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을 다하여 간절히 구하라
“나”의 벽은 무너뜨리고자 하여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동안 “나”의 이기심과 “나”의 고집과 “나”에 대한 사랑으로 너무나 견고하게 쌓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가장 쉬운 경우는 삼매(三昧)를 이룰 때이다.
참선하여 좌선 삼매에 젖어 들거나, 불보살의 명호를 외워 염불삼매에 젖어 들면
“나”의 벽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또 “나”의 것을 아끼는 마음을 없애는 보시를 하거나,
자비 봉사로 남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살릴 수 있는 삶을 살거나,
경전 등을 열심히 공부하고 사색하여
무아(無我)의 이치를 사무쳐 깨닫게 되면 “나”의 벽은 사라지게 된다.
어떠한 불법 수행이라도 상관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깊이 명심해야 할 사항은 자랑 말고 집착 말고 정성껏 행하라는 것이다.
가령 보시를 하였다고 하면 보시를 한 그 자체로 끝낼 뿐,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자취를 남겨서는 안 된다.
왜인가? 자랑하고 집착하는 보시는 그 공덕이 자랑하고 집착하는 만큼만이지만,
집착 없이 행하는 보시는 한량없는 복을 불러일으키고 깨달음의 길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즐겨 닦는 기도나 절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자 중에는 힘든 3천 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3천 배를 올리면서 흘린 땀방울은 그야말로 참회의 땀방울이다.
그런데 그 사람 중 일부는 3천이라는 절의 수를 즐겨 자랑하기도 한다.
3천 배 한 것을 마치 미지의 산봉우리를 최초로 밟은 것 인양 자랑하고,
아직 3천 배 한 일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삼아 은근히 뽐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절을 하고 기도한다면 3천 배가 아니라 백만 배를 한들 참된 깨달음으로는 이어질 수가 없다.
자랑 섞인 3천 배보다는 오히려 정성을 가득 담은 3배가 더 큰 공덕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부디 명심하라. 불법 수행의 요체는 정성껏 행하고 비우는 것이다.
결코 자랑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랑하면 흔적이 깊어지고, 흔적이 깊으면 깊은 만큼 텅 비어 있는 참된 도와 하나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은 어떠한 불법을 수행하더라도 자랑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언제나 하심(下心)을 하면서 정성껏-정성껏 불법을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 정성이 설산동자(雪山童子)가 도를 구한 것처럼 간절해지면,
감추어진 보배 창고인 일심을 되찾아서 마음대로 보물을 쓰고
무한한 행복의 대 해탈의 삶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설산동자…
☞ 설산동자는 청정한 설산(雪山)에서 세속적인 모든 욕심을 버리고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구하기 위해 힘든 고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의 제석천왕을 비롯한 많은 천신이 그 고행자를 보고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저 고행자는 청정설산에서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수행에만 힘쓰고 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저토록 힘든 고행을 닦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저렇게 한량없는 복을 지어서 무엇을 하려고 할까?
혹 제석천왕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기껏 제석천왕 자리를 탐내는 자가 저런 고행을 하겠습니까?
저 사람은 아마도 모든 일이 무상하다는 것을 아는 무상심(無常心)을 깊이 체득하여,
위없는 깨달음인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저 사람처럼 일체 상(相)을 떠난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닦다 보면
머지않아 틀림없이 무상대도를 성취할 것입니다.
제석천왕은 천신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입을 열었다.
“비유컨대, 마갈어가 수억만 개의 알을 낳지만,
그 알이 모두 부화 되어 큰 물고기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무상대도를 이루겠다고 발심(發心)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무상대도를 성취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저자가 참으로 진금(眞金)인 줄 알려면 태워보고 갈아보고 두드려 보아야[燒磨打] 한다.”
제석천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 흉측한 나찰 귀신으로 모습을 바꾸고
설산으로 내려가, 동자가 수행하는 근처에 앉아 게송을 읊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변천하는 모든 법 떳떳하지 않아
시생멸법(是生滅法)
모두가 났다가는 없어지는 법
설산동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귀 기울였다.
아니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법문이 들여오는가?
어디에서 이와 같은 반쪽의 여의보주가 쏟아졌는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흉측한 나찰만이 저쪽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혹시 당신께서 조금 전에 노래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도 모르오.”
“당신은 무엇을 먹고삽니까?”
“놀라지 마시오. 나는 산 사람의 따뜻한 고기와 피를 먹고 사는 나찰 귀신이라오.”
“조금 전에 설한 법문은 반쪽밖에 안 되니 나머지 반쪽도 들려주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기꺼이 이 몸을 드리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겠소.”
“내가 당신께 이 몸을 보시한다는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소.”
“그렇다면 잘 들으시오. 행자여.”
생멸멸이(生滅滅巳)
나고 죽는 법이 다 없어지면
적멸위락(寂滅爲樂)
고요하고 고요하여 즐거우니라.
나머지 게송을 듣고 난 뒤
행자는 나무와 돌, 땅에다 부지런히 게송을 쓴 다음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시방 제불(十方諸佛) 이시여,
일언반구(一言半句)를 위해 이제 이 몸을 버리오니 저를 증명해 주소서.”
그러고는 나찰의 입을 향해 뛰어내렸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는 온갖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찰 귀신은 제석천왕의 모습으로 돌아와 설산동자의 몸을 허공에서 살며시 받아 평지에 내려놓았다.
제석천왕을 비롯한 여러 천인은 설산동자의 발아래 예배하며 찬탄하였다.
“장하여라. 당신은 진정한 보살입니다.
무명(無明) 속에서 법의 횃불을 켜고 한량없는 중생의 이익을 구하려 하십니다.
저희는 여래의 높은 법을 지극히 아끼기에 시끄럽고 번거롭게 하였사오나,
참회하는 정성을 받아 주시고 무상대도를 이루어 저희를 제도해 주소서.”
제석천왕과 모든 하늘 대중은 다시 설산 동자에게 예배하고 사라졌다.
석가모니불께서는 전생의 설산동자 시절,
반 게송을 위해 몸을 버린 인연으로 성불의 시기를 12 겁(劫)이나 앞당겨,
미륵보살보다 먼저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불법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설산동자.
이 설산동자처럼 누구나 지극한 마음가짐으로 몸을 잊고
불법을 구하게 되면 한량없는 겁을 뛰어넘어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
물론 대부분 불자는 설산동자와 같은 지극한 구법의 정성을 보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힘닿는 데까지 꾸준히 불법을 익히고 정성을 다하면 차츰 길이 열리게 된다.
불자들이여, 부디 명심하라.
언제나 불법을 생각하고 불법 속에 살면 비록 지금은 어려운 수행일지라도
차츰 인(因)과 연(緣)과 업(業)이 무르익고 또 익어 마침내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정녕 중요한 것은 법답게 살고 정성을 다하는 일이다.
내가 “나”를 개발하여 영원 생명과 무한 생명을 이루는 불법 수행에 정성을 다하여,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의 길로 나아가기를 축원드린다.
- 일타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