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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기둥과 불 기둥
출 13:17-22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13:17-22 / [숙곳에서 에담까지] 마침내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을 때 하나님은 훨씬 가까운 길인 블레셋 사람이 살고 있는 땅으로 그들을 데려고 가지 않으셨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들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마음을 고쳐 먹지 않을까 해서였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홍해에 이르는 광야길로 이끌고 가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투 대형을 지어서 애굽에서 나왔다. 19) 이때 모세는 요셉의 유해를 가지고 떠났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아 주시려고 찾아오실 터이니 그때 너희는 내 뼈를 여기에서 가지고 나가 다오'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단히 다짐해 두었기 때문이다. 20) 이스라엘 백성은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이르러 진을 쳤다. 21)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진할 때 앞서 가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 위를 환하게 밝혀 주셨다. 22) 이렇게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를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여주십니다.
블레셋이 아닌 다른 길(17) 애굽에서 나와 동쪽과 북동쪽으로 향해 갈 때 가까운 길은 군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블레셋 영토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싸울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다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길을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을 곧바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산 호렙, 시내 산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는 길로 가다가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모르는 길로 인도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18-22) 하나님께서 홍해방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대열을 지어 나옵니다. 아이들과 여자들을 포함하여 약 200만 명이 그냥 나오지 않고 줄을 지어 질서 있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의 삶을 위해서 질서를 가르쳐 혼란스럽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약 360년 전 요셉은 하나님이 출애굽을 일으키실 날을 내다보았고 자신의 유골을 약속의 땅으로 가져가 장사 지내라고 유언한 것을 모세가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서 반드시 가나안으로 돌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맹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맹세를 기억하고 순종한 모세의 신앙이 훌륭합니다. 광야 끝까지 와서 장막을 쳤다고 합니다. 옆에는 절벽이고, 앞에는 바다이며, 뒤에는 광야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오면 피할 수 없는 곳으로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앞으로 가시면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구름 기둥으로 낮의 뜨거운 열기를 가려주시고, 불 기둥으로 밤에는 앞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계속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걸어가면 주의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적용: 말씀에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생활 죄악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힘들이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들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모든 어려움 가운데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 13:17-22 / 임덕순 목사
사람이 새 집을 짓고 나서는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쓸고 닦고 관리하기 때문에 집이 깨끗이 유지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는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지키고 유지하고 계십니다. 아마 만들어 놓기만 하고 그냥 놔두셨다면 이 우주는 이미 폐허가 되고 말 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의 거대한 물을 항상 싱싱한 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 물속에 염분을 넣어 두셔서 쉽게 썩지 않게 하셨고, 달에게 끄는 힘을 주어서 오늘도 바닷물을 하루에 두 번씩 휘젓게 하십니다. 이렇게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계속 유지시키고 간섭하시고 붙드시는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이 섭리는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노예가 되어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던 사람들을 구원하신 뒤에는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어 그들을 날마다 간섭하시며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감당 못할 시험이 오면 미리 막아주시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헤맬 때는 분명히 가닥을 잡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1. 이스라엘의 출애굽 장면은 참으로 당당했습니다.
1) 군대같이 항로를 갖춘 모습이었습니다.
18절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라는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항오를 지어 나왔다는 말은 질서 있게 열을 맞추어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보통 어디서 탈출한다고 하면 질서도 방향도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서 자기만 살려고 빠져나오느라고 아우성인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군대가 국군의 날에 행사를 하듯이 열을 맞추어 질서 있게 나왔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군대 같은 모습입니다. 출 12장 41절에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땅에서 나왔은즉”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들은 과연 군대 같았습니다.
2)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불러들여 번성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준 공로자 요셉은,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우리 민족이 언젠가는 여기서 나가 하나님이 주신 고향땅 가나안으로 가게 될 터인데, 그때는 여기에 묻힌 내 유골을 메고나가라고 유언했었습니다. 창50: 24-25에 보면, "정녕 여호와께서 너희를 권고하사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시리니 그때에 내 해골도 메어 올리라."고 하였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바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유산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나누어 가지라고 유언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유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가라고 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은 너희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너희가 사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너희 땅이 아니고, 너희가 가서 살아야 할 곳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땅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유언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도 후손들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게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긴급히 해방을 받은 그 경황없는 시간에 요셉의 유언을 생각하고 요셉의 유골을 수습해서 관에 담아 메고 출발했습니다.
관을 메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가족이 없었겠습니까? 가져가야할 살림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요셉의 관을 메어가게 하였고, 그들은 자기의 살림을 어깨에 메거나, 자식들의 손을 잡고 나간 것이 아니라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나설 때, 메고 나가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살림걱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제 땅 한 평도 없고, 제 집 한 채가 없지만 여러분은 땅도 있고 집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있고 집도 있을지라도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땅에 있는 재산이나 기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누리라고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일컬으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소망이요 재산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메고 가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발하던 날, 그렇게 당당하게 출애굽 했습니다.
2.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기는 했지만 어떤 길로 가야할 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이 애굽은 벗어났고,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막연히 알았지만, 어떤 길로 가야만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가장 가기 쉬운 길은 흔히 카라반이라고 하는 해변 가의 장사꾼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가나안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거의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길로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쉽고 편하기는 하지만 길목을 지키는 불레셋 이라고 하는 강력한 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편하고 빠른 길로 인도하는 대신에, 힘들고 거친 광야길,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길,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길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 해변 가의 길로 그들을 인도했더라면, 길목을 지키는 블레셋의 침략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전쟁이라는 것은 처음 당해보는 그들이 두려워서 애굽으로 발길을 돌려 도망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노예 노릇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길로 인도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체험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광야의 사정은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광야에서 훈련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속히 도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준비하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을 장소인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해야 하는 선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편하고 넓은 길로 갈 것이냐, 아니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한분 하나님을 의지하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뻔히 아는 길을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그길로 가도 결국 내일은 모르는 일이니, 차라리 하나님 한분만을 따라 갈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어떤 식으로 인도하시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순종하여 광야로 접어들자마자 자신을 상징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시작하셨는데 밤에는 불기둥이 앞을 비취며 인도하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고, 낮에는 구름기둥이 인도하기 때문에 그늘로만 가면 되었습니다. 길은 없었지만 하나님이 아주 분명하게 인도하셨기 때문에 밤에는 불빛을 따라서, 낮에는 그늘 속으로만 가면 되었습니다.
광야로 들어가기 전에는 두려웠지만 막상 들어가고 보니 하나님의 신기한 인도를 체험하는 행복하고 신기한 여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한 선동이 아니라 그가 순종하여 따라 나설 때 어떻게 책임져 인도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하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고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로 가던 삶을 이제 접고 자신의 앞날을 전부 하나님께 맡기고 따라 나서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결심이 있습니까?
3. 하나님은 그들의 체질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군대처럼 열을 지어 애굽을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을 지었다고 해서 다 싸움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싸움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 전쟁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애굽 왕들은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이 적의 편에 가담할까 두려워서 그들의 손에는 전쟁무기를 주지 않았고, 노예처럼 일만 시켰고 박해만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군대처럼 항오를 지어서 행진했지만, 실상은 노예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지, 무엇 하나 자기가 책임지고 해 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약 전쟁을 만나면 오합지졸이 되어 애굽으로 도망쳐 버릴 것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습니다.
17절에 보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때, 그 한 번의 결심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잘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기는 했고, 겉모습은 군대처럼 열을 맞추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예 무리였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우리 성품은 아직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채, 자신도 원치 않으면서 남들이 가는 대로 따라서 살아온 노예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시련이 닥쳐오면 마음이 흔들리며, “예수 믿으면 다 잘된다더니 이게 뭐야, 나 이제 예수 그만 믿을래” 하면서 떠나버릴 수 있는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체질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라도 가나안으로 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들이 불레셋 사람들과 싸울 힘이나 용기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불평이나 원망뿐이지 어떤 어려움이든지 뚫고 나갈 각오나 결심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들은 크고 넓고 쉬운 길을 원했습니다. 아무 부담 없이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안 되면 되돌아오면 되는 그런 길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빨리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체력이 아니라 믿음이 강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에 가장 합당한 장소로는 아무 대책이 없는 광야가 제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는 길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되돌아갈 길을 알 수 없는 광야가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변 길로 가려는 것을 막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위험을 미리 아셨고, 그들이 그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며 친히 하나님을 체험하여 강한 믿음을 갖도록 훈련시키기 위하여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는지를 아십니까? 대부분은 모르고 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신에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답답해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야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넘어지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자기를 힘들게 하신다고 생각해서 기쁨을 잃고 원망도 절망도 합니다.
해변 길로 가면 만나게 되는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맞장 떠 볼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은 원래 크레타 섬에서 이주한 민족으로, 이미 스파르타 등으로부터 고도의 훈련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이제 갖 해방된 이스라엘이 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삼손 때까지 블레셋을 전혀 상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무시무시한 적이 있습니다. 혈과 육이 아닌 영적인 세력인데, 하나님께도 대드는 사단입니다. 이 사단과 싸우려면 힘을 길러야 합니다. 말씀으로 자라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확고한 체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는 제법 신자구실을 잘 한다고 하면서도 밖에 나가서는 전혀 신자구실을 못하고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하고 또 밖에서 기다리는 원수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모르고 하룻강아지처럼 덤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겨우 주일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면서 성경지식이 조금 있으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그런 문제를 내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 할 수도 없고, 신앙을 지키고자 한다면 망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될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책을 끼고 당당하게 교회로 걸어 들어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이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라고 밝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겁을 먹고 네 앞을 비켜 줄 거야” 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도리어 우는 사자같이 사단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라고 묘사된 사단은 그렇게 어리석거나 시시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가장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훈련 없이는 결코 사단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훈련을 위하여 우리를 가보지 않은 길,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무 쓸데없는 길로 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여 믿음의 힘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그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보는 순종의 체험입니다. 그 순종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4. 하나님은 광야의 사정을 아셨습니다.
이들이 가는 광야는 사막입니다. 사막에는 특별한 사막기후가 있습니다. 낮에는 머리가 벗겨지도록 뜨겁고 밤에는 너무나 차갑습니다. 온도를 보관하고 유지할만한 숲이나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든 사막에는 낮과 밤의 기온차가 물과 숲이 있는 땅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광야가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도우시느라고 낮에는 구름기둥을 주어 시원하게 보호하며 가야할 방향도 알려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주어 따뜻하게 보호하실 뿐 아니라 불기둥이 있는 쪽을 향하여 가도록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불과 구름기둥을 그들이 광야 길을 걷는 40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그들의 위에서 덮어 보호하고 앞에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길도 없는 광야로 걸어갔지만 길을 잃어버린 일이 없었고 열사에 해를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이미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그 길에서 만날 상황에 대한 준비까지도 미리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데 정말로 치밀하신 분이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만 그들 곁에 두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직접 그들의 위에서, 곁에서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밀하신 하나님, 구원받아야할 처지를 아시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나약한 존재임을 아시고 그들의 길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동행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생활이란 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남들이 가지 않는 익숙하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롬8:14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시작하는 신자의 삶에 성령을 보내어 인도를 시작하십니다.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던 그 하나님은, 이제는 성령님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의 상황을 아시고, 이스라엘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이 당시에도 완벽하게 인도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이 시대의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맞는 맞춤형 인도를 해 주시기 위해서 각자에게 성령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가라 하셔서 순종의 고난의 길을 가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모셔라 하셔서 없는 살림에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까? 스스로 자립할수 없는 형제를 책임지며 수고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라 하셔서 구제헌금과 선교헌금을 드리기 위해서 돈 한번 넉넉히 써보지 못하며 힘들게 헌신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이 길로 가라 하셔서 순종의 가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아시는데, 그가 그 순종의 길을 가다가 그 길에서 어떤 일을 만날 것인지와, 그것을 어떻게 도울지를 이미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깨우쳐 주시며 감동시켜 주시고, 상황을 당신이 직접 주관하여 우리를 철저하게 도와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순종하는 길을 가면서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통해서는 "또 어떤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 할 것인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여행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미지의 장소를 찾아가 풍경을 감상하고 그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풍습을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면서 즐기는 것이 여행입니다. 그러나 여행 자체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누구와 함께 여행하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여행을 하느니 차라리 안하는 게 낫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 가장 즐겁고 신날까요? 여행 중에서 만날 모든 문제를 다 아시고, 또 그때마다 척척 해결해주실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여행이 아닐까요? 여행 중에 최고의 여행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여행입니다. 믿음으로 최고의 여행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홍해의 광야길
곽선희 목사
일사유사(逸士遺事) 라고 하는 우리나라 고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한양에 김학성씨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아들, 형제를 서당에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여느 날과도 같이 그날도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비오는 날 처맛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주룩 주룩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울림같은 여운이 나서 '이상하다' 여겨서 처마 밑을, 땅 밑을 파보았더니 커다란 가마솥이 있고, 그 솥뚜껑을 열어보니까 그 속에 은이, 은전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아마도 잦았던 난리로 인해서 누군가가 이 은을 이렇게 가마솥에 넣어서 땅에 묻어놓고 피난을 갔다가 못돌아오고 그 어디선가 죽어버렸던가봐요.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 가난한 어머니는 재빨리 그 뚜껑을 덮고 그리고 되묻어서 흙으로 다 묻어서 그 집을 팔고 조그마한 오막살이로 옮겨가서 어머니는 여전히 삯바느질을 하면서 두 아들을 애써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어머니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두 아들을 불러놓고 그 옛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땀흘리지 아니한, 또 갑작스럽게 얻은 재물이라는 것은 곧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오늘같은 날 이런 일이 있었으면 축하파티를 했습니다. 신문에 났을 겁니다. 재수 좋은 사람이라고 lucky라고, 팔자 고쳤다고, 이제 삯바느질 할 필요없다고 너희들 공부 걱정할 것 없다. 우리 운명이 이렇게 열렸고 복을 받았다고 기뻐하고 축하했을 것입니다. 공짜, 횡재, 그리고 불로소득, 이것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공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공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성공 다음에 오는 무서운 시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대표적인 영화사 중에 하나인 PARAMOUNT PICTURES라고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여기 회장님은 여자 분입니다. 쉐리 랜싱(Sherry Lansing) 이라고 하는 분인데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많은 수고를 해서 회장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올시다. 이 유명한 랜싱 회장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 회사원들을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과정을 즐겨라. 그리고 성공을 염려하지 마라." 성공할까 실패할까, 이거 두려워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과정 자체를 즐겨라 이 말이죠. 과정 자체 속에 우리의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어야되고,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빠른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훈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을 합니다. 큰 권능으로 광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었던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인도해서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이상하게도 말이에요 하나님이 정한 코스가 그 노정이 우리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 말하면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야됩니다. 그럼 육로로 갈 수 있습니다. 북쪽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야 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이게 정코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상식과는 달리 깊은 물이 무려 340m나 되는 수에즈만 앞바다, 홍해, Yam Suph로 인도했다는 겁니다. 얌수프라고 하는 이 홍해바다 길로 인도했습니다. 막다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동으로 동으로 와보니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뒤에는 분노한 애굽군대가 지금 원수를 갚겠다고 따라오고 있어요. 상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요 하나님이 가라고 한 길이요 모세가 인도한 길입니다. 그런데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점점 가까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속된 말로 독 안에 든 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4장 11절에 보면 저들이 원망을 합니다. 정말 원망할만 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느냐? 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가 죽이려느냐? 합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합리한 노정을 하나님이 택해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와 경륜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무언가 많이 잘못되었는데 하나님께는 깊은 뜻이 있었어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고 저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서 떠나서 저 가나안 땅까지 가는 노정에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고로 이 시간에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다 더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깊은 인상을 가지고 깊은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기를 원해서 이런 드라마틱한 사건이 이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인도해서 주야로 항오를 벌여서 이렇게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저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는 것을 깊이깊이 인상을 주고 깊이 감동하고 감격한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광야 길을 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계시를 확증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사랑이 뭡니까? 상대방의 처지를 알고 저를 사랑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어느 수준에 있는 지를 알고 그의 약점거리에 미숙한 점 이걸 다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은 아직도 확실한 신앙의 사람들이 못됩니다. 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이 직행하는 길로 가다가 만일에 블레셋 사람들을 만나서 전쟁을 하게 되면 이거 본문에 분명히 말했어요.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습니다. 전쟁을 보는 순간 아이구 어쩌자구 우리가 여길 왔는가?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 돌아갈거라는 거죠. 꼭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저들은 약하고 미숙해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세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같은 큰 사건을 통해서 저들에게 믿음을 줄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귀로를 차단해 버렸어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홍해를 열었다가 닫아버렸어요. 이것을 보는 순간 '이제는 못 돌아간다' 그러한 확실함을 주기 위해서 이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귀로를 차단했다. 다시 옛 노예생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돌아갈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은 다시는 못 돌아가게 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죠. 놀라운 배려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도 종종 그런 경우가 많아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조금 어려운 일 당하면 옛날로 돌아가요. 옛 생활스타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나약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노 리턴(No Return)!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그렇게 홍해를 가로막았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것을 저들에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내가 말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데 대한 것은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가라면 갈것이요, 오라면 올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진정한 순종은 나를 순종케 하시는 자에게 내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자유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은 자유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마음이 늘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는 사람, 거역하는 사람, 자, 예를 들어서 남편의 말을 거역하고 또 부모의 말도 거역하고 누구의 말도 거역하고, 거역하는 순간 전개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됩니다. 이 책임이 누적되면서 소위 스트레스라는 게 생기는 겁니다. 스트레스는 거역하는 반발형의 사람에게 생기는 거예요. 온유 겸손해서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부모님께, 또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선생님께, 잘 순종해서 사는 사람은 심령이 자유롭습니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어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은 고집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홍해의 광야길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갑니다. 홍해가 딱 가로막혀 있습니다. '아이고 이제는 죽었다' 하는데 '걱정하지 마라. 내가 가라고 한 일이니까 내가 책임진다' 이거 아닙니까? 간단한 이치예요. 내가 하라고 한 일에 대해선 내가 책임진다. 내가 명령한 데 대해 순종한 것은 내가 책임진다 그 말이예요. 그리고 저 가나안땅을 계속해서 약속해 주십니다. '저 땅에 가는 것은 내가 허락한 것이니라, 내가 약속한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엔 큰 믿음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출애굽 벽두에 이같은 큰 사건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데로 이같은 큰 권능과 능력을 출애굽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노정에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종종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 엎드러져 죽기도 하고,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거 왜 원망하느냐? 원망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건망증이 심해서 그래요. 지난날에 받은 은혜가 큰데 그 큰 은혜를 오늘도 기억하고 있으면 되겠는데 자꾸만 잃어버려요. 그때는 감사 감격하고 심지어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할만큼 충만할 때가 있었지만은 곧 잃어버린다는 거죠. 이게 문제올시다. 여러분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제 홍해가 열립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했는지 그 감격은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고 나서 그 감격이 얼마나 갔느냐 이거예요. 성경학자들이 잘 연구해 보면 꼭 열나흘 갔어요. 열나흘 갔다가 쪼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또 원망을 하는 거예요. 전일에 보호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인도하실 거 아니겠습니까? 전일의 큰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셨으면 또 앞으로 오늘과 내일도 함께 하실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믿음이 없는 겁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적게 믿는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건망증 환자들이에요. 그래서 오늘의 문제에 대한 것을 바로 타계할 수가 없었어요.
또 하나는 너무 조급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 앞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라고 하는 책을 쓰신 이규태 씨, 그 이규태 교수님의 칼럼이 매일같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규태씨의 글 가운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사람의 성품 중에, 의식구조 속에, 그 체질 중에 고쳐야 할 것 하나가 있다, 하고 강조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쿼터리즘입니다. 쿼터리즘. 쿼터리즘이라고 이렇게 학술적인 용어를 썼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쿼터라는 말은 15분이라는 말이에요. "15분주의"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정에 성숙하지 못하고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너무 초조해. 꼭 뭐든지 15분밖에 못합니다. 아침 신문보는 거 자세하게 논설도 읽고 해야 하는데 큰 글자만 요렇게 요렇게 15분. 뭐든지 15분으로 훌쩍 넘겨버려. 침착하게 오래오래 생각을 하고 그러지 못합니다. 이 15분이라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분이 지적한 대로 유원지에서 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보아도 놀이터에 어떤 놀이기구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을 보아도 가만히 보면 5분밖에 안놀아요. 5분 있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어른들은 15분 얘들은 5분. 이렇게 초조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즘에 "느리게 사는 비결"이라는 책도 나오잖아요. 좀 느리게, 느긋하게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속전속결, 바로 거기에 우리의 인간성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문제란 말입니다.
제가 쿠알라룸프에 갔을 때, 어느 중국집에 가서 대접을 받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제가 아는 대로 중국집에서 식사라는 건 한접시가 나오면 다 먹고난 다음에 그 다음 접시가 나오고 또 다 먹은 다음에 그 다음, 그렇게 해서 보통 두시간 반동안 식사를 하는 것이 중국음식을 먹는 그 하나의 에티켓인데 가보았더니 한꺼번에 세접시씩 나와요. 그래서 궁금해서 왜 이러냐 물었더니 한국 사람들은 처음부터 빨리빨리 빨리빨리 그러기 때문에 아예 한국 사람 가면 안대요. 세접시씩 그냥 나온대요. 그것뿐만 아니라 빨리 먹고 가기 때문에 부탁을 안해도 음식값을 할인해 준답니다. 소문났어요. 아주 세계적으로 소문 났어요. 급하게 논다, 빨리빨리로 말해요. 그러니까 빨리 망하지. 이걸 아셔야 됩니다. 뭘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어요.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무슨 공사 뭐니…. 좀 느긋하게 하질 못해요. 급하게 해놓고 축하파티하고 무너지지 않습니까. 왜 이모양 입니까? 걸려야 할 시간만큼은 걸려야 되는 거예요. 과정을 무시하는 거예요. 결과만 가지고 따지는 겁니다. 이것이 망조예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든 것이 다, 보세요. 무엇 때문이에요? 쿼터리즘이에요. 조급해요. 조급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가는데 왜 이렇게 조급해요? 조금 일이 잘되면 감사하고, 찬송하고, 조금만 안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종잇장처럼 벌컥벌컥 튀어요. 조급한 마음, 이것이 이렇게 원망으로치닫게 되는 것이예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어요. 또 하나, 믿음이 없었어요. 많은 사건을 통해서 은총을 경험하고 있지만은 그 마음 심성 속에 깊이깊이 신앙이 없었어요. 문제올시다. 그래서 13장 14절에서 보면 모세는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날 여호와 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그 구원을 보라. 그 말 합니다. 구원을 보라. Be still know that I am God, 조용하야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하나님 됨을 알라. 믿음을 요구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을 돌보는 사람들을 호스피스라 합니다. 요새는 이 호스피스가 하는 직업이 대단히 중요한 직업입니다. 그들이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을 봉사해 가면서 듣고 경험한 일을 집약해 놓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백만장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학자도 있고 그리고 무식한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사람이 자기들 앞에 와서 임종을 맞습니다. 그 지식과 재산 명예, 아무소용 없대요. 그들앞에는 다같이 어린아이예요. 마지막 임종할 때 공통적으로 세가지를 후회하는 것이에요. 첫째가 그때 좀 더 참고 인내할걸……. 조금 더 참았으면 좋았는데 참지 못한 데 대해서 후회가 있어요. 두 번째는 그때 좀더 베풀 걸……. 얼마든지 선한 일 할 수 있었는데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인색했던가? 베풀지 못한 데 대한 후회. 세 번째가 그때 좀더 재미있게 살걸……. 뭐 불만도 많지만은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행복하지 못했던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었는데 하는 것을 이제서 후회한다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 이렇게 원망불평 해놓고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실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때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원망하지 말걸……. 아니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딘 길로 인도하십니까? 왜 직행하는 길을 빼놓고 먼길로 가라 하십니까? 왜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길로, 왜 가까운 길 놔두고 먼 길로 가라하시는 것입니까?
실패와 위기, 우리가 당하는 사건, 그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한 특별한 배려가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옛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도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더 이상 거짓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이제 아무 불만없이 조용히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이 길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 주신 이 길로, 묵묵히 감사하며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
이필재 목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하나님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무리를 칠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도구는 꺼지지 않는 불이다, 불 심판이다.”라고 하나님의 권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말 “성령은 불과 같이 임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는 것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막았습니다. 그랬더니 요한, 야고보가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요청을 하잖아요?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놈들을 멸망시키자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불로 인식되어 있음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 성은 심판의 유황불이 내려 다 심판을 받았다고 나와 있고,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설교할 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구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름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름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따라갔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회막 위에는 항상 구름이 떠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성이 나타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예수님 네 사람이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신비한 광경을 제자들이 목격하였을 때 5절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121편에 “여호와께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로다.”라는 말씀은 광야에서 구름 기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104편에 보면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모세가 광야 회막에 들어갈 때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모세와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름으로 하나님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여 모세 인도를 따라서 민족 이동을 하는 약 3500년 전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여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노정에는 우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길은 가까울 지라도”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을 가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 중에는 좋은 길이 있습니다. 해변가를 따라 상업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항상 그 길로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바로 옛날 요셉이 팔려가던 길입니다. 그 길로 가면 한 달도 안가서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일주일 만에 왔다 갔다 하는 그 길입니다. 도로도 아주 좋습니다. 경치도 좋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40년 동안 살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만약 애굽에서 그 해안 도로를 따라 가나안까지 가면 홍해를 건널 필요도 없었습니다. 요단강을 구태여 건너가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쉽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40년 동안 모래벌판에서 고생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애굽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좋은 길로, 한 달 만에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정 반대 방향의 시나이 반도 사막의 모래벌판을 가게 하셨는가? 불필요한 수많은 길을 헤매게 하시고 불필요한 적을 수없이 만나서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쉽게 우리가 풀이를 하면 분당에서 부산을 가는데 고속도로로 쫙 내려가면 5시간이면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산을 가는 사람이 춘천으로 올라가서 파주로 가서 불필요한 인천을 가서 수원에 왔다가 저 목포로 내려갑니다. 그랬다가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서 광주로 갔다가 여수, 대구, 마산을 거쳐서 부산에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간 겁니다. 왜 그렇게 갔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가라고 하신 겁니다. 이상하잖아요? 그러는 도중에 홍해를 만나기도 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온갖 고생 다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질러가는 길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 왔다! 여기만 지나가면 된다.” 하나님이 “그리로 가지 말라.” “아니, 조그만 가면 됩니다.” 갔다가 큰 실패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잖아요? “내가 그리로 가지 말라고 했잖느냐?” “하나님, 왜 그리로 가지 말아야 됩니까? 결국 그 땅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실 거 아닙니까?” 이런 이상하고도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 신앙의 갈등이 ‘도대체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나만도 생각을 못하시나?’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은 지나치게 인색하십니다. 인색한 것은 고사하고 공연히 못살게 구는 취미를 가지신 것 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성격 나쁜 아버지가 집안 식구들 달달 볶듯이 한 달만 고생하면 되는 길을 40년이나 시나이 반도를 다 헤매게 하시고 끝없는 피를 흘리게 하시고…. 이거, 도대체 왜 이렇게 하시는 거야? 이런 고생 안시키기고도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겨주었다면 한 달 만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로 못 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첫 번 목회지가 시각장애인 교회였습니다. 인생 중간에 실명되신 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때 그분들과 좋은 추억이 많아서 44년 전 일인데도 지금도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해서 내일과 모레도 삼척에서 시각장애인협회 여름수련회 주강사로 가게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분들이 생각할 때는 ‘저 시각장애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살맛이 날까?’ 이렇게 생각되시죠? 아닙니다. 얼마나 명랑하고 삶이 기쁘고 농담도 얼마나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전 그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돌아가면서 식사기도를 시키면 공동체 생활을 하니까 “오늘 누구 기도 차례야! 식사기도!” “전도사님,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앞에 뭐가 있는지 보여야 이거 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텐데 뭐가 보여야 기도를 하지요? 다른 사람 시키세요. 난 안할래요.” 밥 먹다가 “야! 얼굴에 밥풀 좀 떼고 먹어!” 얼마나 농담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항상 불을 끄면서 “불 좀 켜고 먹어라.” 재미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날마다 저한테 와서 “전도사님, 하나님이 왜 나를 눈멀게 하신 겁니까?” 이 두 가지 반응이 항상 나타납니다. “나는 다 좋습니다. 건강도 괜찮고 아이큐도 괜찮은데 이 앞 못 보는 거 이거 하나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앞 못 보는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니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이 질문이 끊임없습니다. 그러다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앞만 못 보나? 뒤도 못 보지? 옆도 안보이고….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을까?” 사실 이 문제는 모세의 기도에도 나옵니다. 모세가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를 즉시 죽여서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왜 나를 이렇게 곤고하게 만드시나이까? 죽여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취미로 그 민족을 그렇게 고난스럽게 하셨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 삶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 세상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초대를 받는 사람들이 택한 백성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이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했잖아요?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다 그렇고 택한 백성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500년이나 한결같이 지켜오는 민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장막절입니다. 뭐하는 절기입니까? 출애굽 사건 때 광야에서 받았던 고통을 잊어버리지 말자고 해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가도 가도 모래 먼지만 날리는 열풍과 사막 생활을 한 살 때 나온 사람이 40살이 되었습니다. 시나이 반도의 모래 먼지 속에서 잔뼈가 굵었고 햇볕만 가리는 천막에서 40세가 되도록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그 후손들이 이 지상에서 가장 억세고 강인한 종족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고난의 현장에서도 살아남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들은 디아스포라 되었는데 지금 세계 어디를 가든지 유태인이 들어가 사는 나라는 유태인들이 앞서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는 유태인들을 많이 만나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유태인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그들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편안치 않다고 생각해서 6백만을 죽여 버린 겁니다. 그래도 안 죽어요. 다시 살아남아서 튼튼한 민족을 형성합니다. 지금 서구 사회에 가보면 뭐든지 우세한 것은 유태인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620만의 유태인이 살면서 미국에서 좋은 것들은 그 사람들 손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남자들에게 군인의 의무를 줍니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인을 나가야 합니다. 군인의 숫자가 모자라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여러분, 1967년 6·1전쟁 때 임신 8개월 된 여자가 낙하산을 타고서 기관총을 가지고 낙하하는 모습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고 방송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들을 누가 당합니까? 로스앤젤레스에 포레스토론이라는 숲속이 있는데 유태인들이 사용하는 사격장입니다. 12살만 되면 유태인들은 누구나 거기에 끌려가야 합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씨에도 12살짜리에게 작은 소총을 주고 사격 연습을 혹독하게 시킵니다. “우리 유태인은 이렇게 안하면 살아남지 못해. 알았지?” 개인 1인당 회비를 걷어서 이스라엘 나라로 보내고 고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는 누구든지 자원해서 갈 수 있는 훈련을 해서 만반의 임전 태세를 완벽하게 갖춥니다. 전쟁이 나면 학교 다니다 말고 직장 다니다 말고 갑니다. 못 당합니다. “이렇게 강인한 민족성을 만들어야 이 민족들이 디아스포라 되어서 세계 어디에 가서도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훈련시키신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땅이 귀하다는 훈련을 받았죠? 차지한 땅은 절대로 안 빼앗깁니다. 먹는 식량이 귀하다는 교육을 받았죠? 식량 생산은 기브스 농장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농업 기술로 발전했습니다. 배가 고픈 훈련을 해서 인내를 배웠죠? 참고 견디는 것으로 유태인들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얼마나 잘 뭉칩니까? 절대 안 깨지지 않는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가나안 31족과 전쟁을 하면서 익혀온 그들은 지금 이 세상 어느 군대도 당해낼 수 없는 강한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주변의 10개 나라가 덤벼들어도 절대로 깨지지 않았잖아요? 만약 그들이 해변가의 경치 좋은 무역 도로를 통해서 일주일 만에 쉽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 민족은 멸종당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을 멸종시키고자 기다리던 가나안 땅의 종족이 있었습니다.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이 있었습니다. “이 놈들, 오기만 해봐라! 다 없애버리겠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었잖아요?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족이 다 멸종한다 하여도 그들은 살아남는 강인성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히틀러가 6백만을 죽일 때 “멸종시켜 버려야지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가 너희를 이렇게 훈련해야만 너희를 통한 인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들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된다. 그 땅은 가나안 31족이 있는데 너희가 그렇게 강인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결국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그 복음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잖아요?
저는 지금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녀들의 문제가 뭐냐?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는 유약한 문화에서 자라고 있다.” 자녀가 하나둘이니까 다 왕자같이, 공주같이 길러냅니다. 고난을 못 이깁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뭐든지 필요를 다 들어줘버립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여러분, 군대 들어갈 때가 얼마나 강인한 나이입니까? 인생 중에서 가장 강인한 힘과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을 때 군대 나가잖아요? 우리나라 군대 자살률이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왜 그래요? 유약한 문화에서 왕자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군대 훈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겁니다.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집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률 1위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돈이 필요하다고만 하면 “그래, 그래!” 주고, 말만 떨어졌다하면 “네, 네! 왕자님, 뭐가 필요하십니까?” 자기가 사회 나가서 피땀 흘려 노동을 하고 시간당 돈 몇 천원을 받아 들었을 때 “와! 돈이 이렇게 귀중한 거였나?” 그때 비로소 알게 되잖아요? 외국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쯤 되면 나가서 그렇게 경험을 다 하게 합니다. ‘부모가 주었던 돈의 귀중함이 이런 거였구나!’ 히브리 민족은 광야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자라고 민족의 강인한 유산이 물려지게 되었습니다. 물이 없어 갈증을 겪었을 때 그들은 물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배웠기 때문에 소중함을 깨달았고 애굽에서는 나일 강 삼각주에 살았기 때문에 나일 강 유역의 풍부한 물이 귀중한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땅은 역시 물이 귀한 땅입니다. “메마른 사막에 훈련 없이 거기 가서 살지 못한다.” 노예로 살다가 해방은 받았으나 자유를 누리는 값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도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절반의 사람들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 생활을 계속 하자고 소리쳤습니다.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춤추다가 3천명이 “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무참하게 죽지요? 이런 역사를 통해서 이들은 신앙 훈련이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교인들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길잡이 역할입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방향 제시를 합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체험이라야 됩니다. 체험을 통한 신앙만이 굳셉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를 잘하셨어도 내가 꿈쩍도 안했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 사건을 만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체험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께 직접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니까요. 모세의 그 좋은 설교를,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모세가 설교했잖아요?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다 바알 숭배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듣는 거 신앙에 도움은 줍니다. 그러나 아주 강인한 신앙이 마련되는 것은 체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광야에서 체험시키시는 겁니다. 온갖 고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교육을 시키시는 겁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그들은 아무리 정착해서 좋은 조건의 장소라도 떠나야 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좋은 장소가 있는데 여기서 좀 오래 살면 안 되겠습니까?” “구름이 움직이잖아!” 또 구름 기둥이 머물면 아무리 살기가 열악한 사막 한 복판일지라도 그곳에 진을 쳐야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지 않느냐?” 때로 우리의 이성의 명령과는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너희들 마음대로 갈 길을 정해서 가라.” 그랬다면 100퍼센트가 무역 도로로 닦여진 해안 도로를 따라서 한 달 만에 가나안에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오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영혼에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인도를 불 기둥, 구름 기둥과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우리 주변이 아무리 몰아치는 사막의 열풍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갈 길이 분명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식량이 없어서 광야에서 굶어죽은 자가 있느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죽었지 생활여건이 열악해서 고난을 당했지만 죽은 사람이 있느냐? 없지 않느냐?”
오늘 말씀에 모세가 애굽을 떠날 때 요셉의 무덤을 헤치고 해골을 꺼내들고 가지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뭐하는 겁니까? 창세기 50장에 요셉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110세에 죽으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권고는 어느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 언약의 땅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거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함으로 말미암아 갈보리 산에 십자가를 통해서 온 세계 만민이 구원받을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땅이었잖아요? “그곳으로 가야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땅은 그곳,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지 애굽 문명 속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희를 권고해서 너희를 떠나게 하실 것이다. 그때 내 무덤을 헤치고 내 두개골을 꺼내서 함께 가지고 가다오.” 요셉의 장래 예언의 말을 따라서 그대로 하는 겁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적을 하고 발밑에는 홍해가 있고 사막과 기근이 열풍으로 모래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구름 기둥, 불 기둥을 바라보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켰습니다. 지금은 그 작은 민족이 지구상에서 절대 무시 못 할 억센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보호인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었다는 성경 말씀 하나를 보면서도 내 앞에 있는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앞에는 이 기둥이 항상 서있으며 우리 민족 앞에 그 기둥이 서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도 보지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돌아가자. 무엇 때문에 우리를 끌고 나와서 이 모래 벌판에서 이 고생을 시키는가? 돌아가자. 모세를 죽이고 돌아가자.” 아니면 “하나님이 꼭 가라는 대로 가야 되느냐? 왜 하나님이 이상한 데로 가게 하느냐? 지름길로 가자.” 모두 다 심판 받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움직여!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달라.” 예언자 조상의 해골을 꺼내들고 그 예언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시나이 반도 모래벌판을 40년 헤매던 민족을 우리가 기억할 때 ‘아! 내 앞에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있구나. 우리 교회가 가는 길에는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으며 이 민족이 가는 길에도 있구나.’ 영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사막은 통과하는 겁니다. 내 앞에 세워지는 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어둡고 비참한 역사가 우리 현실 앞에 있다 하여도 이 하나만을 볼 수 있으면 가나안 땅의 성취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언제 남북통일이 될 것인가?’ ‘언제 이 민족은 그러한 세상을 만날 것인가?’ 우리 민족의 과제도 있고 교회 과제도 있고 나 개인의 과제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 앞에 불 기둥이 있어! 민족의 구름 기둥이 있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손을 잡고 가시는 거야. 하나님은 내 손을 잡고 내 앞에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해! 이 믿음 하나로 이기는 거야.” 오늘 성경 말씀의 마지막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구름 기둥은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보호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내 앞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그렀습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출 13:20 / 김광일 목사
이창훈은 523대 1이란 경쟁을 뚫고 한국방송 사상 최초의 지상파 장애인 앵커로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TV를 본적이 없기에 아나운서의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점자 단말기를 통해 뉴스를 정확하고 빠르게 읽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는데 마치 누군가 뒤에서 등을 받쳐주는 듯 든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지만 그는 청년부 회장과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 찬양을 인도하며 피아노 반주도 합니다. 봉사를 하는 그를 보면 1급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뇌수막염 후유중으로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되어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형체는 물론 빛과 어둠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란다. 사람들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도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란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야.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꿈은 가까이 있단다.” 어머니와 아들은 빛을 향해 한 발씩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8세에 서울 한빛맹학교에 입학하여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다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2007년 시각장애인 인터넷 방송에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KBS 장애인 뉴스 앵커 선발 공모를 본 그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 않을까의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평소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는 기도하면서 준비했고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움직이고 도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에담에 장막을 치고 있을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별개의 기둥이 아니라 한 기둥의 이중적인 현상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였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인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랐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 속에 담긴 메시지를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를 통과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상징적 도구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 때 필히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으며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나와 함께하시니
2차 대전이 치열할 때, 군사업무를 띤 영국 기선 한 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선장에게 비밀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항로를 벗어나지 말고 똑바로 항해할 것, 유사시에 즉시 비밀부호로 타전할 것’ 그런데 항해 도중 적함으로 보이는 군함을 발견하고 선장은 급하게 무전을 쳤습니다. ‘적함으로 보이는 군함이 보인다.’ 그러자 바로 회신이 왔습니다. ‘계속 똑바로 담대하게 항진하라.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라’선장은 이상했습니다. 바다에는 영국 전함도, 비행기도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나를 지켜 준단 말인가? 무사히 항해 끝에 도착하여 입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잠수함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잠수함이 같은 항로를 따라 그 기선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때로는 드러날 때도 있지만, 모르게 임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잠수함보다 더 힘 있게, 더 강하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백성들과 함께 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했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증거(Sign)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믿음으로 기드온의 삼 백 용사는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 족속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리고성과 같은 장애물이 있다 해도 미디안족속 같은 방해꾼이 있다 해도 골리앗과 같은 악한 세력이 진을 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해결해 주십니다. 부디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로 인도하시니
노스웨스트 대학 창설자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박사의 간증입니다. 그가 대학을 세우기 전에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부흥집회를 인도하려는 교회의 노부부 집에 숙소를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부부가 음식솜씨도 신통치 않고 집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침대도 낡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들은 집도 크고 넓은 정원에 부유하게 사는 젊은 부부의 집으로 옮길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러자 버터필드는 숙소를 옮기는 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며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말합니다. “이런 일까지 기도하십니까? 그냥 옮기시지요?” 그러나 버터필드는 잠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젊은 부부가 사는 집으로 옮겨도 됩니까? 아니면 이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기도하던 중에 마음속에 누가복음 10장 7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버터필드는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으므로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머물겠습니다” 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젊은 부부의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집이 1개월 동안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만약 버터필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부흥회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갇혀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집회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를 받는 가운데 위대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여기의 ‘가시며’ 의 ‘홀레크’ 는 ‘걷다’ 인 ‘할라크’의 분사형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인도하며 계속 걷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행진할 때마다 그들 앞에서 인도하셨고 이스라엘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동행의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기둥과 불기둥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뒤처지지도 않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다른 방향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아닐지라도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기도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변해서는 안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책임을 지는 하나님의 징표이기에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끝까지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를 보호하시니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설교 부탁을 받고 낯선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모르는 그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내자를 따라 나선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안내자가 어이 없어 합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목적지가 아닌 곳에 이미 와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그 날 설교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을 반대하는 대적들이 이미 숲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시고 어거스틴을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0절입니다.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진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애굽 군대가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이 건넙니다. 나중에 애굽 군사들이 따라 들어갔지만 물이 합쳐지면서 수장됩니다. 19절에 구름기둥이 앞에서 뒤로 이동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후가 되어 보호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 하셨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눈동자처럼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험한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그의 손길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수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동행하여 주십니다.
인생길을 가는 동안 반드시 동행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동행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시는 증거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은혜를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의 위기를 당할 때
출 13:20-22 / 조용기 목사
<서론>
“삶의 위기를 당할 때”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넓고 넓은 광야에서 갈 길을 찾을 수가 없어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낮에는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높이 서서 그들을 덮어 주시고 밤에는 그 구름기둥이 불기둥으로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치고 있는 곳에 대낮같이 환하게 하셨습니다. 벌써 그때 하나님께서 에어컨디션을 역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밤에 불을 환하게 하셨는데 주위가 환할 뿐 아니라 덥다 말입니다. 공기를 덥게 만드시니 더운 기운이 에어컨디션이 되어서 그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돌봐 주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너희 마음대로 가나안을 찾아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정한 길로 이끌어 주신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내동댕이 쳐놓지 않고 여러분을 위해서 길을 다 정해놓고 그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본론>
1.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인도하신 하나님은 출애굽기 13장 21절에 야훼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우리가 안심하고 뒤따라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 따라가는 자 결코 시험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은 우리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원수와 싸워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장하지 않은 군대가 없는 백성입니다. 약 3백만되는 저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 주변에 있는 민족들이 공격을 해오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사나운 짐승들이 공격을 해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가운데 계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해오는 애굽의 군대만 바라보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싸우기 위하여 함께 계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속에서 하나님은 싸울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싸워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마음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들어오면 믿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애굽의 국경을 지켰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9절로 20절에 보면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택한 것은 오늘날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민으로 택한 상징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 주야로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바람같이 우리 가운데 이 시간에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서 숨을 쉬는 것처럼 성령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되 넘치게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오늘 이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구름 기둥이 기온 조절을 해서 낮과 밤에 편하게 광야를 지내게 해주신 것같이 우리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에어컨디션이 되어서 밤낮 좋을 때나 어려울 때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도 주님을 본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냐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굉장히 어려운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여러분 뒤로 물러가지 마시고 끝까지 참고 견뎌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이 난관에 처했을 때 그때 여러분과 원수 사이에 서서 여러분을 위해서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같이 계시므로 성령이 여러분을 낭패 당했을 때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 못하게 한 것처럼 오늘날도 원수가 여러분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4절로 25절에 보면 “새벽에 야훼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야훼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밤새도록 성령께서 불기둥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는데 이른 새벽에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려하니까 그 병거바퀴를 전부 벗어지게 하고 말이 달리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2. 구약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신약의 상징
구약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우리 신약의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너희와 함께 거하시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실 것이요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 보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특별히 보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보혜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에게 먹이시고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가면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또 보내 주신다. 다른 보혜사, 그러면 우리가 말할 것입니다. 주님이 좋지 다른 보혜사 원치 않습니다. 다르다는 말은 똑같은 종류 중에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성령님이 우리에게 와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같은 분인 것입니다. 알고 마음속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똑같은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똑같은 분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같은 분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버지의 영이시오 예수님의 영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아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죄를 용서해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형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보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보내주시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고 하나님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구약 4천년 동안 아버지가 정면에 서서 일하셨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성령님도 아버지 안에서 역사했고 아버지가 정면에 나와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는 30세 동안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셨다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난 다음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하여 3년 반 동안 아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아버지도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님도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아들의 시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어 부활해서 승천하시고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시대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도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고 아들도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은 영이시므로 동시에 온 우주에 계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역사하실 때 아들과 성령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야훼 하나님,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로써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성령이 직접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역사할 때 아버지도 아들도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목회했을 때 어떻게 해서 교회가 그렇게 성장 발전하느냐? 그 질문을 언제나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우리 교회는 아버지도 아들도 직접 나타나서 역사하신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 우리는 율법이나 의식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성령께서 다른 보혜사가 되어서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 성령님은 똑같은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도 나타나시고 아버지를 나타나는데 우리교회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니까 자연히 성령님을 통해서 아버지가 나타나시고 아들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붙잡는다는 것 참 힘든 일입니다. 생자로 예수님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가서 예수를 전도한다는 것은 그 마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붙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장가 못가는 총각이 왜 장가를 못 가느냐. 좋아하는 처녀의 마음을 빼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잡아야 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도 남편도 전도하기 힘들고, 아내도 전도하기 힘들고, 자식도 전도하기 힘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쉽게 내놓습니까? 안 내놓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복음교회 가면 마음이 달라진다고 해요. 어떻게 마음이 달라지냐.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목사의 설교를 가지고서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과 같은 은혜를 마음에 부어주므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살아계신 성령님이 항상 우리와 같이 역사하기 위해서 우리 생각 속에 성령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늘 마음속에 생각하고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 속에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항상 자녀를 생각합니다. 서로 남녀간 사랑하게 되면 자나 깨나 서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생각에 성령님을 늘 모시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늘 생각하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며 생각을 하고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같이 성령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 같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상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면 구름 기둥 같이 불 기둥 같이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성령께서 와 계신다. 그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 나와 같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돌봐주신 것같이 성령이 나를 돌봐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큰 소리로 성령님 나와 같이 계셔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소리 내어 성령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께서 움직여야 예수님이 움직이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시대는 아버지의 시대고 신약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대는 아들의 시대고 지금은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러 온 성령시대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성령께서 지금 저와 같이 계십니다. 성령님을 믿습니다. 의지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말씀을 다 들으시고 오냐 내가 너와 함께 하마. 같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마음에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성령님을 꿈꿔보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같이 있는 것을 꿈꿔보고 그리고 성령님 믿습니다.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줄 줄 믿습니다. 나에게 같이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는 성령님, 내 앞서 가 주시옵소서. 성령님 나를 지켜 주시옵소서. 기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성령님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 같이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느냐. 제일 처음에는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 성령께서 인도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마음속에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로고스. 그러나 이 로고스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전에는 그렇지 않던 말씀이 내 마음에 감동이 오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직접 성경에서 뛰어나와서 내게 말씀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는 로고스라는 말씀이 성령에 의해서 내게 주신 말씀이 되어서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레마라고 합니다. 레마, 보통 말씀은 우리 다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 우리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조용기 보고 만 말한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고도 만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아~ 그런가보다. 예수 믿는 사들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해야 되는가보다. 그런데 조용기는 그 성경을 읽으면 네가 구라파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늘 읽으라는 것은 성경을 읽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에 확 비취게 해서 레마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날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여러분 그런 것 체험하지요? 여러분 교회 와서 예배 드릴 때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아~ 나보고 하는 말씀이구나. 병이 들어서 고생 고생하는 사람 교회 와서 설교 듣는데 아? 저것 오늘 나보고 하는 말 아니냐? 허리가 다쳐서 몸을 못 쓰는 사람이 나았습니다. 전에는 아, 여기에 또 허리 다친 사람이 또 있는가보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야, 저것 나보고 하는 말이다. 그때는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인 것입니다. 레마가 오면 강력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지식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으로 내게 전해주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뜻을 알 수가 있는데 레마는 지금 현재 하나님 말씀이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마를 받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강력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열심히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면 여러분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레마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이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또한 소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면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내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생깁니다. 내가 마음속에 뜨거운 소원이 생겨서 오늘 친구 집에 가보고 싶습니다. 그래 내가 보통 때 같으면 가지 않는데 기도를 하는데 자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친구를 만나보아야겠다는 소원이 생겨 하나님이 인도하신 줄 알고 가보면 꼭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원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소원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에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인 로고스를 통해서도 인도하시지만 뜨거운 마음에 소원이 생겨서 하나님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 하나를 결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우리 한국에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 장로교에서 지도적인 목사님인데 지금은 천당갔습니다만 이분이 하루 내 사무실에 들어오셨어요. 보통 그런 정도의 훌륭한 목사님은 내 사무실에 찾아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훌륭한 장로교 목사님이 날 찾아왔다고 해서 들어오서라고 하니까 내 방에 들어오서더니만 두말하지 않고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게 안수해 주십시오. 내가 너무 황당해서 아이고 일어나 앉으십시오. 왜 끓어 앉습니까? 내가 겸손하게 되어야 되겠고 마음이 깨어져야 되겠고 그리고 목사님 안수를 받아야 목회에 성공하겠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내가 우리 성도들을 훈련을 시키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지식은 얻으나 마음에 살아있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머릿속에 남아있지 마음에 감동을 주고 뜨거운 신앙이 생기지 않는데 왜 그러느냐.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문자만 깨닫고 살아있는 성령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므로 제가 미국에 건너가서 성령운동하시는 분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미국 갈 준비를 하고 기도를 하는데 오늘 아침 성령께서 말씀하기를 성령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미국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왜, 어디를 가란 말입니까? 엎드리면 코 닿는데 성령의 역사하는 내 종이 있는데 왜 미국까지 가려고 하느냐? 누굽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 찾아가라! 그래서 아휴 하나님, 다른데 가라고 하시지 모든 사람 다 있는데 체면도 있는데 그러니까 네가 성령의 역사를 못 받지 않느냐. 하나님 은혜를 받는데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가서 안수 받으면 미국 가지 않고 성령충만을 얻을 수 있다. 둘이가 얼싸안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그 덕분에 나도 성령충만 받고 그도 성령충만을 받고... 그게 소원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결판을 못 내릴 때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서 그 소원이 모든 것을 이기고 함께 기도하러 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계시는 꿈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때가 매번 있습니다. 요셉은 꿈으로 하나님께 계시 받아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을 여러분 잘 아십니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계시를 주는 사람 종종 있어요. 나는 제가 목회할 때 우리 성도 중에 꿈을 너무 잘 꾸는 사람이 있어서 괴로움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잠만 자면 꿈을 꾸요. 꿈을 꾸면 꿈에 내가 연결된 꿈을 꿉니다. 진짜 하나님의 계시도 있고 잘못된 계시도 있고 그런데 이 계시는 상당히 분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계시가 오면 성경말씀으로 분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를 무시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꿈으로 계시도 있고 기도하다가 비몽사몽 간에 계시를 보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꿈이나 환상으로 여러분에게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 꿈이나 환상을 받아가지고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성령께서 이중삼중으로 소원도 일으켜 주시고 마음을 뜨겁게 해서 레마로 주시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인도하는 것은 마음의 양심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분이 오늘도 내게 와서 하나님 성령이 인도하셨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까워요. 그래서 한번만 안 내도 괜찮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양심이 뭐라고 합니까? 양심이 십일조를 내라고 합니다. 그럼 그 계시가 양심으로 왔는데 뭔 잔소리냐. 여러분, 양심이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계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양심을 성령이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가장 뚜렷한 증거는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날 의식을 지키거나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이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4천년 동안은 율법시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 일생의 죄를 다 청산해 버리기 때문에 이제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힘 있게 가르켜 주기를 원하는 것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구원은 우리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내가 다 이루었다 청산해 버렸으니까 이제 예수님 앞에 나오면 나를 붙잡을 죄가 없어요. 예수님이 다 갚아버렸으니까. 여러분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할 때 우편좌편 선 강도가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이 즉시 그 자리에서 오늘 너는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우편에 선 강도는 엄청난 강도입니다. 살인하고 방화를 한 아주 흉악한 강도인데 율법으로 말하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님께서 너는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겠다고 하셨으니 주님,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이미 그 강도의 죄를 대신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그는 낙원에 갔고 고백하지 않고 그냥 달린 사람은 지옥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여러분의 죄를 다 담당하게 하는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다 만들어 주시고 천국에 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와 의를 얻어 천국 가는 이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여러분 마음에 감동을 시켜서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죄와 허물을 다 담당하셨고 너를 위해서 병을 짊어지셨고 너를 위해서 저주를 다 감당해서 가난과 실패를 청산하셨고 너를 위해서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생복락을 얻게 하셔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셨으니 믿으라. 믿으면 하겠네. 얼마나 놀라운 계시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을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을 얻는 소식을 전해 주시고, 포로가 된 자에게는 자유를 자고, 눈 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한다. 은혜의 해라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해를 전파하게 한다. 이제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다음 믿음으로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는 그때까지 한정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은혜로써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의롭게 된 것을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열두 정탐꾼을 보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라고 했는데 그들은 성령님이 여태까지 이끌어온 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부정적인 눈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나와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보는 것이 다 부정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느 외국인이 며칠 전에 저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 사람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그것 왜 그러느냐. 한국 사람이 자동차를 만든다기에 나는 자동차 전문가 중에 한 사람인데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말을 했다. 자동차 만드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설계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부품을 만드는 것까지 한국이 자동차를 만들려면 100년은 기다려야 될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생각했는데 지금 한국 자동차 세계5대 메이커로서 경쟁을 하고 있다. 그것 왜 그러느냐. 내가 자동차 만드는 기술이 어려운 것만 알았지 한국 사람들이 뭘 한다면 아주 얼토당토 안한 자리에서 시작해서도 일을 마치고 마는 참 마음이 결단심이 강한 민족이 한국민족이라고... 한국 사람이 한다고 하면 엉터리로라도 해놓고 만다고... 그래서 왜 엉터리라고 하느냐. 한국 사람이 한다고 하면 한다. 이제 두고 봐라. 온 세계 기독교는 한국에서부터 나간다. 정말로 우리 한국 사람들이 목표를 가지고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가면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늘 말하지 않습니까? 바라보고, 믿고, 말하라. 그러면 해놓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아예 바라보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부정적으로 행동하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은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이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의 영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따르지 않고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마귀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면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3.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거역한 백성들
민수기 14장 32절로 34절에 보면 열 두 지파 열 명의 대표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백성들에게 공포를 넣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공포를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한 것입니다.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부정적인 말을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끌어 오신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을 대적했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렸던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면 순종하는 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으나 불순종하면 광야에서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30절에 보면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지 않고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나가면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부인하는 자는 주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세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여러분 속에 성전 삼고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데 이 성령의 가르치심을 배반해 버리면 세상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불길같이 일어나다가 요사이 잠잠해지는 것은 성령님을 멀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님을 교회가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면 그 성령 속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가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교회에서 넘쳐나면 다시 불꽃같이 일어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이 증거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마귀에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가 해방을 얻고 병으로 눌린 자가 해방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가 전파되고 성도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마음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희한한 마음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마음에 기름 부으심이 오면 마음에 달큼한 향내는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성령이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달큼한 향내를 허락해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굉장히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거역해도 성령님이 우리를 달래주고 다시 회개시키기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해버리면 우리를 달래줄 사람이 없습니다. 버림받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항상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 이렇게 나와서 앉아계신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 보고 의식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오셔야 예수를 주님으로 깨닫고 믿게 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통해서 천국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이 여러분 마음속에 감동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재이신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에게 병 낫는 믿음을 주시고 물질적 축복을 얻는 믿음을 주시고 마음에 희망을 주시고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인 성령님을 항상 바라보고 성령님을 믿고 따라가며 찬양하며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과 같이 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시고 더불어 믿으시고 더불어 말씀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기이한 이사와 기적을 항상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의 인도하심 따라
출 13:21-22 / 김광일 목사
어느 두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여 약혼한 남자가 전쟁터에 나갔는데 어느 날 전사통지가 날라 왔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기다리고 있던 여인에게 캄캄한 밤이 왔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고독하고 아픈 마음을 몇 날 밤 새우다 약혼자를 따라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 날 밤, 여인은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다리를 걷다가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로 뛰어 내리려는 순간 누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플래시를 든 다리를 지키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렇게 비를 맞으면 춥지 않습니까? 다리 끝에 사무실이 있으니 거기 가서 차를 들면서 몸을 녹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갔습니다. 여인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후에 다리지기는 여인의 손을 잡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여기 길 잃은 주님의 어린양이 있나이다. 이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평강을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여인은 자기 마음속에 있던 고통과 절망의 먹구름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은 집에 돌아와서 옛날의 믿음을 되찾고 저절로 찬송과 기도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이 여인은 그 다리지기에게 감사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그 분이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깨닫게 되었고 더욱더 신앙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비바람이 몰아치는 환난의 밤에 처해 있습니까? 앞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낙심의 눈으로 땅만 보지 마시고 믿음의 눈을 들어 주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을 인도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상징이었습니다.
토마스 왓슨이란 설교가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실 때 우선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수많은 정보들이 있어도 그것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만이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시편기자는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우리 인생의 불기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갈 길을 인도해주는 이정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팔아서 생긴 목돈으로 더 많은 목돈을 손에 쥐고 싶었습니다. 주택복권을 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성경은 밝히 대답합니다. "아니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졸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창피를 당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여 위기를 모면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있을 때 성경은 정직하라고 말씀합니다.
아프리카에 모펫 선교사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어린아이 하나가 모펫 선교사의 옷자락을 부둥켜 잡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선교사님, 동네 개가 내 성경책을 찢어 먹었어요." "그래. 하나님께서 새 성경책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려보자" "아니에요. 선교사님. 저는 친구들 가운데서 아주 나쁜 아이였어요. 그런데 성경책을 읽고 좋은 아이가 되었단 말이예요. 그 성경책은 보물가운데 보물이예요. 어쩌면 좋아요" 모펫 선교사님은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성경책이 너를 좋은 아이로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그 성경책을 찢어 먹은 그 개도 좋은 개가 될꺼야" 이 아이는 밝게 웃으며 선교사곁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내서입니다. 매뉴얼입니다.
영국의 시인이며 소설가로 유명한 월터 스코트는 죽음 직전에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책을 읽어 달라'고 하자 사위인 로커트가 묻기를 '장인님, 무슨 책을 읽어 드릴까요?'라고 하자 '책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 곧 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경의 말씀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내서로 여기고 읽어보십시오. 큰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순종의 행함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더 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십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특별한 모습으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때 내 가운데 오셔서 나를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이미 성령님이 오셔서 도와주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성령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령님은 사역은 무대 위에서 대사를 잊어버리고 당황하고 있을 때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프롬프터 같은 역할입니다. 영적으로 팔꿈치를 쿡쿡 찔러주는 것, 내가 다른 길로 가고자 할 때 내 옷소매 자락을 살짝 잡아 당겨주는 느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초자연인 역사이기 때문에 때로 상식이나 성경의 가르침까지도 초월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은 절대로 말씀을 거스리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매사를 소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픈 심령이 치료를 받습니다. 어두운 세상가운데 비전을 갖게 합니다. 절망과 좌절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 극도로 번민하여 좌절에 빠진 때가 있었습니다. 거룩해지려고 노력할수록 그 반대의 행동이 나오고, 믿어야 될 줄 알면서도 자꾸 의심이 생기고, 열매를 맺으려고 해도 열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실망과 좌절에 빠졌을 때, 그의 누이한테 편지가 왔습니다. 오빠는 포도나무 가지에 불과하니까 그분에게 맡기고 의지하면서 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포도나무가지는 영양분을 끌어올리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꽃을 피우려고, 열매를 맺으려고 힘쓸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원줄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테일러는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완전히 주님께 맡기고 쉴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고,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노력해서 성취하려고 헛수고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해 놓으신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힘을 빼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인도해 주십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주변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통해서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멘토라고 말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멘토리라고 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을 멘토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섬유수출업을 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이집사라는 분이 IMF가 터졌을 당시 부도로 회사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영원하자던 사업파트너도, 명예도 신용도 집도 없어지고 심지어 문제를 상의할 친구도 모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낙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명료한 해답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아직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믿음으로 기도해주는 교우들이 있으며 가장 든든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해답입니다. 그후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같이 사업을 의논하게 하시고 같이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가 이런 모든 멘토들과 함께 하지 안했다면 낙담하여 페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전 한닢 없던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업장을 허락하셔서 이제 새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금전도 건강도 친구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만과 허영으로 가득 찬 지난날을 뉘우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주변에 많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멘토들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주위 성도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십시다. 그들이 당신에게 소중한 구름기둥이 되어 줄 것입니다. 가족의 얼굴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당신인생에 소중한 불기둥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속회 안에, 우리 선교회 안에 많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멘토들을 이미 세워놓고 당신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당신의 멘토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중세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성자로 불리운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설교를 하기 위하여 낯선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안내자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안내자가 자신 있게 길을 인도한다고 해서 나섰는데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길을 다 온 후에 그 안내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목적지가 아닌 곳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 날은 설교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후일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임을 당할 뻔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거스틴이 어느 길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숲 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몽둥이와 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들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입니다. 책임을 지시는 징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으로 그리고 사람들을 통하여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