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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영적인 말이 안 되는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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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60323 강론글 말미에 적으시다.>
내일부터 부활 때까지 강론을 올리지 못할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올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사순 시기 잘 보내시길 바라고 빕니다.
위에 따라 강론글 3시 45분 현재 안 올리셨기에
지난 강론글 중 1편을 아래와 같이 올리고
5시 까지 또는 5시 20분 이후 7시 반까지 올해 강론글을 올리실 경우
지난 글 아래에 올리도록 합니다.
<05:20~07:20 중에는 새벽미사 참례로 글 못 올릴 수 있음>
^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아직 /
최근 3일간 당일 12시 ~13시반에 올리셨기에 그럴 경우 14시경 추가로 공유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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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01:51
사순 5주 금요일 -영적인 말이 안 되는 사람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오늘 주제를 말장난처럼 하면 ‘자처하다가 자초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다가
죽음을 자초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신 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유대인들이 말하지만
자처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과정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나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신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에 대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만 신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우리 인간도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은 당신의 신성을 밝힌 것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위상도 격상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격상시키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에는 그저 ‘받은’이라고 나와 있지만
‘받은’은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영어에 Receive가, 주니 단순히 받은 것이라면
Accept는, 선택하여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내리셔도
그 말씀을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처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즈카르야처럼 의심하여 벙어리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영적 벙어리,
하느님과 대화 상대가 못 되는 영적 벙어리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대화 상대로 격상하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영어와 하느님 말씀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영어가 지구 이쪽 말과 저쪽 말의 차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의 차이잖습니까?
이것이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라고
며칠 전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처럼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 격상하셔도
바리사이들처럼 ‘나는 그런 말 모르겠고 아무튼
당신은 신성모독 하는 것’이라고 우기는 자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영적인 말이 안 되는 사람,
그래서 주님께서 아무리 신분을 격상시켜 줘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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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03:45현재 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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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연대의 노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시편은 우리의 공동 인류가 드리는 목소리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시편 : 유배 시기의 노래
연대의 노래
2026년 3월 26일 목요일
구약성서 학자 월터 브루게만(Walter Brueggemann)은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 우리 보편 인류와의 연대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시편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음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함께 모아온 공동의 목소리이며, 지금도 놀라운 진실성과 현재성을 지닌 목소리입니다. 시편은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인간의 깊은 차원 속에서 언제나 반복되는 문제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을 기도로서 올려 드린다는 것은 곧 인류의 목소리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서겠다는 결단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이 고통스럽고도 기쁜 인간 순례길에 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공동의 환희와 슬픔, 분노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경의 말씀이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힘과 형상, 그리고 권위로 드러내 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쿠바에서 망명한 신학자 아다 마리아 이사시-디아스(Ada Maria Isasi-Diaz)1943–2012)는 시편 137편에서 위로와 힘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처음 시편 137편을 읽었을 때, 그 말씀 대부분이 제 마음과에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국을 제 뜻과는 달리 떠나 있어야 했던 아픔을 이 시편이 적절히 표현해 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제 부재가 오래 지속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비자 신분은 ‘관광객’에서 ‘난민’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시편 137편은 저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바빌론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시편 137,1).
나는 시편 137편과 깊이 일치감을 느꼈던 그날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친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그는 농담처럼 "기타를 나무에 걸어 두려는 거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나를 낳아 준 땅(la tierra que mi vió nacer)에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친구들은 나에게 쿠바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이들은, 노래를 사랑하는 내가 왜 늘 "관타마네라(Guantamanera)"를 부르기를 주저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노래는 우리 조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마르티의 시를 가사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Yo quiero cuando me muera
Sin patria pero sin amo
Tener en mi tumba
Un ramo de flores
Y una bandera.
나는 죽을 때,
조국은 잃었으나 주인 없는 자유인으로서,
내 무덤 위에
한 다발의 꽃과
한 깃발을 두기를 원하노라.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습니다.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4).
브루게만은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시편은 공허한 공간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살아가는 역사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마무리하시고 은총으로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시는 역사 안에서 드려집니다. 시편은 우리의 체험과 함께 움직이며, 때로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넘어, 형제자매들이 걸어가는 더 깊고 애절한 순례길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보스턴 칼리지에 온 한 교수님께서 나에게 직접 비탄의 시편을 써보라고 권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기에, 그 경험은 놀라울 만큼 깊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종종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권합니다.
그 기본 구조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 부르짖고,
불평을 토로하며,
도움을 청하고,
신뢰를 고백한 뒤,
찬미와 감사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큰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Eileen M.
References
Brian D. McLaren, “Psalms of Exile: An Eye Exam” for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hael Sturgeon, untitled (detail), 2020,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타악기는 유배가 지워버릴 수 없는 내적 리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리듬은 시편 속에 메아리치며, 음악이 억압을 드러내고, 고향을 기억하며, 망각을 거부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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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하느님)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하느님)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요한 10,3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편 82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성찰해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단순히 우리를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로 놓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말씀을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설령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저와 같은 사제들과 신앙(혹은 신학)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가장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마치 종이에 적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종이가 아니라 육화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우리의 봉사직으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추천서입니다. 그것은 먹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새겨지고, 돌판이 아니라 살로 된 마음이라는 판에 새겨졌습니다."(2코린 3,3).
"정교(orthodoxy: 正敎)"라는 말은 "올바른 가르침"을 뜻합니다. 이에 더해 "올바른 실천(orthopraxis: 正行)"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육화이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실행되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우리의 말을 육화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 고백은 삶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참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이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요한 복음에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내용을 여러 번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심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제들이 성찬례 때 성작에 포도주와 물을 섞으면서 하는 기도를 연상케 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이 기도문이 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저희도 저희의 비천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천주성에 참여케 하소서."라고요.
우리가 하느님성에 참여한다는 것, 즉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그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느님성, 즉 천주성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에 관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자기 목숨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에 관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무례한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새로운 도전을 던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해서 말만 하지 말고 그 말씀을 실생활 안에서 육화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그분과 유사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의 의미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고, 또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 삶의 의미를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런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그분 사랑의 힘이 부족한 우리를 채워 주시고 계속해서 넘어지는 우리를 일으켜 주신다는 겸손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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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봉헌축제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뒷부분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앎과 깨달음의 능력이요 사랑의 힘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능력입니다(요한 10,38 참조).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야다, יָדַע)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앎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경험에서 선사되는 앎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너 있지 않는 곳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그것은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신화, θεοσισ). 이는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진정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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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알고리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검색하거나, 제가 즐겨 보는 영화가 있으면 그와 비슷한 것들을 제가 먼저 찾지 않아도 알려주는 기능입니다. 작년 성탄 무렵에 음악 공연을 보았습니다. 전 세계를 순회공연 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성탄이 관련된 음악이었습니다. 대림 성가도 있었고, 성탄 성가도 있었고, 성탄을 기뻐하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의상과 멋진 연주와 노래가 무대를 장식한 촛불과 잘 어울렸습니다. 제가 우연히 음악회를 검색해서 공연을 보았더니, 이제는 달라스에 있는 여러 공연장의 프로그램이 저의 스마트폰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5번의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12월에 공연하는 뮤지컬에 대한 소개도 있어서 보려고 합니다. 뮤지컬 제목은 ‘오페라의 유령’입니다. 저는 토론토에서, 서울에서, 뉴욕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제가 운동경기를 검색했다면 알고리즘은 각종 운동경기에 대한 일정을 제게 보여 주었을 겁니다. 제가 컴퓨터 게임을 검색했다면 알고리즘은 여러 컴퓨터 게임에 관해 알려주었을 겁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검색하면서 지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교회는 기도, 단식, 자선을 권장합니다. 교회는 회개와 화해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똑똑하고 잘났던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겸손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헌금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방인이었던 시렙다 과부의 집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을 치유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굳이 방문하지 않고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학력, 능력, 업적, 재물, 명예, 권력, 신분’과 같은 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습작’이라고 생각하는 ‘겸손, 희생, 나눔, 인내, 기도, 봉사, 절제’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셨던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로니카였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성소 국장으로 지냈습니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 주교님들, 국장 신부님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준비하는 모임에도 함께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 생활의 ‘걸작’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그 5년도 감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주교님, 다른 국장 신부님들이 많아서 저는 그리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경기도의 작은 성당에서 3년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신자 수도 적고, 헌금도 적고, 할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 생활의 ‘습작’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습작’과 같았던 그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사제 생활 중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의 모습에서 결코 ‘걸작’의 품위를 찾기 어렵습니다. 가시관을 쓰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습작’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걸작과 같은 빌라도의 권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헤로데의 신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대사제 가야파와 안나스의 율법에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이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려고 하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요?
사순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자존심, 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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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은 순명과 겸손, 평화와 비폭력의 주님이셨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살기등등한 얼굴에, 손엔 끔찍한 흉기를 들고, 노골적인 살의를 갖고 내게 달려드는...
그런 상황 한번 겪고 나면 남게 되는 트라우마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이고 깨어나고를 반복할 것입니다.
이런 트라우마는 평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저는 수십 년이 흘렀지만, 끔찍했던 사건이 꿈속에서 반복되곤 해서,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곤 합니다.
그런 장면은 스릴러나 조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 통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셨습니다.
적대자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여차하면 어른 주먹만 한 돌을 손에 손에 들고 예수님을 에워싸며 협박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벼랑길 위를 아슬아슬 위태위태 걸어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전지전능하심을 물려받으신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까짓것 유다인들 천 명, 로마군사 만 명, 말씀 한마디로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 싹 쓸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명과 겸손, 평화와 비폭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끝끝내 무력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당신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인내하시고 순명하셨습니다.
사순시기는 이런 예수님의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그리고 큰 죽음, 다시 말해서 골고타 언덕 위에서 맞이하신 결정적인 죽음을 묵상하고,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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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0,31–42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합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많은 좋은 일을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어떤 일 때문에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그들은 대답합니다.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 모독 때문이다.
당신이 사람이면서 하느님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들의 기준을 흔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으면 나를 믿지 마라.
그러나 내가 한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들은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피하시고,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믿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행하지 않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참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에서 인간의 비극을 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좋은 일”을 보면서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그 선조차 위협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진리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교만으로 굳어 있으면
빛이 와도 눈이 아픕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예수님의 신성은 철학적 주장만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살리는 손길을
자기 권위와 체계를 흔드는 위협으로 봅니다.
그래서 돌을 듭니다.
오늘 영성 주간의 복음은
우리에게 정확히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선을 보며
더 부드러워지는가,
아니면 더 단단해지는가?
나는 생명을 살리는 일 앞에서
기뻐하는가,
아니면 내 기준이 흔들릴까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내가 한 일’을 보라고 하십니다.
말로 이기려 하지 않으시고,
삶으로 드러내십니다.
오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성인의 날과 함께
복음은 우리를 이렇게 부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돌을 드는 손 대신
살리는 손으로,
단죄하는 눈 대신
자비의 눈으로.
주님,
제 마음이 교만으로 굳어
당신의 선마저 위협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제가 돌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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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할머니 수녀님 얼굴 속에 묻어나는 아기 같은 모습을 보며
요즘 판공이 있어서 오전에 미사가 있습니다. 옆 본당에요. 이번주에는 화수목 이렇게 사흘째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기 전에 그 본당 카페를 들어갔습니다. 뭔가를 확인하려고 갔습니다. 지금 그 본당은 수녀님이 두 분 계십니다. 사실 본원은 대구에 있는 살트로 수녀원입니다.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의 수녀님들의 본원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당에 있는 수녀님들과 아주 친한 사이였던 거죠. 다른 수녀님 한 분은 어제 제가 전화번호를 딴 게 아니라 수녀님이 먼저 전화번호를 주셨습니다. 제가 성무일도 네 권짜리는 가지고 있는데 사실 원래 영세를 받고 나서 하려고 했지만 찾는 방법을 잘 몰라서 잘 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어떤 자매님의 권유로 다시 하려고 하는데 소성무일도만으로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냥 수녀님께 어제 미사 후에 한 번 여쭤봤습니다.
제가 여기 본당 신자는 아니지만 수녀님 궁금한 게 있다고 하면서 여쭸는데 소성무일도 배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말입니다. 수녀님이 성무일도를 수녀원에 들어가셔서 가지고 오신 후에 설명을 해 주시겠다고 하셔서 저는 성전에서 기다렸습니다. 수녀님이 한 권을 가지고 오셨는데 그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있는 줄 아셨는데 없었던 거죠. 한 권짜리는 수녀님들만 아마 사용하는 거였습니다. 예전에 마치 소성무일도처럼 사용하셨던 거죠. 권유한 자매님은 매일미사 뒤에 있는 걸로 하면 된다고 했는데 저는 물론 그렇게도 해도 되지만 그것 없이도 하고 싶었습니다. 설명을 해 주시는데 잘 모르겠더군요. 수녀님이 소성무일도를 가지고 오면 수녀님과 같이 몇 번만 찾아서 해보면 된다고 하시면서 번호를 주셨습니다. 아마 내일 소성무일도가 택배로 오면 수녀님께 가 설명을 듣고 앞으로는 계속 해 볼 생각입니다. 많이 삼천포로 흘렀습니다.
오늘 미사 가기 전에 카페에 갔다가 이 수녀님 말고 또 다른 노수녀님 사진을 보게 됐습니다. 주일학교 애들과 뭔가를 하시는 모습의 사진이었는데 한 사진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전에도 이 수녀님 여러 번 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은 더 잘 알지만 사진으로는 처음 뵀습니다. 사진을 본 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던 거죠. 얼굴은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시면서 그 모습 속에 아주 귀여운 아기 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한 번 보여드리고 싶은데 캡쳐해서 말입니다. 초상권 문제를 떠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늘 미사 후에 수녀님을 뵈었는데 영성체 후에 자리로 돌아오면서 보니 반주를 하시더군요. 가끔 보면 수녀님들이 반주를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본당에 계신 앞 전 수녀님도 반주를 하셨습니다. 수녀님이 반주를 하시는 모습 그게 정면이 아니고 오르간 위치가 90도 돼 있어서 옆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그 본당 건물 구조가 그렇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본 느낌 그대로 묘사를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아마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이 과장이 심하다고 하실 것 같아 그건 생략을 하겠습니다.
미사 후에 돌아오면서 묵상을 한 게 있습니다. 그 수녀님의 얼굴 모습을 보고 한 묵상입니다. 정말 어떻게 연세는 있으신데도 그 연세에 아기 같은 모습을 하실 수 있을지 말입니다. 제가 이 앞전에 계신 수녀님에 대해서도 한번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모든 수녀님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본당 수녀님들 가운데에 제가 호감이 가는 수녀님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수녀님으로서 말입니다. 갑자기 떠나신 그 수녀님이 보고 싶습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자꾸 생각이 나네요. 교구 주교님이 선종하셨을 때 교구청에서 연도를 할 때 그때 제 바로 옆에 수녀님이 계셨습니다. 이래저래 그 수녀님도 미사를 참례하면서 많이 본 얼굴이라 제가 어떤 본당인지도 아시고 합니다. 지금은 대구 외곽에 있는 어떤 본당에 계십니다. 제가 그 수녀님께 드리고 싶은 인사가 있어서 그 본당 카페에 가입해 인사를 남겼는데 어떤 형제님이 전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수녀님도 그렇고 방금 언급한 수녀님도 그렇고 제가 뭔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바로 얼굴입니다.
저는 나이를 떠나 대구 외곽으로 가신 그 수녀님이나 그 수녀님은 원장 수녀님 같은 분위기는 아직 연세가 그 정도는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젊게 보이십니다. 그래도 모르긴 몰라도 연세는 좀 있으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좋은 모습으로 기억을 하는 건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죠. 이동하신 수녀님은 맛으로 비유하면 샹큼한 레몬 같습니다. 전에 남긴 글에서는 제가 어떤 모습을 묘사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긴 합니다만 느낌은 같을 겁니다. 두 수녀님을 보면서 든 생각은 그런 좋은 인상은 단순히 원래부터 타고난 인상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만 저는 이 전제를 배제했을 때 다른 이유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면서 그럼 원래는 그런 좋은 모습이 아니었는데 수도생활로 어떻게 그럼 마치 복음에 나오는 거룩한 변모 사건처럼 탈바꿈을 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 거죠.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렇게 되려면 짦은 시간에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실 거의 확실할 겁니다. 원래 얼굴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바로 '얼' 의 굴 즉 굴은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의 모습, 모양인 것이죠. 이 말은 고 이어령 교수님이 사실 예전에 많은 언급을 하신 것도 있고 또 언어의 기원에 관한 책에 보면 이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제가 언어의 변천사 이런 거에 아주 관심있어서 본 책입니다. 얼굴은 사실 자기 마음 영혼의 모습과 거의 같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거기다가 눈까지 보면 정말 자신의 영혼을 그대로 사진처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좋고 선한 마음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면 그 사람은 타고난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도 거부감이 없는 얼굴로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얼굴을 보면 정말 보기 힘들 정도로 거부감이 드는 얼굴을 가진 사림이 있습니다.
신앙 유무를 떠나서 그런 사람은 선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표독한 얼굴을 가진 사람치고 온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저는 평소 생각합니다. 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고난 미모보다는 후천적으로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그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는 그 모습이 가장 좋은 모습입니다. 얼굴은 미인인데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은 별로인데 정이 엄청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입니다. 빈말 같은 말 같지만 마음이 이쁜 사람이 가진 얼굴이 정말 이쁘고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결국은 이쁜 마음을 가져야 예쁜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시면서도 그 속에 아기 같은 모습을 지니고 계신 이유는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무지무지 사랑하셔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실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셔가지고 그렇게 순수한 모습을 지니게 되셨을 거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좀 무서운 단어를 사용해 표현한다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는 날 가령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기록도 보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말이 필요 없을 겁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얼굴 속에 한 사람의 생애가 다 있다고 보여집니다. 결국 지금 나의 얼굴 모습은 지금까지의 내 영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명사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인가? 하느님이 이 얼굴을 보시면 좋아하실까 아니면 인상을 찌뿌리실까? 찌뿌리실 것 같은 느낌이 드신다면 지금부터서라도 아름답고 이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을 하시면 지금보다는 나아졌으면 나아지지 더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나중에 이런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서 하느님이 돌리시는 모습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땐 참담할 것입니다. 억장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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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35 추가
<“나는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0,31-42).>
1) 뒤의 14장을 보면, 38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
다시 나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8-9ㄷ.10ㄴ-11)”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일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은 구세주(메시아)”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복음 말씀에는 ‘예수님의 일’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또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고,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을 알아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일’과 ‘예수님의 신원’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니까 메시아시고, 메시아시니까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2)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한 것은,
“아버지와 하는 하나다(요한 10,30).” 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33절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라는 말은, “당신이 하는 일이 ‘좋은 일’(‘하느님의 일’)로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당신이 하는 일은 ‘악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악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3) 34절의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는 말씀은, 시편 82편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여느 대관들처럼 쓰러지리라(시편 82,6-7).”
시편 82편에서 말하는 ‘신들’은 ‘법관들’을 가리킵니다.
법관들을 ‘신들’이라고 부른 것은,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권한에 참여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82편은, 올바른 재판을 하지 않는 법관들을
꾸짖으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시편입니다.>
4) 37절의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는, 뜻으로는 “믿으면 안 된다.”인데, 메시아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메시아로 믿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38절의 “나를 믿지 않더라도”는, 뜻으로는 “그동안 나를 믿지 않았더라도”입니다.
38절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본 적이 없어서 예수님을 안 믿었던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일’을 본다면 믿게 된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일’을 보았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를 뜻하는 말씀이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와 ‘같은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복음 선포’ 라는 ‘일’을 통해서, 그리고 각자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또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이라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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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7. 사순 제5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15 추가
요한 10,31-42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저는 나중에 커서 꼭 우리 아빠, 엄마 같은 사람이 될거예요.” 만약 자기 자식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 부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린 놈의 자슥이 어딜 감히 부모처럼 되려고 해?’라며 머리를 쥐어박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녀들을 사랑해서 했던 진정성 있는 행동들이 그들의 마음에 가 닿았음을 느끼며 뿌듯해하겠지요.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의 좋은 모습을 닮아가는 걸 실제로 보게 된다면 그 보람과 기쁨은 더 커질 겁니다. 반면, 자녀가 부모를 닮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부모와 ‘맞먹으려고’ 들면 어떨까요? 그건 부모를 무시하는 일이며, 부모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기에, 자녀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부모는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괴롭고 슬프겠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줄곧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듭니다. 그런 행동은 유다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율법 규정들을 어겼을 때 그에 대한 처벌로나 할 법한 일이었지요. 즉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으로 여긴 겁니다. 그들이 제기한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감히 사람인 주제에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즉 하느님과 ‘동급’이라고 자처하는 건 큰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언행이 하느님을 모독하여 그분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여겼기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 잘못을 ‘투석형’이라는 엄한 벌로 다스리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심판과 단죄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하셔야 하는 일인데,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분의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런 잘못된 행동을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하느님께 대한 충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겉으로 드러나는 단적인 말이나 행동을 문제삼으며 그것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지 아닌지를 따지려 들지 말고,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곰곰이 되새기며, 그분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하느님 사랑에 물들어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겁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신화’(θεοσισ)라고 부르지요. 이는 독재자나 사이비 교주들이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하느님과 동급이라 주장하는 ‘신격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그분 자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며,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직무유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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