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로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반 고흐가 아를로 온 건 1888년 2월 20일이었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16시간을 달려 눈이 소복하게 쌓인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투명한 햇빛으로 모든 색이 발하는 아를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반 고흐는 아를의 다양한 풍경을 그리면서 특히 바르비종파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50년에 그린 <씨 뿌리는 사람>에서 영감을 받아 1888년 6월에 씨 뿌리는 사람이 있는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 Sower with Setting Sun>을 그리면서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그 그림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변형시키면서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 사용된 대비채색법을 응용했다.
옥수수를 뽑은 후 씨를 뿌리는 것이 상식인데 그는 옥수수를 뽑지도 않은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삽입했다.
회화를 위해서라면 사실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는 표현주의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씨 뿌리는 사람은 단순히 들에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 이미지이다.
그가 현대적으로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에서 원형으로 빛나는 후광에 감동하여 “색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테오에게 말하면서 레몬과 같은 밝은 노란색을 보고 해와 달의 무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반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 Sower>에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후광의 효과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에 빛을 발하는 태양으로 대신했다.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씨 뿌리는 사람>에 적용한 것이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했는데, 반 고흐가 예수 자신을 순수 창조력을 지닌 씨 뿌리는 사람으로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반 고흐는 1888년 10월 7일 혹은 8일에 고갱으로부터 <레 미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 Les Miserables: Self-Portrait with a Portrait of Bernard>을 받았다.
반 고흐와 작품을 교환하기로 약속한 걸 지키기 위해 보낸 것이다.
고갱은 프랑스 화단에서 버림받고 고뇌 끝에 분노를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1802~85) 소설의 주인공인 장 발장Jean Valjean으로 묘사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가 위고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반대한 이유로 1851년에 국외로 추방되어 1870년까지 19년 동안 영국 해협에 있는 저지와 건지 두 섬에서 지내면서 다수의 소설을 썼으며, 1862년에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을 완성했다.
작품 속에서 위고는 “법률, 관습, 풍속 때문에 사회적 처벌이 생겨나고, 이 처벌에 의해서 문명의 한복판에 인공적인 지옥이 만들어져 신이 만들어야 할 숙명이 인간이 만드는 운명에 의해 헝클러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주교의 자비심에 감화되어 사랑을 깨닫게 되고 정치가가 되어 선정을 베푼 장 발장의 고뇌를 거쳐 암흑에서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고갱은 자신을 고뇌하는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순진한 모습의 베르나르의 초상을 배경에 삽입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대조되게 했으며, 꽃무늬를 후광처럼 장식하여 자신의 얼굴을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그는 <레 미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을 반 고흐에게 보내면서 그림 하단 오른편에 ‘나의 친구 빈센트에게’라고 적고 뒤에는 장 발장이라고 적어 사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자신을 장 발장에 비유했다.
그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동심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이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낸다네.
장 발장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이 부랑자처럼 달라진 것이라네.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자신을 장 발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사회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네.
고갱의 편지와 작품을 받고 감동한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굉장해. 굉장히 놀라운 편지 ... 대단히 중요한 것 ... 완전히 죄수와도 같은 인상을 주는구나”라고 적었다.
그는 “그의 자화상을 보면 고갱이 병들고 고통스러워 보이는구나. ... 그 그림이 내게 말하는 건 무엇보다도 그가 더 이상 이런 상황에 계속 처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고갱은 추상을 강조했으며, <레 미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은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고갱도 이를 시인했다.
그가 자신을 낭만적 영웅 장 발장에 비유하거나 순교자로 묘사해 사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대신하려고 한 것은 분명 허세였다.
그 작품은 그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예고하는 불길한 느낌을 준다.
그는 자신을 천재이거나 거의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만큼 고독감도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 고흐는 고갱의 자화상을 받고 용광로의 불길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에게 줄 자신의 자화상을 언급하면서 “나의 자화상도 나름대로 그런 정도는 된다고 장담할 수 있다”고 적었다.
두 사람 모두 회화를 위해서라면 몸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 고흐는 답례로 근래에 그린 <자화상 (폴 고갱에게 바침) Self-Portrait(dedicated to Paul Gauguin)>을 고갱에게 보냈다.
수도승처럼 머리를 깎고 회화에서의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 자화상이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에 수도승이 등장하는 프랑스 소설가, 해군장교 피에르 로티Pierre Loti(1850~1923)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 Madame Chrysantheme』을 읽었다.
그것은 로티가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다.
반 고흐는 일본 판화 복사본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로티의 소설과 판화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의 자화상 모두에는 현대 회화를 위한 수도승과 장 발장의 희생적인 열정이 있다.
고갱과 반 고흐의 자화상은 자신들의 화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내적 울림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개성적 자각이 강렬하게 나타난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만 떼어내 비교하면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했다.
이에 비해 반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자아내는 표현적이며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 모두 상징화, 추상화가 되었지만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로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테오에게 적었다.
고갱에게 작품을 보여주어 그를 감동시키려고 하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하게 되는지 알 수 없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가능한 한 그림을 많이 그리려고 한다.
그가 여기에 오는 것이 나의 화법에 좋은 영향을 주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거의 색칠한 도자기처럼 장식한 내 집을 그리는 화법은 고수할 생각이다.
반 고흐가 말한 “내 집을 그리는 화법”이란 1888년 9월에 그린 <아를의 노란 집>을 말한다.
그는 세 들어 있는 집과 주변을 코발트색 하늘 아래 유황빛으로 햇볕을 과장하여 묘사했다.
최대한의 파란색과 진동하는 노란색이 강한 대조를 이룬다.
고갱이 10월 20일경 아를로 올 것이란 소식을 접하고 반 고흐는 침실을 스케치해서 그에게 보냈다.
그는 고갱이 아를을 마음에 들어 할 것이며 그를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10월 초에 그린 <반 고흐의 침실 Van Gogh's Bedroom>은 방을 장식하려고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