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벅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창작과비평』 22호, 1971. 가을)
[어휘풀이]
-꺽정이 ⸱ 서림이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인물
-쇠전 : 우시장(牛市長). 소를 파는 시장
-도수장 : 도살장. 짐승을 잡는 곳.
[작품해설]
이 시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로 인해 급속도로 와해되어 가던 1970년대 초반의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한과 고뇌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촌의 절망과 농민의 울분을 고발 ⸱ 토로하고 있으면서도, 그 울분이 선동적이거나 전투적인 느낌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끝나는 작품 구조에 의해서 교묘한 역설과 시적 운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울분돠 절망을 정반대의 ‘신명’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을 통해 그들의 아픔이 역설적으로 고양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연 구분이 없는 20행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농무가 끝난 뒤 농민들이 ‘소줏집’에서 답답하고 고달픈 심정을 술로 달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1행은, 농무가 두렛일의 흥겨움보다는 농민들의 자조적인 한탄과 원한의 몸직임을 타타내기 위한 예고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농무가 끝난 뒤의 ‘텅 빈 운동장’이 주는 공허감은 이젠 더 이상 농무에 신명을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자, 이런 현실에 대한 공연자의 안타까움과 공허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한’ 그들은 텅 빈 마음과 고달픈 삶을 그저 술로 달랠 뿐이다.
2단락은 7~10행으로, 농악패에 대한 농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통해 예전과 달라진 농촌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들이 옛날의 풍습대로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보아도, 신명나게 놀아주던 어른들 대신, ‘조무래기들’만 악을 쓰며 따라붙거나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 처녀애들뿐이다.
3단락은 11~16행으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여편네이게나 맡겨 두고’ 나온 그들이 자신의 울분을 춤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춤을 추는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대’며 즐거워하지만, 결국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하며 자신들의 삶을 자학하거나 체념하고 만다. 임꺽정과 서림은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한 까닭은 농민들의 한과 슬픔이 다만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함께 해 온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배려로 볼 수 있다.
4단락은 17~20행으로, 자신의 한과 고뇌를 신명난 춤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이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이르렀을 때,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는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극에 달하지만, 오히려 ‘날라리를 불고’ 덩실덩실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바뀜으로써 그들의 비애가 그만큼 심화되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추는 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생활 터전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농촌의 일상 언어를 통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농민들의 정취와 정감을 물씬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이 시는 농민들의 격학 감정을 직접적인 서술로 표출하면서도 농무의 동작이나 농악기의 소리로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탄탄한 서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가난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과 소외된 농촌을 상기시켜 주는 뛰어난 문학성에 힘입어 이 시는 제1회 만해문학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작가소개]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청북도 중원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탑」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현의회 창립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시집 :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저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