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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신망애 삼덕을 완성하는 믿음. 등 )
^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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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60323 강론글 말미에 적으시다.>
내일부터 부활 때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올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사순 시기 잘 보내시길 바라고 빕니다.
위에 따라 강론글 4시 45분현재 안 올리셨기에
지난 강론글 중 2편을 아래와 같이 올리고
5시 까지 또는 5시 20분 이후 7시 반까지 올해 강론글을 올리실 경우
지난 글 아래에 올리도록 합니다.
<05:20~07:20 중에는 새벽미사 참례로 글 못 올릴 수 있음>
^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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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0 04:12
사순 5주 목요일-신망애 삼덕을 완성하는 믿음
구약에서 그리고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믿는 이들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인 아브라함이
당신 오실 것을 믿음으로 내다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유심히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앞 문장에서는 주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고 함으로써
미래에 있게 될 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한 반면에 뒤 문장에서는
실제로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내다보기도 하고 현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비적 관상의 힘이고 환시를 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환시를 보게 되면 곧 영적으로 보게 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영원을 보게 되고 영원한 현재로 보게 되는 법이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도 아브라함처럼 당신을 믿고
아브라함이 보았던 당신을 같은 눈으로 보라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눈이 없어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신비적 관상을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지만
유대인들과 달리 우리도 미래에 있을 일을 내다보기도 하고,
주님을 현재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볼 수 있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믿음에서 볼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인데
믿지 못하는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도 한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잠재적 능력을 보고,
그의 가능성까지 내다보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그를 믿어주고,
그리고 그렇게 믿음과 신뢰를 받은 그 사람은 믿어준 대로 됩니다.
실제로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믿어주면 자식이 그렇게 되잖습니까?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무한능력
곧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에 대해서는 잠재력(Potential power)을 믿는다면
하느님께 대해서는 전능하심(Omnipotence)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에서 무한 가능성을 믿고
그래서 그것이 불가능이 없다는 희망을 낳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불가능이 없을 뿐 아니라
그분을 믿는 이에게도 불가능이 없다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는 희망을 믿게 할 뿐 아니라 사랑을 믿게 합니다.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더 완전하고 영적인 믿음입니다.
너무 길어지기에 여기서 마무리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은
희망을 믿고
사랑을 믿고
그래서 신망애(信望愛) 삼덕을 완성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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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 04:37
사순 5주 목요일-하느님을 보면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브라함을 모두 얘기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얘기이고,
복음은 그 아브라함이 보리라고 희망하며 즐거워했던
그분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서와 복음에는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도 나옵니다.
“나를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날을 보리라 즐거워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의 “나를 보아라.”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봤더니
먼 훗날 당신의 오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추켜세우시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묵상했는데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보면 땅만 보지 않고 하늘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자기만 보지 않고 꽃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우리나라만 보지 않고 다른 나라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그리스도교만 보지 않고 타 종교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보지 않고 저기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지금만 보지 않고 미래도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만 보지 않고 희망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죽음만 보지 않고 부활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하느님 말씀대로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기에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장소적 경계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도 넘을 수 있었고 미래 메시아 시대도 내다볼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런 경지를 얘기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마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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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04:45현재 아직 /
*** 08:55. 현재 강론글 올리지 아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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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유배의 시편: 영적인 시력 검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시편 137편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유배의 노래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시편 : 유배 시기의 노래
유배의 시편: 영적인 시력 검사
2026년 3월 25일 수요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그것을 하느님의 말씀 그대로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을 체험한 증언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크게 달라집니다. 브라이언 맥라렌은 그 예로 유배의 시편을 예로 듭니다:
유배의 시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편 137편입니다. 이 시편의 앞부분은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자주 읽히며, 뮤지컬 Godspell 속 노래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끝부분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으로 여겨지며, 그 끔찍한 내용 때문에 대부분의 전례에서는 거의 읽혀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이들이 성경을 그럴싸하게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르면서도, 그것이 또한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인간들의 증언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괴물처럼 오해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37편 7–9절의 마지막 구절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읽어 보십시오. 먼저, 그것을 고향에서 쫓겨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원수와 억압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인간성이 짓밟힌 이들이 느낀 깊은 고통과 분노의 표현으로 읽을 때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끔찍한 복수의 욕망은 결코 용서받을 수도 없고, 하느님께 돌려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될 수는 있습니다. 나라가 유린당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며, 이제는 포로 잡은 자들의 오락을 위해 고향의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를 받는 이들이라면, 바빌론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분노를 이해할 때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다시 그 구절을 읽어 보십시오.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느님의 참된 의견이라고 가정한다면, 성경을 그런 방식으로 읽도록 가르침받은 사람들이 왜 하느님을 무정하고, 복수심에 불타며, 잔혹한 괴물로 오해하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37편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읽는다면, 성경 전체를 더 지혜롭고 신중하게 읽는 길을 배울 수 있을까요? 물론 하느님께서 아기들의 고통과 죽음이나 부모의 비탄을 기뻐하실 리는 없습니다.
예,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서 폭력 속에서 왜곡된 기쁨을 누리신다고 본다면, 곧 우리 자신을 그런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끔찍한 해석은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과 함께 서서, 너무도 현실적이고 너무도 자주 반복되는 인간의 잔혹함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를요.
우리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침묵하고 굴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복수의 환상을 실행에 옮기도록 부추기지도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깊이 귀 기울이고, 이해하며, 공감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분노와 절망을 함께 느낍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억압과 복수가 지배하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악순환을 만들어내며 점점 더 추악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미래가 과거의 최악의 잘못을 되풀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결단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역사의 폭력적이고 잔혹한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성경을 읽는 새로운 방식, 보는 새로운 눈, 살아가는 새로운 길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시편 137편은 "영적 시력 검사"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 속에서 무엇을 보는지를, 우리가 얼마나 잘 보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이 구절은 제 내면에 의해서나 제 주변의 세상에 의해 인해 압도되던 지난 수년 동안 제가 붙잡아 온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로 하여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단순히 "존재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 나의 역할을 이해하거나, 그것을 바꿀 능력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결국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기게 됩니다.
—Barbara B.
References
Brian D. McLaren, “Psalms of Exile: An Eye Exam” for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hael Sturgeon, untitled (detail), 2020,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타악기는 유배가 지워버릴 수 없는 내적 리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리듬은 시편 속에 메아리치며, 음악이 억압을 드러내고, 고향을 기억하며, 망각을 거부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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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머무름....
예전에 한 번 언급해 드렸던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며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이 더닝-크루거 현상(혹은 효과)은 특정 영역에서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그 능력을 실제보다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지적 편향을 말합니다. 이 용어는 또한 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 현상은 1999년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과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에 의해 처음 확인되었습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장평가나 과소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가 잘 안 되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더닝-크루거 현상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자신에 대한 [인지 장애]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장애가 생기면 하느님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왜곡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점점 더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그들은 무언가에 대해 확신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적인 태도는 사실상 불신과 혼란을 감추는 방어적 반응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진정한 확신은 조용한 결심으로 나타나지, 공격성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의심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확신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확신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의심으로 끝나고, 의심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확신으로 끝난다."라고 말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너희는 그분(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자신들을 예언자의 상속자이자 계약의 상속자라 여겼던 이들에게 큰 책망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이성적 인식이나 학습에서 오는 지식이 아니라, 신비에 참여하는 신앙적 인식, 즉 믿음 안에서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존재성에 인격적으로 참여할 때 오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14세기 영성 고전 무지의 구름은 신학의 본질이 지적 겸손임을 강조해 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실제로 원문에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나는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이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해 놓으면 그 이해가 매끄럽지 않으니까 복음서를 접하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을 해 놓은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나는 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하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나를 보내셨고 하여라." (탈출 3,14)
사실 예수님은 "나는 있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이 단순한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일치해 계신 분임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분명한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자기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과 자신에 대해 다 안다고 주장하지 않을 때, 오히려 성령의 은총이 내면 깊은 곳에서 드러납니다. 그곳은 곧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는 자리이며, 모든 참된 사랑과 자비의 근원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시는 모든 것과 당신의 말씀과 행위 전부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기인한 것, 즉 아버지에게 들으시고 당부받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요한 8,4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느님으로서 우리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시지만, 또한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모범이기도 하십니다. 복음서들, 특히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존재성에 참여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존재성에 참여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참여는 '내' 것, '내' 지식, '내' 고정관념,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해타산식 논리를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 참으로 근본적이고 중대한 수양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더 들어 갈수록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더 집착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허허~~" 하며 겸허하게 '내' 것을 내려놓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면서 "너희가 내 말(사랑)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1요한 4,16).
이 [머무름]이 사순 시기의 막바지에 있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도전이요 초대가 아닐까 합니다. 이 머무름 안에서 우리는 잘못된 인식으로 이루어진 환상이 아닌 참으로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이 현존하시며 일하시는 참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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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함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니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바퀴(영)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에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사랑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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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6월에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을 예정입니다. 숙소는 남미 주교회의 건물로 정했습니다. 담당 주교님께서 기꺼이 장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모임 할 때는 개최 본당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은 맛있는 한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개최 본당 교우들과 미사도 함께 하면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콜롬비아는 선교지역이고, 미국처럼 한인 신자가 많지 않습니다. 주일 미사도 10명 미만 참석합니다. 음식 때문에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달라스 성당에서 봉사자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봉사자들은 항공료도 본인들이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미국에서와 같이 맛있는 한식으로 준비해 주신다고 합니다. 외식하는 것은 가격도 부담이지만, 신부님들 입맛에도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봉사자들이 함께하니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더욱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고, 사제들 모임이 잘 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는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지만 순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자라는 나무에는 원으로 자라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는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우리는 계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과 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도로와 순환 지하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곡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림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순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사제들을 사랑하면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봉사자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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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시때때로 우리의 고통을 그분께 드립시다!
사순시기가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간 계속 봉독해온 요한복음서도 이제 슬슬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서서히 당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절정의 장소,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결정적인 죽음 이전에 이미 셀수도 없이 많은 작은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오늘만 해도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들은 손에 손에 묵직한 돌 하나씩 쥐고 던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몰아 현장에서 사형에 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순간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울 정도의 배은망덕이요 배신이 아닐 없습니다.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당신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질퍽질퍽한 진흙땅까지 내려오신 메시아, 백번 천번 감사드려도 부족할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돌을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극심한 영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지금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과 죽음에 가장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존재, 풍성한 은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 영성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소속 부활의 로랑 수사(1614~1691)는 생애내내 고통을 많이 받기도 유명했다. 첫서원후 그는 즉시 파리 공동체의 요리사가 됩니다.
15년간 대수도원의 수많은 수도자들의 식생활을 책임지느라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전쟁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좌골 통풍이 점점 심해져 결국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체장애를 얻게 됩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주방에서 봉사할 수 없게 된 로랑 수사에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인 신발 수선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200명이나 되는 수사들의 샌들을 만들고, 수선하고를 반복했습니다.
25년간 로랑 수사를 괴롭힌 좌골 통풍은 결국 다리 궤양으로 악화되었는데, 죽음과도 같이 끔찍한 통증을 동반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로랑 수사는 영적생활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끊임없이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시키고 수렴시키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인생의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만큼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대화를 계속하다보면 육신의 모든 질병이 훨씬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종 우리 영혼을 정화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머물도록 강권하시기 위해 육신의 질병을 허락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분만을 원하는 사람이 어떻게 괴로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그분께 경배하고, 시시때때로 우리의 고통을 그분께 드립시다.”(부활의 로랑 수사, 하느님의 현존 연습,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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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8,51–5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발합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선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
그들은 돌을 집어 들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를 지나가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에서 사람들의 분노를
‘이해 부족’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기준을 지키기 위해
진리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하듯 경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의 문장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라는 초대입니다.
“내 말을 지키라”는 것은
지식으로 동의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나에게 맡기라는 부르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너무 큰 말”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이 자기 세계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죽음을 통과하는 길을 여십니다.
그 길은 ‘내 방식’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입니다.
영성 주간의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 그 자체인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게 되는 불안인가.
크리소스토모의 눈으로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뿌리를 건드리십니다.
“너는 네가 주인이라고 착각해 왔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있다’.”
즉, 너의 흔들리는 삶의 바닥이
너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의 보상만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두려움이 줄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자라는
현재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주님,
제가 두려움 때문에 돌을 쥐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붙잡게 하소서.
“내가 있다” 하시는 당신 안에서
오늘도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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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15 추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요한 8,51-59).>
1)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유한함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영원’과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막연하게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뿐인데,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져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단순히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그 일치와 행복과 기쁨 속에서 사신 분들입니다.>
2) 51절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사는 신앙인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52절의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라는 말은, “당신은 미쳤다.” 라는 뜻이고,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는다.” 라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들 가운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살아 있는 채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3-14).”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한 생명’이 실감나지 않는다 해도, 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도,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그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때가 되면, 즉 심판의 날이 되면, 믿음과 희망 속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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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6. 사순 제5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00 추가
요한 8,51-59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이 마음에 ‘콱’하고 박혔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이 말씀이 마음에 박힌 건 아마도 저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시 말해 제 얘기로 들렸기 때문일 것이고, 이 말씀이 듣는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 말씀을 곱씹으며 저 자신을 성찰해봅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가? 그래도 사제 생활을 이제 13년째 하고 있고, 신자분들 앞에서 그분 말씀을 선포하고 그 뜻을 알려드리는 게 내 일인데, 실제로 신자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그분 뜻은 아마 이런 것 같다고 말씀 드리기도 했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저는 하느님에 대해 조금이지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아는 것이고,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성인들의 묵상글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그분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 말씀을 직접 들어서 그분에 대해 온전히 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고, 저는 그분이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정도만 알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느님에 대해 아는 건 그분에 대한 앎의 전체에 견주어보면 지극히 작은 일부, ‘티끌’과 같이 작은 부분일 뿐이지요. 그마저도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어설프게, 어림짐작으로 겨우 알았을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을 직접 보고 그분 말씀을 직접 들어서, 다시 말해 그분과 직접 인격적인 친교를 맺음으로써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부족한 우리의 머리로는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다행히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분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니 하느님을 사랑하면 그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사랑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분을 향한 사랑에서 내 욕심을 뺄 수 있다면,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을 뺄 수 있다면, 차별하고 편애하는 경향을 뺄 수 있다면 나는 그만큼 하느님의 더 깊은 부분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겠지요.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저 감성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일 뿐이고, 그런 거짓 사랑으로는 하느님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그 사랑을 이웃, 형제를 향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랑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깊은 친교를 나누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은 언제 자신에게 다가올 지 모르는 죽음만 바라보며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죽음 저 너머,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분 나라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하게 될 날을 희망하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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