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38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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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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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H7l52ZJKWE
[수원교구 한용민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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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무응답은 정답!>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백성들에게 특유의 명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러하듯 뜨거웠습니다.
길고 장황할 뿐만 아니라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율법 교사들과는 완전 차별화되는 가르침, 신선하고 명쾌하고 쉽고 재미있는 가르침이었기에 사람들은 말씀에 초집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심기가 뒤틀린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란 권한을 주었소?”(마태 21, 23)
사실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당시 유다 사회, 문화, 종교계를 총망라해서 최고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동시에 제한된 것이었지만 나름 탄탄한 권위와 정치력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변방 나자렛 출신이었습니다. 율법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가르치는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대사제들과 원로들 입장에서 볼 때 무자격 교사, 사이비 교사가 가르치고 있으니, 당연히 따진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답변을 회피하십니다. 노림수가 분명한 질문, 잔뜩 꼬이고 꼬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질문답고 진실해야 대답할 가치가 있습니다. 질문이 사심이나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진리를 왜곡하고 호도하는 질문이라면 차라리 응답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숱하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외아들,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서의 탁월성을 직접 자신들의 두 눈으로 목격한 대사제들과 원로들이었지만, 깡그리 무시하고 곤란한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곤경으로 몰아넣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면, 더 정중하고 예의 바른 질문이어야 했습니다. 진지하고 진정성 있는 질문이어야 했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질문, 진정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자 하는 질문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에수님의 무응답은 정답이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영적 교만으로 완전히 눈이 먼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신 것을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듯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너무나도 당연히 백성들을 가르칠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능력을 부여받으셨기에, 대사제들이나 원로보다 훨씬 큰 권한과 권위를 지니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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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ed4y-hPu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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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습니까? 그럼 껴안아 보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득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했던 유명한, 어쩌면 아주 건방져 보이는 말이 떠올랐습니다."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얼핏 들으면 고객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무지하니까 내가 주는 대로 써!"
이런 느낌이지요. 하지만 잡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고객을 무시한 게 아니라, 고객보다 더 치열하게 고객의 삶을 연구하고 파고들었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두려워서 묻습니다. "고객님, 이거 좋아하세요? 싫어하세요?" 거절당할까 봐, 안 팔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봅니다. 하지만 잡스는 수천 번의 고민과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까지 이미 다 꿰뚫고 있었습니다.상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두려움이 사라진 경지, 그래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실현하려면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혹은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없기때문입니다.
믿음이 용기를 줍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구리와 통나무' 이야기 아시지요? 어느 날 연못에 큰 통나무가 '첨벙!'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 엄청난 소리와 물보라에 개구리들은 혼비백산하여 물속 깊은 곳으로 숨었습니다.
"아이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다!" 개구리들은 벌벌 떨며 감히 쳐다볼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그런데 용기 있는 개구리 한 마리가 슬금슬금 물 위로 올라와 그 괴물을 툭 건드려 보았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그냥 떠 있는 나무토막일 뿐이었습니다. 실체를 알고 나니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중에는 개구리들이 그 통나무 위에 올라가 일광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통나무는 세상이고 참다원 권위는 그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니 통나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던진 분을 덜 믿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키워가는 방법은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가는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통나무를 무서워하는 개구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그들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안 믿었냐고 할 거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이 돌을 던질 텐데…'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했습니다. 왜일까요? 지아 장처럼 군중 속으로 들어가 부딪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군중의 소리보다 하느님의 소리가 더 크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세상이 거대해 보이고, 하느님은 작아 보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 13장을 보면 이 대비가 더 명확해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돌아온 10명은 사색이 되어 보고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 같았습니다!"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비하하는 이 패배감.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부재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으니, 눈앞의 거인만 보이고 내 뒤의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칼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니 저 거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 앞에서 떨지 않았던 것은, 그가 돌팔매질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너는 칼과 창을 들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나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니 하느님의 크기에 비추어 아주 작게 이해할 수 있는 힘입니다.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마리 퀴리 부인은 당시 사람들이 미지의 물질인 라듐을 두려워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이해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지금은 더 많이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덜 두려워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두려움을 없애고 믿음을 키울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유명한 '뱀 공포증 치료 실험'이 그 힌트를 줍니다. 반두라는 뱀을 보면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뱀을 던져준 게 아닙니다. 첫 단계는 유리창 너머로 뱀을 보게 합니다.
괜찮으면 다음 단계, 문을 열고 봅니다. 그 다음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뱀 꼬리를 살짝 만져봅니다. 이 과정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진행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놀랍게도 참가자들이 맨손으로 뱀을 만지며 목에 두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생각보다 부드럽네요."
이 실험의 핵심은 '작은 직면(Small Steps)'입니다.
두려움을 쪼개서 조금씩 맛보면, 우리 뇌는 "어라? 안전하네?"라고 학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뱀뿐만 아니라 인생의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반두라의 실험처럼, 매일 조금씩 하느님께 나를 던져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은 가만히 앉아서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스티브 잡스처럼 고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마리 퀴리처럼 위험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고, 다윗처럼 물맷돌 하나 들고 거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작은 체험들이 쌓여 우리의 믿음은 거대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면 피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빽 믿고 딱 한 걸음만, 유리창 너머로 뱀을 보듯 다가가 보십시오. 그림자를 피하면 괴물이 되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주님과 만나는 성소가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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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 갔을 때입니다. 매일 바뀌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암구호’입니다. 암구호는 일종의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암구호는 두 개의 대응하는 말로 이루어집니다. ‘참새, 방앗간’과 같은 말입니다. 상대방이 ‘참새’라고 했을 때 ‘방앗간’이라고 말하면 문을 열어줍니다. 만일 참새라고 했는데 엉뚱한 답을 하면 적으로 오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대원은 매일 바뀌는 암구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일종의 암구호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하면 흔히 이렇게 묻습니다. ‘세례명이 무엇인가요?’ 세례명을 당당하게, 자신있게 이야기하면 천주교 신자임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 암구호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성호경’입니다.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당 다니시나 봅니다.’ 저는 자신있게 ‘예, 성당 다닙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차에 걸어 놓는 ‘묵주와 십자가’도 암구호와 같습니다. 그런 성물을 보면 저 차의 주인은 성당 다닌다는 걸 알게 됩니다.
군대에서 문서를 취급할 때입니다. 문서의 등급에 따라서 비밀취급 인증을 받게 됩니다. 저도 비밀취급 인가를 받아서 문서를 처리하였습니다. 민감한 사안이 담긴 문서는 특별히 ‘비밀’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고, 그런 문서는 비밀취급 인가를 받은 사람이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권한을 받은 사람만이 열람하거나 개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만큼 정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 일할 때입니다. 교구청의 컴퓨터에 들어가면 제가 속한, 제가 관여하는 업무가 리스트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인재 양성 위원회, 옹기 장학회, 사제 평의회와 같은 업무에 접속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과 관련되었고, 제게 주어진 업무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도 그렇고 교구청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제대하면서 저의 권한도 자연스럽게 삭제되었습니다. 교구청의 컴퓨터에도 저의 권한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그런 권한은 저의 인격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의 직책에 따라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한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한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한이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하느님한테서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권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한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섬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겸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 세상의 권한을 탐하지 않고 당신의 겸손과 섬김을 닮게 하소서. 사랑으로 권한을 사용하며 당신의 뜻을 이루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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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의 바로 앞부분은(마태 21,18-22 참조) 예수님께서 성안으로 들어가시다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말라 버리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시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분께 시비를 겁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에도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께 질투를 느끼고 화가 난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시 잘 알려진 토론 방식으로 대응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1,24-25)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나 올바른 대답에는 관심이 없으며,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기들의 권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리하게 대답한다고 생각하였겠지만, 사실은 예수님과 한 토론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만일 나에게 작은 권한이라도 주어지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씁니까? 다른 이를 섬기는 데 씁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통제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씁니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모습은 어쩌면 마음을 되돌리고 변화하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신념과 욕구, 닫힌 마음과 굳어진 습관들에 갇힌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내적 자유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자기 신념과 욕구를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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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대림 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빛을 선택할 것인지, 어둠에 머물 것인지 늘 물음 앞에 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23절) 묻는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리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반문하심으로써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한다. 기적과 말씀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5절) 되물으신다. 만약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거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들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모르겠다”라고 회피한다. 그들의 답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두려움의 결과였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닫혀 있었고, 그러한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해석한다. “그들은 빛이 앞에 있었으나 스스로 눈을 감았다. 문제는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기를 원치 않음이다.”(Hom. in Matth. 68,3) 신앙은 논리보다 겸손히 마음을 여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의 질문을 단순한 논박이 아니라 자비의 행위로 이해한다. “주님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불신앙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In Io. Tract. 2) 하느님은 언제나 심판보다 회개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신다. 오리게네스는 요한과 예수님의 권위를 연결한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는,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Comm. in Matth. XIII,19) 요한을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바리사이들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회피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증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림 시기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백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 권위는 세상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의 친밀한 일치와 사랑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단순히 기적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며 따르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림의 기다림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바리사이들처럼 “모르겠다.”라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믿음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과 담대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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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그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21,23-27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오직 그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믿음은
믿음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믿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기쁨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기쁨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희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축복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축복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온유를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온유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음은
이음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이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품음은
품음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품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섬김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섬김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살림은
살림을 굳이 말하지 않으니
오직 살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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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권한은, 나를 살리려고 애쓰시는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1) 여기서 ‘이런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마태 21,12-13)와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런 일은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일이 가끔 생깁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라고 물은 것은, 공적인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예수님에게 어떤 권한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주신 권한으로,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며, 메시아이신” 당신의 권한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쪽에서 하는 말이고, 당시에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은 “아무 권한도 없는 자가, 제멋대로 성전에 들어와서 ‘성전 모독죄’를 짓고 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한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라는 질문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왜 그것을 내버려 두었느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냐?”라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요한의 증언도 믿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의 권한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에게 온 사제들과 원로들은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 라는 것을 안 믿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한을 안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군중이 두렵소.” 라는 말은,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는 않고, 즉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만일에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돌을 던질 것입니다. <결국 사제들과 원로들이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는 것입니다.>
“모르겠소.”라는 말은, 대답을 회피하는 말인데, “요한의 세례와 당신의 권한은 상관없는 일이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는 요한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사실상 ‘직무 유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어지게 됩니다. 성전의 수석 사제 자격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쪽에서도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답변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왜, 하느님께서 세우신 유대교 안에서 일하시지 않고, 밖에서 일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유대교의 율법과 전례를 준수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활동은 ‘제도권 밖에서’ 하셨는데, 그것은 ‘유대교’ 라는 제도권이 위선과 탐욕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만일에 ‘사람의 일’이라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즉 구원을 받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아무리 힘들어도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느님의 일’로 믿지 않고 ‘사람의 일’이라고 깎아내린다면, 그것은 곧 ‘사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일’은 우리를 멸망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의 일’은 버리고, 또 ‘사탄의 일’은 물리치고, 오직 ‘하느님의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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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하라>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주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현주 목사)뿐이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법적으로 교사 자격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정통성과 법적인 권한에 대하여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예수께서 반문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21,25).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은 ‘눈 가리고 아웅’ 한 것으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백성들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못했고,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안 하셨다.
“욕심을 부리는 병은 고칠 수 있으나 이론을 고집하는 병은 고치기 어려우며, 사물의 장애는 없앨 수 있으나 의리에 얽매인 장애는 없애기 어렵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저희끼리’모여 의논한 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리에 얽매여 하느님마저 자기들의 만족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유다인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셨다”(김영수신부).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사회적이고 법적인 권한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하느님께서 주신 더 근원적인 권한에 대해 물으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회적 전통으로 만들어진 인간적인 법적 권한으로는 더 원천적인 권한을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한은 인간의 권한에 앞서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다.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 42,20)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우선 해야 한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삐 움직여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 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원불교 신자'가 있는가 하면...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 '우거지 신자’도 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례받은 우리 모두는 예언자다. 기도하자!
“주님, 당신 백성에게 예언자가 부족하지 않게 해 주소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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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인정받는다는 것>
권위와 권위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앞선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스스로 그것을 부리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가서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많은 신부님들이 성직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 강제노역을 떠났습니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때는 몇몇이서 몰래 화장실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노동사제의 시작입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도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게 된 몇몇 노동사제들은 노동 안에서 때로는 이념적으로 다르고 때로는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한 노동사제가 다른 노동자를 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 그리고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그의 관이 성당 문밖을 나가자 왼편과 오른편에 각기 자신들의 깃발들을 들고 서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깃발을 숙임으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비록 신앙면에서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같은 노동자로서 아파하는 동료들 곁에서 늘 함께해 준 이를 진정한 형제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권위주의로 덧씌워진 이들이 ‘권위’와 ‘권한’에 대한 질문을 던지니, 예수님의 반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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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고정배 요셉 신부님]
<사랑이 권한이다>
지난번에 있던 성당에 안나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유복자 하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한참 젊었을 때는 치근덕대는 사람이 생길까 걱정이 돼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정도 많았지만 성격도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40년을 농사일, 남의 집 일을 봐주며 생활하셨고, 지금은 성당 옆 골목에 방 하나를 얻어 지내신다.
물론 아들·며느리와 같이 살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얼마 전 허리를 다쳐 일을 못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나 할머니는 강론 시간에도 당신 마음에 안 들면 대꾸하고, 미사 후에도 신부를 한 수 가르쳐야 성에 차는 분이었다.
장날 못 팔면 버릴 과일을 잔뜩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버리는 것이 아까워 일부러 산다), 쌀이 남으면 떡을 해서 온 동네에 돌리셨다. 물론 할머니에게 찍힌 사람은 국물도 없다.
통장에 생활비가 입금되면 본당 신부와 자장면으로 의무 방어전을 치르고, 신세 진 신자를 불러 비빔밥으로 신세도 갚고, 장에서 예쁜 화초도 사서 키우시던 분이다.
처음에 나는 할머니의 말투도, 끊임없이 들고 오는 떡과 과일 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유도 없으신데 이 사람 저 사람 밥 사주고, 과자며 떡, 채소를 사다 주고, 굽은 허리로 농사지은 옥수수며 고추를 나누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동네 사람들도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쓰레기 같은 것만 가져온다고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사람들도 할머니를 주책이라고 여기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안나 할머니의 마음이었고 애정의 표현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이 애정은 그치지를 않았다. 할머니에겐 주고 싶은 애정과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쁘게 받아줄 수 있는 애정은 물론 되갚을 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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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0년부터 시작되었던 코로나 팬데믹은 많은 이를 힘들게 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거리두기로 인해 미사 참석이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에 나가지 못하니 아예 신앙을 멈춰버린 분도 많았습니다. 요즘도 코로나 때부터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가 이제야 나오게 되었다는 분도 꽤 됩니다. 쉬는 김에 오랫동안 푹 쉬신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박해 시대에도 전염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821년, 우리나라는 콜레라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콜레라는 ‘괴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괴상한 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었습니다. 특히 병의 진행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아침에 멀쩡하던 사람이 저녁에 죽어 나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병 후 사망에 이르는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그래서 1821년에만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때 신앙생활을 멈췄을까요? 더구나 박해의 위협도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서 질병에 맞섰고, 박해에 굴하지 않고 순교하셨습니다. 이런 우리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신앙과 지금 우리의 신앙을 비교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너무 쉽게 세상에 타협하던 것이 아닐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교 체제에서 공적인 가르침이나 성전 관할권은 랍비의 안수나 산헤드린의 위임이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받지 않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려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라고 되물으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한 예언자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왔다.”라고 하면, 왜 요한의 말을 믿고 회개하지 않았으며, 그가 증언한 예수를 왜 믿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면, 요한을 참된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의 폭동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진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을 회피하는 것이고,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불성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아들의 권한을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처럼 남의 눈치를 보며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가 아닐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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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울질>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의 무게를 재며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은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자기 자신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가려진 자기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저울 위에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져보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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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 위에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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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카리스마와 제도>
우리나라 최상위법인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위법인 보안법은 그 사상의 표현을 제한합니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영상 표현법은 영화에 등급을 매기고 표현을 제한합니다.
사상과 표현은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준 권리이기에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이 될 때 집단은 그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판단의 권한이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가 항상 문제입니다. 이것은 종교, 신앙 행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특히 악령을 치유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은사를 받은 사람과 교도권은 자주 충돌을 합니다. 그러나 교도권은 성령의 은사를 존중해야 하고 개인도 교도권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좋은 예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유다교의 충돌을 얘기하며 올바른 교도권 행사의 한 예를 소개합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사도들의 말과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면 인간, 즉 교도권이 막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버려 두어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는 할 수 없는 설교의 허락을 교황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도권의 허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교도권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복음을 선포하던 이단과는 다른 태도였습니다.
교황님으로부터 설교의 허락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교구를 가던지 그 교구장의 허락을 또 받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교구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 교구장께 설교의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교님은 당신이 설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프란치스코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라고 내치셨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쪽 문으로 나가 저쪽 문으로 다시 돌아와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이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주교님의 물음에 프란치스코는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있느냐고 여전히 주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주었습니다. 교도권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고 교도권은 그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고 허락을 준 것입니다.
개인과 교도권, 카리스마와 제도.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의 관계이며 서로 존중해야 할 영원한 상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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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51215.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권위의 힘, 섬김의 권위>
-“주님은 참 권위의 원천이자 모범이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구암리카페로 변한 제 고향집과 제 수도원 집무실이 우연의 일치처럼 신비롭게 생각됩니다. 주님 안에서 상담과 고백성사차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는 영적쉼터, 영적카페 역할을 하는 수도원 제 집무실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바칠수 있는 참 짧고 좋은 기도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입니다. 성호경의 생활화가 참 좋은 영적유익이 됩니다. 두 성인의 성호경 예찬입니다.
“십자성호를 긋지 않고 절대 집을 나서지 마라. 그것은 그대에게 지팡이며 무기이고 무너뜨릴 수 없는 요새가 될 것이다. 그대가 그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것을 보면, 인간도 악마도 감히 그대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성호는 그대가 전사이며 악마와 대적할 준비가 되어 있고, 정의의 왕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십자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가? 그것은 죽음을 이겼고, 죄를 없앴으며, 지옥을 비웠고, 사탄을 물리쳤고, 인류를 구원하였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
“죄에 물든 내 몸에 성호를 그을 때마다 온갖 선한 생각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 잠자고 있던 신성한 힘이 회복된다.”<성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
어제 <가우데테 주일>에 게시판에 좌우명 삼고자 써서 붙여놓은 성구입니다.
“Rejoice in the Lord always!”(기뻐하여라, 주님 안에서, 늘!)
오래된 기쁨은 없습니다. 기쁨은 늘 새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레오14세 교황의 지혜로움과 부지런함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못지 않으니 가톨릭교회의 복입니다. 레오 교황의 말씀도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예수님 성탄은 희망의 궁핍한 우리 시대를 위한 빛의 선물이다.”
“꽃들은 감옥들 안에서도 피어날 수 있다(Flowers can bloom even in prisons)”
“예수님의 말씀은 절망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가 눈이 가려 보지 못할 뿐 희망은 살아 있는 보석처럼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타협의 반복이다. 그러한 비겁함과 화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다산>
“함부로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고, 깊은 물에 들어가지 않으며,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구차하게 웃지 않는다.”<예기>
어제는 멋지게 노년을 보내는 70대 후반 교대 동창들의 춤추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우아하여 많은 이들과 동영상을 나눴습니다. 마침 은퇴를 앞둔 50년 이상을 춤춰온 고전무용 여교수가 방문하여 유익한 대화를 나눴고, 다음 유쾌한 덕담도 나눕니다.
“춤은 바로 임향한 그리움을 몸으로 쓴 시입니다. 자매님은 평생 몸으로 시를 써오셨네요! 부럽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노래>로 바치는 시편 <고백> <기도>에 <춤>까지 곁들인다면 최고로 완벽한 하느님 찬미가 될 것입니다.”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참 권위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구나 내면 깊이에서 승복할 수 있는 참 권위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권위의 실추는 신뢰의 실추만큼 개인이나 공동체에는 큰 재앙입니다. 한 번 실추된 권위나 신뢰의 회복은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참 권위는 하늘로부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옵니다. 참 권위의 힘이요 참 권위는 섬김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바로 참 권위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 권위의 모범이자 원천이 됩니다.
오늘 마태복음과 제1독서 민수기는 참 권위의 소재를 다룹니다. 오늘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성전정화는 물론 예수님의 부적절해 보이는 행위들에 대한 권한을 누가 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상지혜를 발휘하여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시니 이런 대응 역시 하늘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진퇴양난, 딜레머입니다. 활짝 열린 눈에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지만 무지에 눈먼, 비겁한 적대자들은 이런 진리를 무시합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믿지 않느냐? 물음에 답할 길이 없고, 사람에게서 왔다하면 하늘로부터 왔음을 믿는 뭇 여론의 매를 감당할 수 없자, 이들은 “모르겠소,” 대답합니다.
예수님 역시, 즉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대답하니 이 또한 하늘로부터 온 빛나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무지에 눈먼 이들에게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는 발라암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신탁이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영이 내리자 발라암은 신탁을 선포합니다. 놀랍게도 대림의 기쁨과 메시아 탄생의 성탄이 예고됩니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같구나...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예수님처럼 발라암의 권위와 권한은 그대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이 명약관화 하게 드러납니다. 볼 눈이 있는 자라면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하늘로부터 선사되는 권위와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참 권위의 이해를 위해 <권위>라는 단어의 깊은 뜻을 나누고 싶습니다. 라틴어 <auctoritas> 는, 동사 <augere>에서 파생된 추상명사로 이 동사의 뜻은 <증가시키다, 더 크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참 권위를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강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타인 안에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섬김의 권위와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강압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본래 되어야 할 모습대로 성장하도록 이끌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참 권위는 그대로 교육의 원리와도 통합니다. 인류 최고의 의사이자 교사이셨던 주님은 참 권위의 원천이자 모범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날마다 이런 주님을 모시는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권위를 지닌 섬김의 사람, 지혜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 8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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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나의 부활의 원천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21,23-27)의 제목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수모와 수난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메시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건만 사람들은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 곧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태클을 걸어왔고, 마침내는 그들 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가시어 골고타 언덕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겪는 수모나 수난은 당연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겪으셔야만 했던 수모와 수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부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매일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사제의 손을 통해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부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부활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성당엘 다니려고 하고, 기도하고, 힘을 다해 미사에 참례해 성체를 받아모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극진하고도 완전한 사랑 안에 머물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부활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되고, 사랑이 되려고.
"주님,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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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참된 권위는
사랑과 진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된 삶
그 자체입니다.
참된 권한은
힘을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권한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권한은
생명을 보호하는
힘입니다.
권한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항상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자기중심적
자아에서
나오지 않고,
하느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된
자기 비움의
상태에서
나타납니다.
이렇듯 권한은
얻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설명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체험되는
진실입니다.
높은 자리에 서는
권위가 아니라,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심에서 나오는
권한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명령과 강요로
나타나지 않고,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참된 권한은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옳다고 믿는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일치한
삶으로부터
나오는 권한이
참된 권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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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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