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로 사랑을 불태웠던 강명화[康明花]
1923년 6월, 온 천지에 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봄날 장안엔 한 기생의 연애담으로 떠들썩했다. 평양 기생 강명화(1900~1923)와 대구 부호의 아들 장병천과의 순애보는 불나비처럼 자신들의 몸을 등불에 던져버린 사랑이야기였다. 강명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급기야 23세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으며, 장병천도 그 뒤를 따랐다는 것. 동아일보는 아래와 같은 기사를 내보내며 강명화의 죽음에 대하여 아쉬움을 토로했다.
康明花의 自殺 내막은 매우 복잡
기명을 明花라 하여 일시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이 있다 하던 평양태생의 康道天(25)은 경북 재산가 張吉相씨의 아들 張丙天의 애첩이 되어 동경으로, 경성으로 그 남편과 같이 왕래하더니 최근 온양온천에 그 남편과 함께 가서 유숙하던 중 12일 온천 여관에서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자살할 결심으로 독약을 먹었으므로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인하여 절명하였는데 시체는 어제 경성으로 운반하여 매장한 터이며 자살한 원인은 장씨의 가정 사정과 기타 복잡한 내막이 있다더라.「東亞日報」(1923.6.15)
강명화는 190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1세의 어린나이에 기생이 되었고, 17세가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평양기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대정권번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녀는 뛰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서도잡가와 시조를 잘하였고 무엇보다 사교성이 좋고 성격이 유순하여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하니 당시 장안의 사내들치고 평양기생 강명화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녀가 부르는 「수심가」와 「배따라기」를 듣기위해 숱한 남성들은 2~3만원하는 거금을 거침없이 내던지곤 하였다. 또한 그녀의 마음을 사기위해 온갖 구애방법을 동원하였으니 그야말로 장안은 강명화를 차지하기 위한 사내들의 쟁투장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절개를 지키리라 스스로에게 결심한 바가 있어 비록 기생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몸과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안의 사내들에게 그녀는 오만하고 독한, 그러면서도 소유하지 못해 애가 타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녀에게도 운명의 사랑은 찾아왔다. 경상도 대구의 대 부호 장길상의 아들이었던 병천을 만났던 것이다. 부자이긴 하지만 수전노처럼 인색하기만 했던 장길상은 아들이 기생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극심한 반대에 부딪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채 외출조차 금지하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강명화는 사랑하는 병천과 함께 동경으로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한다. 장병천을 공부시키고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하여 동경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선의 경비는 그동안 기생생활로 벌어두었던 약간의 돈과 금비녀와 은가락지 등을 판 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동경에서의 두 사람의 생활은 극심한 가난과 조선인 유학생들의 질시아래 지독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둘은 동경 아사쿠사에 있는 집을 빌려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되는데, 장병천은 대학의 예비과를 다니고 그녀는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장병찬의 아버지 장길상이 아들이 기생과 함께 동경에 유학 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매달 30원씩의 학비를 보내왔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동경에서의 소문은 현해탄을 넘어 대구에 사는 장길상에게 전해졌고, 그날로 학비를 중단하게 된다. 당장 먹고살기가 아득해진 강명화는 친정어머니에게 서울 전동에 있는 집을 팔아달라고 부탁하여 그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동경의 유학생들사이에서도 장병천과 강명화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모두 노동을 하며 어렵게 공부하는데 백만장자인 아버지를 둔 덕택에 기생첩을 데리고 산다고 하며 유학생계에서 장병천과 강명화는 철저하게 이지메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분을 참지 못한 유학생들이 장병찬과 강명화에게 폭행을 가하려고 덤벼들었다. 이때 강명화는 칼을 들어 제 손가락을 잘라 보이며 자신은 떳떳한 장씨문중의 사람이며 다른 유학생들과 같이 고생하며 학문의 길을 가고 있노라고 결연히 대답한다. 강명화의 태도에 질린 유학생들은 일단 물러서게 된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변호하기 위해 斷指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던 것을 보더라도 강명화의 강인하면서도 사랑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기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방법으로 유학생들 사이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유학생들 사이에 두 사람을 危害하고자 하는 공론이 일자 두 사람은 조용히 동경을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강명화는 숨어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는, 장길상의 집으로 홀로 찾아가 사정도 하고 애원도 해 보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대구의 부자인 장길상이 자신의 며느리로 기생출신의 여자를 받아드릴리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쫓겨나다시피 하고 서울로 돌아 온 강명화는 지니고 있던 금은 패물을 팔아 근근이 삶을 이어갔다. 제대로 된 집 한 칸도 얻을 수 없고 매 끼니를 죽으로 때우며 살아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신과 병천의 사랑에 대한 병천의 부모가 지닌 선입견과 기생의 사랑을 믿어주지 못하는 야속한 세상이었다. 자신이 계속 병천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병천의 곁에 있게 된다면 병천은 부모와 영원히 의절하게 될 것이고, 사회적으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폐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자신의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의 수갑이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이 병천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된다.
강명화는 장병천에게 몸이 아프니 온양온천에 가서 쉬자고 졸랐다. 평상시에는 요구하지 않았던 옷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사달라고 졸라대어 병천이 사준 옷과 구두를 신고 온양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날 밤 온천의 조용한 방에서 평양기생 강명화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을 베고 독약을 마시곤 자신이 죽고 나면 부모님께 효도하고 사회의 큰 인물이 되어달라고 당부하면서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장병찬이 의사를 불러 소생시켜보고자 하였으나 이미 그녀의 숨이 멎은 뒤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 세 살이었다.
서울로 강명화의 시신을 옮겨와 구문 밖 수철리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강명화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진실을 알 게 된 장길상은 친척의 예를 갖추어 제례를 차려주어 외로운 혼을 위로하였다. 뿐만아니라 당시 유명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은 강명화를 장사지내던 날 신문에 난 「강명화의 자살」이라는 제목아래 그녀의 유언인“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선 살 수가 없는데, 당신은 나와 살면 가족도 세상도 모두 당신을 외면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내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를 서두에 인용하며 애석해하는 글을 실었다.
강명화의 장례가 치러진 후 며칠이 지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장병찬마저 홀연 강명화의 뒤를 이어 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는 용납되지도, 지속되지도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세월이 지나 사람들 속에 회자되던 이들의 사랑은 1927년 우영식에 의해 「강명화 가」가 음반으로 나오게 되었고, 강명화에 대한 책이 출판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목숨을 건 지독한 사랑은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난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