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으로 붉게 다려진 밤이었다. 깊은 밤 그윽한 달의 향기가 은은하게 문창지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영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 위해 버릇대로 오른손 중지와 약지를 들어 혀에 가져다 대었다. 그 때 문창지 밖으로 댕기머리를 땋은 소녀의 그림자 하나가 비쳐 들었다. 영은 잠시 책을 넘기던 손짓을 멈추고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자 밖에서 소녀의 그림자가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하였다.
“도련님, 환이옵니다. 자리끼를 가져왔습니다.”
영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말했다.
“문 밖에다 두고 가거라.”
소녀의 그림자가 낮게 고개를 숙이며 마루에 무언가를 놓는 것이 보였다. 소녀의 그림자가 잠시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 말하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들렸습니다. 무고하신지요.”
영의 검은 눈동자가 문창지에 비친 소녀의 그림자를 따라 흔들렸다.
“잠시 들어오거라.”
방 안 가득 일렁이던 초의 주홍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더니 이내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네 어째서 이 야심한 시각에 잠에 들지 못 하고 근심에 쌓여 예까지 찾아 온 것이더냐.”
영은 달빛에 가늘게 그어진 고운 환의 얼굴 곡선을 따라 손등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어 내렸다. 환의 검은 그림자가 달빛에 물들어 익숙해지자 영은 조신하게 몸을 옆으로 돌린 환을 끌어 앉았다.
“네가 참 맹랑한 아이로구나. 당돌한 아이야.”
방 가운데로 한숨이 피어올랐다. 누구의 한숨인지 알 수 없으나 다음순간, 영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영은 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달빛을 받은 환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그득 차올라 있었다. 그리고 영은 다시 환을 품에 앉았다. 영의 가슴까지도 환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이 피어올랐다.
첫 닭이 울기도 전에 대사도(호조판서)의 집은 부산스러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닭의 울음보다 부엌의 솥 끓는 김이 먼저 피어올라 대사도의 집 처마위로 일순 먹구름이 차오르는 듯 보였다. 순산이 닭의 목을 비틀었다. 하늘은 어둠을 걷고 푸르게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영원히 날이 개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순산은 닭의 남은 몸뚱이를 다듬으며 예신에게 말했다.
“오늘은 잔칫날답지 않게 날씨가 꽤 쌀쌀하지 않아? 꼭 초상날 같이 을씨년스럽구먼.”
순산의 말을 예신이 잘랐다.
“아 그런 말 말어.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구 그래. 우리야 매일 이런 시간에 앉아 일을 하니 그렇지 해 뜨고 날 따땃하게 대펴져 봐. 누가 알겠어. 그런데 오늘 좀 을씨년스럽긴 하네. 안개도 쉬이 걷히지 않는 것이. 지난밤에 달그림자도 안 졌던데 왜 그런가 몰라.”
예신이 파를 다듬다 말고 손으로 자신의 양팔을 감싸 쓸어내리며 진저리 치는 시늉을 냈다. 이 때 환이가 우물가에서 길어 올린 물독을 이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예신과 순산의 입이 딱 다물어지고 부엌은 다시 물 끓는 소리와 음식들이 지글 지글 익는 소리로 가득 찼다. 환이 채우는 물독으로 차오르는 물소리가 청명하지 않고 무겁게 독을 메웠다. 환은 물독을 마저 채우며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슬슬 주인마님 치장을 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예신이 손을 옷 춤에 닦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예신의 다리로 일순 피가 몰려들었는지라 예신은 연신 자신의 다리를 토닥였다.
“그려, 그려. 얼른 가 봐. 일손이 부족하니 진명이한테 네 일 좀 거들어 달라고 해라. 참, 도련님은 일어나셨나?”
예신의 말에 순산이 예신의 옆구리를 팔뚝으로 쿡 찔렀다. 날카로운 순산의 눈빛이 예신에게
‘옴살 맞은 여편네 뭣 하러 쓰잘떼기 없는 소리를 해’ 하고 말 하는 듯 했다. 예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환이 물 항아리를 바닥에 내려두고 막 부엌 문간을 나서려는데 반대편 문으로 다급하게 자연이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할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고루 숨을 쉬지 못 하므로 입술이 퍼렇게 질려서 흡사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아 보였다.
자연이 문을 들어서자마자 털썩 주저앉더니 넋이 빠진 몰골로 입술을 물고기마냥 뻐끔거리며 조금씩 달싹였다. 자연의 어미인 순산은 순간 멍하니 자연의 하는 꼴을 보고 있다 퍼뜩 정신이 들어 주저앉은 자연에게로 다가가 자연의 두 뺨을 연신 내리치고 몸을 어르고 흔들어댔다.
“야야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데 이 호들갑이냐. 아이고 야, 야 눈 좀 봐라 눈이 풀렸다. 눈이 풀렸어. 환아 그라고 있지 말고 사발에 물이나 떠 같고 온나.”
환이 몸의 방향을 틀기도 전에 순산이 다급하게 물을 바가지 째 떠서 자연의 얼굴에 뿌리고 먹이며, 온 몸을 주물렀다. 그러자 자연의 얼굴이 순산의 쪽으로 조금씩 돌아와 입술을 달싹였다.
“마님이.. 마님이..”
답답한 순산이 가슴 저고리를 두 주먹으로 틀어쥔 채 귀를 바짝 대고 자연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크게 불렀다.
“마님이 뭐, 뭐야 답답하다 크게 좀 말해봐라.”
그러자 자연이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엄마. 마님이.. 마님이 돌아가셨어.”
“이게 무슨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이야. 아이고. 환아 너 그러고 멀뚱히 있지 말고 안채에 좀 가봐라. 아니다 같이 가자.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이게.”
갑작스런 자연의 말에 순산과 예신은 환과 함께 안채로 달려갔다. 그러나 순산과 예신은 문을 열고 들어설 용기가 서지 않았다. 하여, 반쯤 열린 문틈으로 한쪽 눈을 찡긋하고 나머지 한 쪽 눈으로 신랑신부 첫날밤을 훔쳐보듯 안채를 들여다보았다. 이 때 환이 문을 홱 하고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순산과 예신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그 자리에서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곳에는 음부와 가슴을 모두 드러낸 속옷 바람의 유씨 부인이 아랫도리를 벗은 낯선 사내와 원앙금침이 수놓아져 있는 침상 위에 눕혀져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일이래. 응? 무슨 일이야.”
아연 실색한 예신과 순산은 믿지 못 할 광경에 맥없이 주저앉아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이 때, 마치 짜인 각본이라도 하듯 대사도와 그의 아들 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안채 마루 위에 주저앉아 있는 여인네들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여 주위를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그제야 예신과 순산은 얼떨떨한 정신을 바로잡고 일어섰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고개를 숙이고 저만치 구석으로 물러났다. 환만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대사도에게 아뢰었다.
“마님께서 화를 당하신 것 같습니다.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조금 있으면 동네 아낙들이 일손을 돕기 위해 몰려올 터인데 어찌 처결할까요.”
대사도는 한 걸음도 안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은 채 턱에 난 수염을 몇 번씩 쓰다듬더니 아들 영을 바라보았다.
“영아, 너는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환아 너는 지금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방으로 가 진정시킨 뒤에 내 말이 있을 때까지 일체 문밖으로 나오지 말거라.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수습 할 것이니라.”
환은 고개를 조아린 뒤 아직도 넋이 빠져 있는 예신과 순산을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들 뒤로 집 안의 장정들이 재빠르게 안채로 들어갔다. 놀란 사람은 예신과 순산 그리고 순산의 딸 자연뿐인 것처럼 보였다.
유씨 부인의 잔치는 무산되었다. 오후 한 낮이 되어서 기별을 받지 못 한 고관대작의 부인들과 또는 그 하인들이 생일선물을 들고 찾아들었으나 문 밖에서 유씨 부인의 병고소식을 듣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후 하루해가 채 꺼지기도 전에 유씨 부인의 임종소식이 장안에 퍼졌다. 그러나 이미 후미진 장터 곳곳에 자신의 생일날 죽은 유씨 부인에 대한 몹쓸 소문이 퍼져들고 있었다.
예신과 자연은 빨래더미를 들고 모처럼 만에 빨래터에 나왔다. 빨래터에 나오는 일도 순번이 정해져 있는 일인지라 그 동안 나올 수 없었던 예신은 유씨 부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살짝 챙겨두었던 향주머니를 허리춤에 찼다. 예신의 입 꼬리가 샐쭉 맞게 올라갔다. 예신이 허리에 찬 향주머니는 유씨 부인의 생일이 있기 전 날 어느 대감 댁의 하녀인지 모를 여인네가 문을 들어서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맡겨두고 간 물건이라 예신 이외에는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게다가 유씨 부인의 소동 이후 그녀조차도 깜빡하고 전하지 못 한 것을 예신은 한 치 마음의 거스름도 없이 그녀의 것으로 치부해 버린 터였다.
몸에 지니고 다니기만 하여도, 그 향이 뭇 남정네들을 꼬여들게 한다는 사향주머니를 찬 그녀는 둘레둘레 자신을 쫓아오는 열일곱 갓 피어나는 자연의 미색에 반한 남정네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내심 기쁜 기색을 하였다. 예신과 자연의 이러한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녀들이 빨래터에 도착하자 수군거림이 일시에 쥐 죽은 듯이 멈추어졌다. 빨래터에는 빨래 방망이소리만이 빼곡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모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하는 소리들을 잠재우리가도 할 듯이 거센 방망이질 소리가 더러운 때구정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예신은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예신은 자연에게 말을 붙였다.
“얘 자연아 오늘 사내들이 나를 흘끔거리며 훔쳐보는 것 같지 않던? 아유 중국에서도 귀하디귀해서 양귀비만이 차고 다닌다는 사향주머니를 찼다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이러면 곤란한데.”
그러면서 예신은 일부러 자신의 가슴을 잔뜩 부풀게 만들어 허리춤에 찬 갖가지 현란한 꽃이 수놓아진 비단 향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헛기침 소리가 빨래터의 다른 아낙들의 시선을 한대 끌어 모았다. 건너편의 한 아낙이 예신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여?”
“아니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 한단 말여? 원 싱거운 여편네. 이 비단 주머니를 만져보고 이야기 하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집 마님. 외간 사내와 통하다가 죽은 게 사실이냔 말여.”
순간 자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방망이를 들고 있던 손을 덜덜 떨다가 덜컥 손에서 떨기고 말았다. 예신은 헛기침을 여러 번하며 아낙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누가 그런 못된 소문을 다 퍼뜨리고 다닌데. 아 난 몰라라. 얘, 자연아 그만 돌아가자. 여기 더는 못 있겠다.”
예신이 자연을 일으키려 한쪽 팔을 잡았으나 이미 자연의 몸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뒤라 땅에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자연은 그 자리에서 그만 실신해버리고 말았다. 이 일로 하여 유씨 부인의 이야기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음은 물론이요, 예신과 자연 그리고 자연의 어미인 순산은 엄한 문초를 받고 광에 갇혀버렸다. 소문은 급기야 유씨 부인이 죽은 지 사흘이 지나지 않아 관아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을의 사또인 이학진은 고심 하였다. 그의 집안 내력이라야, 부친 되는 이학선이 겨우 종3품의 사간으로 지낸 것이 다였다. 그리 큰 벼슬을 아비가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다가, 자신의 대에 넘어 오기 전 까지 크고 작은 고비가 많았던 지라 고을의 사또로 부임해 올 적에도 대번에 대사도에게 찾아 들어 엎드려 절하며 잘 봐주십사 청을 넣을 정도로 몸을 숙인 그였다. 그런 그가 생각해 본 바, 이번 일에 관여해 보았자 좋을 일은 없단 생각이 들었다.
소문으로 듣기에도 유씨 부인의 품행이 방정맞지 않아 여러 차례 입방아에 올랐다. 그가 추측하건데 이 일은 그녀의 방정맞지 않은 성품을 수치로 여긴 문중에서 비밀리에 유씨 부인에게 벌을 내리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헌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그만 유씨 부인이 침상에 외간 사내를 끌어 들이니 처음엔 유씨 부인의 갑작스런 병고로 인한 죽음을 자연스레 짜 넣었던 이야기에 변수가 생기고, 하여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키고자 했는데 일이 새어나가 일파만파 커진 것이 아닌가싶다. 사또는 이런 저런 추측을 해 보아가면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안절부절 하였다. 이 때 밖에서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보고를 올렸다. 보고의 내용인 즉슨, 유씨 부인의 사체에서 다량의 부자가 검출 되었으며 이 외간사내의 사체도 역시 유씨 부인과 사인이 같았다. 이 사내의 신분을 확인해 보니 그는 이웃 마을의 평범한 상인으로, 마음은 좋았으나 계집질에 날 새는 줄 모르는 그러한 위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사내의 사체의 등에 유씨 부인의 은장도가 꽂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또한 발견 후에 누군가 유씨 부인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꽃아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칼에 꽂힌 사내가 스스로 독약을 마셨다..”
이학진은 머리가 혼란스러워 짐을 느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옷을 벗고 죽어 있었으므로, 이 또한 엄연한 간통 현장으로 보아 무방한데, 이 일이 크게 알려지면 대사도의 집 안 체면은 물론이거니와, 이 사건을 조사해 나라에 고해야 하는 이학진에게도 남아 날 것은 없었다. 이학진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의 입장이 이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사건을 대한지 하룻밤 만에 이학진의 얼굴은 흡사 도깨비에 홀렸던 사람처럼 홀쭉해지고 초상집 개 마냥 비리해졌다. 날이 밝자 이학진은 그 몰골로 축 늘어져서는 대사도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대사도 어른. 솔직하게 털어놔 주십시오. 소인도 무얼 알아야 일을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이학진의 면전을 대하는 대사도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대사도는 허옇게 뜬 얼굴로 학진의 얼굴을 동병상련하여 가까이 다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보시게 사또. 부인이 음탕하다는 소문이 나 돌았단 것은 나도 알고 있었네. 내 귀가 그래도 제 구실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그래도 그 정도로 음탕한 여자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하였다네.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주겠나.”
대사도는 핼쑥한 얼굴에 까칠하게 터진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내 요 근래 부인의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하녀 하나를 시켜 부인에게 몸보신할 탕약을 매일 밤마다 올리게 하고 혹 무슨 병고가 생기지는 않나 유심히 살펴보라고 일러두었다네. 그러다 이 일이 생기기 며칠 전 밤이었지. 그 아이가 늦은 밤에 나를 찾아 와 이런 이야길 하더군. 안채에서 외간 사내와 두런두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몸을 숨기고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웬, 낮선 사내가 그 안에서 나오더란 말이야. 하도 주위가 어둑하여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 하였고 차림새로 보아하니, 평민의 옷차림이라 혹 하인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처음엔 그리 생각하였다고 했네. 그러다 부인이 낮선 사내와 함께 날이 새기 전까지 일을 치르는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나에게 달려왔다 하지 않겠나. 그러니 내 어이 답답하고 황당하고 화가 나지 않았겠나. 내 당장에라도 급습하여 그 년 놈을 요절내고 싶었으나 차마 내색은 못 했다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는 더욱 놀라운 말이 그 사내가 저번에 본 사내가 아니라는 것이야. 그러던 중 부인의 행실을 내 이 두 눈으로 지켜볼 겸 하던 차에 이런 일이 터진 것이라네.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통 감이 잡히질 않아.”
대사도의 말에 이학진은 펄쩍 뛰었다. 붉게 충혈 되어 서슬까지 퍼렇게 선 그의 두 눈에 서 찔끔하고 마른 눈물이 삐져나왔다.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범인이 대사도어른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범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대사도는 한숨만 내쉬며 곰방대 쪽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아이를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대사도의 얼굴이 언짢은 듯 찡그려졌다. 곧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거기 밖에 누구 있느냐. 가서 환이 좀 불러오너라.”
밖에서는 다른 기척이 없었으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의 시름이 깊어 보였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마치 방 안 가득 개 두 마리를 사슬에 묶어 가둬 놓은 듯 했다. 잠시 후 사람이 마루를 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가까이로 다가온 그림자가 말했다.
“환이 왔습니다. 들어갈까요.”
환은 영특한 아이였다. 또 통이 큰 아이기도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환이라는 아이가 그런 아이였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흠일 만큼 당차기도 했지만, 여자로서 어디 가서 빠질 일이 없을 만큼 재색 또한 뛰어났다. 지난 봄 아들인 영이 사냥을 나갔다가 데려왔으나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으니 유씨 부인은 들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아들인 영이 바라고 그 또한 내색 않은 마음이 바라였으므로 허락 하였다. 이에 못 마땅한 기색이었던 유씨 부인은 스스로 환을 몸종으로 두었다. 이 유씨 부인은 양귀비 못지않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나 종종 몹쓸 소문이 돌기는 했으나, 환이 들고 나서는 그 소문이 유독 심하였다.
환은 이학진과 대사도 앞에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바짝 꿇고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래 네 이야기는 대사도에게 들어 알고 있다. 정녕 그 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렷다. 네가 지금 이 사석에서 진실을 고하지 않는다면, 공석에서는 너를 죽을 때까지 문초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학진은 처음부터 엄포를 놓았다. 이윽고 환이 고개를 들었다.
“사또, 소녀는 본 일도 들은 일도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그날 밤에도 마님께서는 침수 드신다며 소녀를 일찍이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곧 탕제를 올리는 일을 잊어버림을 알고 안채로 들었으나 그 때도 마님은 혼자 계시는 듯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이미 다 들었느니, 바른대로 고하여도 좋다. 이실직고 고하렷다.”
이학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환의 차분한 대답 어디에도 동요됨이 없었다.
“혼자 계셨습니다.”
“참 말이냐.”
“예. 어느 안전이라고 헛말을 아뢰겠습니까.”
대사도는 나직이 환에게 물었다.
“그래 그 탕약을 올린 시간이 언제이더냐.”
“자시(밤 11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그래 탕약을 지어 올릴 때에 너 말고 또 다른 이가 있었더냐.”
이학진은 환의 얼굴과 가녀린 몸을 가만가만 뜯어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다들 해시가 넘자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이후에 측간에 들렸다 온 예신아주머니를 만나, 아주머니가 지나치면서 제게 일찍이 하고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답니다.”
이학진의 얼굴이 짜증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탕약을 네가 올렸다고 했다. 그런데 마님께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느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네. 다음 날 온 의원의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줄 알았던 환의 담담함과 비장함마저 감도는 눈빛에 이학진은 한 번에 기가 질렸다.
“그래. 잘 하면 네가 독살하였다고도 고하겠구나. 어디 너의 진실을 들어보자.”
그제야 환은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몸을 바닥에 털썩 붙이고 넙죽 엎드렸다.
“대감마님 소녀는 기필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소녀같이 미천한 것이 무엇 때문에 부인마님을 독살하며 소녀가 탕약을 올린 것을 아는데 여직까지 도망가지 않고 여기 붙어 있었겠습니까. 다 소녀가 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결백하기에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소녀의 목숨을 지금 내어가도 좋으니, 선견지명을 내려주십시오.”
이학진과 대사도는 비록 배운 것 없는 아이일 지나 그녀에게서 당돌함과 더불어 이 시대의 탐관오리들에게는 볼 수 없는 기백을 보았다.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학진에게도 스쳐 지났다.
“그래, 허나 지금의 정황으로서는 너의 결백을 믿어 주고 싶어도 그럴 상황이 되지 않는 구나. 어쩌면 너에게 힘든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구나.”
대사도는 헛기침을 하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환에게 말했다.
“환아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이학진은 물러가는 환을 바라보며 대사도에게 나직이 물었다.
“저 아이를 유독 아끼시는 것 같은데 무슨 연유라도 있으신지요. 제 생각에는..”
이학진은 비록 그 벼슬이 낮아 언제 된서리를 맞게 될지 모르는 처지나, 혜안이 맑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도의 집 안에 숨은 이야기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된 서리를 피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서 전해 들어 벼슬이 높은 고관대작의 집 일수록 구린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대사도의 하품이 세월처럼 닳아버린 곰방대 끝으로 피어올라 담배 연기마저 나른하게 만들었다. 대사도는 그런 이학진을 처음부터 알아본 듯 했다. 그리하여 대사도도 이학진에게 천천히 비밀이 일렁이는 붉은 혀를 움직여 나직이 말을 꺼냈다.
“저 아이가 영이 어미와 많이 닮아서 그렇다네. 내가 죄책감을 씻을 길이 없어. 영이 어미가 죽고 나서 내 잘못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도 들었고 그 이후로 송장을 찾지 못 해 가묘를 만들고 절에 제를 부탁하기 전까지 얼마나 내 꿈에 자주 나타나는지. 내 저 아이를 영이 데려올 때부터 무거운 죄책감 때문에 막대할 수가 없는 것이라네.”
이학진은 그제야 대사도가 하잘 것 없는 아이의 목숨에 연연하여 일을 지지부진 끄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문에 영이 본 부인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씨받이를 하여 나온 것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씨받이를 한 여인은 대개 밤중에 쫓겨나거나 혹은 영이 어미처럼 아들을 낳아 첩이 되는 경우였는데, 소문에 의하면 아들을 낳은 이 여인을 대사도가 더 아껴하여 본 부인의 질투를 낳았다고 한다. 본 부인의 질투는 곧 사람을 시켜 영이 어미를 죽였다는 소문으로 끝나 있다. 소문의 진상은 유씨 부인 밖에는 모르는 일이다. 소문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대사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또한 가문의, 가문에 의한, 가문을 위한, 일이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모든 사실을 가슴에 묻고 무덤 속까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들어가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이학진은 대사도가 환을 본 순간부터 이런 일을 예감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일었다. 아들을 낳고도 미움을 사 생사불명에 원통한 여인이 된 영의 어미와 닮은 환이를 대사도는 정에 이끌려 끝내 가슴에서 내치지 못 하고 덮어주고만 싶은 것처럼 여겨졌다.
“허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야 대사도어른께서 하명하시면 그대로 상부에다가 이르겠으나,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찌 하시렵니까.”
“내 광에 가둔 하인 셋을 버리지 무엇 하겠나. 그 보다 더 편한 방도가 있을까 싶네만.”
대사도는 이학진의 말을 자르고 이미 결론을 지었다는 듯 말을 툭 내던졌다. 던져 놓고 보니 그 또한 소를 위한 대의 희생인지라, 잘 한 결정인지 본인도 찝찝하여 기분이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사도어른 예기치 않은 이야기가 하나 더 숨겨져 있던데, 영이 도련님 생모이신 분이 그 동생 분을..”
대사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의 상을 하였다. 이윽고 대사도가 고개를 들자 핏발이 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죄가 커서인지 여자의 질투가 새삼 무섭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네. 영이 어미가 둘 째 아이를 수태하였다는 것을 내 진즉에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더 큰 화를 불러들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다네.”
이학진은 알았다는 듯 조용히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대사도의 깊은 한숨이 곰방대 끝으로 하염없이 피어올랐다.
다음 날 이학진은 순산과 순산의 딸 자연 그리고 예신을 불러 그 죄를 물었다. 그러나 없는 죄를 고할 수 없었던 그녀들은 무조건 결백을 호소하고 자비를 구했다. 이학진은 이에, 원래부터 몸에 몹쓸 병이 있어 병환을 앓고 있던 유씨 부인의, 병으로 인한 죽음을 잘못된 소문으로 퍼뜨린 죄를 물어 세 하녀에게 벌을 내렸다. 그 벌인 즉슨 혀를 잘라 입을 봉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씨 부인에 관한 소문은 슬그머니 꽁지를 빼듯 누그러졌다.
그 이웃한 마을에서는 한 평범한 장사치가 사라진 사건이 있었으나, 어딘가에 보쌈이 되었거나 계집질 하던 계집년과 도망질 하였지 않느냐는 수군거림으로 심심치 않게 떠돌 뿐 이었다.
그러나 대사도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일이 잘 해결되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가 그의 가슴에 남아 속이 가뭄 든 논바닥처럼 바짝 바짝 말라가는 것이 아닌가.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이 오지 않자 대사도는 두 눈을 황소처럼 끔벅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뜰로 나갔다. 자시가 한 참 넘어 축시(새벽 한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렇게 뜰을 거닐다가 대사도는 자신의 아들이 거처하는 처소로 걸음을 두었다. 늦은 시각이니 만큼 아들 영이 자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고 한번은 늦은 밤까지 불이 켜 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특함이 떠올라 대사도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대사도가 아들의 방 앞까지 왔을 때 아들 영의 방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자는 모양이다 하고 대사도는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려 했다. 그런데 이 때였다. 영의 방 안에서 흐느끼는 처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사도는 혹 부인의 귀신이 든 것이 아닌가. 의미심장하여, 신고 있던 태사혜(양반들이 신던 화려한 가죽 신)를 벗어 두 손에 쥐고 영의 침소 가까이 몸을 기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사도의 귀에 들리는 여인의 음성은 환의 것이었다.
“그래. 그 이후 너의 어미는 어찌 되었느냐.”
환의 목소리는 여전히 또랑또랑 하고 맑았으나 울음에 섞여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소녀의 어미는 한쪽 어깨뼈가 으스러져서 걸레처럼 너덜거렸습니다. 허나, 돈이 없어 치료할 길이 없던 어머니는 그 몸으로 세월을 나셨고, 저에게 젖을 물리고 한쪽 다리를 저으면서 어화둥둥 하며 가끔씩 업어 주기도 하셨답니다. 어느 날인가는 대감마님께 마지막으로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며 곱게 단장하고 길을 나셨나이다. 소녀는 불길한 기분이 들어 한사코 말렸습니다. 혹여 마님께 들키는 날에는 두 모녀가 함께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어머니는 영 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님에게 들켜 화를 당하신 것이라 생각하여 복수를 결심하고 이리로 온 것입니다. 도련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환의 목소리가 바닥 깊이 내려앉는 순간 대사도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다리가 독사에 물려 깊이 독이 퍼지듯 온 몸을 조여 오는 듯, 하더니 맥이 탁 하고 풀렸다. 대사도는 한쪽 손에 잡고 있던 신을 마루에 올려놓고 주춧돌 위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어머니를 끔찍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씨 부인과 대감마님을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영은 환의 상체를 품에 앉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지 말아라. 환아. 네 그런 마음이 가여워 어찌할 수가 없구나. 환아. 이제 여기서 그만 마음을 접거라. 참으로 딱하고 가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구나.”
환은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고는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럴 수 없나이다. 도련님, 저는 그 여자의 허물을 모두 알면서도 덮어 주었던 대감마님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대사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환을 처음에 보며 느꼈던 미묘한 감정이 애틋함으로 뒤바뀌어 다시 새롭게 피어올랐다. 대사도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처소로 조용히 돌아갔다. 환의 흐느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소녀의 어미 되는 자는 사실을 고하려다 그런 화를 입게 되어 숨어 산 것이라 하였습니다.”
영은 언뜻 문 밖의 사람 형태를 본 것 같았으나 환의 기구한 이야기에 빠져 달그림자에 비친 허상이려니 생각했다. 밤이 짙어 질수록 광기에 휩싸인 달빛이 검은 기와지붕을 붉게 물들였다. 달의 묘한 마력이 집안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였다.
대사도는 불을 킬까 하다 어둠 속에 침잠하듯 조용히 과거를 떠올리며 자리를 보전했다.
환이 처음 영을 따라 집을 들어서던 날이었다. 환을 대한 유씨 부인의 얼굴이 편치 않아 보이기는 했으나 그 자신도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피어오르는 미묘한 감정에 정신이 팔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환의 곱상한 생김과 집안 사내들에게 뻗치는 눈길이 지나쳐 보이자 유씨 부인은 그녀를 몸종으로 삼고자 했다. 말릴 이유가 없었던 대사도는 허락은 했지만 혹여나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게 학대를 하진 않을까 심려했다. 아니나 다를까 환의 걸음이 이상한 날이면 조심스레 고약을 찾는 하녀들의 움직임으로 그는 자신이 심려하던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상심에 잠긴 대사도는 유씨 부인의 죽음이야 어찌 되었든 그 간의 숨겨둔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정리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가 훔쳐 들은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숨겨져 있으리라곤 끝 내 알 수 없었다. 대사도는 곧 환이 영과 같은 핏줄임을 밝히고 자신을 죽이러 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한편 여기 어둠 속에서 몰래 대사도의 집을 훔쳐보는 이가 있었다. 이 여인이야 말로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무서운 소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어둠 속을 달려온 이였다. 여인의 이름은 진남. 때가 꼬질 꼬질 낀데다 다 헤진 옷을 입은 여인은 한 쪽 팔이 성치 않아 덜렁이는 팔을 옷끈으로 움직이지 못 하게 허리춤에 둘둘 둘러 묶었다. 게다가 얼굴 한 쪽이 일그러졌으며, 한 쪽 다리마저도 심하게 절고 있었다. 이 여인의 생김새와 더불어 자연스레 풍겨오는 송장 썩은 내는 왜 이 여인이 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을 타고 이곳까지 왔어야 했는지를 말 해 주었다.
진남은 평범하지 않은 외모 탓에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숲 속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숲은 절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후에 어떤 인연이었는지 영의 생모의 시신을 거두게 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영의 생모가 또 다시 둘째 아이를 수태하였다는 사실을 안 유씨 부인은 사람을 시켜 영의 생모가 절로 향하는 숲길에서 해코지를 하였다. 영의 생모는 그대로 낭떠러지에서 굴러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 여인을 발견한 진남은 여인을 자신의 집에 들였으나 곧 아기를 낳고 목숨을 잃는다. 진남은 자신이 덤터기를 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녀를 따로 고이 묻어 장사 치러 주었다. 이후 진남은 아기를 키우며 남모를 무서운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녀의 품에서 딸로 자라난 환은 재색이 뛰어나고 가르친 것이 없어도 스스로 알아 명석한 아이로 자라났다. 그러나 환은 그녀와 전혀 닮지 않은 진남과 가난을 경멸하고 있었다. 환은 어린 나이에도 야심이 대단했다. 진남은 가슴 속에 응어리를 푸념 하 듯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 어린 환 앞에 한숨조로 자주 늘어놓았고, 그녀는 곧 진남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비밀들을 하나 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수려한 미모를 빌어 양반의 눈에 띄기 위해 몰래 사대부의 집을 훔쳐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대사도의 집을 유난히 눈여겨보았는데, 대사도의 집 장자인 영이 도령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사냥하러 나온 영과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고 이것이 기회가 되어 대사도의 집으로 들게 된 것이었다.
진남은 결심한 듯 이 모든 진실을 고하기 위해 어렵사리 담을 넘어 대사도의 집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러나 고래 등 같은 집 어느 구석이 대사도의 거처인지 알 길이 없었던 진남은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방황하였다.
이윽고 대사도의 방 문 밖으로 달빛에 물든 여인의 그림자가 비쳐 들었다. 대사도는 머뭇거리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목에 감겨 떨리고 있었다.
“화..환이냐? 거기 환이냐. 들어오거라. 기다리고 있었다.”
문 밖의 그림자는 화들짝 놀라 주춤거리는 듯, 하더니 사분하게 문을 열고 몸을 들여 놓았다. 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그림자는 대사도의 코앞까지 거침없이 걸어 들어와서는 털썩하고 주저앉아 이마를 바닥에 깔고 깊숙이 절을 올렸다.
“환아. 나도 일이 일어난 후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느니. 너의 어미 시신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어 가묘도 만들어 주었고 절에 부탁을 하여 극락가라고 제까지 지내 주었느니라. 네가 조금만 더 일찍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더라면 너희 두 모녀를 내가 도울 수 있었을 진데, 이 어이 불행한 일을 네 손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단 말이더냐.”
그러나 대사도 앞에 주저앉은 이는 환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눈이 익은 대사도의 앞에는 사람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고약한 송장 냄새를 풍기고 있는 해괴한 모습의 진남이 주저앉아 있었다. 진남이 기어서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 사태를 알 길 없는 대사도의 심장은 놀라움으로 심하게 몽둥이질 쳤다. 불현듯 진실로 억울한 영의 생모이든지 아니면 죽은 유씨 부인이든지 귀신이 된 그녀들 중 하나가 썩은 송장의 몸을 빌려 자신의 앞에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찾아 든 것이 아닌가 하여 기가 탁 막혔다. 고약한 내가 대사도의 앞으로 간격을 좁혀 들어올수록 담담해하려 했던 대사도의 마음과는 다르게 심장은 점점 빨라졌고 그러더니 기어이 똑 하고 멎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진남은 어둠이 익숙지 않아 그래도 결례를 범할까 싶어 기어서 대사도 곁으로 다가가던 차에 그가 갑작스레 쓰러지자 어안이 벙벙하여 대사도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진남의 심장도 조급함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영은 차마 환을 잡지 못 하고 놓아 주었다. 환은 영의 방을 나와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결심으로 대사도의 거처를 향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환이 처음 영의 눈에 띄었을 때도 환은 영이 사냥을 나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재색에 반한 영은 환의 신상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환을 본 유씨 부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환이 영의 생모와 닮은 것도 그러하고 환의 눈에 야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씨 부인은 환이 생각했던 것처럼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사대부 집안의 마님다운 면모가 풍겨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녀는 의심이 많고 조심성 많은 여인이었다. 재색이 뛰어남과 동시에 아이를 낳지 못 한 과오로 인하여 외간사내와의 몹쓸 이야기가 간혹 퍼졌으나 이 또한 근거 없는 이야기로 영의 생모를 추종하던 이들이 퍼뜨린 헛된 소문임이 보였다. 환은 그런 유씨 부인의 맘에 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들였으나 유씨 부인에게는 영의 생모와 닮은 환의 고운 자태가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번번이 미움을 샀다.
유씨 부인에게는 매일 올려야 하는 탕약이 있었는데 환은 이 탕약에 부자를 넣어 유씨 부인을 죽이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사도의 마음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사도 같은 중늙은이가 아니더라도 앞날이 창창한 영의 마음에 들었으니 이미 절반은 성사된 일이었다. 밖으로 나돌 수 없었던 진남에게는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들어 필요한 생필품을 전해주는 장사치가 하나 있었다. 환에게도 시킬 수 있는 일이었기는 하나 그녀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 싫었던 진남은 환이 다 커서도 장사치를 자신의 집으로 들리게 하였다.
환은 이 장사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환은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장사치를 만나면서부터 머릿속에 무서운 계략을 꾸며 넣기 시작했다. 하여 유씨 부인의 생일 전날 밤 필요한 물건이 있으나 너무 바빠서 길을 나설 짬이 없으니 늦은 밤 찾아오라고 일렀다. 한편 환은 유씨 부인에게 부자를 탄 탕약을 먹이고 장사치를 기다렸다. 어둑한 밤, 달빛이 기울어진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장사치의 모습이 비죽이 튀어 나오자 환은 문을 열어 조심스럽게 그를 안으로 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사치는 환의 조심스러움에 간혹 낮에 양반의 집을 방문할 때도 그와 같은 조심스러움이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안채로 향했다. 환이 눈웃음을 살살 치며 안 채 마루로 오르자 짐을 풀려던 그는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 마루로 올랐고 환은 미리 준비해 둔 탕약을 그에게 건넸다. 단 번에 부자를 탄 탕약을 아무 의심 없이 들이킨 그는 안 채 문을 열고 들어가는 환을 따라 가다 우뚝 하고 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 곳에는 음부와 가슴을 드러낸 유씨 부인이 반듯하게 들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상황을 직감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번쩍하고 비수가 날아들었다. 탕약의 효과도 있었지만 그는 저항할 길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환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장사치의 입가에 흘러내린 탕약을 닦고 아랫도리를 벗겨 몸을 드러내게 한 뒤 두 구의 사체를 나란히 눕혔다. 그러나 장사치의 등에 꽂힌 은장도는 어찌나 단단히 박혔던지 달리 뺄 방도가 없었다. 그대로 안채를 나온 환의 눈에 사람의 형체가 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를 향해 사람의 형체가 말을 걸었다.
“환이냐? 늦은 밤까지 마님 시중 든겨? 쯧쯧.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몸 눕혀 내일은 더 바빠질 테니까.”
예신이었다. 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영을 생각했다. 그러자 발길은 자연스레 영의 거처로 옮겨졌다. 바람에 버들가지 잎들이 괴이한 모습으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지난 날 이학진이 다녀간 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환은 대사도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은장도를 빼들고 마루를 오르는데 문이 열려 있고 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환은 딴 사람이 들었나 싶어 귀를 가까이 댔다. 사람의 소리는 기괴한 흐느낌 소리로 변했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든 환의 눈에 비친 광경은 쓰러진 대사도의 몸을 연신 주무르는 진남이 아닌가. 환은 얼른 대사도의 코에 천을 가져다 대었다. 대사도의 숨이 끊어진 것을 알게 되자 환은 진남을 쳐다보았다. 진남은 영문을 몰라 풀린 눈으로 잠시 멍하니 환을 바라보더니 그제야 환임을 깨닫고 매달렸다.
“환아, 환아, 이를.. 이를 어쩌냐 어찌하면 좋냐.”
“어찌하긴 무얼 어찌합니까.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어서 도망가세요. 이 일을 본 이가 아무도 없으니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날이 새면 죽은 유씨 부인의 혼령이 다녀갔다 소문을 퍼뜨리면 아무도 의심하지 못 할 겁니다. 안심하고 어서 이 자리나 피하세요.”
환은 다급하게 진남을 일으켜 밖으로 내몰았다. 진남은 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혀 속에 뭉쳐 있던 진실을 뻐끔 거리기 시작했다.
“환아 네가.. 네가 부인을 죽인 게로구나?”
환은 잠시 멈칫하다, 진남을 대문 밖으로 밀었다.
“모르셔도 되요. 이젠 이 마을을 떠나셔요. 멀리 멀리 떠나셔요. 눈에 띄면 우리 모녀 모두 죽는 다는 걸 명심하고 떠나셔요.”
그러면서 환은 치마 속에 감추어두었던 돈 주머니를 진남의 품 안에 끼어 넣었다. 진남은 환에게 밀려나면서도 말을 계속 하였다. 오랫동안 묵은 진실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환아 그래도 안 된다. 안 돼. 그 분은.. 대사도 어른은 너의 피다. 너의 친 아비다. 이 이상 죄를 저질러선 안 돼.”
순간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몸이 경직 되었다. 환은 또다시 머리가 아찔해져 옴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어머니?”
진남은 더듬거리며 오랫동안 묵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래전 일이다. 나물을 뜯으러 숲을 거닐다 한 양반 댁 부인이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해코지를 당하는 일을 본 적이 있다. 곧 그 부인이 발을 헛디뎌 내가 있는 쪽으로 구르는 것을 보았지. 사내들이 도망을 간 후에 곧 부인에게로 다가갔으나 산기가 있어 너를 낳고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놀랍고도 두려워 이 사실을 숨기고 너를 키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깊은 숲 속에 홀로 사는 내게 누가 씨를 주고 가겠니. 그 후에 한 양반 집에서 후처가 사라진 소문을 듣고 언젠가 아이를 돌려주어야지 하다가 소문에 무서운 소문이 덧대어져서 너를 그냥 키우기로 했다.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관가로 가자꾸나. 죄를 고하고 자비를 구하자꾸나. 아가. 그러자꾸나.”
일순간 환의 눈에 칼을 뒤집어 쓴 자신의 모습이 환영처럼 일었다. 환은 아랫입술 끝을 꽉 깨물었다.
“어머니 그렇다면 더더욱 당신은 멀리 도망가셔야 합니다. 아무리 옛날 일이라 하여도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신의 말을 믿어줄 이도 없는데 저와 함께 가서 무얼 어찌하시렵니까. 멀리 도망가셔요. 옛날처럼 꼭꼭 숨어 사셔요. 다시는 이곳에 그림자도 내비치지 마십시오.”
환은 진남을 내쫓은 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벌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환은 곧바로 영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에 그녀의 입술 꼬리가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마침 환의 그릇된 생각으로 마음에 근심이 쌓여있던 영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한편으로 영은 환이 잘못을 저지르고 멀리 떠나지 않을까 싶어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한 찰나에 환이 영에게로 다가들었다.
환은 영에게 다가가 슬픔에 젖은 얼굴을 하고 큰 절을 올렸다. 환은 이대로 영이 잡아주지 않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환의 영특한 머리에서 나온 계산이었다. 환이 계산한 대로 영은 절을 올리는 환을 다급하게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슬픔에 젖은 얼굴을 한 환을 꼭 끌어 앉았다. 달빛에 휩싸인 밤은 척척 감기는 나른한 슬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200*110)
첫댓글 잘 읽었어요. 배경이 조선시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