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울나들이를 할 때는 주로 경의중앙선 전철을 이용한다.
경의중앙선(京義中央線)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서울(京)-의주(義州) 간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했다.
일본은 이 노선을 대륙침략을 위해 사용하려고 공사를 서둘렀다.
1905년 용산-의주 구간(총연장 499km) 열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이 때 종착역 일대를 신 의주(新 義州)라고 명명했다.
1908년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경부선과
서울에서 평안북도 신 의주를 잇는 경의선을 이용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주파하는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만주까지 철도(鐵道)로 연결되어
한국 최초로 경의선은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부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금의 휴전선 위치에 해당하는
문산과- 개성 사이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분단 이후 경의선은 남쪽 구간인 서울-문산간과,
북쪽 구간인 개성-신의주간으로 나뉘게 되었다.
남한은 서울-문산 간 46.3km를 운행하였으며,
2009년 전 구간이 복선 전철 구간으로 개통되어
수도권전철 “경의선”으로 운행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수도권전철 중앙선(청량리-경주)과 연결되어 운행하기 시작했다.
현재 경의중앙선은
지평-용문-양평-덕소-청량리-용산-문산 간을 운행하고 있다.
함경도 민요 어랑타령(漁郞打令)은〈신고산타령>이라고도 한다.
가사 첫머리의 “신고산이 우루루……”에서 따온 것이다.
신 고산(新 高山)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함경남도에 있는
경원선의 한 기차역(정거장) 이름이다.
옛날 이 역에서 약 2km 가까이에 고산(高山)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철도가 생기고 역이 들어서면서 원래의 고산은 구 고산(舊 高山)이 되고,
새로 들어선 곳이 신 고산(新 高山)이 되었다.
"신고산이 우루루 함흥차(車) 떠나는 소리에
구고산 큰애기 반봇짐만 싸누나
어랑어랑 어허야 어야 더야 내사랑아"
〈어랑타령〉이라는 이름은, 후렴 “어랑어랑”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개화기 때의 노래로,
근대 문명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 살아온
시골 처녀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는 내용이다.
경원선(京元線)은
서울특별시 용산역과 - 강원도 철원군 백마고지역을 지나 -
북한 원산역까지 이어졌던 철도이다.
경원선이 함경남도 함흥까지 연결되고
굉음을 울리며 달리는 철마(鐵馬)를 보며
시골처녀가 대처에 대한 동경에 가슴이 설렜다는 노래이다.
소박한 향토색을 구성지게 그려냈다.
"철마는 달리고싶다" 라는 철도 종단점은 경의선과 경원선 두 곳이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궂은 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그침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요.
<오동동타령>은,
1955년 황정자가 불러 히트한 노래이다.
오동동은, 전남 여수의 오동도(梧桐島)가 아니라,
마산의 먹자골목 동네 이름이다.
오동추야(梧桐 秋夜)는,
오동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가을밤이란 뜻이다.
사우(思友)는,
1925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다.
일명 <동무 생각>이라고도 한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대구 동쪽 얕은 동산에
서양 선교사집의 담벼락을 담쟁이가 덮고 있어서
청라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달성토성이 대구의 중심이었을 때 그 동쪽에 있다하여
동산(東山)으로도 불리 운다.
청라언덕의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라는 뜻이다.
르네데카르트는,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했다.
영어로, I think, therefore I am.
독일어로, Ich denke, also bin ich.
중국어로, 我思故我在.
생각은 결론을 얻으려는 관념의 과정이다.
즉 목표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정신 활동을 말한다.
사상(思想), 사유(思惟)라고도 한다.
지각이나 기억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고
또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활동을 “생각”이라고 한다.
연화대 위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개 얹고
가볍게 숙인 얼굴을 오른손으로 괸 모습의 불상(佛像)
반가(반 가부좌) 사유상 (半跏 思惟像)은 국보 제 118호의 보물이다.
그러니 쉬지 말고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며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한다.
넓은 마음은 사람을 바르게 하고 깊은 마음은 사람을 감동케 한다.
사람이 항상 진실하면 사람이 따르게 된다.
덕소(德沼)의 금대산(金垈山)에도 영하의 겨울이 왔다.
덕소의 옛지명은 원덕마을이다.
옛강변에는 덕소나루터(현 한솔아파트 앞)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주막들이 있었다(현 강변덕소회관 주변).
덕소나루터는 옛날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과 상인들이 이용하던 나루터였다.
한때는 덕소 우시장의 소들을 배로 실어 나르기도 했으며,
미사 유원지를 찾는 나들이객들이 이용하던 나루터이기도 했다.
당시 강원도 정선이나 영월지방의 떼꾼들은
“썩정이할머니집” 주막이 유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 한솔아파트와 진도아파트 자리에는 큰 연못(沼)이 있었으나
1925년(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강변마을과 연못은 수몰되었다.
원주민들은 마을이 수몰되자
지대가 높은 곳(현 덕소삼거리 및 덕소우체국 일대)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지금의 덕소(德沼)라는 지명은,
원덕(原德)마을의 덕(德)자와 수몰된 연못의 소(沼)자를 합성한
지명이다.
덕소는 지혜와 지식과 개성으로
내게 큰 감명을 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능내에 있는 정약용의 집은 여유(與猶堂)이지만,
우리집 이름은 예소당(禮沼堂)이다. <쇳송. 3085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