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문학의 길을 걷는 이여
이시백(소설가)
『시와산문』이 걸어온 지 삼십 년에 이르렀다 한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를 세 번이나 거듭하였다니 유구하기만 하다. 돈을 삼태기로 쓸어 담는다는 장사도 간판의 페인트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봄날의 눈석임물처럼 사라지는 세상에서, 돈과는 거리가 먼 문학의 길을 삼십 해나 이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장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삼십 년 동안 삽질을 했더라도 노다지 금맥을 두어 번은 잡았을 노력이요, 한길로 우물을 팠다면 지구 건너편 호주의 해변가에 이르렀을 공력이라 하겠다. 그러나 두루 알다시피, 문학이라는 길은 돈과는 이번 생에는 물론이고, 다음 생에도 영 인연이 없는 방면이다. “시가 밥 먹여주냐”는 세간의 말은 영구불변의 명언에 가깝다. 난닝구 차림으로 쓰던 김수영의 시에도 담겨 있듯이, 시란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실이다. 말재주 좋은 이들이 이르기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비실용성’이 문학의 가치이며 쓸모라 둘러대듯이, 문학은 그렇게 태생적으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비극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라 하겠다.
돈이 만물을 지배하고, 영예가 조석변개 하는 시세에 무엇이 그 긴 시간을 이어가게 하고, 또한 적잖은 문인들이 지금도 밤을 새워가며 그 후미진 길을 걷게 하는 것일까. 다른 이의 심경을 헤아릴 수 없으니 우선 반평생 그 길의 언저리를 어정거린 자신을 돌아볼 뿐이다.
내게 문학은 무엇일까. 스스로 존귀함을 깨달은 석가세존이 아닌 범인으로서 앞선 사람을 보고 뜻을 세웠으니 이른바 ‘롤 모델’이라 하겠다. 내 문학의 롤 모델들은 참으로 창백하고 쓸쓸한 존재들이었다.
문학에 뜻을 품었던 십 대들이 지녔을 감상도 있었겠지만, 교과서에서 배우던 이상이나 소월, 심지어 그 유쾌한 김유정에 이르기까지 죄다 요절하였고, 국어 선생께서 몽롱한 얼굴로 소개하던 서양의 랭보나 포우의 삶도 하나같이 비극적이었으며, 심지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시인까지 등장하였으니 그 문학의 길이 건강해 보일 리 없었다. 폐병과 아편과 총성이 낭자한 그 길은 제정신으로는 차마 걷지 못할 길로 여겨졌을 만하다.
게다가 집안의 어른들은 글을 끼적거리는 나를 격려는커녕 ‘예술은 배가 고프다’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하였으며, 마침 동네에 생존하던 문인이라는 이의 생활도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안주인은 툭하면 이웃으로 식량을 꾸러 다니고, 문인께서는 개다리 밥상을 앞에 놓고 귀한 종이만 사정없이 구겨 버린다는 소문이 어린 내 귀까지 전해왔다.
그렇다면 제정신의 나는 어찌하여 그 비참하고, 배고픈 문학의 길을 흠모하며 스스로 걷기로 하였을까.
적잖은 이들이 그를 운명이라고 하고, 어떤 분은 ‘천형天刑’이라는 말까지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오래도록 나는 문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왜 그리 비극적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복서처럼 웃통을 벗고 선 채로 타자를 두드리는 헤밍웨이 같은 작가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도 엽총과 함께 홀연히 떠나고, 심지어 노벨상을 받은 일본의 작가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 의문은 고질처럼 깊어만 갔다. 문인들의 비극적인 삶도 의문이었지만, 그런 길을 번연히 알면서도 제 발로 따르는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백석이 이른 시의 구절을 읽으며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하다고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깊은 의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하늘이 귀히 여겨 사랑한다면, 어찌하여 강남의 타워팰리스라는 아파트에 살며, 입만 벙긋해도 사방에서 박수와 조공이 쏟아져 들어오는 ‘셀럽’으로 추앙받으며, 넘치는 기쁨 속에 살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방안의 담벼락을 마주하고 십여 년간 자문한 끝에 얻은 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길이 풍요롭고 즐거운 사람이라면 굳이 가려 하지 않는 길이라는 깨우침이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여야만 걸을 수 있는, 자학 충만한 이 길은 놀랍게도 사람 보기 드문 몽골에도 있었다.
가축을 길러서 먹고사는 몽골의 유목민들 중에서 양을 기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벌판에 외따로 게르 한 채 지어놓고, 마당에 찌그러진 솥 하나 걸고 살아갔으니, 이들이야말로 ‘가난하고 외로운’ 존재라 하겠다. 이들은 양도 없이, 처자도 없이 두 줄짜리 허름한 악기를 짊어지고 평생을 바람처럼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야말로 ‘높고 쓸쓸한’ 길을 걷는 대표선수라 하겠다. 이들은 집도 절도 ‘없는’ 존재였으며, 구름처럼 지나다가 어느 낯선 유목민의 게르에 들러 말 꼬리털로 엮은 악기의 현을 튕기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토올’이라 불리는 그 이야기는 그의 몸을 빌려 들려주는 하늘의 소리라 하겠다.
“이 유랑가객을 토올치라 부르는데, 그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전해지지만 아무 때나 들을 수는 없다. 점을 쳐서 날을 잡아 부른다. ‘더워 하르 부르’라는 토올은 완창하려면 사흘이나 걸린다고 한다. 밥도 아니 먹고, 잠도 자지 아니하며, 줄을 튕기며 알타이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는 신앙에 가깝다. 몽골에는 ‘가난한 사람은 이야기꾼이고 고아는 소리꾼’이라는 말이 있으니, 양도 없이 가족도 없이 평생을 두 줄짜리 악기를 메고 떠돌아다니는 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야말로 시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몽골의 시인이나 작가들은 샤먼에 가깝다. 실제로 오이라트족의 한 분파인 오리앙카이족은 서사시를 즐겨 암송하며, 이 부족의 버(샤먼)는 영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몽골의 막막한 길을 떠도는 유랑가객도 지극히 ‘높은’ 존재로 여겨지지만, ‘가난’하게 살도록 세상에 내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이나 몽골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바위에 그림 그리던 고대나 스타벅스 구석에 앉아 노트북으로 시를 쓰는 요즘이나, 문학의 길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걸어야 할 수밖에 없으며, 무려 삼십 년이나 그 길을 이어온
『시와산문』과 더불어 지금도 그 길을 걷는 이들이야말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여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니 행여 번쩍거리는 불빛과 박수 소리를 그리워한다면 서둘러 다른 길을 찾아보는 편이 나으실 줄 아시라.
그러나 그 ‘슬픔’은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함께 있으니, 이를 오랜 연구 끝에 스스로 얻은 바가 있다. 그 오묘한 이종 결합의 사연을 몽골의 어느 옹색한 게르에 앉아 침식을 잊으며 올리던 승려의 기도문을 빌어 전한다.
“세상의 모든 슬픔은 내게로,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은 그대에게로….”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가장 귀해하던 ‘사랑’은 그렇게 문학의 길을 걷는 이에게 슬픔과 함께 주어진 축복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