比較 선악(善惡)의 개념은 같고 잘하고 못하고의 개념은 같고 대소(大小)의 개념은 같고 경중의 개념은 같고 지행(止行)의 개념은 같고 욕원(欲願)과 거부(拒否)의 개념 또한 동일시라 공(空)의 개념은 같다이다. 감정(感情)의 개념을 같이 두는 것은 공의 개념이 같다。파리는 잘 나는데 나는 날지 못해 내가 그런 면으론 싫다 한다면 공의 개념은 같다는 뜻이다.비교할 수 있는 것은 개념은 같다(이 삿된 진리임으로서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개념은 같지 않아 공(空)의 개념은 같지 않으나 왜|같지 않은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거나 헐뜯고 비판하면 견주는 것이 되는 것이니 공(空)의 개념은 같다로 된다. 저기 시냇물이 흐르고 여기 나무 위에 꽃이 핀다。공의 개념이 같지 않다。시냇물이 나무와 같은 꽃을 피우고 나무 위에 시냇물이 흐른다로 얼토당토않게 억지라도 부려 주워맞춰 헐뜯으면 공의 개념은 같아질 것이다。 공의 개념은 같지 않아 만류(萬類)가 질서(秩序)를 유지(維持)하고 정연(整然)히 있는 것이다. ○ 누구를 탈파시키겠다는 것이 이 시건방진 생각이다. 정신 및 육신의 고깃덩어리가 진작에 거룩한 탈집인 줄 알았다면 번잡스런 논리의 탈파 설명이 없었을 것이다。육신이 부패의 집과 그 성분(性分)의 시초가 아니라 이 거룩한 의지처였나니라。성자(醒者)는 스스로를 벗기고자 세상이 되고 탈이 되고, 구원하는 자는 자신을 구제코자 세상이 되고 구원자라 하였나니라。만유(萬有) 성물(成物)이 이 괴로워 함이니라 그 신(神)이라 하는 것이 괴로워하고 고통하도다。시(時)=생명(生命)과 그 생명을 뜻하지 않는 것의 겨룸이나 생명은 언제나 그 모양도 부피도 없는 것에 의탁하여 완전한 탈파(脫破)를 바란다. 왜? 생명(生命)의 고(罟)를 풀기 위해서이다. 저쪽으로 벗어나가려는 그 점에서 이쪽의 껍질이 걸리듯 옷을 벗듯 한다.다시 말하지만 점의 확대 그냥 점이라 하더라도 점은 곧 이 우주이다。다만 벗음을 실감나게 말하려고 하였을 따름이다。그러므로 탈파는 일상생활 속에 하는 사업(事業)의 일과 성취되는 공적일 뿐인 것이다. 일하는 이도 고달프고 들어주는 이도 하염없는 구원자나 역시 고달프다。그러나 벗어난 개체(個體)들은 무현(無現)의 공화(空化)가 되어 무엇이라는 의미와 감(感)이 없어 고달픔을 몰라 고달픔이 없다。생명감이 있는 것만 무엇이던 感해 원을 쌓고 고달퍼할 따름이다。감(感)을 아는 보살은 억겁의 수련을 했다 하나 진리와 생명의 일편이지 벗어난 불(佛)보살은 아니다. 어떠한 공간(空間)의 물질(物質)이 감(感)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감을 아는 주체(主體)는 행사(行事)의 흐름신(神)、 즉 생명(生命)이다。따라서 그 생명을 싸고 있는 그 물(物)의 구성(具成)된 원인(原因)은 생명(生命)의 고(罟)、해(解)를 위함이며 그 구성요소(具成要素)인 자재(資材)는 유무(有無)나 유현무현(有現無現)의 그 아무러크소니들에게 제공받아 그 생명들이 만들었다。그 작품 자재(作品資材)는 아무런 이들의 여러 삼라(森羅)들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관찰하는 이 각자의 주장에 맡긴다。이래서 아무러크소니의 묘미는 점입가경이다。저―산야엔 생명의 고(罟)를 벗기기 위한 여러 자재(資材)들이 가득 산적해 있다. 이것은 나 이렇게 벗어났다는 탈 성자,그 아무것이들인 것이다(※ 생각을 그렇게 기울여서 그렇지 그것을 고(罟)를 벗지 못해 고통하는 여러 생명들의 모습이 그렇다 한다면 또한 그렇게 관점이 돌아간다 할 것이나 이것은 멀쩡한 사람을 탈을 잡아 부적 같은 것을 붙혀 고통시키겠다는 관점이니 상호간에 좋은 관점 속에 들지 못한다 할 것이다。앞에 여러 탈파한 논리들은 이러한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구실、그 된 노릇、그 가치、그 몫、그 분담된 역할을 다하고 소멸될 때 까지(소위 소멸은 저쪽으로 모두 빠져 나감을 뜻한다) 완성의 단계 꼬리끝과 같은 게 저쪽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며 다 빠져 나옴과 동시에 완전(完全)이던 불완전(不完全)이던 공(空)을 이뤄 또 다른 차원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불완전이란 보기에 흠결된 것、병집있는 것, 덜 된 것、부실한 것을 뜻한다(덜 되었어도 꼭지 떨어져 落果되는 수가 있다.이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저 앞에서 말한 것 같으나 의외의 변수로 지금도 계속 회전에 튕기듯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물체를 속도를 가하여 회전시키면 그에 붙어 있던 여러 이물질이나 본체라 하더라도 당기는 구심력 작용보다 원심력 작용이 클때 튕겨지게 되는 것이다. ○ 흐름이 잠깐 쉬었다 간다는 게 현실공(空)인데 공에 들면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이라도 하염없이 넓고 김(長) 등 그 얽힘의 현상(現狀)이 억만이라 오히려 그 흐름을 짧게 여기고 공이 전부(全部)인 것처럼 여기나니라。공중(空中)의 흐름 공상(空想)도 하염이 없거늘 현공(現空)케 하는 흐름을 추측이나 하랴? 그러나 그 흐름도 역시 공(空)일 뿐이다。왜? 공(空)은 흐름을 공(空)으로 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뒤집어서 흐름은 空을 흐름으로 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운명을 부여받아 태어난 물(物)이 대추나무라 한다면 공(空)은 그 결정된 운명에 따라 대추나무상(象)을 과미(過거未래)를 한데묶듯 투시(透視)하듯 그린다. 대추나무 일대기는 대추나무를 그렸다가 공(空)을 떠나 흐름으로 드는 것이다.시공합성(時空合成)된 운명이므로 공중(空中)의 흐름으로 그려 나타남으로 그것이 어떤 물사(物事)(대추나무)라는 것을 알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空을 떠나 흐름에 듬도 역시 그에 적당한 空이다. ○ 지난 흐름은 귀신을 흐름도 귀신, 지난 흐름은 병든 것, 늙은 것, 부패된 것저 멀리 떠나갔다 돌아올 것、올 흐름은 미지의 신선한 것、새로운 것을 交接하고 되돌아온 것. 귀신은 시간, 시간은 興起停滯 停滯現狀은 空化。지나간 病廢시간 寃恨가진 귀신탈로 둔갑한 미지의 시간이 되어 신선한 것처럼 뒤돌아와 바람을 쐬듯 겪게 한다. 갖은 병폐를 일으키니 감기몸살로부터 몽달객귀′천태만상의 원한풀이 약을 써서 해원시키나 약발이 듣지 않는 지독한 귀신은 그 병든 먹이체를 타계(他界)로 이끄므로 해원코자 한다.그것도 모자라 갖은 악질의 전염병균이 되어 여기저기 옮겨다니니 누가 소두무족(小頭無足)이라 하였던가? 또한 못된 병(病) 귀신은 파고들어 유전자 변이를 가져와 세습화병、유전병을 일으킨다. 이것이 모두 원한을 가진 귀신의 작란(作亂)이니 어떠한 물사(物事)가 생성(生成)됨으로부터 갈등의 소지로 원한은 쌓이는 법 누적되는 원한은 귀괴(鬼塊)가 되고 귀괴는 시차(時差)인 것이며 시차는 공화(空化)인 것이며 여러 공화는 연관작용으로 먹고 먹히고 약육강식하는 것이며 약육강식 속에 병(病)과 약 (藥)이 있으며 제역사(諸役事)가 이루어지는 것이다。귀신의 원한풀이는 한(限)이 없어 피고 지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의 공화이니 저 아름답게 보이는 물사(物事)도 한낱 귀신의 한풀이일 뿐이다. 시간의 흐름, 즉 귀신은 오가지 않고 그 귀신인 공(空)탈들만 빙글빙글 돌아논다。귀신의 재주는 무궁。천태만상의 삼라를 지어내니 만사 해결사。귀신、무불통지사 귀신이니 제공화(諸空化)들이 칭칭시하라. 우민(愚愍)한 공(空)들이 슬기로운 공(空)들한테 부탁하면 감당할 정도의 소원을 이룰 것이다。이 말씀이 무엇인가? 소위 능력있는 귀신한테 빌면 저마다 공(空)의 그릇(器)된 걸 봐서 알차게 한다는 것이다. 귀신이란 명칭이 깃껍지 않은 명칭같으면 공경하는 명칭을 붙일 것이니、 신명이라 하고 업(業)님이라 하고 창조주 하느님 부처 등 갖은 좋은 우상명분을 붙여서 떠받들면 공(空)들의 뜻대로 될 것이다。귀신의 변덕이 죽끓듯 할 것이니 비위를 거스리지 말 것이다. 제 뜻대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나니 수족처럼 보여서 벗어나고자 말 것이다.모든 것을 귀신이 앞장서서 이뤄 줄 것이니 모든 것은 귀신으로부터 먼저 나왔기 때문이니라. ◎ 자연치유(自然治療) 흐름의 능력대단 시간은 약(藥) 보살은 하나님。그 병(病)을 치유하다.상반(相反)과 대칭(對稱)되는 것의 작용(作用)이 또한 흐름이며 고(罟)라。즉 그 서로 아닌 것을 가리키는 것이 대칭상반으로 신(神)의 고(罟)다。왜 없을까? 하는 다원(多願) 염력(念力)은 고(罟)를 형성한다.신(神)하면 신(神) 아닌 게 있고 불(佛)하면 불(佛) 아닌 게 있고 평(平)하면 斜있음으로부터며 빈부귀천(貧富貴賤)이 또한 그러하다 그 아닌 것은 그 없는 것이 되고 그 없는 것은 없는 의문을 낳고、없는 의문을 낳는 말씀이 왜|없을까? 이다.그러나 이것이 이기주의적(利己主義的)인 주장(主張)같지만 오직 아무러크소니만은(空限象과 그 저쪽에 있는 것 같음이라 뭔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상반된다고 굳이 할 수없어) 그렇지 않나니 왜? 아무러크소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철저하게 모순의 뜻에 휘감겨 갇혀 가고 있는 중이다)。 혹이 의혹하여 말하길 왜?없어 아무러크소니 아닌 게 있을 텐데 한다면 실로 그러하다。그렇기 때문에 아무렴 하는 그 아니든 그든 그 있든 없든 아무렇게나 아무러크소니라 하나니라 어떠한 그 실상(實相) 또 그 헛된 상(相)이 모두가 다 그 가리키는 명칭이나 뜻을 대변(代辯)하는 탈을 잠깐 지었을 뿐이요、이없는 것이다。왜? 풀리는 것이기 때문에 풀리면 흐름 입문(入門)을 지나 아무러크소니니라 모든 지칭하는 일에로 신(神)과 불(佛) 및 주의(主義)、사상(思想)、취지(趣旨) 등이 그 이름과 가리키는 뜻일 뿐 실 제에 있어선 어떠한 진상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허상과 念脫(껍질을 뒤집어쓴 것)이니라" 庚午陰六月 丁酉日 *** 어떠한 물사체(物事體)(틀)가 그러하다(진퇴의 여부(與否)。작용(作用)의 여부(與否)” 즉 원활한 원활치 못한 관찰 및 판별분석 또는 방향의 설정여부(設定與否)、성립과 불성립 및 지향성、추구성、目的性格、사안(事案)의 향방 및경중(輕重) 여부, 내면에 흐르는 면면(綿綿)한 허(虛)、실(實)、상(相)의 여부(與否) 등)는 것은 이미(旣) 정해진 것이고 이미 정해진 것은 이미 계산(計算)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하니 흡사 쌍둥이와 같다. 또는 실체(實體)와 조명(照明)에 비춰진 그림자와 같다.이미 정해졌다는 것은 그 공(空) 전체에 대한 절대성(絶對性)을 부여(賦與)한 것이고, 이렇게 저렇게는 내부적 작용에 있어선 상대성(相對性)이 된다는 것이다.「내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은 절대성이고「글쎄……」는 상대성이 된다할 것이다。움직이는 대로 따라 그대로 하는 것과 그 반작용(反作用)이 생성되는 것은 상대논리이고 그렇게 작동하면 그렇게 귀결지어질 것이다 하는 미리 예견하는 성격을 갖게 하는 것(相體)은 이미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내다본 것에 불과하므로 절대성이 된다할 것이다。의외의 변수 또한 흐름을 돌리는 역할을 한다 하나 그 테두리 속에 있는 것이므로 물체에 떨어지는 돌이라 하여도 그렇고 그 성분을 다 몰아간다 해도 그렇고 틀을 깨뜨리진 못한다. 그러므로 절대성의 지위(地位)는 변하지 않는다. 물고기를 보고 낚시 미끼를 놓음에 걸림의 유무(有無)는 저쪽 몫이니 상대적(相對的)인 성격을 띈다 할 것이나 미끼의 확증적인 이유가 있어 걸림의 유무(有無)는 절대적인 성격을 띈다 할 것이다。행(行)의 거래(옮기고 안 옮기는 것)는 상대성이고 실증체는 절대성이 된다할 것이다。이상(以上)의 성격이 관념이나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므로 관점을 둘 나름이란 뜻이니 실제에 있어선 무상절(無相絶)로 공중(空中)에 수다흥기(數多興起)하는 회류(回流)의 유동작용(有動作用)인 것이다。저쪽 몫이 이행(以行)에 있어 이행、불이행에도 상당한 이유가 존재(存在)할 것이니 그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판결지어지는 것은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상대성의 그 성격은 變質되 절대성화(絶對性化)하는 것이다.이러므로 我執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있는 것이니 어떠한 상(相)이나 관(觀)은 영원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말씀이라 해서 회류가 되면 잊을까 해서 급히 여기 적는다. 만약상(萬若上) 어떠한 물사(物事)가 수(數)의 영역(領域)을 갖고 표현할 제에 십중육(十中六)을 차지해서 이뤄졌다면 나머지 사(四)는 주위를 에워싼 그릇(器)이란 뜻이다。이 그릇은 물사(物事) 속에 있는 속 心(內面에 쌓인 相)과도 통하니、 즉 속심이며 속심의 발로(發露)처럼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이 에워싼 그릇이란 뜻이다.소위(所謂) 속심이 뒤집힌 顚倒象이 기(器)이고 그 그릇에 쌓여 있는 것이 심가탈(心家脫)인 물사체(物事體)(그 行포함)란 것이다。제삼라(諸森羅)의 그릇(器=心相)은 같은 입장(立場)을 취하게 되니 내 마음 너 마음의 구별(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공중일색(空中一色)이란 뜻이다. 다만 탈상경계(脫象境界)의 영향을 받아 너 마음 내 마음의 분별이 있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것은 일색심(一色心)이 아니라 심탈상(心胞象)이 돼 있다는 것이다. 즉 심(心)조차도 탈의 境地에 있다는 뜻이다.그러므로 그것조차도 벗어치워야지만 공심(空心)(극달의 경지。이것이 사단의 생각이 짚힌 것인지 의심스럽다。왜? 만사통달한다는 말 아닌가?)에 의한 성공상(成空相)이 된다는 것이다。공중일색(空中一色)해서 여러 삼라탈을 쓰고 제 우주를 형성해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계(現實界)(想像 理想포함 無感、無現、無側 포함)인 것이다.그러니까 시공간(時空間) 탈로 형성된 우주(宇宙)이지만 그에 두둥실 떠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여러 별들과 가스, 공기층 및 미세균사나 기운(氣運)(제三에 氣란 것 포함)과 이상망(理想網)을 치면 모두 걸리는 것이 공중심탈(空中心脫)이란 것이다. 이것이 착각하면 창조 피조논리에 환태로 접근하는 것 같으나 그 공중심일색(空中心一色)이 같은 입장을 취한다 하나ㆍᆢ 하나(壹)가 아니란 뜻이다。무량공(空)이란 뜻이다。무량공(空)이므로 저마다 제삼라(諸森羅)탈이 되는 것이다. 앞서들 논한 여러 수의 논리가 다 이 논리를 펼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니、태을형(太乙形)을 거론(擧論)한 것 같으나 허、실、논리라도 상관이 없다。왜냐? 다 그 뜻이 통하고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시류(時流)가 저만큼 돌아 작아진 것은 귀신(鬼神)이 오래 묵을수록 작아지는 것은 기억이 오래되어 희미해진 것과 같고 신 신은 지가 오래되어 낡아진 것 같고 시야가 멀면 작아 보이는 거와 같나니라. 시류(時流)는 어디 가지 않고 거듭 맞게 되는 것이니 내일(來日) 아침이 있는 거와 같다。즉 귀신은 어디 가지 않고 거듭 온다는 뜻이니、 사람이 영혼이 있는데 만물 또한 영혼이 없을 손가? 사람의 영혼되어 돌아감(回)을 안다면 만물의 영혼도 이에 견주어 유추하리라。선각자가 말씀하시길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있는데 혼은 하늘에 뜨고 魄(백)은 땅에 묻힌다한다。四代奉祀後에 魂은 神靈이 되고 魄은 鬼가 된다한다。(이는 時流가 저만큼 돌았다는 뜻이다.) 귀신이 서로 섞이면(혼성) 되돌아 오는 시발점이 되니 鬼(氣質)가 神(理治)의 힘을 입어(神의 道)에 의해 凝結됨이니 곧 작은 核質 菌(균) 以前으로부터 그 以後이니理治(얽힘、얽음)로 包化胎化 粒子를 이루고 粒子를 이루면 細胞組職化하고 그는 또 균사체 미생물이 되어 萬類의 根源이 된다할 것이다. 즉, 귀신은 점점 작아졌다. 다시 뭉쳐 새로운 형태類의 始發이 된다 할 것이다。이것이 생명의 힘을 얻는 것은 空속의 여러 時流들의 용트림치는 회오리치는 영향력을 받기때문이다。先人言에 필자생각을 덧붙여 봤을 뿐이다. ◎ 아무리 여러 數를 내다본다 하더라도 (어떤 方面으론 생각이 멀리 미쳐 좋은 점(유비무한의 그릇 도 있다 하겠지만) 그는 곧 反轉(反顚)의 거듭이니 現位置 상태가 正觀 관점이라 할 것이다。要는 누구에게主導權이 있느냐이다. 주도권을 잡으면 임의로 좌지우지 하게되는 것이다。霸하면 旣存의 낡은 것을 뜯어고치는 힘이 있다。즉 革世改度한다。권한이 있어야 뜻대로 할 수 있다。다스릴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베풀수 있다。권한을 얻기 위하여 책략의 미끼를 던진다。미끼의 유혹에 걸려든 고기는 아무리 크더라도맥을 못추게 되는 것이다。남을 격멸히 여기고 잘난체하는 자를 깨우치기 위해 유혹에 함정을 파고 빠뜨리는 것이다。이것을 시험의 일면이라 한다. 누구를 시험할 위치에 서겠다는 것은 可笑로운 일이다。내가 덫을 놓으면 남도 덫을 놓을 줄아니'(※ 以上 格言은 옛글에 있음) 見物이면 生心이라 利害得失이 앞을 가리니 거시적인 안목과 총명을 잃게되고 소견이 좁아졌으니 주제를 잃게되고 되말림을 당한다.그러므로 自然空이 시험하게 시리 맡겨두는 것이다.) @ 有備無患은 그릇(器) 哲人曰 그릇을 위해 담김이 있는게 아니라 그릇이 있으면 절로 있게된다던지 막연한 바램의 그릇이 된다하는 것이다.이는 또 이대로의 역할을 다한다 할 것이니 빈그릇이 찬그릇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하필이면 그에 맞는걸 담아야 맛인가? 담지 않아도 그보다 더 훌륭한 역할을 한다면야 이것이 비뚤어진 관점이 아니라 世人이 共感하는 正觀 관점이다. ○ 이 말씀은 주머니를 뒤집은 듯한 사단의 말씀、眞理가 아니나니、잘 생각해보라. 本文= 사탄이 그것(유혹꺼리 件)으로 유혹치 않으면 어찌 고의 깨뜨림을 얻으리! 醒者、구원자가 유혹속에 들어 그 枚體의 몸을 짓지 않으면 너를 어찌 깨뜨려주리。그것은 진리(相)이다. 너는 진리의 주제자다。醒者、구제자가 유혹시킬(※ 유혹에 들게한다는「유혹에 들」이라고 立案되어 있음)갖은 협오의 몸짓을 해 갖고 고통을 무릅쓰고 신음하면서 빌기를「오! 신명님이시여! 그것의 능력을 발케 하소서 그리하여 이 혐오스런 고통을 없애소서!」한다면 사탄이 호기롭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또는참이던 가증이던 눈물을 흘리면서=참과 거짓은 自他의 이리저리하는 관점에 달린 것이다) 그 아무것이醒者와 修鍊(수련)자가 참이란 뜻이 없으니 참없음으로 사탄인 나를 앎이로다。무진으로 나를 벗겨 주심 이로다 하리로다°(참은 도도한 임금의 자리에 있음과 같음이다。조그만치의 여력이 있는 한 절대로 허리 굽혀들지 않는 것이다 굴복하면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용을 종의 관점으로 보지 師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주위를 의식하기 때문에 겸양의 미덕을 혹 내보인다 할지라도 이는 허식에 불과한 것이고 또 주위를 의식하기 때문에 設定한 程度의 限界에 묶여 그 以上 行이 自制되는 것이다. 필자의 말이 다분히 패도적인 것을 옹호하는 말 같으나 제반틀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면 그것을 깨뜨리고자 한다는 것은 도리어 혼란만 가중시킴을 가져온다 할 것이다.그러므로 깨뜨림도 그 內에서 하여 걸러서 중화시키듯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願에 대한 成熟한 答인 것이다。진리는 藥이고 무진리는 이 病에 當하나니라°(깨뜨리기위한 방편에 의해서 병약의 분파논리 참과 참없음의 누수 논리를 드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 꽉찬 무속과 같아 이 없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虛한 것이 되었다면 만질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고(罟)이고 病은 理解(풀어벗길 것을 제공해주는 제공꺼리) 이나니라。진리의 고(罟)를 풀어주는 지옥과 고해속의 무량의 醒者와 구원자의 고통스런 노력과 희열과 쾌락과 황홀감속에 드는 모습으로 여겨지는 일체의 고(罟)海를 너는 아느냐?…(※이것이 또 釋氏類의 글을 흉내내는 꼴로 되어 돌아감이 아닌가? 버쩍 의구심이 들더라도 무슨 상관있으랴? 머리가 돌수박 허개지듯이 깨뜨려진다면야. 註=의구심이 든 것에 내가 직접 겪지 않으면 그 의구심을 푸는 맛을 느끼지 못한다。느낌으로 인해 깨뜨림을 얻는다。내가 직접 겪음은 나의 벗김도 되지만 유혹하는 상대체 願고(罟)도 들어줘 풀어 벗김이 된다는 것이다。物事의 去來속에 그 틈바구니속에 自他의 내라는 삿된 진리 我執을 깨뜨리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겪고 헤쳐나가는 것이지 누가 헤쳐주는 것은、그래서 깨뜨려 벗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 참이 아닌걸 갖고 삿된 아집 참이란걸 깨뜨린다. 소위 진리라해서 잘난 것처럼 해가지고 원풀기를 바라는 것을 無眞이 되어 못난 허울을 쓰고 들어준다는 것이니 고맙게 여기면 다행이고 당연히 그런 것으로 여겨 기고만장하게 되어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니 무책임한 말이 아니라 사탄이 원래 제가 이래저래 마음먹어 제 뜻대로 행하는 것이 사탄이기 때문이다。들에 풀어논 망아지처럼 자라면서 온갖 것을 다겪어 성숙한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물 벗어치우는 것이 되는 것이다。천고마비象은 찌는 듯한 여름날을 벗어치웠다는 것이다.그 여름날이 지옥처럼 여겨졌으나 나를 도운 스승이었다는 것이다. ○ 사탄은 슬기롭고 醒者는 어리석은가? 말의 모순, 성자인데 왜| 어리석은가?) 사탄과 醒者가 따로 있지 않고 원래(原來= 이뜻은 과거를 쫓아 캐는 어휘이며 뜻이지만 필자는 시간 관념을 回流로 봄으로 迷宮속으로 들어가는 원래가 아니라, 현실을 형성하는 에워싸는 그 성분이던) 回流로 봄이라 여기서는 현실적인 글뜻 표현수단 語助辭로 여길 뿐이다.이런 해설을 왜? 하는가 하면 머리속에서 생각이 씹히고 단어에 대한 모순이 계속 일기때문이다。) 하나의 몸이 아니라 無眞(나를 내세우지 않음으로)으로 같은 몸이니라. 아무러크소니의 立場에서 볼땐 아무리크소니와 거리가 머나니 앞과 같은 깨뜨리는 뜻과 목적이 있어 내세우는 것이 있으면 아무러크소니가 될 수 없나니라°(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의 몸이 아니라 무진으로 같은 몸이라 하는 것은 깨뜨린 (일궈논) 目的達城 진리體가 된다는 뜻이다。그래서 아무러크소니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이것이 철저한 모순에 감기는 相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아니라고 기필코 부정하더라도 진리에 가깝기 때문이다。사탄이 저가 그렇다고 벗고자 하는 것은 醒者가 그렇다고 벗기고자 하는 것과 같나니라。이래서 이 모든 것은 合掌하듯 아무리크소니 하나니라. ◎ 雲雨(陰陽間 出情分을 여기선 뜻함)의 極致는 宇宙의 邪惡한 氣運을 풀어벗김인가? 아니면 邪惡의 胎인가? (※ 宇宙象은 영원한 운우의 극치인가? 계속 용을 쓰는 힘을 쓰는 인가? 이것은 뒤에 다시 거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 救援者께서 娼女와 乾達春風의 몸을 지어 태어나셨다。그리하여 뭇사나이와 바람들은 추파의 계집들의 주체할 수 없는 蕩淫欲타 못해 사악한 氣運을 벗기시었다。왜냐하면 그 邪惡한 氣運들을 벗기지 않으면 旺盛한 주체할 수없는 氣力을 갖고 다른 것에 사악한 짓을 일삼음으로 다방면으로 어지러운 피폐가 극심할 것임으로서니라。(즉 유혹의 相을 지어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하여 사악한 行爲를 自制케 한다는 뜻이다.또는 空象들의 흐름에 원할 장애 與否를 헤아려 미연에 방지책으로 理相治相(治世治政과 같은 뜻) 象態흐름에 개의치 못하게시리 관심을 그에서 딴곳으로 틀거나 유혹당한 것에 푹빠지게하여 그에서 헤어날 餘力의 餘地가 없게해서 일체 방해되는 행위를 제어시킨다。그것(전개될 얘기)도 또한 時運이라 할 것이지만 ‘우리가 어릴땐 애、어른 할 것없이 툭하면 쌈박질께나 해대더니만’한다면 이것은 덜깨여서가 아니라 삶의 단조로움이던 판도가 좁았던 힘을 소모할 에너지를 표출할) 꺼리(事件)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나 지금 세상은 그렇치 않다。현실은 그 만큼 정신을 여러군데 쏟을 다양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어지간한 걸갖고 주먹다짐 할새가 없거나(있다면 극소수일 뿐이고 그만큼 환경이 변했다는 뜻이다.) 그 邪惡한 기운은 또다른 사악한 기운을 낳아 퍼뜨리기 위하여 잉태에 끼어들길 잘하니라. 운명이란 명분을 갖고 말이다. 왜냐하면 헤집고 풀어볼려고 함으로서다。그 때에 구원자가 생기있는 여러가지 음식、공기、환경 등을 만들어 氣力잃어 무력한 여러 것들을 건전한 삶으로 벗기시었다。(즉 소생키시었다.) (세상이 雨後에 산뜻하게 단장하는 것 또한 그 구원자에 의함이 아니던가? 이 또한 空相속의 自然行態돌아감이 아니던가?) 또는 여럿의 願을 들어 주셨다: 그 때에 구원자께서 무법자와(法을 경시하는 자) 무법地帶(法을 경시하는 풍조、세태、질서문란)와 부랑한 모습을 짓고 태어나셨다。그리하여 진리를 말하는 유약한 자와 선량한 자와 참된 여러 자들을 싫컷 두둘겨 패주고 辱보이고 갖은 원망이 가득들게 하시었다。왜냐하면 죄와 벌과 功과 賞과 옳음과 그름이 삿된 진리가 格을 세우고 삿된 진리의 판단이지 긍극엔 그없기 때문이다. 그 때에 구원자께서 앞다리를 불김당하고 물을 잔뜩 강제로 먹임 당하고 차에 질질 끌려 다니는 고통받는 소의 몸을 지으셨다.또 허파를 떼어내고 염통에다 강제로 물넣음을 당하는 소의 몸을 지으셨다。(그 험한 꼴을 강조하기 위하여 거듭 비슷한 말을 쓰다) 왜냐하면 사악한 진리의 願을 들어주어 풀어벗기고자 함에서다。어떠한 理由를 대거나 빙자는 진리로서 삿될 뿐이고 또 그것(我執)만의 相을 띄게 되는 것이다.(후담 당시뉴스에 그런짓 한것이 올라 왔음 거기다 좀 덧 보태기한 뜻) (한 골수에 빠져 다른 것은 높은 절벽이 되고 그 절벽은 에워싸 보호막을 치듯 스스로를 돋우고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한대 쥐어박고 반 보라도 내디디면 그 맛됨을 깨우치는 門을 볼 것인데도 말이다. 그 때에 구원자께서 도축장과 도축하는 자로 相을 지으셨다。유혹을 일삼는 진리를 위해서와 주제넘게도 그 삿되다하는 진리를 풀어벗기겠다는 고통받는 소의 몸을 지은 삿된 진리를 풀어 벗기기 위해서다. ※ 어떠한 주장이 一理家見相이 되면 邪門에 들어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아집이 되어 그 가치를 점점 잃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앞의 구원자는 그 뜻이 퇴색되어 삿된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이 보살이 보살이 아니요 이 삿됨이 삿 됨이 아니나니 그 象(相)과 그 이름(名分)과 그 形容과 그 흐름과 그 行 事 등을 통하여서 벗어날려고 몸부림치는 神(理=얽음=空)의 相이나니라。그 때에 구원자께서 그런 도축업을 미워하는 法과 눈과 눈을 지으셨다. 또한 그 때에 구원자께서 미워하는 法과 눈과 눈의 願을 들어주셔서 도축업자들을 잡아들이시었다. 즉 願을 들어주어 풀어벗기시었다。 그때를 벗어난( 초월한) 醒者께서 때에 속하는 현재를 과거의 깨뜨림 도구로 삼으시고 미래를 현재의 탈파로 정하셨다。그것은 현재 현위치 현실이다。즉 現覺想相이다。 ***** ◎ 나(我)는 同類를 제친 선택 象이 아니다. 數 많은 同類가 門쪽으로 몰리는 것은 ( 점차 단계적인 모 습을 취하거나 무질서 한 것이라도) 여건조성형태를 그렇게 지어보이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 그 어느것 하나를빠뜨린게 없다. 즉 모두가 참여한 것임으로 저 폭넓어 수많음과 이끝점 門 수없음을 분류해서 그 比率을 가릴 계제(문제、꺼리件)가 아닌것이다. 數億의 同類라도 하나의 흐름身으로 歸結되니 微細한 穴點을 通하여 저쪽으로 빠져나가듯 함인 것이니 그 하나만 수억의 대변자가 아니고 그 하나가 승리자가아니고 그 하나가 저 만의 一身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나니 전체의 성분 그 氣 넋과 혼이 모두와 스며 서려있는 것이니 全體가 곧 나라。저것 이것처럼 느껴질줄 모르지만 저것 이것없는 一相껍질 결코 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名目지어진 것은 탈、벗으면 나라는 存在는 없는 것이다。그 실감을 느낄려면 끝이 뾰족한 말뚝을 땅에 대고 발로 밟으면 밟는 이의 체중이 실려(뾰족한 끝으로 힘이 몰려) 땅에 밝히는 거와 같다. 즉 나(밟는 이라는 존재는 그와 함께 하는 것이지 어디 다른데로 사라진 것은 아닌 것이니 그 말뚝과밟는 이는 一身脫相이란 뜻이다.또 연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조성시킨 여건形態) 훈련에 따른 구령에 의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만이 선택된 승리자가 아닌 것이 다。개별적 흥망은 그 具成要素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전체의 성분이나 상황이라곤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라도 죽으면 못쓴다하면 못쓰는 것이고 몇개죽어도 상관없다。하나만 남아도 쓴다하면 쓰는 것이다.또 다 죽어도 생사에 관계없이 쓴다 한다면 쓰는 것이다.상태에 따라 여건에 따라 有用無用이며 使用者의 意向에 따라 유용무용이니 相對性을 띈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이러므로 그 그러하다하는 실체를 인정하라고 아무리 욱박질러도、목조여오듯해도 그 아닌 쪽으로 관념이 흘러 웅덩이에 물고이듯 한다면야 어쩔수 없는 것이다.또한 이러므로써 諸森羅象이 同類의 여럿을 제친 選擇象이 아닌 것이다. *** 여기까지 역설 도시 마안장으로서 마감을 짓고 다음은 광증 일보 직전장으로 연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