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대전은 무척 친근한 도시에다 묘한 인연과 영혼이 담겨 있는 곳이다.
지인이 살고 있기도 하지만 요즘도 가끔 대전에 가서 은행동 천변을 걸으며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지금은 대전이 너무 많이 변했지만 옛 추억을 바꿀 만큼 내 기억 속에 남은 향수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국민학교를 막 졸업한 열네 살에 처음 대전에 왔다. 무슨 연고가 있어서가 아닌 교장 선생님 때문이었다.
우리 집이 가난해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복도에서 의자를 들고 벌을 서곤 했는데 그때 나를 구조해준(?) 분도 교장 선생님이었다.
천OO 교장 선생님이다. 담임도 아닌데 어쩌다 나는 교장 선생님과 깊은 인연이 생긴 것일까.
육성회비 못 냈다고 벌까지 세우지는 말라고 했는지 이후 벌 서는 일도 없었고 가끔 공책이나 연필 등을 사서 슬쩍 내게 건네 주기도 했다.
교장 선생님 격려 때문인지 몰라도 졸업식 때 우등상과 향교 교육상 등을 받았다.
내가 중학교 진학을 못하자 교장 선생님이 나를 대전으로 연결해줬다. 동네 부잣집에서 쇠죽을 쑤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밥을 얻어 먹고 있을 때였다.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했을 무렵일 것이다. 어머니가 지어준 새벽밥을 먹고 버스와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하니 한 남자가 마중을 나왔다.
교장 선생님의 사위였다. 선생님은 당신의 딸에게 나를 부탁했던 것이다. 중앙시장 입구 부근의 가전제품 대리점이었다.
지금의 하이마트처럼 깔끔한 매장이 아니라 밥솥이나 믹서기 등이 진열된 가게로 기억한다. 교장 선생님 딸이 반기면서 우동을 시켜 주었다.
나는 우동 먹을 생각보다 너무 생소한 환경 때문에 눈물이 났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씽씽 달리는 자동차, 높은 빌딩 등에 주눅이 든 것이다.
하긴 읍내 장터에 가본 것이 전부인 촌닭이 놀랄 만도 했다. 따님이 내 등을 토닥이며 먹으라고 달랬지만 나는 계속 울기만 했다.
사위가 내게 말했다. 여기서 일하면서 내년에는 야간학교에 갈 수 있단다. 열네 살짜리가 가게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교장 선생님 부탁으로 부부가 나를 받아준 모양이었다. 그때 옆집 전파사에선가 배호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어릴 때 동네 이웃집 전축에서 들리던 노래라 익숙한 곡이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울지도 않아요. 당신이 먼저 가버린 뒤,, 어쩌구 하는 가사에 엄니 생각이 나서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어린 것이 노래 의미를 제대로 알았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 노래 때문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었다.
부부가 번갈아 가며 나를 달랬으나 대체 어디에 고인 물이 있어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일까.
사위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오늘은 집으로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눈물을 그친 나는 사위가 표를 사서 태워준 기차에 앉았다.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따님이 창문을 두드리더니 비닐 봉지를 내밀었다. 빵과 삶은 계란과 우유가 들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집에 갔다가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돼. 그렇지만 공부는 꼭 했으면 한단다." 나는 집에 와서 다시 대전에 가지 않았다.
그해 가을 누이를 따라 인천으로 올라왔다. 이듬해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고 답장이 왔다.
지금은 그 편지가 없지만 내용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뚜렷이 기억을 한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 편지를 읽었다.
이후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두 번 받았는데 늘 나를 다독이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으로 정규 학교는 끝났고 청소년기를 불량 환경에서 보냈지만 어둠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은 교장 선생님 편지 덕분이었을 것이다.
가끔 그 편지를 꺼내서 읽고는 했으나 세상을 떠돌다 보니 어디론가 사라져서 아쉽다. 행여 그때 내가 대전에 머물렀다면 나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젯밤 대전에 사는 지인이 말하길 이번 주말부터 대전에서 <0시 축제>가 열린단다.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다.
축제 이름이 독특해서 물으니 가요 대전브루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란다.
나는 대전을 여러 번 갔고 여행광이었지만 대전발 0시 50분 기차를 타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빠름의 시대라 밤새 달렸던 완행열차도 없다. 그나마 노래가 있어 옛 추억을 달래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지금도 대전브루스가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래요.로움님 말씀처럼 아름다운 마음이란
고맙고 은헤로운 기억과 인연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은혜를 잊고 살았네요.
제 정서가 누이와 엄니를 닮아 슬픈 노래를 좋아한답니다.ㅎ
가난도 죄이련가 당시 어느집이나 그리
넉넉하지 못한 우리나라 실정에서 다들
고생들 하셨습니다 중학진학도 못하고
그렇게 외지에서 서러워 울다 집에온
그 마음에 오죽 상처가 남았을까요
가끔 꺼내보년 유년시절의 추억이 한
드라마 같이 흘러 갑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가난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닐지라도 때론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많던 재산 혼자 즐기며 흥청망청 탕진하고 떠난 아버지 덕에 남은 가족은 모두 죄인으로 살았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교장 선생님 같은 분이 그리울 때가 있네요.
차마두 선배도 남은 인생 즐겁게 사셨으면 합니다.ㅎ
저도 산길 걸어 걸어서 학교를 다녔답니다
선생님께서 격려해 주시고 예뻐라 해 주시어 실망 시키지 않으려 숙제부터 했었지요
지금은 선생님 모습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게 선생님은 늘 존경스런 분으로 남아 있답니다
시골 신작로길이 생각나는 유현덕님의 글에 미소를 지어봅니다^^
홍실님도 저처럼 비슷한 추억을 갖고 계시네요.
저도 산길과 들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지요.
누구든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홍실님처럼 존경하는 스승을 품고 사는 것도 복이네요.
바람 불 때마다 흙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가 그립습니다.ㅎ
배호의 <당신>은 제 애창곡중의 하나입니다.
보내야 할 당신 미련 남기지 말고...
여섯살때 엄마를 여의고 외가식구들과 연락이
끊겼지만, 인천 주안에 사는 막내이모와 우연히
연락이 되어 만나러 가던날...
그날 주안역앞은 논밭에 스케이트장도 있었는데
배호의 <누가 울어>가 어디선가 들리면서 소년은
눈물을 콱~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허걱~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으셨다니 뜻밖입니다.
그래 적토마 선배 글에서 가슴 한쪽에 슬픔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나 보네요.
배호를 좋아하신다니 동질감이 듭니다.
노래 당신은 배호도 좋지만 김정호가 부른 것도 참 좋더군요.
십정동이 고향처럼 여기는 곳이라 부평에서 주안, 거북시장까지 바람난 수캐처럼 쏘다녔네요.
배다리 개코 막걸리를 매주 가던 시절도 있었답니다.
적선배와 닮은 곳이 많아 이걸 어째요.
의형제를 맺자할 수도 없고,,ㅎ
@유현덕
엄마를 잃고 그 다음해는 세살아래(토끼띠)
여둥생이 새엄마한테 맞아 죽었죠.
저는 죽어가다가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해 살아났고....
언제 배다리나 신포동 삼치골목에서
한잔합시다. 십정동도 좋고...
부평역앞에도 개코막걸리는 있죠. ㅋ~
@적토마 오매야!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군요.
적토마 선배가 겪은 것에 비하면 저는 꽃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요즘 식성이 변해 신포동 삼치 골목을 좋아 합니다.
아마도 선배 볼 날이 멀지 않은 듯요.ㅎ
@유현덕
늘 건강하시기를...화이팅 ~ !!
0시축제
https://www.dailycc.net/news/articleView.html?idxno=751613
라인업이라고 해서
올려져있네요 ^^
재미있겠어요
저도 브이로그 찍고싶어지네요
대전이 동구 쪽은 추억의 거리로
변신하나보네요 ^^
드가님이 영시축제에 관심이 많으시나 봅니다.
태풍만 무사히 지나가면 즐거운 축제가 될 듯합니다.
대전이 엄청 변했지만 원도심에는 그래도 옛 추억이 일부 남아 있더군요.
드가님이 브이로그 찍어 이곳에 올리시면 제가 꼭 응원 댓글 달아드릴게요.^^
한 눈에 알아보신 교장 선생님은 참 좋은 분 이셨네요
더군다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제가 그자리에 있었어도 눈물바다를 이뤘을거에요
오늘 유난히 현덕 님 글이 뭉클하네요
눈물이 주루룩ㅡㅡ
이제 대전 블루스만 나오면 지금 이글의 어린중학생의 애틋한 심정이 생각 날거에요
네, 참 좋은 교장 선생님이셨습니다.
저처럼 수업도 들어본 적는 교장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이군아! 나는 참 기쁘구나. 이렇게 시작한 그 편지 내용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글구 제가 어릴 적 유난히 눈물이 많은 아이였긴 했네요.
리즈님이 공감해주니 무지 기쁘다는,,ㅎ
대전 부르스를 듣고 있으니 더 생각이 납니다
광주에서 자취 생활을 했었는데
나를 징하게 쫓아다니던 같은 반 친구가
집에서 돈을 훔쳐와 대전역에서 우동 한그릇 먹고 오자고
새벽녘에 자취방으로 찾아 왔습니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기차에 몸을 싣고 대전 역에서 우동 한그릇 먹고 다시 돌아 왔다는...
저도 시골에서 유학와서 수업시간에 창밖만 바라보고
두고 온 고향 생각에 눈물을 훔쳤지요
그러다 2학년 올라가니
친구들과 매점에서 과자 사먹고 노느라고 ㅋㅋㅋ
이제 편지도 보기 힘든 세상으로 변해 버렸네요
ㅎㅎ
가리나무님께서 아주 비싼 우동을 드시고 오셨네요.
그래도 추억이 되어 돌아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도 먼 곳을 여행할 때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차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중간 역에 기차가 오래 머물 때가 있는데 그 틈을 이용해 먹었던 가락국수 맛을 잊을 수가 없네요.
지금은 편지 쓸 일이 없어진 시대가 되었지만
가리나무님과 동시대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ㅎ
대전발ㅇ시50분 ㅎㅎ
잘있거라 나는간다!
가긴 어딜 가요.
방장님은 항상 여기 있어야지.
태풍 온다는데 피해 없도록 단도리 잘 하이소.ㅎ
오늘부터
0시 축제 하는 시내 차량 통제 한다는군요
내일은 대중교통이용 학원에 갈 계획합니다
하필 태풍 시작 날에~~
이젤님이 그곳에 사시나 봅니다.
행사가 늦은 밤에 열리는 것이 많아 저한테는 그림의 떡이랍니다.
옛날에는 야행성이었으나 지금은 11시만 넘으면 눈이 감기기 시작하네요.
모쪼록 태풍이 더위만 데려가고 피해 없이 갔으면 합니다.ㅎ
72년 그시절엔 대전역전앞
중앙시장이 내 나와바리였는데
현덕님이 그곳에 있었다니
계속 대전에 있었으면 봤을 수도 있었겠네요 ~ㅎ
그 시절엔 중앙시장통에 은행들이
모여 있었지요 .국민은행 기업은행
산업은행 야간은행도 했구요.
현덕님이 대전과 인연이 있었다니
더욱 반갑네요
유현덕 화이팅 ~~ㅎ
0시 축제 가볼 생각 이었는데
태풍이 방해를 하네요~^^
보쳉 누이가 대전 출신이라니 반갑네요.
그때는 울다만 와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몰랐더랬답니다.^^
오랜 외국 생활 끝에 대전 갔더니 너무 변해서 깜짝 놀랐었네요.
요즘도 가끔 대전 가면 은행동에서 소박한 동네인 문창동까지 천변 따라 걷는답니다.
그때 못 만난 인연 이제라도 연결이 되었으니 좋네요.
만날 인연이면 이렇게 언젠가는 만나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ㅎ
교장셈 과 셈가족들이
참으로 고맙고 말고요
육성회비 안내고 싶은사람이
오딨겠나요?
가난해서 못낸걸
벌을 세우다니요?
아픈마음에다 더 상처를
주네요
그래도 힘든 환경에서
꿋꿋 하게 욜심히 살아 나오셔서
인간승리 하셨습니다
그때는 육성회비도 학급별로 완납율을 매겨서 경쟁을 붙였다고 하더군요.
벌을 설 때는 담임이 원망스러웠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리야님이 젊게 사시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글만 봐도 짐작할 수가 있네요.
운영위원에도 충실한 리야님을 응원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