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성가가 두 배의 기도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습니다. 그 말의 출처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한 "성가는 두 배의 기도"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인용해 왔던 것입니다.
그를 그리스도교로 이끈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암브로시오 성인도 "시편은 백성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하느님께 바치는 찬양이며, 회중이 드리는 찬미 노래이고, 모든 이가 치는 손뼉입니다.
보편적인 교훈이고, 교회의 목소리요, 노래로 바치는 신앙고백"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근거로 말하자면,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에페 5,19)하라는 권고를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노래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내적인 열정과 자발성의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전통적인 성가들은 대부분 성경의 시편들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읽었겠죠.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음악적 감수성이 남들 보다 뛰어났던 어떤 수도자가 여기에 가락을 붙여, 읽는다기 보다는 노래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수도원에서부터 기도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이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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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녀원 성가대.즈앙 조르주 비베르(1865) |
이처럼, 전통적으로는 함께 모여 기도하는 성무일도의 시편 기도들과 찬가는 좀 더 아름답고 일체감을 느끼며 기도하고자 했던 원의의 발로였다고 하겠습니다. 정해진 가락에 맞춰 함께 목소리를 모으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노래와 음악은 전례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습니다. “온 교회의 음악 전통은, 다른 예술 표현들 가운데에서 매우 뛰어난, 그 가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보고이다.
그것은 특히 말씀이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서 성대한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56항)고 합니다.
노래와 음악은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전례 행위와 밀접하게 결합될 수 있으며, 그 결합이 잘 이루어질수록 깊은 의미를 지닌 표징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기준들은 기도의 아름다운 표현, 예정된 시간에 이루어지는 회중 전원의 일치된 참여, 전례 거행의 장엄함 등"입니다.
"이처럼 노래와 음악은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라고 하는 전례적 언어와 행위의 궁극 목적에 이바지"(같은 책, 1157항)합니다.
그리고, 표징이란 성가, 음악, 언어,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이 표징들의 조화는 전례를 거행하는 하느님 백성 고유의 풍부한 문화로 표현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로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규범에 따라, ‘거룩한 신심 행사들에서 그리고 바로 전례 행위 안에서 신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대중 성가를 적극 장려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성가에 붙여진 가사는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여야 하며, 주로 성경과 전례의 샘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같은 책, 1158항)는 지침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회중의 마음이 모일 때 장엄함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노래와 음악이 이 부분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를 이끄는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미사 전례곡을 뽑는다면 미사곡 선정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하더라도 실제로는 회중의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노래를 배울 필요가 있다면, 미사 전에 연습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노래방에 가서는 열과 성을 다해 노래하면서 미사 전례 중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음악세계와 다르다는.... 어이없어 대답이 안 나오는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전례에 참여하고 있는 한 구성원으로서 노래는 성가대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가대가 안내하고 모든 이는 전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가사들을 음미하면서 가능한 열심히 따라가는 자세, 다른 회중들과 노래를 통해 마음을 모으는 정성이 중요합니다.
제 기억에 미사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노래했던 사람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아직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적잖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사 전 성가 연습시간에도, 미사 전례 중에도 그들은 목소리를 모아 큰 소리로 정성껏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런 시간을 노래에 실어 하느님께 호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매우 뚜렷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례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해 준 것은, 서품을 준비하러 파리에 갔다가 난생 처음 성금요일에 노래로 낭독되는 수난복음을 듣게 된 사건이었습니다(사실 그 전까지는 수난복음이 노래로 불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금요일 전례 때 수난복음을 노래로 부르는 본당에 가 보질 못했기 그랬습니다).
실제로는 노래가 쉽지 않아 성금요일의 수난복음을 노래로 부르는 곳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 이후로는 가능하면 수난복음을 노래로 하는 곳을 찾아가 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가가 아니라서 회중이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는 아니고, 한 시간 정도를 서서 낭독 참가자들의 노래를 듣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다리가 좀 아프고, 내 쪽의 참여가 덜 한 만큼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 수난을 묵상하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매우 감동스런 전례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례가 진행되는 동안 노래를 해야 할 때 특별한 이유가 없이 입을 다물고 계신 분들은 자신의 내적 열정에 대해서 질문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치러야 하는 미사니까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내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성가는 두 배의 기도이지만 이럴 때 침묵은 가려진 냉담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어둠이 내게 말을 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노래를 통해 기쁨의 빛을 길어 오시기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