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삽은 “왜 악인이 번성하는가?”라고 물었고, 욥은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고 물었다. 아삽은 악인이 누리는 행복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질문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믿음의 물음표이다.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평안하게 사는데, 정결하게 살려고 애쓴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전환점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찾아왔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형통이 인생의 최종 결론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침내 그의 고백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로 바뀌었다. 복을 바라보는 기준이 소유와 형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옮겨 간 것이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설명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고난의 원인을 그의 죄에서 찾았지만, 그 설명은 욥의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욥은 탄식하고 항변하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질문을 가져갔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기보다, 그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창조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 만남 속에서 욥은 고백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고난의 이유를 모두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된 것이다.
아삽은 성소에서 시선이 바뀌었고, 욥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이해의 한계를 깨달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질문을 품은 채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믿음 안에는 탄식과 항변을 드릴 자리도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 서 있는 커다란 물음표를 바라보며 이들의 질문을 떠올린다. “왜 저 사람은 잘되는가?”,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가?” 우리에게도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 모든 물음표가 설명이라는 느낌표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질문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자리에서 신뢰의 고백이 자랄 수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