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며칠 앞 둔 어제 오후에 며느리는 밤새 외출한다며 손녀, 손자를 시어머니한테 맡겼다.
할머니인 아내는 유치원생인 손녀 손녀를 데리고 하루밤 재웠고, 다음날인 오늘 아침에 큰아들 내외가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되돌아갔다.
며느리 친정은 대구.
얼마 전에 며느리한테 친정에 다녀오라고 일렀다는 아내의 말을 내가 기억했다.
아내한테 물었다.
'며느리는 언제 친정에 간대?'
'화요일 기차표를 예매했다네요. 오래 전부터 예매하려고 했는데도 좌석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대요.'
'화요일이면 9월 10일. 추석 사흘 전이구먼.'
큰 아들은 직장 일 끝난 뒤 혼자서 대구 처가댁으로 내려갈 게다.
이번 추석에도 나는 아내, 미혼인 작은아들과 함께 셋이서 지낼 터.
어쩌면 큰딸이 추석 전후로 들리겠다.
큰사위는 인도사람. 며칠 전에 미국으로 나갔기에 큰딸은 지금 혼자서 지낸다.
작은딸.
충남 태안군에 사시는 시아버지 내외가 인천으로 올라오셔서 시아버지의 큰집에서 차례 지낸다고 한다.
작은딸은 어린아이 핑계를 대면서 올 추석에도 추석맞이 준비를 별로 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제 집에서 돌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아들과 함께 지낼런지도 모른다.
(어렵사리 얻은 아들)
작은사위 혼자서 인천으로 가서 자기 부모님을 뵙고, 친척들을 만나면서 차례를 지낼 것 같기도 하고...
몇 해 전, 서울로 올라온 나는 이번 추석 명절에도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서해안에서 함께 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그참 서울로 되올라왔기에 보령지방 산골마을에 있는 내 시골집은 그 뒤부터 텅 비었다.
10여 대의 산소가 한 군데에 몰려 있는데도 장손인 나는 이번 추석에도 산소에 들리지도 못할 터.
수십 년 전의 명절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는 모두가 무척이나 고생 많이 했다.
첫째는 교통편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는 나는 서울역에 나가서 기차표를 예매해야 했다.
한 달 전에 어떤 날을 깃점으로 예매가 시작하기에 예매하는 날에는 새벽 일찍이 나가서 서울역 광장에서 줄 지어 서서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역 광장에 줄 지어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나와 아내는 어린 자식 넷과 함께 6식구가 기차에 탔다.
서울 용산역 또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장항선 기차를 타려면.. 몸집이 작은 아이들을 어깨 위로 번쩍 쳐들어서 기차 창문으로 밀어넣어야 했다. 기차 안에서 아내는 아이들을 받고...
정말로 많은 승객들로 가득 차서 발 하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기차 안에서 몇 시간이나 시달린 뒤 시골역에 내리면 네 아이들과 아내는 초주검 상태.
먼 뒷날에서야 자가용이 등장했고, 자동차를 몰고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야 했다.
언제이던가, 구정 이틀 전이었다. 섣달그믐이 생신인 어머니 생일도 맞이할 겸 길을 나섰다.
서울 아파트에서 시골집까지는 거리는 불과 190km.
서해안고속도로 바닥이 갑자기 내린 폭설로 결빙해서 모든 차는 설설 기어야 했다.
무려 18시간 30분이나 걸린 뒤에서야 시골집에 겨우 도착한 때도 있었다.
겨울철 빙판길. 차 안에서 밤을 지새우고... 숱한 자동차 접촉사고도 목격하고...
몇 해 전, 아흔일곱 살을 맞이한 지 며칠 뒤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뒤부터는 명절은 아예 서울에서만 지낸다.
이제는 교통지옥을 전혀 걱정하지도 않는다.
내 자식 셋은 결혼해서 따로 살고, 미혼인 막내아들만 잠실에서 함께 산다.
명절 때 시골로 내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다행이다.
아내가 힘들어하는 둘째는 차례상 준비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서울에서 차례를 지내기에 제수물 준비는 무척이나 간편해졌다.
잠실 새마을시장에 가면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다.
아내는 혼자서 시장에 나가서 그냥 사오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도와 줄 일은 없어?'
'아무 것도 없어요. 차례 지낼 때에나 생밤이나 칼로 깎으세요.'
나는 종손.
사촌네, 당숙네들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각자 알아서 자기네끼리 차례 지내기로 오래 전에 합의했다.
그들도 자기 부모 제사를 모셔야 하기에.
사정이 이렇기에 큰집은 내 아내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예전 내 어머니가 차례 준비를 할 때에는 정말로 힘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머슴애인 나조차도 제사상에 오를 음식물 준비에 정말로 바빠해야 했다.
차례 당일 아침에서야 마을에 사는 일가들, 공주 사는 작은아버지 등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차례 지내는 은정말로 아무 것도 아닐 만큼 간소화되었다.
서울 잠실 새마을시장에 나가면 제사상에 오를 제수물이 완벽하게 다 준비되어 있기에 지갑을 열면 모든 것을 금세 다 갖출 수 있다.
아내는 젊은 날 차례 준비를 하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다.
며느리한테는 차례상 준비를 전혀 시키지 않는다.
추석에는 친정으로 차례 지내라고 배려한다.
설날에도 배려했다.
설은 서울 잠실에서 차례 지내되 어린 아이가 둘이니 차례 지내기 바로 직전에서야 오라고 단단히 일렀다.
아내 혼자서 차례상 준비를 하고, 큰아들 내외는 차례 직전에서야 잠실에 들른다. 차례를 지내고는 그들은 이내 잠실을 떠난다. 아마도 대구 친정으로 갈 듯 싶고...
나는 1949년 1월생.
수십 년 전을 떠올린다.
설이나 추석 차례를 지내려면 어린 사내인 나한테도 일거리가 정말로 많았다.
(아버지는 대전에서 사셨기에 차례 전날에서야 오시고)
그 당시에는 시골 산골마을인데도 사람들이 정말로 많이 살았으며, 객지에 나간 사람들은 명절에 시골로 내려왔기에 마을 전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수십 년이 지난 뒤 2000년대인 지금에는?
2019년 9월 8일인 오늘 인터넷에는 '혼추족, 나홀로 추석'이란 용어가 떴다.
혼자서 추석을 지내는 사람이무척이나 많다는 뜻.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사람을 위해서 일인용 제수물과 혼자 먹을 음식물이 배달되는 세상이다.
'혼추족', 나홀로 추석'이란 용어 이외에도 '혼밥, 혼술, 혼영, 혼행, 싱글족' 등도 있다.
혼추족, 혼설족 :
명절 스트레스를 피해 휴식을 취하거나 취업준비, 일 따위를 하느라 명절 연휴를 혼자 보내는 사람이나 또그런 무리를 말한다.
'방콕, 라이프 스타일' 등의 신용어가 마구 등장한다.
이번 추석에도 나는 막내아들과 함께 차례를 지내면 모든 게 끝일 게다.
차례 지낸 뒤에는 그저 조용히 내 방에서 쉴 게다. 나도 나홀로족처럼 '방콕' 할 게다.
시골로 내려가지도 않기에 마을 앞산에 있는 집단묘지에도 들리지도 않을 터.
2016년, 2017년 마을 앞산이 일반산업단지로 토지수용되면서 무덤을 파묘하여 다른 곳으로 개장.
내외분으로 합장한 무덤마다 절을 올리지도 않을 터.
조상님들의 묘지는 올 추석에도 그냥 쓸쓸할 터.
어쩌면 대천시내에 사시는 큰당숙(여든두 살)이, 대전 사는 사촌동생(여러 형제)들이 조상 선대의 집단묘지에 먼저 들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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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고맙습니다.
어찌 이런 미물이...존재하냐?
모기 한 마리, 아랫배가 빨간 물이 밴 모기가 23층 고층 아파트에 있는 내 방에서 날라다닌다.
정말로 짜증이 난다.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신과 모기의 귀싸대기를 번갈라 갈길 것 같다.
모기가 정말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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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자가 아니다.'
筆者 必子
어떤 사람의 글을 보았다.
자신을 말할 때 필자라고 하는지...
글감이다.
내일에 작성하자.
첫댓글 행복한 추석 명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따라서 주변이
많이 변한 것을 느낍니다.
며느님에 대한 배려가
지극하심을 느낍니다.
예...
손녀와 손자를 낳아서 키우니까요.
손녀는 잘 먹어서 키도 큰데 비하여, 손자는 고집이 쎄서 생선 비린 것은 안 먹는다네요.
그 어린 것이 최씨고집을 피우는 것일까요?
댓글 고맙습니다.
아직 다듬지 않은 글감인데...
넉넉한 추석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럴까?
며느리가 생긴다면?
그럼요.
며느리도 자식이거든요.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어도 가슴으로 보듬어줘야 하는 자식이지요.
내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사는 짝이기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살펴 줘야 하지요.
어쩌면 우리세대가 변화해야겠지요.
예전의 고지식했던 시어머니한테 구박받았으나...이제는 시어머니 위치에 와 있는 우리세대... 며느리를 보듬어 주는 새시대의 시어머니로 자리매김을 하니까요.
머물다갑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고 늘 좋은일만 가득하세요
세상사는 이야기속에 머물다갑니다
건강한 하루 미소가득한 하루
하이팅입니다
고향가는 철길에 예쁜 꽃이 피었군요.
맑고 푸른 하늘에 붉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군요.
저는 고향 가는 기차를 타 본 지도 오래되는군요.
지금은 자가용으로 가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는 저는 고향을 떴기에...
이제는 텅 빈 고향이지요.
제 밭 가생이에 낸 마을회관 앞 터에는 추석 쇠러 온 사람들의 자가용이 주차했을 겁니다.
제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비워두었을 터...
억세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가득 찼겠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명절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가 고향과 부모님이지요.
그만큼 우리는 고향을 떠나살면서도
평생 고향을 잊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를 잊지 못하듯이.....
댓글 고맙습니다.저한테는 시골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 최씨네는 3집. 모두 빈 집 수준...
종가인 제 집은 텅 비어 있고, 6촌동생네는 전세 내놓고, 사촌네도 비어 있고...
대천 사는 큰당숙네가, 대전에서 차례 지내는 사촌동생네가 혹시 고향 산소에 들러서 절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명이서 고작.
추석... 더욱 간소화되겠지요.
저한테는 고향이 있지만 제 자식들한테는 고향이 없습니다.
있다면 서울 송파구 잠실이 고향?
다복하십니다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시는 아내분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제 손위 형님도 차례 끝나면 조카 장인댁으로 보내더군요
보기 좋았어요
제 아내의 고향은 전남 광양군 골약면... 지금은 광양제철소 땅으로 흡수되어 고향을 잃어버렸지요.
고향마을이 깡그리 사라졌고...
또 서울에서 광양까지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고, 자식이 넷이나 딸렸고, 종손집 며느리라서 설, 추석 등 명절에는 단 한 번도 친정으로 내려가지 못했지요. 이런 아픔을 아는 아내이기에 대구가 친정인 며느리한테 배려했다고 봅니다. 하기가 비좁은 아파트에서 음식 준비에 서툰 며느리가 와서 거둔다고 해도 오히려 거리적거릴 터.
나중에 아내가 힘이 없으면 그때에는 며느리가 제수 준비하겠지요. 친정에는 덜 갈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