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를 좋아하여 자기 집 당호를 白酒堂이라 써 붙이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72세로 하세할 때 까지 막걸리만 마셨고. 막걸리 노래(白酒堂記)를 스스로 지어 술이거나하면 항상 즐겨 불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 예찬 글을 지어 쌍백당집(雙栢堂集)이란 자기 문집에 넣어 그 글을 판각하여 목판본으로 책을 찍어 명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원본은 장서각에 있고 필사본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백발의 흰 빛이여,
막걸리의 흰 빛이여.
너는 내 마음에 꼭 드는구나.
옥쟁반의 진수성찬은 천금의 값이라 장만할 수 없는데,
막사발에 부어 마시는 일은 정말 초가집이라 마땅하지.
내 흰 빛으로 너의 흰 빛을 얻으리니
막걸리야, 막걸리야,
빈 방에 늘 흰 빛이 돌게 하기를. - 이세화 -
* <참고로 부평이씨 이세화 내력 약술 합니다.>
조선시대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지낸 이세화(李世華, 1630-1701)는 1657년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거쳐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왔다. 그후 대사간(大司諫-호조판서(戶曺判書)-판의금부사 겸 지경연사(判義禁府事兼知經筵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으며 공조(工曺), 형조(刑曺), 병조(兵曺), 이조(吏曺)의 5조 판서(判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를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숙종이 장희빈에 미혹되어 인현왕후를 폐출하려 할 때 朴太輔, 吳斗寅과 더불어 그 부당함을 끝까지 주장하다 장 80대를 맞고 귀양길에 오른다. 박태보는 함흥으로 끌려가다 장독으로 파주에서 죽어 수락산 자락 선영에 묻혔고, 오두인은 과천에서 죽어 양성 고성산 하래 선영에 묻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세화는 죽지 않고 살아나 인현왕후가 복귀할 때 인현왕후 복위도감제조로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컴백한다. 서인 정권시대가 열린 후 공조, 형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거쳐 5조판서를 역임하고 나이 70에 이르러 지중추부사로 명예롭게 은퇴한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청백리에 녹선된 쌍백당 이세화(雙栢堂 李世華, 1630∼1701)는 관직에서 명예롭게 은퇴한 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고향인 파주 선유리에 백주당을 짓고 살다가 하세하여 집뒤에 묻혔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쌍백당집}이 있고 풍계(豊溪)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또 그는 막걸리를 예찬하는 글을 지어 목판에 새겨 책을 찍어 돌렸는데 그의 문집《쌍백당집(雙栢堂集)》원본은 장서각에, 필사본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원문>
堂以白酒名何哉? 主翁嗜飮, 嘗以瓦樽濁?, 置之前, 其味醇, 其色白, 價廉而力省, 不難於取辦, 療飢救渴, 專?於是, 因以名其堂.
噫天地之間, 有五色焉, 靑者黃者赤者黑者, 各?其彩, 而淸而潔樸而直者, 其惟白乎. 物之白者, 不一其種, 人之白者, 曠世而罕覩, 豈物能保其質, 而人未免梏喪而然耶.
悲夫, 主翁??身世, 土木形骸, 靜聽不聞五聲, 熟視不見五彩, 山中暮年所覩者, 鏡中白髮. 白酒一樽, 振?邊之髮, 吸樽中之酒醉而歌.
歌曰, 白髮之白兮, 白酒之白兮. 爾能適我?兮, 玉盤珍羞, 難辦千金價兮, 瓦樽缶飮, 正宜茅茨下兮. 以吾之白得爾之白, 白酒兮白酒, 庶幾使虛室而長白.
- 이세화, <백주당기(白酒堂記)>《쌍백당집(雙栢堂集)에서》
<해설>
이세화(李世華, 1630~1701)는 육조의 판서 중 예조판서를 제외한 五曺判書를 역임한 명신(名臣)이요, 절조가 높은 선비였다.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랑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하려 할 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太輔)와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의 소두(疏頭)에 이름을 올렸다. 숙종이 크게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을 하면서 장80대를 맞으며 빈사지경에 이르자, 이세화는 아뢰기를 “내 본시 國事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지만, 신의 죽음이 聖德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臣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시니 玉體를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라 말한 일화가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본관이 부평이며 자는 군실(君實)이다. 호는 쌍백당(雙栢堂)이 알려져 있지만 파주의 칠정(七井)이 고향인지라 칠정(七井) 혹은 정곡(井谷)이라는 호도 흔히 사용하였다. 그의 문집 《쌍백당집(雙栢堂集)》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규장각에는 필사본이 전한다.
<원문해설>
중국에서 백주(白酒)는 고급 소주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도연명(陶淵明)이 중양절에 막걸리에 국화를 띄워 마신 고사가 알려져,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시기부터 소탈한 문인의 멋을 돋우는 술이 되었다. 막걸리를 읊은 시에 늘 국화꽃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백(李白)의 “막걸리 막 익을 때 산속으로 돌아오니, 기장 쪼는 누런 닭이 가을 되어 살졌네. 아이 불러 닭을 삶고 막걸리 들이키니, 아녀들 웃고 장난치며 옷자락을 끄네(白酒新熟山中歸, 黃?啄黍秋正肥. 呼童烹鷄酌白酒, 兒女嬉笑牽人衣.)”(<남릉에서 아이들과 헤어져 서울로 돌아와서(南陵別兒童入京)>)라 한 시가 널리 알려져 있어, 막걸리에 닭백숙도 은일을 지향한 선비의 시에 자주 등장한다.
이세화는 자신의 집 이름을 막걸리라는 뜻에서 白酒堂이라 하였다. 막걸리는 값이 싸서 쉽게 구할 수 있고 허기와 갈증에 보탬이 되니 예나 지금이나 서민에게 잘 어울린다. 이세화는 여기에 더하여 막걸리의 백(白)에 의미를 부여하여 청백(淸白)의 뜻을 끌어들였다. 이 글의 핵심어는 바로 백(白)이다. 사물은 백(白)의 본바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은 청백(淸白)의 절조를 끝까지 지키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하여 세태를 개탄하였다. 자신의 백발(白髮)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이 초가에서의 청빈한 삶이요, 청빈한 삶에 막걸리가 가장 잘 어울린다 하였다. 이렇게 사노라면 절로 마음이 맑아진다고 하였다.
《장자(莊子)에 텅 빈 방 안에서 흰빛이 생겨난다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세화는 이 말을 끌어와 빈 방이라야 훤한 햇살이 잘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맑게 살겠노라 다짐하였다. 이세화는 노년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실제로 이렇게 살았다고 하겠다.
*내용이 이러하니 날씨가 아무리 덥다해도 이 분을 찾아가 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어서 어제는 문산행 전철을 타고 문산시외 버스 92번으로 파주시 仙遊里(고양시에는 선유洞) 새능삼거리에 내려서 선유리 산89-4에 있는 이세화 묘를 찾아 보았습니다. 과연 청백리 답게 간결한 석물만 배치하고 일체의 현식을 배제한 조촐하기가 짝이 없는 그 분의 묘를 보고 부평이씨 雙栢堂 李世華의 고매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댓글 아 이건 여름방학중이라서 개학후 자세히 읽어봐야 뜻을 알겠네요...방학후 숙제..
김종익 학생은 방학중 이라 " 그래서 역사 점수가 낙제점을 겨우 달랑 달랑 하는군 공부좀해 공부해 남조 뜨들지마 앙
어데서 많이 듣던 말...말...말...ㅎ...ㅎ...ㅎ...
세 선비가 곤장 80대를 같이 맞았지만 부 분은 장독으로 죽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세화만 살아서 명예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막걸리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데, 곤장을 맞아도 내탓이라 여기고 감사하는 드넓고 호탕한 마음가짐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았던 것이 아닐런지?? 일체유심조라 했던가 ............
하,그 막걸리...밑에 가라 앉은 술 지게미를 섞으려고 마개를 딴 후 손 바닥에 병 주둥이를 딱 붙이고는 흔들어 대는 데..조금 따른 후에 흔들어 대야 잘 섞이는데...
사실 듣기는 좋아도 그 청백리 생활이 실제로는 어땟을 까요..홀몸이라면 또 그 개인 상태이겠지만..혼인하여 처자라도 있던지 하면...매 끼니는 돌아 오고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데...아플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