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 화란 ) 지점으로 발령 나다
- 3년간의 홍콩 주재 근무를 마치고 본사로 들어와 3년여를 지내고 나니 다시 해외로 나가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회사는 계속 성장하고 있어 해외 영업망이 확장되는 만큼 본사 파견 영업담당의 수요도 늘어났다. 필자의 해외 우선순위는 여전히 1순위 미주, 2순위 일본지역이었으나 그곳은 여전히 무수히 많은 우수인력이 대기 중이었다.
- 마침 급증하는 구라파행 화물에 부응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화물기를 취항시키는 문제가 대두되어 필자가 그 기획의 일부를 떠맡다 보니 결국 결자해지 방식으로 필자가 대한항공 암스테르담 지점으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 당시 KAL은 서울/파리 노선에 이미 여객기가 취항 중 이어서 서울/파리는 KAL, 파리/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국적기인 KLM을 이용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장난이 아니어서 서울/앵커리지 ( 알래스카 ) 까지 9시간, 앵커리지/파리 10시간, 파리/암스텔담 1시간, 총 비행시간만 20시간에 중간 기착지 대기시간까지 합치면 22시간으로 거의 하루를 소비해야 갈 수 있는 먼 거리였다.
- 요즘은 중국과 러시아 상공을 지나는 유럽 직항노선이 생겨나 비행시간이 12시간 30여분으로 단축되었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 앵커리지에 도착하면 급유관계로 약 1시간 정도 체류하는데 그때 공항내에는 면세점뿐만 아니라 식당도 여럿 있었지만 필자는일본인이 운영하는 간이식당에서 우동을 먹곤하였는데 그 국물맛이 아직도 잊혀지지않는다.
- 이 일본인 우동장수는 한동안 단물을 잘 빨아먹다 그 가게를 한국교포에게 넘겼는데 교포분은 그리 큰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몇년후부터 극동 발 앵커리지 경유 구라파행 비행기들이 차례로 모두 중국, 러시아 상공을 지나게 됨으로써 앵커리지공항은 계속 축소되었기 때문이었다.
- 화란은 불리우는 이름도 다양했다. 화란, 하란 이외에 네덜란드 또는 홀랜드라고 불린다. 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도시로 화란의 실질적인 수도이나 이들은 헤이그라는 행정수도를 하나 더 갖고 있다. 17세기에는 이미 세계 제일의 무역대국으로 남아프리카, 동남아시아 ( 인도네시아 ), 남미 북부 수리남 그리고 남 카리브에 화란령 앤틸레스제도를 식민지로 거느렸다. 이에 더해 대만을 무력점거 하고 일본 막부시절 데지마에 화란인 자체 거주지까지 설치를 요구하는 등 거칠것이 없었다. 현재의 미국 뉴욕도 옛날 이름은 뉴 암스텔담 이었다. 당시 전 세계를 항해하는 선박의 절반이 화란선박 이었다고 하니 당시 그들의 부를 짐작 할만하다. 곧 이어 등장한 대영제국에 의해 많은 해외영토를 잃었고 무역패권도 영국에 넘기게 되었으나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처럼 그들은 35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부자 나라이다.
- 대한항공 암스텔담지점은 시내 국립박물관 바로 앞에 신축 건물에 자리잡고 직원을 보강하고 화물기 취항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한국(서울) 과 구주 (암스텔담 )를 잇는 최초의 화물기가 수출화물을 만재하고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착륙한다. 그곳에서 대대적인 취항 기념행사가 있었으며 곧 증편 논의가 있을정도로 대한항공은 이곳에서도 승승장구 한다.
- 그러나 필자에게는 한가지 큰 근심거리가 생기게 된다.국제 운전면허증의 유효기간 1년이 훌쩍지나, 무면허 운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오리지날 면허는 화란면허와 교환인정이 안되던 시절이었으며 따라서 화란면허를 따야하는데 화란어로 시험을 치루니 당연히 떨어졌다. 재시험 자격은 3개월 후 인데 그것도 합격을 보장 못하는 형편이었다.
- 한국에 국제운전면허 재발급을 신청하는데는 본인이 직접 출두해야 한다고 했다. 그 때가 마침 그동안 누적되어 왔던 운전면허 부정발급이 적발되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어 필자의 경우도 예외가 없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비행기 타는 시간만 왕복 꼬박 이틀에다 발급처 출두 등등 그리고 토/일요일이 끼면 적어도 일주일은 가져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 때마침 LA에 나가있던 입사동기가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한가지 제안을 한다.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한국 보다 훨씬 가까운 L A로 와서 미국면허를 따 가지고 그것을 화란 면허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 일 뿐 아니라 최다 화란 방문객을 가진 나라여서 미국 면허증은 바로 화란면허와 교환이 가능 했던 것이었다.
- 이에 용기를 얻은 필자는 필기시험 문제를 미리 받아 공부 한 후 화란 연휴를 이용하여 LA행을 감행한다. 도착 당일 오후 그 친구 차를 한번 몰아보고 그 친구로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안전운전에만 신경쓰면 합격 할 것이라는 고무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이튿날 면허시험장 문이 열리자 1착으로 신청하고 필기시험을 거쳐 바로 시험관을 옆에 앉히고 어제 동기와 한 바퀴 돌았던 바로 그 지점을 돌았다. 그리고는 시험관으로부터 축하 한다는 의미의 “ CONGRATULATION!” 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합격이었다.
- 필자보다 더 기분이 상기 (UP) 된 동기는 이튿날 과감하게 월차를 내고 우리는 디즈니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생전 처음 가본 미국이었지만 디즈니랜드에 대한 기억이 별로 남는게 없었다. 어디를 가도 지루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간의 여행과 긴장으로 피로가 몰려왔다.
- 그러나 벨( BELL) 전화회사가 회사 홍보용으로 설치해둔 버튼식 신형 전화기는 잠재해 있던 나의 우수한 기업가 정신을 깨어나게 했다. 버튼식이 얼마나 편리한가를 각인시키기 위하여 그 옆에 당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중인 다이알식 전화기를 비치하고 차례로 돌리고 눌러보게 하였는데 버튼식이 2배이상 빨랐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까지 100프로 다이알 방식이었다.
- 이 자리에서 당장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서 이 버튼식 전화기를 만들어 판매하면 큰 돈을 벌것 같았다. 동기는 이 친구가 배가 고파서 헛소리 하고 있는것으로 짐작하고 군소리 말라고 하며 필자를 맥도날드 매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물어지도 않고 빅맥 밀 (BIGMAC MEAL) 을 받아왔다.
- 물어보나마나였다. 이상하게 그 때의 그 햄버거 맛이 그렇게 좋았다. 홍콩에서 근무할 때도 자주 먹었지만 그 날은 특히 맛이 있었다. 본 고장 햄버거 맛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날로 미국에 주저 앉아 평생 이 햄버거만 먹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 맛이 또 필자의 사업가 기질을 건드렸다. 한국에 들어가 버튼식 전화기 사업이 안되면 맥도날드 햄버거집을 차려도 될 것 같았다.
- 이튿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필자는 전과 달리 상당히 간덩이가 부어 있었다. 파리에 주재하는 본부장에게 미국 운전면허 취득을 전화로 보고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운전기술만 뽐냈다.
추신
- 암스텔담에서 3년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본사 지시로 대만에서 중화항공( CHINA AIR : 지금의 중국과는 관계없는 당시의 대만국적항공사) 과 업무협의차 이틀을 묵었다. 그때 보니 대만은 이미 버튼식 전화기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 혹시나하며 귀국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도 이미 금성사에서 버튼식 전화기를 판매중이었다. 아차! 대한항공에서 쫓겨나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더욱 자세를 낮추고 열심히 일하게된다.
첫댓글 그때도 지금도 대만과는 경쟁 상대입니다.
현재, 반도체 설계는 대부분 미국이 하고 있지만,
생산만은 우리나라와 대만이 대부분 생산 하고 있는데
그 중 60%이상을 대만 회사(TSMC)에서 ...
우리의 삼성이 그동안 1위 였는데 ...
요글 역시나 잘 읽었습니다.
- 소교님, 건강하시죠?
- 대만은 자동차, 조선은 별로지만 반도체 하나는 잘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 그동안 우리 정부와는 달리, 대만 정부는 반도체 사업을 국가의 먹거리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TSMC로.......
해외지사에 근무하시는 분들
독립군같은 애국자들이시죠.
다이얼전화, 그무렵 독일 지멘스는 이미 전자교환기를 생산해
수백명씩 근무하던 전화국,대형 회사나 빌딩의 교환원들에게 치명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