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광
김성민
발목뿐인 사내가 가슴팍에서 번쩍번쩍 뛰는, 환영이었네 어련하였거니 음지에서만 광나는 주검들 어둔 데서 살가죽 가만 벗고 있었지 어떤 눈빛에 몸이 뽑혀 던져지는 줄 모르고 신원미상의 플래시만 서성였다네 그만 좀 하게 나 그만 시달리려 무덤 개방해 내…방하였네 거기, 신…체로 들어오시게 꺼이꺼이 사적인 광량 맹세코 소리 내지 않겠네
앞 얼굴에 뒤 얼굴이 상영된다
사람 아닌 체질은 비좁다
세계의 외출이 우리를 비워내고 있다
살아서 깜박인 것들은 죽어서도 깜박거렸다네 조명을 꺼내 청소되지 않은 잔광을 탈탈 털어본 적 있었네 서둘러 밝아질수록 빛은 무겁게 변한다지 내…생 치르려 흐느낌의 겉면적을 빛에 넣던 날, 그대들…이 세상 모든 위치로 흩어졌다네 가장 환한 그림자처럼 빛을 찾다가 꺼져갔다네 의식과 세계 사이의 오차를 좁힐 수 없었네
넋을 터득하는 빛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외로 틈입된다
양지에서 실신하는 혼령들
내게 맞는 실외가 점등됐을 때
나 은밀을 잃어버렸지
목구멍에 육신 들…켰네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의 사내는 별도의 대사가 있을 때까지
지시받은 발광을 계속할 것이다)
공복 인형
간밤은 한 겹 감촉이었지 전등만 끄면 길어지는 새벽, 먼젓번 동틀 때까지 불 나간 방안을 기다리던 나인데 아 그건 이를테면 눈을 공란으로 비워두는 방음
가지고 놀다 버렸던 그 많은 인형들
굳이 쓰거나 읽지 않아도
몸으로 적어보는 다리와 길이
네가 나를 선뜻 가지고 놀았으되
이제부터 당신과 혼자 웅크려야 할 노릇이
눈꺼풀 안쪽은 도망도 못 친 채근으로 가득했지 딱 눈멀어 끝내 동작을 다 떼어내지 못한 팔다리들 완력에 체결되었지 공포의 이음새를 저만치 이동할 수 있으므로 구체와 관절을 전부 움직이고 말았어 알몸으로 타인의 분비 구멍을 찔러대는 사람들처럼 성한 몸 캄캄하게 만들지도 몰라 생의 부위들을 여전히 끼워 넣고 있었지
너와 나는 너와 나대로
여기까지 움직였던가
미친 외형이여
생각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서로의 사소함에 옷 입혔을 때
냉큼 인체 잊어버렸지
방에 떨어진 실루엣이 새벽 내내 벽을 등지고 뒤척인다 그토록 내리 잤음에도 몸짓은 밤새 삐걱거리고
온통 끝장난 것들만 가득한 방 안에서 너 역시 너를 얼마나 그만두려고 했을지
가끔 영혼 고프면
유기된 걸음끼리 음영 거닐다
뒤엉켜 살아지게 하였지
새벽 산책
시골에서 새벽 산책을 나서면 빛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매만지게 된다. 자정을 넘기면 갑작스레 꺼지는 편의점 간판 불빛, 일순간 밤은 공간을 닫고 어떤 질감이 되어 살갗에 훅 들이쳐 온다. 어둑한 그림자들이 더 어두운 공기를 밀어내며 산등성이로 상승하는 느낌, 시야 대신 부피로 감광되는 바람들이 내 몸의 윤곽을 더 꽉 다물게 만드는 기분이 든다. 그제야 온전히 내 눈의 체열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나 뜨거운 암흑이 해골 속에 옹송그리고 있었다는 감각이다.
2년 동안 직장을 세 번 잃고, 털어버리기엔 아쉬운 월급도 한 번 떼어먹혔다. 골치 아픈 처지를 잊고자 빛이 최대한 잠잠해진 시간을 골라 산책하는 버릇을 들였다. 4층 원룸을 내려가 캄캄한 공간에 몸을 섞고 오면, 생의 본체는 방안에 남고 그 외형만 모든 것을 집어삼킨 어둠에 훌훌 헹구고 돌아오는 기분이 들어서다. 살아있는 것은 만져서는 안 될 무언가를 잔뜩 쓰다듬고 온 사람처럼, 산책 후 방에 돌아오면 영혼의 몸무게가 제법 감량된 듯해 마음이 편해진다.
두어 달가량 밤 걸음을 반복하니 삶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착각이 든다. 아마도 삶에서 이탈한 헛것들이 저 밖 들판에서 기웃거리다 내게 득달같이 달라붙어 방안으로 딸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눈두덩 안쪽에 머물던 영혼이 기어코 실외로 배출되었을 때, 도로 기어들어 오고 싶은 육신을 찾아 나의 사지에 매달려왔을 것이다. 삶이 공포인지 공포가 삶인지 분간할 수 없는 처지가 나와 그들을 같은 밤에 풍덩 빠트렸을 것이다. 생각이 육체를 옮기고 나면, 미처 따르지 못한 흐느낌만 세상에 유기된 채 발밑에서 뒤엉켰을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계속 살아남았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시를 쓴다. 나의 윤곽을 이승에 두고 싶어서, 동이 틀 때까지, 빛이 다시 세계를 공간으로 복원할 때까지, 밤이 나를 아무리 두루뭉술하게 만들어도 끝끝내 체온을 잊지 않기 위해서, 쓴다. 다만 밤의 형색을, 그 잊힌 외형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어 앓는 소리들을 문장으로 기록할 뿐이다. 나보다 앞서 밤 속으로 사라진 울음과 죽음과 고통을 골몰하며, 새벽마다 어둠에 발길 머물게 할 따름이다. 언제고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누군가 나의 음영을 밤 속에서 뒤적거려주길 바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