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을 일흔까지 사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줄여서 고희古稀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너도나도 인생 백세시대를 구가하고 있어 고희란 말은 더 이상 설 땅을 잃고 말았다. 왕년의 여배우 김지미나 엄앵란 최은희도 각각 여든에 가깝거나 아흔을 바라보는 인생 여정을 관통하고 있어 장수명시대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백세시대는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랫말처럼 과연 인간들에게 축복으로 다가온 것일까. 오륙십년 동안 스크린을 통해 익숙한 스타들의 삶이 이에 대한 답을 말해준다.
은막의 스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이라도 만년에 맞닥뜨린 고독과 허무는 피할 길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최은희는 자신이 죽으면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장례 때 불러달라고 했다. 아흔을 코앞에 둔 그가 요양원 휠체어에 의지하여 마지막 여생을 보내면서 쏟아낸 말이라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열네 살에 극단에 입단하여 열일곱에 영화에 데뷔했던 최은희. 그는 동란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휴전 후 20여 년간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 몇 편은 직접 자신이 메가폰을 잡기까지 했다.
서른 중반에 본인이 직접 설립한 예술학교에 마흔이 되어서는 교장을 맡기도 했지만 마흔여덟에 홍콩에서 납북되어 북조선 영화 17편 제작에 참여해야만 했고 쉰 후반에 북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 일흔이 다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최은희의 삶엔 결혼과 이혼 후 재결합까지 했던 신상옥 감독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길고도 모진 세월을 살아왔다”고 그는 회고하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여든 초반을 살고 있는 엄앵란은 어떠했을까.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아무리 개망나니 짓을 해도 사랑으로 감싸면서 남편 신성일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여자가 엄앵란이다. 그는 지금도 신성일과 합방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성일은 텔레비전에 나와서 애인이 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도 해마다 보약을 대령하고 집 나간 지 20년이 넘는데도 빨래며 밑반찬을 그에게 해다 바친다. 큰아들 결혼 때 돈 한 푼 안 보탠 남편이 신성일이다. 영화 찍는다고 벌어놓은 돈 다 말아먹고 국회의원 되겠다고 빚더미에 앉아 집안 가재도구까지 다 빨간딱지 붙이게 한 그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어린 아이들을 서울에 버려두고 전주에 내려가 20년을 비빔밥 장사를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 엄앵란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그는 지금도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먹고 사는 게 절박했던 것이다. 자신이 교도소에 있을 때 엄앵란이 찾아오자 줄게 없어서 교도소 안에 핀 장미를 꺾어 주었던 신성일. 엄앵란은 그 꽃을 말려 유리병 속에 밀봉해서 간직하고 있다.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으면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을까 싶다.
일흔 일곱인 김지미는 전성기에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녀 더욱 유명해졌다. 홍성기 영화감독이 남편이었지만 영화배우 최무룡과 바람을 피우다가 수갑까지 차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러곤 그의 부인에게 위자료까지 지불했다. 당시 신문과 방송은 여자가 위자료를 댄 경우는 김지미가 처음이라고 떠들어댔다. 영화에 출연해야 하는 사람이 감옥에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으니 집을 잡혀서 위자료를 냈던 것이다.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향하면서도 두 사람은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김지미는 최무룡과도 헤어진 후 희대의 스캔들로 불린 가수 나훈아와의 사랑에 빠졌다. 십년 정도의 나이차도 있었지만 김지미가 노안이다 보니 엄마와 아들과 같은 모습으로 비쳤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커플이었다. 그러고 그는 나훈아와도 얼마간 살다가 갈라섰다. 이제 혼자 조용히 사나했더니 또 결혼을 했다. 이번에는 그녀와 어울리는 나이대의 사람이었다. 바로 자기 엄마의 주치의였다. 그 사람은 자유분방한 김지미와는 달리 완고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사랑 앞에서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던지 김지미와 결혼을 했다.
그러고 두 사람은 잘 사는 듯하다가 또 이혼을 했고 그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또 결혼을 하나 했지만 아직까지는 혼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인생에서 누가 과연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엄앵란이 옳게 산 사람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엄앵란은 노년에 대한민국에서 훌륭한 어머니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잘 키워냈고 가정을 지켰기에 툭하면 이혼하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여인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한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그에 비해 본인의 욕망대로 산 김지미의 삶은 어땠을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수치스러운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지만 자신의 감정에는 충실히 살았다. 지금 이 시대는 엄앵란의 삶보다 김지미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툭하면 이혼하고 다른 남자 찾아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밖으로 화려해 보이는 스타들의 삶에도 이처럼 고난의 세월은 이어졌다. 황혼인생에게 아무리 노년의 낙과 여유로움을 말해봤자 가슴에 남는 건 낙조의 쓸쓸함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쓸쓸함을 이기지 못해 구순에 가까운 여배우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보처럼 살았다며 가슴을 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