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와 화장실
/이지유
10년 전9월,
나는 호주 북부 필바라 지역의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한 여름 기온이 50도를 훌쩍 넘는 곳으로, 사람이 살기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한번은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텐트 지퍼를 열고 기어 나오다 어떤 존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우리는 10초 정도 그대로 멈춘 채 서로를 응시했다.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도 내 눈높이와 똑같이 따라 일어섰다. 완전히 일어설 무렵 눈이 어둠에 적용했고. 그제야 눈앞의 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캥거루였다! 털은 달빛을 받아 반지르르 윤이 났고. 울록불룩한 근육의 윤곽이 선명했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덩치가 제법 컸고 운동 능력이 뛰어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인가 신기한 마음은 잠시였고 무서워졌다.
캥거루는 점프하며 이동하는 유일한 포유류다. 강력한 뒷다리 근육과 스프링처럼 작동하는 인대로 적은 에너지로도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동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뒤로 점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캥거루는 오직 전진만 가능하다.내 앞에 있는 캥거루가 놀라서 달아난다면 앞으로 점프하면서 나를 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어둠에 더 적응하자 놀라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캥거루는 새끼를 데리고 있었다. 새끼는 엄마의 배 주머니를 꼭 움켜쥔 채 그안에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어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암컷 캥거루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다. 그들은 임신한 배아가 더 자라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먹을 게 부족하거나 다른 새끼가 주머니에서 자라고 있을 때는 배아률 그대로 머무르도록 하고, 환경이 나아지면 다시 자라게끔 한다. 책에서만 본 이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가 바로 눈앞에 있어 정말 신기했지만, 역시 새끼를 품은 어미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발을 조금씩 움직여 옆으로 이동했다. 캥거루는 여전히 석상처럼 가만히 서서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 있었다. 30센티미터쯤 이동하니 캥거루의 굵은 꼬리가 보였다. 캥거루 꼬리는 다섯 번째 다리와도 같다. 캥거루는 싸울 때 앞다리뿐 아니라 뒷다리로도 편치를 날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들은 굵고 튼튼한 꼬리로 땅을 짚고 강력한 뒷발로 발차기를 날린다. 지구상에 캥거루 말고 이런 동작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없다. 이 역시 조심해야 할 이유 아니겠는가.
캥거루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 나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한 마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미 캥거루 뒤에 또 다른 캥거루 대여섯 마리가 우투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들이 무리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차하면 캥거루 여러 마리를 상대해야 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가까이 있는 캥거루와 멀리 있는 캥거루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둠에 완전히 적응한 눈 덕분에 달빛 아래 캠프장에서 벌어지는 대치 상황이 온전히 보였다. 그 순간 알았다. 캥거루도 나만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캥거루를 무서워한 것보다 캥거루가 인간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나는 천천히 옆으로 걸어서 화장실에 당도했다. 그리고 거의 한 시간 동안 머물다 나왔다. 캥거루는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빈 텐트 앞 공간을 보고 있자니, 캥거루를 두려위한 내가 우습기도 하고 캥거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텐트 앞에 쌓인 캥거루 똥을 보니 그런 마음이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은 화장실을 찾았을 뿐이다. 나처럼,
이지유 님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과학 이야기를 쓰고 좋은 책을 찾아 우리말로 옮긴다.
(이지유의 이지 사이언스> (별똥별 아줌마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처음 읽는 우주의 역사) 등을 썼다. 이 코너에서는 과학의 눈으로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