 다른 굴욕이다. 당시 인조의 시각이나 동국인의 시각으로는 굴욕이 맞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의 시각으로는 굴욕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우리들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도 굴욕이라 한다. 이는 크나큰 역사왜곡이다.
---실록만으로는, 인조가 삼전도에 도착하자 청태종이 ‘잘 오셨다’고 말하고, 인조도 ‘하늘의 은혜가 크다’고 답하여, 단순히 환영인사를 나눈 것이 된다. 그러나, 일기에서는, 인조가 삼전도에 도착하여 하늘에 죄를 빌어 용서를 받고 나자, 청태종이 ‘잘 오셨다’고 말하고, 인조도 ‘하늘의 은혜가 크다’고 답하여, 왜 천은망극이라 하였는지 의문이 풀린다.
그러나, 기존의 지식으로는 실록의 기록도, 일기의 기록도 모순이 된다. 기존의 지식으로 실록의 기록을 살피면, 청태종이 잘 왔다고 인사하는데, 여기에 온 것은 청태종의 은혜가 크기 때문이라 답하여, 여기어 온 것은 청태종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 주었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이 되어, 언뜻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항복(삼배고두)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여서 항복을 하러 왔다면, 항복을 하고 나서 ‘청태종의 은혜가 크다’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아직 항복을 하지도 않았는데, 살려주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되어, 말이 안 된다. 청태종은 인조가 항복을 하지도 않았는데 인조를 살려주겠다고 말한 것이 되며, 인조는 살려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항복을 한 것이 된다. 정작, 항복을 하고 나서는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는다.
기존의 지식으로 일기의 기록을 살피면, 인조는 청태종을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을 하고, 청태종도 인조를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을 받고, 항복을 한 후에 서로 대면하게 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항복을 하는 이상한 상황이 이어진다. 백번 양보해서, 두 번째 항복을 감사인사라 쳐도, 절만 하였지 말로는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항복할 때는 감사를 말로 표현하고, 정작 감사인사를 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인조는 삼전도에서 두 번 하늘에 삼배고두례를 하였다. 한 번은 죄를 비는 절이었고, 다시 한 번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절이었다. 청태종에게 절을 한 것이 절대 아니다.
---필자가 방위놀이라 이름붙인, 인조의 방위놀이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은, 삼전도의 진실에 다가가는 중대한 두 번째 열쇠가 된다. 이 날의 기사에서, 사관은 방향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1.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 上行三拜九叩頭禮。 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 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 모퉁이로 들어와서 단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2.
[龍胡以汗言, 請上登壇, 汗南面而坐, 上坐於東北隅西面, 而淸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 又淸王子四人, 坐於西北隅東面, 二大君連坐於其下。 我國侍臣, 給席於壇下東隅, 江都被執諸臣, 入坐於壇下西隅,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龍骨大等, 引入, 由東作門以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淸人臚唱。上復三拜叩頭。龍骨大等引出, 由東作門而出, 更由東北隅而使地坐於壇東。大君以下, 自江都被執, 列立於壇下少西矣。已而龍骨大等, 以皇帝言, 請上登壇。皇帝南面而坐, 上坐東北上西南[面]而坐。淸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而坐。淸王子四人, 竝西北東面而坐, 鳳林·麟坪二大君, 連坐於其下。我國侍臣, 給席於壇上[下]東隅, 江都被執之臣, 使坐於壇下西隅,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동쪽 작문을 통해 들어가니,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여창(臚唱)하자, 상이 다시 삼배고두례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나와 동쪽 작문을 통해 나와서는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지나 단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에서 잡혀 와서 단 아래의 약간 서쪽에 늘어서 있었다. 이윽고 용골대 등이 황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쪽 윗자리에 앉았는데 서쪽을 향해 앉았다. 청나라 왕자 세 사람은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는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네 사람은 모두 서북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봉림(鳳林)과 인평(麟坪) 두 대군은 그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주었고, 강도에서 잡혀 온 신하는 단 아래의 서쪽 모퉁이에 앉게 하고서]
{승정원일기, 한국고전번역원}
먼저 방위놀이1을 살펴보면,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한 후에, 진의 동쪽으로 나갔다가 동북 모퉁이로 들어와서 단의 동쪽에 앉았는데, 출처인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서는 {...}의 해석을 빼먹었지만,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이어서, 대군이하가 단 아래 소서의 방향에 늘어섰다는 것이다. 아마도, 노서(老西)는 서남서(西南西)를 말하고 소서(少西)는 서북서(西北西)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항복을 하러 왔다면서 진을 왜 들락날락 하는가? 절을 하고 난 다음에 ‘진의 동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동북으로 들어와서 단의 동쪽에 자리하다’라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방위놀이2를 살펴보면,
이어서, 청태종이 인조에게 단에 오르겠다고 청하였다. 단 위에 앉아있던 청태종이 인조에게 단 위로 오르도록 명령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단 위의 동쪽부분에 앉아 있던 인조에게, 단의 아래 서쪽이나 북쪽에 있었을 청태종이, 인조에게 단에 오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는 뜻이다. 청태종이 남쪽을 향해 앉았다는데, 황제는 중국의 왕이므로 단의 북쪽 변두리가 아닌, 단의 정중앙에 자리했음이 틀림없다. 이어, 인조가 동북쪽 구석으로 옮겨가 서쪽(서남쪽)을 향해 앉았다. ‘인조가 동북 구석에 앉아 서남쪽을 바라보고, 청태종이 중앙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다’라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방위놀이 1과 2는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삼전도에서 있었던 방위놀이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표현한 제례이며, 방위놀이1은 개천(開天)이고 방위놀이2는 벽지(闢地)이다. 삼전도의 제례와 사직단의 제례는, 같은 구조의 단에서 제례를 올린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목적이나 제례절차가 완전히 다르다. 삼전도의 제례는 천지개벽이고, 사직단의 제례는 개벽 후의 세상경영이다. 주역 설괘전 5장과 6장을 살펴보자.
[帝出乎震, 齊乎巽, 相見乎離, 致役乎坤, 說言乎兌, 戰乎乾, 勞乎坎, 成言乎艮. 萬物出乎震, 震東方也, 齊乎巽, 巽東南也, 齊也者, 言萬物之絜齊也. 離也者, 明也, 萬物皆相見, 南方之卦也,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蓋取諸此也. 坤也者, 地也, 萬物皆致養焉, 故曰致役乎坤. 兌, 正秋也, 萬物之所說也, 故曰說言乎兌. 戰乎乾, 乾西北之卦也, 言陰陽相薄也. 坎者, 水也, 正北方之卦也, 勞卦也, 萬物之所歸也, 故曰勞乎坎. 艮東北之卦也, 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 故曰成言乎艮.](5장)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動萬物者莫疾乎雷. 橈萬物者莫疾乎風, 燥萬物者莫熯乎火, 說萬物者莫說乎澤, 潤萬物者莫潤乎水, 終萬物始萬物者莫盛乎艮. 故水火相逮, 雷風不相悖, 山澤通氣, 然後能變化旣成萬物也.](6장)
‘帝出乎震 ~ 成言乎艮. 萬物出乎震, 震東方也 ~ 艮東北之卦也, 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 故曰成言乎艮’에서 帝는 ‘하느님, 천신, 태양신’을 가리키고, 설괘전 5장은 태양이 경로를 따라 운행함으로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설명이다. 즉, 방위놀이1은 이것을 표현한 제례이다. 동작문 밖에 설치된 전(殿)은 하늘궁전이며 태양신의 처소이자, 동국의 임금이 머무는 자리이다. 그래서, 태양신인 인조가 동작문 밖에 있는 전의 아래에서 삼배고두를 함으로써, 말세를 끝낸 것이다.
태양신이 전을 떠나 동작문(東神門)을 통해 들어가, 단의 북쪽에서 삼배고두를 함으로써, 개천(開天)을 시작한다. 절이 끝나고 동작문으로 나갔다가, 전이 있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동북쪽 모퉁이를 통해 다시 들어가, 단의 동쪽에 앉음으로써 개천이 끝나게 된다. 동북쪽은 시작과 끝의 간방(艮方)으로서, 태양신의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라, 이곳을 경유한 것이다. 단의 동쪽에 앉는 것은, 아침에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말하며, 태양신이 천하의 동쪽에 하강하여 자리를 잡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천하의 동쪽에 자리 잡는 것을 신시개천(神市開天)이라 하며, 신시를 건설하는 것은 동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동국이 곧 신시이다.
혹자는, 환웅이 신시를 건설하고 배달국을 세운 것이 개천이며,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것은 개천이 아니고, 개천절은 환웅의 신시개천을 기념한 것이며, 단군조선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이 아주 틀리지 않은 것이, 우리 한국의 시작을 이른바 단군신화의 신시개천에서, 환웅의 배달국에서 찾고 있으니 그러하다. 그러나, 환웅이 개천을 한 것이 맞지만, 단군도 개천을 했다. 마찬가지로, 환인도 개천을 한 것이다. 신라도 개천을 했으며 고려도 개천을 했고, 조선도 개천을 하였다. 이것이 하늘나라인 동국의 역사이고, 하느님이 거주하는 신시의 역사다.
設席於壇下北面을 해석하길,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라고 하여, ‘북면’을 ‘북향’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잘못이다. 실록과 일기 모두에서 남면, 서남면, 서면, 동면 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두 방향을 뜻한다. 그래서, 그 앞쪽에 나오는 북면을 북향으로 해석한 것 같은데, 북면은 ‘앞면을 북쪽으로 둠, 북쪽에 있는 면’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어, 그 뜻을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직단의 구조를 보면 판위라는 구조물이 있는데, 제례 때 임금이 서는 자리이다. 그 판위는 단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모든 제례는 남향으로 지낸다. 지고의 태양신, 지고의 하느님은 북극성에 계시고, 북극성의 명을 받은 태양신이, 천지개벽을 하기 위해 북극성에서 하강하여, 처음 내리는 곳이 천하의 북쪽이다. 따라서, 태양신인 인조의 개천하는 삼배고두는 단의 남쪽이 아니라, 단의 북쪽에서 행해야 맞는 것이다. 결국, 여기의 北面은 북향이 아니라 북쪽 면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청태종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다. 청태종은 이 제례의 주인공으로서 제주에 해당한다. 또한, 태양신의 아들인 천자이므로 역시 태양신이다. 사직단에서, 제주인 임금의 이동 경로는 북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을 경유하여 서신문(西神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어로를 따라 북쪽의 판위로 이동한다. 또, 동국과 중국의 사람들이 만날 때는 동서로 나누어 앉는 관습이 있다. 또, 강도에서 잡혀온 대군이하의 사람들이 소서에 위치했다. 따라서, 황옥의 위치는 진 밖의 북쪽이나 서쪽이었을 것이고, 개천 예식에서는 진 안으로 걸어 들어와서, 단 아래 서북쪽이나 북쪽, 또는 단 아래 서쪽에 서있었을 것이다.
방위놀이2는, 하늘의 뜻 즉, 하늘의 말씀을 땅에 구현한 상태를 표현한 벽지(闢地)이다. 천신의 작용으로 사람과 만물이 번성하고 중국이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표현한 것이다. 천자(天子)는 중국의 왕이고 성인(聖人)이므로, ‘離也者, 明也, 萬物皆相見, 南方之卦也,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蓋取諸此也’이므로, 청태종이 남향하여 앉은 것이다. 또, ‘終萬物始萬物者莫盛乎艮’이기에 인조가 동북방에 앉은 것이다. 동국은 신국(神國)이고 동국의 임금은 천제(天帝, 태양신)이기 때문에, 동국의 책무는 아들인 중국을 사대모화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향하여 앉은 청태종을 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請上登壇은, 단 아래에 있던 청태종이, 단 위의 동쪽에 앉아 있던 인조에게, ‘인조에게 자신의 등단을 청하다’이다. ‘인조에게 단 위로 올라오도록 명령했다’가 아니라, ‘인조에게 단 위로 올라가고 싶다고 말하다’이다. 방위놀이1이 끝날 때, 使坐於壇東, 使地坐於壇東이라 하였으므로, 인조는 이미 단 위의 동쪽에 올라와 있었다. 또,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청태종은 단 위에 있지 않았다. 於壇東은 ‘단의 아래 동쪽에’가 아니라 ‘단 위의 동쪽 부분’이다. 단의 아래는 壇下라고 표기하고 있다.
방위놀이1은 개천인데, 개천의 주인공은 인조다. 방위놀이2는 벽지(闢地)인데, 주인공은 청태종이며 인조는 조연이 된다. 물론, 벽지를 하는 주체는 인조이며 청태종은 객체이다. 하지만, 벽지를 하는 목적이 천하를 융성하게 하는 것이므로, 벽지 이후의 세상의 주인공은 청태종이 되는 것이다. 즉, 중국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며, 동국은 그러한 중국의 뒤를 봐주는 것이다. 원래 환국이 동국으로 변하기 전에는 따로 중국이 없었지만, 짐을 덜기 위해 중국을 만들어 환국이 동국이 되었고, 동국의 하느님과 중국의 하늘아들님이 함께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천하의 동쪽(동북쪽)에 동국을 만들어 개천을 하고 나서, 천하의 가운데에 중국을 만들고, 중국으로 하여금 천하를 다스리도록 한 것이 바로 벽지이다. 벽지는 곧 유신(維新)이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계속 요구한 것은 유신하라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상대에게 항복하라는 요구를 하지, 상대의 법제를 고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유신은 단순히 동국 내의 법제를 고치는 행위가 아니라 천하의 법제를 고치는 행위이다. 즉, 동국과 명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법제에서, 동국과 청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법제로 바꾸는 행위, 이것이 청태종이 인조에게 요구한 유신이다.
청태종이 단의 정중앙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행위는, 청나라가 중국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청태종을 뒤에서 바라보는 인조의 행위는, 동국과 청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형태의 법제로 유신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을 교체하는 유신은, 단순히 정권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개벽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방의 세계관이며 정치철학이다. 중국을 교체하는 삼전도의 예식은, 인조가 천지개벽을 행한 것이다.
---‘차 한잔을 올렸다(進茶一杯)’는, 용골대 등이 인조를 비롯하여 단 위의 사람들에게 차를 올린 것이다. 결코, 인조가 청태종에게 차를 올린 것이 아니다. 이 날의 제례에 관한 모든 일은 청나라가 주관하고 있다. 단을 쌓는 것, 방진을 치는 것, 인조를 이끌어 제례를 지내는 실무자 등, 모든 것을 청나라가 준비했다. 인조를 비롯한 동국인들은 그냥 몸만 왔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차를 올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뭐가 있어야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용골대가 인조를 이끌어 차를 올렸다느니, 인조가 차를 올리게 했다느니, 청태종에게 차를 올리게 했다느니 등의 말이 전혀 없이, 그냥 ‘차를 한잔 올렸다’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은 제례의 실무자인 용골대 등이 인조와 청태종 등에게 차를 올린 것이다. 임금에게 차를 올린다는 것은 제례가 끝났음을 나타내는 의식이다. 차를 올리고 나서 바로, 활쏘기를 하며 놀았다는 것을 보아서도, 제례가 끝났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진다(進茶)라는 단어만으로도 인조가 청태종에게 차를 바친 것이 아니라, 제례의 진행자가 단 위의 사람들에게 차를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다는 ‘임금께 차를 올림, 또는 그 의식(儀式)’이라는 뜻인데, 인조와 청태종 등이 행한 행위가, 항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례를 지낸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얼마 후 진찬하고 행주를 한다. 이 날의 예식은 기쁜 일이고 잔치를 벌일 일이다. 그래서, 진찬행주를 하게 된 것이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동국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워진다는 것, 새롭게 한다는 것, 유신이라는 것은 원래 기뻐할 일이다.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고, 어찌 동국인에게 기쁜 일이겠는가? 청죄의 예식을 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애초에 군사(軍事)로 인해 이런 예식을 행하게 된 것이니, 기쁠 일이 뭐 있겠는가?
---盃盤以次降殺, 而上前盃盤, 與皇帝盃盤一樣, 蓋尊敬而優異之也
술상이 차례로 예수(禮數)가 줄었으나 상의 앞에 놓인 술상은 황제의 술상과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존경하고 우대하기 위해서였다.
(일기)
이 해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강쇄(降殺)가 관용어인데도 불구하고 次降殺를, ‘차례로 예수가 줄었으나’라고 해석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강쇄는(降殺) 신분의 귀천(貴賤)과 고하(高下), 혈연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의식의 등급이 낮아지는 것을 말함. 봉작(封爵), 상복(喪服), 제례(祭禮) 등 친족의 순서를 구별하여 차례를 정할 때는 그 가까운 정도에 따라 의식 절차를 정하였음.}
강쇄가 무엇인지, 삼전도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 설명하면,
초상이 났을 때, 신분에 따라 어떤 사람이 3년상을 치러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1년상을 치러야 하는데, 어떤 상황에 의해 3년상을 치러야 할 사람이 1년상을 치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잔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강쇄는 등급을 낮추는 것을 말하지, 등급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신분상 1년상을 치러야 할 사람이, 상황에 따라 3년상을 치르는 경우는 없다.
次의 뜻이 여기서는 ‘두 번째 등급, 다음 등급’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次降殺는 ‘두 번째 등급으로 강쇄하다, 다음 등급으로 강쇄하다, 두 번째 등급으로 낮추다. 다음 등급으로 낮추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인조의 술상을 다음 등급으로 낮추었다는 뜻이다.
등급을 낮추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의 술상과 한 모양으로 같다는 것은, 인조의 원래 등급은 황제의 등급 보다 한 등급 위였다는 것을 말한다. 인조의 등급을 낮추어서 자신의 등급과 같게 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등급을 높여서 인조의 등급과 같게 할 수는 없다. 즉, 인조의 술상은 원래 1등급으로서 황제보다 더 높은 등급인데, 강쇄하여 황제의 등급과 같은 술상을 차렸다는 뜻이 된다. 결론적으로, 인조가 청태종 보다 한 등급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蓋尊敬而優異之也를 ‘존경하고 우대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여, 蓋尊敬의 蓋를 아주 반대로 해석하였는데, 개는 ‘덮다’라는 뜻으로, ‘존경을 덮다’라고 해석해야 맞다. 분명히, 인조의 술상 등급을 강쇄한 것이지 청태종의 술상을 강쇄한 것이 아니다. 청태종의 술상 등급을 낮추어서 인조의 술상 등급과 같게 하여야, 존경하고 우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해석은 ‘존경을 덮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다’가 된다.
올바른 해석은, ‘술상이 2등급으로 강쇄되어, 상의 앞에 놓인 술상이 황제의 술상과 똑같은 모양을 한 것은, 존경을 덮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낸 것이다.’가 된다.
---上辭出,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실록)
俄而上請辭降壇, 由壇之後, 從西北隅而出, 얼마 후 상이 인사를 하고 단을 내려갈 것을 청하였다. 단 뒤쪽을 경유한 뒤에 서북쪽 모퉁이를 따라 나오니,(일기)
승정원일기를 볼 것 같으면, 단의 동북쪽에 앉아 있던 인조가, ‘단의 뒷부분을 지나 서북쪽의 모퉁이로 나왔다’고 써져 있다. 즉, 이것은 앞에서 설명했던 방위놀이2를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전도의 모든 진실을 밝혀주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단 뒤쪽을 경유하다, 단의 뒷부분을 지나다, 단의 뒤를 지나다’는 ‘단하(壇下)에서 단의 북쪽을 따라 돌아서’라는 말이 아니라, ‘단상(壇上)에서 단의 북쪽 부분을 지나가다’를 말한다. 출발지가 단의 동북쪽이었으므로, 단의 뒤쪽을 사선으로 경유하여 내려가서, 서북쪽으로 진을 나온 것이 된다. 애초에 인조가 있었던 곳이 단의 위였기에, 인조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지점이 단 위의 동북쪽이었기에, 단 위의 북쪽 부분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단에서 일어난 일이 방위놀이가 아니라면, 청태종은 단의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앉았을 것이고, 인조는 청태종의 왼편인 단의 동북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앉았을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임금과 신하의 배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조가 단의 뒤쪽을 경유하여 서북쪽 모퉁이로 진을 빠져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조가 걸어 나가는 경로에 청태종이 앉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의 기사대로 인조가 단을 내려오려면, 방위놀이2의 위치에 청태종과 인조가 각각 위치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청태종은 단의 북쪽이 아닌, 정중앙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던 것이 되고, 인조는 청태종의 왼편 뒤쪽인 동북쪽에서, 청태종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서남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던 것이 된다. 설령, 부딪히지 않기 위해 청태종을 피해서 살짝 돌아가더라도, 신하가 임금의 뒤쪽으로 퇴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청태종의 위치는 단의 정중앙이다. 이것은 너무 단순한 사실로서, 중국이므로 단의 중앙에 앉는 것이고, 동국이므로 단의 동북쪽에 앉는 것이다. 천하도를 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皇帝南面而坐, 上坐東北上西南[面]而坐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쪽 윗자리에 앉았는데 서쪽을 향해 앉았다.]
(일기) - 서쪽은 서남쪽의 오역.
청국과 동국의 관계가 임금과 신하인데, 청태종과 인조의 관계가 임금과 신하인데, 신하가 임금의 뒤쪽에 앉아 있을 수 있는가? 신하가 임금의 뒤쪽을 지나갈 수 있는가? 신하는 임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임금은 신하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즉, 이것은 기존의 지식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청태종이 인조를 보려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야 하고, 인조는 청태종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게 되는데, 이는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동국은 부모로서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역할을 하므로, 뒤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것이고, 중국은 자식으로서 동국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천하만물을 융성하게 하므로, 부모를 뒤에 두고 앞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빽이 좋다’라는 표현이 있다. 영어인 back, background 등에서 온 말로 보이는데, 이는 한국식 영어로서 올바른 표현은 아니고 well connected가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같은 표현으로 쓰이는 우리말 중에 ‘뒤를 봐주다, 후견인(後見人)’이라는 말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빽이 좋다’는 ‘후견인이 좋다’와 뜻이 같을 뿐만 아니라, 단어적인 구성(back=後)도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러한 신조어가 생겨난 이유가, 원래부터 후견인이라는 말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견인의 어원은 무엇일까,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동양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수강단의 제례에서, 동양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수강단의 제례에서, 제례의 방위놀이2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청태종이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인조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청나라를 중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천하의 법제(法制)를 유신하는 것이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계속 요구한 것은, 인조가 유신(維新)하라는 것이었다. 유신이란 ‘낡은 제도를 전부 새롭게 고치는 행위, 모든 것을 개혁하여 새롭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일본의 명치유신이 다 같은 뜻의 말이다. 천하의 법제를 유신한다는 것은, 중국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하는 것이다.
---上辭出(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上請辭降壇(상이 인사를 하고 단을 내려갈 것을 청하였다)
상사출(上辭出)은 ‘인조가 제례를 마치고 진을 나오다’라는 뜻이고, 상청사강단(上請辭降壇)은 ‘인조가 청태종에게 강단(受降壇)을 마치자고 청하였다’라는 뜻이다. 降壇을 ‘단을 내려가다’로 해석했는데 이는 잘못이고, ‘단을 내려가다’는 하단(下壇)이다. 강단은 수강단(受降壇)의 준말이다.
---[龍胡等又將貂裘而來, 傳汗言曰: "此物, 當初意欲相贈而持來。 今見本國衣制不同, 非敢强使着之也, 只表情意而已。" 上受而着之, 入庭展謝,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而已龍骨大等, 持貂皮裘出來, 以皇帝言傳曰, 此物當初欲爲相贈而持來, 今見本國衣制, 與此不同, 非强使着之也, 只欲表情而已。上受而着之, 入庭伏謝
잠시 후 용골대 등이 초피구(貂皮裘)를 가지고 나와 황제의 말로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에 주고자 해서 가져왔는데, 지금 보니 본국의 의복 제도가 이와 같지가 않다. 감히 억지로 입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情理)를 표하고자 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엎드려 사례하였다.]
청태종이 용골대를 통해 말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실록과 일기를 살피면, 청태종이 동국을 가리켜 ‘본국(本國)’이라 칭하고 있다. 이것은 동국이 본국이고 중국(명나라, 청나라), 외국(몽골, 일본 등)이 번국(藩國, 蕃國)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지식에서는 ‘본국’이라는 단어를 풀이하기를, ‘자기 나라를 스스로 일컫는 말’이라 한다. 그런데, 청태종은 자기 나라인 청나라가 아닌 동국을 본국이라 칭하고 있다. 이것은, 동국정운을 본국정운이라 하는 것과 같다.
본국을 네이버국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는데,
1. 자기의 국적이 있는 나라. [비슷한 말] 본나라, 본방(本邦).
<그 외국인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2. 지배국이나 보호국을 식민지나 피보호국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3. 국적을 옮긴 경우 그 이전의 본디 국적이 있던 나라.
4. 말하는 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 나라를 이르는 말.
<본국에서는 귀하의 입국을 허가합니다.>
2번이 원래의 뜻이고 1, 3, 4번은 근래에 왜곡되어 확장된 뜻이다. 동방(東方)은 본국인 동국과 번국인 중국, 외국으로 이루어진 연방제의 세계(世界)이다. 세계의 세(世)는 속세(俗世)로서 중국을 가리키고, 계(界)는 천계(天界)로서 동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계(界)는, 도교를 국교로 정하면 동국이 선계(仙界=彦界)가 되는 것이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 동국이 불계(佛界, 佛國土)가 되는 것이고, 유교를 국교로 정하면 동국이 유계(儒界)가 되는 것이고, 동방의 기본적인 세계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의해서는 동국이 천계(天界)가 된다. 세(世)는, 동국이 국교를 무엇으로 정하든 백성이 사는 지상(地上=天下=世上)을 가리키는 속세(俗世)가 된다.
흔히 말하는, 천상천하(天上天下)의 천상은 계로서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천하는 세로서 인간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우주관이자 세계관이다. 따라서, 천상천하라는 단어와 세계라는 단어와 우주라는 단어는, 서로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우주(宇宙)라는 단어는 천지인(天地人)이 아니라 천지(天地)와 동의어가 된다. 이런 세계관을 정치적으로 구현한 것이 동방, 동국, 중국, 외국인 것이다. 즉, 동국은 하늘나라가 되고 동국의 임금은 하느님이 되며, 중국은 천하가 되고 중국의 임금은 하늘아들(天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속세의 속(俗)은 중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속에서는 언문을 반절이라 한다”라는 말의 참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속(俗)이 중국(天下, 世上, 地上, 땅)을 뜻하는 단어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속의 반대말은 선(仙)이다. 춘추이전의 선도(仙道, 風流)가 국교이던 시절에, 산(山, 언덕, 邱, 수미산)은 하늘나라를 뜻하는 단어였고, 골(谷, 고을, 州, 九州, 골짜기)은 땅을 뜻하는 단어였고, 인(人)은 천지인으로서의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사람은 {山+人=仙}으로서 仙이 되어 신선(神仙, 神人, 仙人)이라 하며, 골에 있는 사람은 {谷+人=俗}으로서 俗이 되어 속민(俗民)이라 한다. 즉, 하늘나라인 山은 선계(仙界)가 되고, 땅인 谷은 속세(俗世)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속(俗)이 중국(땅, 天下)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그리고, 산에 사는 사람은 人이 되고 골에 사는 사람은 民이 된다. 이것이 내려오면서, 人과 神이 분리되어 人은 하늘나라의 백성을 뜻하고 神은 하늘나라의 지배자를 뜻하게 된다. 그래서, 인민(人民)의 人은 동국의 백성을 가리키게 되고, 民은 중국의 백성을 가리키게 된다. 또, 神(天帝)은 동국의 임금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다가 나중에, 人은 보통의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따라서,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에서의 ‘백성(民)’은 중국인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결국, 훈민정음은 중국인을 위해 만든 것이 된다.
---[入庭展謝] [入庭伏謝] 여기에서, 정(庭)은 단순히 ‘뜰’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廷과 같은 뜻의 글자로서 조정(朝廷)을 가리킨다. 즉, 청태종이 앉아있는 황옥의 앞마당이, 그 순간의 중국조정(中國朝廷=中朝)이 되는 것이다. 伏謝는 ‘(땅에) 엎드려 감사를 (표했다)’가 아니라, ‘감사를 표했다’이다. 展謝도 ‘감사를 표했다’이다. 엎드려 절하면서 감사를 표한 것인지, 고개만 살짝 숙이면서 감사를 표한 것인지, 이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 伏謝는 단순히 ‘감사를 표하다’라는 뜻의 관용어로 보이기 때문이다.
{入庭展謝(실록), 伏謝於庭(실록), 入庭伏謝(일기)} => 뜰에 들어가 展謝했다, 뜰에서 伏謝했다, 뜰에 들어가 伏謝했다.
{入伏於庭(실록), 入伏于庭(일기)} => 뜰에 들어가 엎드렸다.
위의 실례에서 살펴보아 알 수 있듯이, 伏謝는 관용어가 분명하다. ‘엎드려 감사했다’라고 기록할 것 같으면, ‘入伏於庭展謝, 入伏展謝, 入伏感謝, 入伏謝禮, 伏庭謝禮, 伏地謝禮’ 등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伏謝를 ‘땅에 엎드려 감사했다’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국보(國寶), 고명(誥命), 옥책(玉冊), 연호(年號) 등을, 중국에게서 받거나 중국의 것을 따른다고 하여, 동국이 중국의 속국이라고 하는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국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아들이 사용할 물건을 아버지가 만들어서 내려줄 수도 있지만, 아버지가 사용할 물건을 아들이 만들어서 받칠 수도 있다. 옥책은, 존호를 올리는 것이므로, 중국이 동국에 받치는 것이 맞다. 고명은, 아랫사람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충성맹세와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중국이 동국을 인정하였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연호는 동국과 중국이 각자 따로 쓰는 것이 옳지 않다. 같은 세계이므로 동국과 중국이 같은 연호를 쓰는 것이 맞고, 일본 등의 외국은 각자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할 수 있으므로, 따로 연호를 쓰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 동국은 뒤를 봐주는 역할이라, 아들인 중국에 맞추어 연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우리 동국에서는 호란, 왜란이라 부른다. 일부의 무식자가 조일전쟁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 여긴다. 동국에서는 왜란(亂)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役)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문록, 경장의 역이라 한다. 조선전쟁이니 항왜원조니 등은 모두 다 현대에 만들어낸 용어이다. 역(役)이란 ‘일하다, 힘쓰다’라는 뜻으로서, 주역(主役), 조역(助役), 역할(役割), 부역(負役), 부역(賦役) 등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 자기가 맡은 책무(역할)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즉, 명나라에서는 만력의 때에 자신이 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로 만력의 역이라 하는 것이며, 일본 역시 문록경장 때에 자신이 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로 역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본국에서는 란이라 하는 것이며, 조선의 나머지 나라에서는 역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일전쟁이라는 단어는, 남한과 북조선이 통일되지 못하고 그대로 이웃나라가 되어, 먼 미래에 한국동란을 ‘한조전쟁, 조한전쟁’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동방의 세계관을 이해하면, 동국이 왜란과 호란 등의 모든 전쟁을 란이라 하는 이유와, 양요(洋擾)를 요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나 신미양요 등은 모두 올바른 표현이다. 당시의 상황에 맞는 호칭을 써야지, 시간이 흘러 아주 달라진, 현재의 상황에 맞추어 호칭을 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금은 한국과 일본이 이웃 나라이지만, 당시에 동국과 일본은 본국과 번국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임진왜란이라 칭해야 하는 것이다.
---조공(朝貢)이라는 것도, 속국인 동국이 종주국인 중국에게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등록금, 책값, 생활비, 용돈 등을 보내주는 것이다. 인천아시안게임 때에, 작은 종로구에 있는 청와대가 커다란 인천에게 지원금을 내주는 것과 같다. 만약, 미래에 천재지변이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도단위 자치정부가 모두 독립을 하였고, 미래의 시점으로 역사를 바라보아, 종로구가 인천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는 각 자치단체에게 정기적으로, 수시로 국고에서 지원을 한다.
동국에서는, 조공의 품목이나 양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만, 조공 그 자체에 대해 시비를 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조공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왜 이러한 점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가? 조공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서,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데에 있어 그 방법들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조공의 물품은 한반도에서 거두어 들여 중국에 보낸 것이 아니다. 중국대륙 전체에서 거두어 들여 중국에 내려주는 것이다. 동국과 중국의 조세제도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세금에 국세와 지방세가 있고 사업에도 국가사업과 지방사업이 있듯이, 동국과 중국도 경제나 행정, 군사 등의 각 분야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중국은 동국이 조공품을 보내주지 않으면, 조공에 들어있는 물품은 구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록과 일기를 종합하면,
[용골대와 인조가 말에서 내린 다음, 인조는 그냥 아무 곳에 앉아 기다렸고(비석 아래에 앉아 기다렸고), 용골대 혼자 들어가 청태종에게 인조가 도착하였음을 보고하고 나와서, 용골대가 인조를 모시고 진의 바깥에 도착하여, 진의 동작문 바깥에 설치한 전(殿)의 아래에 인조가 자리하게 하였고, 전의 아래에서 인조는 하늘에 청죄하는 삼배고두를 행하였고, 용골대는 청죄의 예식이 끝났음을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서, 청태종의 덕담을 용골대가 전하였고, 인조는 그에 답하는 덕담을 하였고,
용골대가 인조를 인도하여 동작문을 통해 진 안으로 들어가서, 수강단의 북쪽 아래에 깔린 자리에 인조가 자리하기를 청하였고, 이때부터 유신하는 예식을 시작하게 되는데, 청나라 사람의 여창에 맞춰 삼배고두를 하고 난후, 용골대의 인도로 동작문을 통해 진 밖으로 나왔다가, 진의 동북쪽 모퉁이를 통해 다시 진 안으로 들어가서, 단 위의 동쪽에 앉았고, 이로써 방위놀이1이 끝나고, 방위놀이2를 시작하기 위해, 강도에서 잡혀온 대군이하 여러 사람이 단의 아래 소서(少西)에 늘어서고,
청태종이 용골대를 통해 인조에게 등단을 청하여 방위놀이2가 시작되고, 청태종은 단의 정중앙에서 남향하여 앉고, 자리를 옮긴 인조는 단의 동북쪽에서 서남향하여 앉고, 청나라 왕자 3인과 세자가 연달아 단의 동쪽에 앉아서 서향하고,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단의 서북쪽에 앉아 동향하고, 봉림과 인평대군도 연달아 앉아 동향하고, 인조를 따라 나선 신하는 단의 동쪽 아래 모퉁이에 앉고, 강도에서 잡혀온 신하는 단의 서쪽 아래 모퉁이에 앉아, 방위놀이2의 배치가 끝나고, 진다(進茶)를 하여 방위놀이2를 마치고,
얼마 뒤 청태종이 급히 소변을 보러 단을 내려가고, 인조 역시 단을 내려가 진 밖으로 나가, 진 밖의 동쪽 모퉁이에서 쉬었고, 청태종이 돌아와 단 위의 자리에 앉아, 인조에게 다시 단 위로 돌아오기를 청하였고, 인조가 자리에 앉은 후, 청태종이 용골대를 통해 동국의 신하들에게 활쏘기를 시켰고, 모두 문관이라 활쏘기를 잘 못한다며 거절하지만, 용골대가 강권하므로, 정이중이 나서서 쏘지만 활과 화살이 동국의 것과 달라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고, 청나라 왕자들과 장수들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활을 쏘며 놀았고,
얼마 뒤 진찬행주를 하게 되고, 인조의 술상 등급을 2등급으로 낮추어 차려서, 인조의 술상을 청태종의 술상과 같게 하였는데, 청태종이 인조의 존경을 덮어서 자신의 잘남을 드러낸 것이고, 술이 세 순 돌자 청태종이 상을 치우라 명하였고, 상을 치우려 할 때 청태종의 시종 두 사람이 각각 큰 강아지를 끌고 와서 청태종의 앞에 이르자, 청태종이 직접 고기를 잘라 던져주고, 고기를 받아먹고 난 후, 두 시종이 강아지를 끌고 단을 내려갔고, 얼마 후 인조가 수항단을 마치자고 청하고, 단의 뒤를 경유하여 서북쪽 모퉁이로 진을 나왔다.]
---지금까지, 중요 부부만 살펴보았다. 삼전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두서없이 막 달려왔다. 삼전도의 굴욕이 사실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출발할 때에는, 단순히 ‘동국의 임금이 중국의 임금에게 절을 했을까’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동국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지만, 찾아낸 증거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나마 증거들도 반박불가의 완벽한 증거로 쓰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더구나, 필자에게는 사명감도 없었고 아둔하고 게을러서, 굳이 증거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천운이 따라 반박불가의 완벽한 증거인, 훈민정음의 정체와 목적을 밝혔었고, 이제 다시, 또 하나의 완벽한 증거인 삼전도의 진실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 밝힌 분명하고 확실한 것 두 가지는, 인조가 삼배고두를 행한 대상은 청태종이 아니라 하늘이었다는 것과, 인조가 삼전도에서 방위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인조는 삼배고두를 두 번 하였는데, 청죄의 절과 유신의 절로서, 청태종이 아닌 하늘에 하였다는 것과, 중국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하는 의식인, 천지개벽을 재현하는 제례를 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원래의 목적인 ‘인조가 청태종에게 절을 했는가’라는 의문을,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뜻밖의 아주 큰 수확을 하게 된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 분명하다. 훈민정음의 정체와 목적을 밝힐 때에도, 애초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일이 돼버린 것, 역시 하늘의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