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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대받는 세대 원문보기 글쓴이: 地坪
◆가자지구 의 비극.
더위. 우리들은 요지음과 같은 뜨거운 더위를 표현할 때 이런말을 쓴다.
‘숨이 턱턱 막힌다.’ ‘찜통이다.’ ‘난로옆에 앉아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고온다습(高溫多濕-습기가 많고 더운 것)한 지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더위는 끈끈하기까지 하다.
반대로 습기가 없는 중동지역은 섭씨45도라 해도 그늘에만 들어서면 서늘하다. 결국 더위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습기의 정도가 그 느낌을 좌우하는 셈이다.
우리집에도 에어컨이 있지만, 손님이 오는 경우를 제외하곤 가동하지 않는다.
우리부부 모두 에어컨의 인공적인 찬 바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긴시간 에어컨 바람에 노출되면 건겅에 나쁘다는 것은 상식이기도 하다.
내가 여름이면 선호하는 물건은 선풍기와 쥘부채다.
아주 더우면 가급적 선풍기를 멀리놓고 제일약한 바람이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오게한다.
그 바람은 흡사 산들산들 지나가는 가을바람처럼 서늘하다. 선풍기를 쓰지않을 정도의 더위에서는 쥘부채를 펴들고 천천히 부채질 한다. 정말 더위를 피하는, 운치있고 여유로운 방법이다.
쥘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은 뜻밖에 크고 서늘하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정감있는 물건이다.
오래전, 나는 사하라사막 한 복판에서 차에서 내려 그 뜨거운 사막을 걸어봤다. 정말 숨이 막히는 뜨거운 열기였다.
그런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중동의 홍해끝 아카마만에 있는 요르단의 알 아카바항을 잊을수 없다.
바로 왼쪽은 이스라엘의 에일랏과 붙어있는 이 항구도시는 버스에서 내리는순간 다시 버스속으로 도망쳐 들어가야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건 사하라보다 더 뜨거운 열기였다.
중동 여러곳을 여행해 봤지만 그렇게 뜨거운 지역은 처음이었다.
호텔로 뛰어들어가 방을 잡은후 창밖을 내다보면서 다시한번 놀랬다.
호텔내부도 에어컨을 최고도로 가동하고 있었지만 몹시 더웠는데 그 뜨거운 밖에서 동네 꼬마들이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쪽 창문으로 내다보니 나이많은 어른들이 평상에 모여앉아 TV를 시청 하고 있었다. 한국인인 내게 그건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 불볕더위에서 어떻게 축구를 할수있으며 모여앉아 TV를 시청할수 있는가.
이집트를 경유 요르단에 온 목적이 ‘페트라’ 에 가기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부부는 호텔방에 머문채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냈다.
결국 인간은 ‘적응’ 의 천재인 것이다. 그 뜨거운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그 불볕에서 살아갈수 있는 내성이 생긴 것이다.
지역에 따라 같은 인간인데도 피부나 겉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환경에 서로다르게 적응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있는곳이 아무리 불볕더위라 해도 알 아카바의 그것과는 비교자체가 안된다. 세상에 그렇게 뜨거운 곳에서도 애들이 축구를 즐기고 있지않은가.
가자지구.
나는 오래전 예루살렘에서 평생 잊을수 없는 무서운 경험을 한바 있다.
성전산의 황금돔모스크를 보기위해 들어갈때는 정문을 이용했다. 그러나 악사모스크까지 돌아본후, 나올때는 후문을 이용했는데 후문을 나서는순간 아주 가까이에서 요란한 자동소총 소리가 나기시작했다.
후문앞 골목에 있던 몇사람은 즉시 땅에 엎드렸고 나도 그들을 따라 납작업드렸다.
그때 골목끝 모퉁이에서 이스라엘 경찰이 나타나 우리들을 향해 자기들 쪽으로 빨리 뛰어오라는 손짓을 계속했다.
그러나 총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계속 났기 때문에 움직일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총격전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왔을 때 우리들은 죽을힘을 다해 이스라엘경찰이 있는쪽으로 뛰었고 무사히 도착했다. 대낮에 벌어진 총격전은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이스라엘경찰간의 전쟁이었다.
나는 비로서 이땅이 얼마나 위험하고 험한곳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이스라엘 안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있는데, 구역은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요르단강에 인접한 웨스트 뱅크(서안지구)와 지중해 연안에 위치, 이집트와 인접한 ‘가자지구’ 가 그것이다.
서안지구는 약250만의 인구가 있으며 파타(Fatah)가 이끄는 자치정부가 있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용인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 160만의 가지지구는 무장단체인 하마스(Hamas)가 장악하고 있으며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이슬람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지금 지상군과 탱크까지 투입, 이스라엘이 공격하고 있는곳이 바로 이 가자지구 이며 분명한 목적은 무장단체 하마스의 붕괴다.
가자지구에서 직경거리 1킬로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남부도시 수데롯에는 지난 10년간 8600발의 하마스 로켓포가 떨어지기도 했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분리장벽을 설치, 모든 접촉을 차단하고 있으며 반출, 반입되는 모든 물품과 인원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무장단체 하마스의 목표가 달성될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거의없다. 그들은 모든면에서 이스라엘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아랍테러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으로 철저히 대응하는 것은 자기들의 생존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동지역을 열 번이상 여행한바 있으며 이슬람이 이스라엘을 이길수 없는 취약점에 대해 많은생각을 해 봤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 한다면,
칼리프들은 16세기에 발명되어 여러나라가 반입한 인쇄기를 배척했다. 아랍세계의 10년간의 출판물 전부를 합해도 스페인의 일년치에도 미달이다. 문,물에서 낙후된 것이다.
또 하나가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신정정치가 그것이다. 현대국가가 되기위한 체제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더 고립되어가고 있다.
한편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을 집안에 가두어두는 어리석음이다. 인구 절반의 경제활동을 봉쇄했으니 그 경제가 발전은커녕 경쟁력을 가질수가 없다.
여자에게는 운전면허도 내 주지않는 나라가 많다.
무슬림들은, 모든일이 ‘인샬라-신의 뜻대로’ 이다.
그러니 딱 부러지게 되는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
현대세계는 이런 ‘거래’ 가 통하지 않는다. 책임이 회피될수 있기 때문이다. 핑계의 이 큰 기둥은 아마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후세인 제거후, 이라크는 소수파인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다수파인 수니파가 정변을 시도하고 있으며 시아파국가인 이란까지 이 복잡한 문제에 가세하고 있다.
알라의 후계 선출방법 때문에 갈라진 같은종교의 형제끼리 피터지게 싸우는게 그들이다.
이슬람의 ‘테러리즘’ 은, 서방에 대한 열등감이 큰 이유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자행되고있는 ‘자살폭탄테러’ 는 이슬람 세계에서만 가능한후진성이다. 지금과 같은 목표와 방법을 바꾸지 않는한 이슬람의 가난과 고통은 끝날 것 같지가 않다.
하마스가 이스라엘군을 이길수 없는것만큼, 확실한 확률이다. 그래서 제일 불쌍한게 ‘셈족’ 의 보통사람들이다.
씨앗.
1914년에 시작된 1차대전 당시 연합군 함대는 우수하고 민첩한 독일잠수함들에 의해 무수히 격침되었으며,
볼세비키 혁명과업으로 내부단속에도 힘 겨웠던 러시아는 도움이 되지못했다.
당시 연합군의 리더였던 영국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나중에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외교전에 매 달리게 된다.
1917년 7월, 유대계 자본의 힘이 절실했던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는 유대계 거부 로스 차일드에게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하는데 동의한다는 서한을 보낸다. 이게 유명한 ‘벨푸어 선언’ 이다.
그런데 이 선언은 그보다 이전인 1915년 10월에 발표된 ‘맥마흔 선언’ 과는 그 내용이 배치되는 것이었다.
1차대전이 진행중이던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의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메카의 세리프 마호메트 자손인 훗세인과 10여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약속을 한바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편에 서 있던 오스만튀르크를 교란하기 위해 당시 오스만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게도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인 프랑스와는 전후 중동을 분할,차지하기 위한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맺기도 했다.
결국 영국은, 전후 이스라엘의 유다국가 독립, 팔레스타인의 독립, 그리고 프랑스와의 중둥 분할까지 삼중의 사기성 약속을 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후, 1922년 7월, 국제연맹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승인했으며 그 안에는 ‘벨푸어선언’ 도 포함했다.
영국의 철저한 견제와 감시를 피해 이스라엘은 1948년 5월에 건국했으며 이때 팔레스타인 땅에 이미 거주하고있던 아랍인 80만명이 추방되었으며 1만5천여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나크바(nakba-대재앙) 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이 바로 이들이다.
영국은 이스라엘 에게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게도 독립국가 건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끝없는 분쟁,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본래 ‘자기들 땅’을 되찾겠다는 것이고,
2000여년 이상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추방된 아랍인들’은 반드시 이스라엘을 지중해에 쓸어넣고 옛땅을 회복,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 지상의 목표가 됐다.
1948년 5월,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의 유대인 국가가 탄생했을 때 아랍권은 그 심각한 의미를 알고있었다.
중동전쟁은 아랍이 이스라엘이 자리잡기 전에 궤멸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어 시작되었다.
제1차 중동전쟁, 1948.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유엔의 중재로 휴전, 이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영토 80%를 차지.
제2차 중동전쟁, 1956. 낫세르가 스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운하 운영권자인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한 전쟁.
제3차 중동전쟁, 6일전쟁, 1967.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빈번한 충돌이 원인이되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연합군과의 전쟁, 이스라엘이 승리했으며
이때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구 예루살렘구역(유명한 통곡의벽 도 이때탈환) 요르단강 서안,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다. (나중에 시나이반도는 이집트에 반환)
제4차 욤키푸르 전쟁, 1973.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 이스라엘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시나이 반도에 있던 이집트 주력부대가 포위되어 패배함.
지금 가자지구에서의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격도 따지고 보면 제한적인 중동전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스트뱅크(서인지구)의 파타(Fatah)가 이스라엘과 공존하는것과 가자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지중해에 쓸어넣으려는 의도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분열과 함께 치부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택한 가지지구 주민들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이제 아랍권은 전과같은 대규모의 전쟁을 할 수가 없다. 네게브사막 깊숙한 기지에는 아랍각국의 수도를 겨냥한, 발사준비가 끝난 핵탄두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있기 때문이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이길수 있을까. 그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가자의 비극’ 은 끝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쌍한게 그곳 주민들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말인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이 복잡한 중동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많은 지혜속에는 많은 슬픔이 있다.-구약성서.
by/yorow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