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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에서 본 진도타워. 바다에는 전복양식장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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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진 펑퍼짐한 바위 끝에 전첩비가 우뚝 솟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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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첩비 주변에는 잡다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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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돌 등 위에 비석이 세워지고 그 옥개석에도 두마리의 거북이 머리가 좌우로 굽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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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벽파진전첩비라 새겨진 아래에는 한글과 한문이 섞여서 비문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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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용머리 같기도 하고 거북머리 같기도 한 동물머리가 옥개석 위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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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첩비 바로 옆에는 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김대중 전대통령이 다녀가면서 기념나무를 심었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가장 심하다는 8월 초
이순신장군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남도땅 진도로 역사기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500여 km,
옛날 같으면 괴나리 봇짐을 둘러메고 보통 한달을 걸려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거리이지만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통팔달로 잘 뚫려서 새벽에 나서고 보니
휴가철이라도 막힘이 없이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멀지만 시간상으로는 그리 멀지가 않았다.
진도로 오기전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인 목포에서
국도로 갈아타고 1시간 여만에 해남땅에 이르렀고,
해남땅에서는 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충무공의 사당인 충무사,
해남 우수영을 거쳐 진도대교와 진도타워를 올라서 둘러보고
진도의 큰 항구였던 벽파진에 이르렀다.
이제는 다리가 놓여서 항구가 그 가치를 많이 잃고 말았다.
벽파진이란 "푸른파도가 이는 항구"로 명량(울돌목)의 빠른 물길에서 벗어난 바로 인접항구다.
벽파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정유재란 당시 잠시 머물던 곳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부터도 진도의 요새항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시대 강화도에 수도서울을 옮겨서 몽고에 대항하던 고려저항군(삼별초)은
몽골군과 고려관군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수백척의 전선과 무역선들을 거느리고
이곳 진도로 또다시 본거지를 옮긴 후 고려관군과 몽골군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육지와 가깝지만 물길이 험한 이곳 울돌목이 진압하고자 돌진할
연합군의 방어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진도를 선택하였으며,
이곳은 육지와 가까워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섬지방과 해안지방을
본거지로 물자보급이 쉬운 곳으로 적합한 곳을 바로 진도로 보았고,
그 본거지로는 바로 이곳 벽파진이 주요 항구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부터 성벽을 쌓고 행궁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 곳은 용장산성이고 그 안에 있는 행궁이었다.
그런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이곳 벽파진에는 최근(1956년 11월)에 충무공벽파전첩비가 세워졌다.
정유재란으로 다시 전쟁이 시작되자 선조는 이순신을 또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으면 수군을 그만두고 육전에 임하기를 권하였다.
충무공은 벽파진에 12척의 판옥선으로 진을 친후
적과의 일전을 앞에 두고 고심에 고심을 하다가 명량해전이 발발하기 하루 전에
수군함선을 해남 우수영으로 전격적으로 옮겼다.
그리고 옮긴 다음날 바로 1597년 9월 16일(음력) 불후의 전쟁인 명량해전이 벌어졌으며
전무후무한 전과를 세우면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전투가 그리 끝나리라고는 장군께서도 장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장군이 쓰신 난중일기에도 자세히 나온다.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금 제수받고 벽파진에 머무는 16일 동안
3일은 비가왔고 4일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고 한다.
가을바람이 스산한 가운데, 적의 기습공격이 있었고, 그 때 13척의 적선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적의 침공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장군은
수군의 본거지를 물살이 거센 해남 우수영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후 360년이 다하도록 진도 벽파진에는 이순신장군의 수군함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에 관한 역사적인 유적은 없었다.
이에 진도군민과 진도군 당국이 힘을 합하고 자금을 모아
벽파진 언덕바위 위에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이곳 진도민으로 당시에 목숨바친 숭고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역사의 징표로 세웠다.
그 때는 정유재란 이후 359년 만인 1956년 이었다.
다음은 벽파진충무공기념비의 전체내용이다.
벽파진 이순신장군 전첩비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바로 이곳이려니와 감옥살이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시고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이 군수로 임명되었던
이곳 진도땅 벽파정에 이르니 때는 공이 53세 되던해인 정유(1597년)년 8월 29일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령하였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사옵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이곳 바다목을 지키셨나니,
여기서 머무는 16일 동안 3일은 비내리고 4일은 바람이 불어왔다.
공은 맞아들 회와 함께 배위에 앉아 눈물도 흘리셨고,
9월 초7일에 적선 13척이 들어옴을 물리치시고,
초9일에는 적선 2척이 감포도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보다 쫓겨났는데,
공이 생각한 바가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적은 배로 330척 적을 모조리 물리치시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그날 진도 백성들은 모조리 물려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식량을 나누었으며
이천구,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헌, 박희령, 박후령,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의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량과 그의 아들 명신등은
목숨까지 바치며 천추에 호국의 신이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진도인의 자랑이라.
이 고장 민속인 강강수래 구슬픈 노래와 춤은 의병전술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어리고 녹진 명량 두 언덕에 철쇄를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동포들이
그 은공과 전기를 영원히 드높이고자 벽파진 머리에 한덩이 돌을 세우며
삼가 끓어 엎드려 대강 그때 사적을 적고 이어 시를 붙이노니,,,
열 두척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벽파진 찾아들어 바다목을 지키실제
그 심정 아는 이 없어 혼자눈물 흘리시다
300척 적의 배를 산같이 깔렸더니
울돌목 쎈 물결이 거품같이 깨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님 우뜩 서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흘린 의사혼백 어는적에 사라지니
이 바다 지나는 이들이여 이마 숙이옵소서
이글은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출신 서예가 손재형이 썼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한 뒤 많은 혼란기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마음만은 그 시대가 어떻든 숭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워진 년도를 보면 해방되고 한국전쟁의 휴전이 성립된지 얼마 안되는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말기로 치닫던 시기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