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발해 자체의 내분 가능성입니다.
4대 폐왕시절부터 9대 간왕까지 발해는 20년간의 무정부상태를 거친거야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선왕 시대 전성기를 맞이하여 요동의 후고구려 소국을 흡수합병한것 역시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왕시기부터 역설적으로 덩치가 커진 발해는 휘하 고구려계나 말갈계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흑수말갈계에 대한 발해의 통제가 어려워진 거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통제가 안 된 발해는 9세기말부터는 잦은 내전 비슷한 상황과 휘하 말갈부족들의 반독립상태, 거란과의 요동을 둘러싼 전쟁(요사에 약 반 세기에 걸쳤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치르면서 급속히 국력이 약화됩니다. 게다가 918년 고려 건국 직후 대규모의 지식인,고위장성들의 계속되는 남하가 시작됩니다. 분명 이는 발해사회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을 발해사회의 지도층이 인식했다는 것밖에 안 됩니다. 대인선이라는 왕 자체도 왕위계승이 정상적이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발해 황제 중 제대로 황위 계승을 한 사람은 실제로 1-4대까지밖에 없을 정도임. 심지어 선왕조차도 간왕계열이 아닌 방계후손이다.)
다음으로 기후조건의 일시적 악화(?)가 문제될 수 있겠습니다. 8세기경은 세계적인 온난기로 3-6세기까지의 아시아지방의 일시적 소빙하기의 반작용으로 엄청나게 따뜻했습니다. 당시 농경북한계선이 하바로프스크까지 진출한 것은 연해주의 펠트호라는 곳의 진흙을 채취하여 얻은 자료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발해의 15부 중 최북단인 안변부가 아무르강 하류임, 현재 이 지역에는 야생벼가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음) 그런데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 백두산이 한 번 폭발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때문에 발해가 망했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화산폭발이 한 번 있으면 최소 10년단위로 제대로 된 기후조건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화산폭발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후가 나빠지면서 아마 농경북한계선이 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이 때를 아마 선왕사후를 기준으로 한 30년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가뜩이나 거란과의 요동을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발해로서는 기후조건 악화로 인한 내수경제력의 저하는 분명히 거란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발해가 위치한 지역의 지형적,인구적 요건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연해주방면으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고구려 시절 연해주지역의 직접통치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비교한다면 분명 발해의 사정은 열악한 가운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연해주 지역은 당시 후진지역으로 인구희소지역이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보여준 300-500만 사이의 인구확보가 아예 발해에서는 불가능한 수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구가 별로 없는 발해는 당연히 내수경제규모 자체가 고구려를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시절 인구밀집지역이던 요동지역의 유민을 상당수 탈출시켜서 나라를 세운 만큼 요동을 확보해도 인구가 고구려시절보다는 적었을 것이기 때문에 영토 확대를 하면 할 수록 이를 지킬 수 있는 인구가 확보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인구분포가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다는 점도 문제가 됩니다. 발해의 경우 고구려유민이 약 40% 미만이고 나머지가 말갈계등 유목계였는데 고구려인들은 거의 다 남해부,용천부,용원부 같은 남부에 집중해서 살았고 나머지 북부나 동북부등 발해영토에서 후진지역이나 넓은 지역은 거의 다 말갈인이 차지했다는 것 또한 국가 방어에 그리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형적 요인으로 고구려에 비해서 남만주와 연해주 방면으로 치우쳐있던 발해는 공격적 군사국가로 가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발해의 가장 큰 해외원정이 무왕때의 등주공략일 정도로 육상공격에 발해가 의외로 소극적이었다는 점 또한 주의해야 합니다. 남만주의 지형은 요동지역과 달라서 공격하기 위해서 진출하기에 어렵습니다.(반대로 방어하기에 쉽습니다.)
발해의 인구구성이야 워낙 잘 알려진 사실로 별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49개성씨(현재 밝혀진 발해귀족의 성씨의 수) 중 고구려계가 6개, 신라계가 2개, 당나라계가 6개 정도인 것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말갈계등 유목민족계라는 점은 이미 발해는 반쯤 말갈국가화가 이루어져있었고 고구려 계승의식에 의한 공격적 정책을 내심 껄끄러웠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같은 유목민족계인 거란족이 발해의 지배자가 된다고 생각해도 말갈인들은 아마도 그리 거북하지도 않았을 상태라는 것 또한 발해에게는 골칫거리였을 것입니다.
사실 2차 돌궐제국의 흥기에 발해가 내심 반기기보다 경계했다는 점을 보면 이미 고왕시절이나 무왕시절부터 말갈인들의 동태에 고구려계열이 두려워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군사력 또한 고구려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다는 점 또한 발해국가의 생명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시까지 30만 정규병력을 가졌고 당시 신라가 평양 공격에 20만이라는 대군을 투입했던 것에 비하면 발해는 최대로 동원해야 15만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9세기 초에나 가능했었고 8세기의 경우 10만단위도 어려웠던것이 발해 군사력의 현실이었습니다. 8세기 발해와 국력이 거의 대등했던 신라가 약 12-15만의 병력(9서당과 10정 모두)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긴 국경선을 가진 발해가 처했던 양적 아킬레스건이 나중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군사력 소모에 취약해지면서 멸망하게 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