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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저자의 의도와 달리 독자적인 생명력이 있다는 옛말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뼈아픈 체험을 통해 그 말의 생명력을 새삼 느꼈다. 문제는 나의 세 번째 책 ‘악의 돈줄(Funding Evil)’이었다. 테러리즘과 정치 폭력에 돈을 대는 범죄자, 억만장자, 국가 지도자들의 네트워크를 파헤친 책이다.
6년 뒤인 지금 그 책은 내가 쓴 내용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유산을 만들어냈다. 그 책으로 말미암아 명예훼손법을 둘러싸고 영국과 미국에서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면서 법적인 개혁의 불길도 당겨졌다. 논란의 발단은 2004년 초 맨해튼의 우리집에서 받은 팩스 한장이었다.
중동 최대 은행의 총재를 지낸 사우디 거부 할리드 빈 마푸즈가 그 책에서 자신을 언급한 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알카에다, 하마스 등 급진 무슬림 단체들과 마푸즈의 관계를 파헤친 대목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갖고 썼기에 그의 협박을 엄포로 무시했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예상 밖이었다.
마푸즈는 영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내 책은 미국에서만 발간되고 팔렸다. 그러나 마푸즈의 변호인단은 내 책 23부가 영국에서 온라인으로 구입됐으며, 미국의 ABC TV가 웹사이트에 세계 어디서나 열람이 가능하도록 내 책의 한 장을 게재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놀랍게도 영국의 고등법원은 그런 주장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명예훼손법은 19세기에 만연하던 각종 험담에 시달리던 귀족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그 때문에 지금 런던은 명예훼손 소송의 세계 수도로 떠올랐다. 세계 각지의 ‘명예훼손 소송 관광객’들이 런던을 찾는다. 인터넷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글을 영국에 퍼뜨렸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나 소송을 걸 수 있다.
그동안 맥도널드 대 환경운동가,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 대 배너티 페어지, 르완다 대학살 용의자 대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등 수십 건의 굵직한 국제 명예훼손 소송이 영국에서 제기됐다. 영국이 그런 명소가 된 이유가 뭘까? 명예훼손의 입증 책임소재 때문이다. 미국에선 소송인이 자신에 관한 언급이 잘못됐으며, 피고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썼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영국(그리고 대다수 영연방 국가)에선 거꾸로 작가가 글의 진실성을 입증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조건이다. 미국인인 나로서는 그런 조건 아래 진행되는 재판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2005년 영국의 한 판사는 결석재판에서 무파즈의 손을 들어주며 내게 22만5000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남은 책 전부를 파기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영국,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말이다. 나는 불복했다. 다행히도 지금 나는 범법자가 아니다. 뉴욕에서 마푸즈를 맞고소하려 했지만 재판 관할권 문제로 무산됐다. 하지만 나의 그런 투쟁으로 뉴욕을 포함해 미국의 6개 주가 수정헌법 제1조(기본권 보호)에 위배되는 해외 명예훼손 판결의 국내 집행을 금하는 법을 제정했다(내 이름을 따 ‘레이철 법’이라고도 불린다).
미 상원 법사위원회는 그런 피소송인들을 국가가 보호하는 법안을 입안 중이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인다. 지난 3월 영국 법무장관은 명예훼손법의 수정을 제안했다. 최근 새로 선출된 연립정부는 명예훼손법 개혁을 정당 간 합의사항 중 하나로 채택했다. 이처럼 전통 미디어에선 정치적인 의지로 문제를 바로잡아가는 추세이지만 온라인에선 상황이 다르다.
가장 큰 문제는 블로그, 댓글, 사교 사이트 게시판에 오르는 글이다. 법적으로 이런 인터넷 수다가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와 동격으로 취급돼야 할까, 아니면 인쇄물과 동등하게 간주돼야 할까? 후자라면 그 ‘작가’들은 모두 명예훼손 소송 대상이다. 그러나 세계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영국 판사들이 드디어 명예훼손 소송 현대화(그리고 자유화)에 나설 조짐이 있다. 그들은 올해 하찮은 소송을 적어도 3건 기각했다.
그중 한 건은 저명한 작가 겸 블로거가 고소된 사건이었다. 영국 의회는 명예훼손법 개혁으로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동안 미국 의회는 국내 작가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고귀한 언론의 자유가 걸린 문제다.
[필자는 뉴욕시 소재 미국 민주주의센터 사무국장이다.] (끝)
첫댓글 글이 잘렸군요?
네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