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A생명보험회사 입상작 올립니다.
아이가 어린데 벌써 노후라니... 남편이 퇴직을 이야기 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 졌다. 삼십년 넘게 교직에 있었으니 이제 휴식을 취할 때도 되긴 하였다. 남들은 앞선 퇴직을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자신들의 노후를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여행 할 곳을 찾기도 하고 건강과 취미를 위한 교본을 읽어 본다고 하는 말이. 그런데 우리는 달랐다. 나는 이제 시작 이었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늦게 둔 아이는 초등학생 이었고 여학교 때 사제지간으로 만난 남편과 나는 연령 차이가 많이 났다. 마음과 달리 더디 자라는 아이의 머리위에 콩나물에 물을 주듯 할 수 도 없고, 어린아이의 학부모로,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의 노년 삶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철도 건널목의 간수처럼 상황을 보아 가면서 기차가 오는 것과 사람이 건널 때 색깔이 다른 깃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몹시 분주하고 민첩하게 쉴 틈 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낮에는 공인 중개사로 남녀 직원과 고객관리, 밤에는 야간 대학원생으로 세상일은 내가 다 하는 것처럼 할 때 가장의 퇴직은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있긴 하였다. 또 퇴직 전,후의 세상 이치에 밝은 남편의 동료 몇 분 선생님은 남편에게 노후에 안식구 사무실에 취업이 보장되어 있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무심하고 간사위 없는 그 사람은 이제껏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들은 아내의 말을 잘 듣는다는데, 둘이 같이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변함이 없으니 원형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은 정설인가 보다. 퇴직금 문제에서도 그랬다. 퇴직 즈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동안 십 수 년 해왔고 현장 경험이나 이론, 느낌의 적중률은 스스로에게 또 의뢰인에게도 실망을 주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수월하게 진행하여 왔다. 그렇게 안 밖으로 큰 과오 없이 살아온 터이기에 퇴직금 문제는 당연히 나를 믿고 나의 의견에 순순히 응 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은 완전한 기우였다. 집안에 교육 공무원이 손위 시누이님 내외분을 비롯하여 몇 분이 더 계시었는데 퇴직금을 일시불로 하느냐 연금으로 하느냐 의견이 나뉘었다. 중개업을 하는 나는 일시불로 하여 모처 마땅한 곳에 묻어 놓으면 몇 배의 투자 효과가 있을 것 이라고 누차 설명을 했고, 동생에게 조근 조근 한 누님의 말씀은 연금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부연설명으로 일시불 한사람들의 실패담을, 비참한 노년의 생활을 이야기 해 주었다. 전해들은 이야기인지 주변의 목격담인지 실감 있게 알려 주려고 애를 쓰시기도 하셨다. 그에 맞서 나도 남편과 단둘이 있는 자리가 되면 나의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리고 결국은 경기장에서 반칙 자에게 경고 의미로 쓰는 옐로우 카드를 뽑듯이 크게 한 수를 제안 하였다. 매월 나오는 연금의 액수 보다 더 많은 금액을 매달 통장에 넣어 주겠다고 호언까지 하였으나, 피는 물보다 진하였을까? 남편은 결국 전체 금액의 1/2 은 일시불, 나머지 1/2 은 연금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일시불은 나에게 주며 앞으로의 생활을 책임지라고 했고, 나머지 연금으로는 자기가 쓰겠다고 하였다. 자기의 몫을 잘 관리 하고 서로에게 간섭을 하지 말자는 선에서 중개자 없는 계약을 하였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였는데 표면적으로 반으로 나뉜 것에 대한 나의 속내는 누님의 의견을 따른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데로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본연의 일에 바빴고 남편은 매월 나오는 연금으로 곳간의 곶감 빼 먹듯이 퇴직 동료 분들과 여행을 다녀 오기도 하고 때때로 붉 으레 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딸아이에게 용돈도 기분 좋게 주고 이웃한 상가의 판매원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손님으로 변해가고 있던 날,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내게 전화벨이 울려 통화를 하고난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덜 퍽 주저앉고 말았다. 상가 건물인 우리 집에 두개 층이 비어 있었는데 한 층의 경우 세입자의 경솔한 말 한마디에 단호한 나의 우김성이 충돌하여 그녀는 계약 갱신을 포기하고 나는 텅 빈 사무실을 안고, 서로 많은 손해를 빚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경기불황이 계속 된다고 하며 다시 한 층이 나간다고 하는 것이었다. 경제학상 경기에는 일정한 사이클이 있다고 배워 알고 있었고 부동산에도 호황기와 쇠퇴기가 있는 것은 익히 경험으로 아는 바였다.
연일 뉴스보도와 가까운 곳에 있는 시장 상인 들은 장사가 너무 안 된다고 하였지만 지나온 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나와는 무관하게 지나갈 줄 알았다. 단, 집을 지으면서 대출을 한 것이 조금 마음이 쓰여 은행금리가 올랐다고 하면 가슴이 내려앉기도 했고 얼음판을 걷는 듯 한 불안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런데 이토록 강하게 내 피부에 와 닿을 줄은 짐작을 못하였다. 이런 난감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새 건물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세입자 형편에 맞추어 보증금은 계획대로 받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있던 세입자 까지 나간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져 내려 앉는 줄 알았다.
대출금 이자는 연체가 되고 미납된 공과금 고지서는 쌓여 가기만 했다. 좋은 시절 딸아이 친구들을 불러 해주던 간식은 잊혀 져 갔고 생일파티도 양력 음력으로 두 번씩 했는데 이제는 가끔 예쁜 옷 사 달라는 소리에 짜증이 났다. 나의 마음을 모르는 남편의 얼큰하게 취해 오는 모습이 보기 싫었고 호기 있게 찬조금을 내던 동창회에는 나의 궁핍이 눈치 채일까 보아 나가지 않았다. 고물거리는 돈, 용돈과 세배 돈 을 모아 정기예금 해놓은 아이의 돈을 은행금리 보다 높게 준다고 하여 시한을 정하고 차용하였다. 노도와 같은 시련 앞에 밤잠을 설치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꿈에 시달리기도 했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은 낮이나 밤이나 나를 괴롭혔다. 실무교육 때 가 보았던 부동산 경매장에서 본 채무자의 참혹한 얼굴이 상기되기도 했고 그동안 나를 알고 지내왔던 많은 사람들이 초라해진 내 모습을 보고 조소를 하는 것 같은 환상에 젖기까지 하였다.
복잡한 생각과 답답한 마음을 비우고자 찾았던 산사 공방, 벽에 붙어 있던 “나의 행복도 나의 불행도 모두 내 스스로가 짓는 것”이라는 글 귀, 거기에서도 내 편은 없었다. 노력하며 살아온 지나 온 날들이 뜬 구름처럼 허상 이었던 것 만 같아 후회되기도 하였고 나름대로 의기 롭 게 산다고 했던 것조차 나의 불찰인 듯 닥아 왔다. 아무튼 모든 것이 내 잘못이고 나의 착오로 생각되어 자책감에 빠져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였다. 전(前)에는 상상도 못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에도 나는 누운 채 딩굴 방굴 tv의 리 모콘 을 켯다, 껏다를 반복 하였다. 도무지 방향키를 놓아버리고 곧 침몰 해 버릴 것 같은 같은 심정이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손에 잡히지도 않았으며 몇 번을 앓아누웠다.
의건 모 한 끝에 남편에게 구조의 요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부지간 이어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나로서는 무척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이고 이미 한 계약을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나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은 10년 만에 연금선택이 옳았다는 결론에 손을 들어 주는 격이 되어 버렸다. 생각은 그러 하면서도 마지막 방법을 쓰지 않으려고 골똘히 다른 해결책을 찾아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별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은행권에는 최대한의 담보 능력을 확보 해놓고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던 날, 비장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말했다. “매달 나오는 연금을 2년간만 빌려 달라”고 구구한 전,후 좌,우의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무참한 기분이 되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나에게 남편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대답해 주었다. 순간 쥐구멍에 볕들듯이 숨구멍이 트이는 기분 이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맙고. 누구나 앞일은 모른다지만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몇 배의 투자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던 내 의견에 따라주지 않아 미웠던 남편의 얼굴이 변색 조처럼 갑자기 무척 예뻐 보였다. 남의 말에 억대 거지라는 이야기도 있고 자본가의 기업이 하루아침에 부도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몸살을 하던 삼년여의 시간이 지나 가고 있다. 미로 같이 앞이 보이지 않던 어둠에 희붐하게 개어 오는 빛을 느끼고 썰물처럼 빠져 나갔던 세입자가 다시 들어오고 있다. 마음도 한결 안정을 찾아가고 나에게도 인생을 갈무리할 나이가 되었다.
연금!
암해 속에 헤 메이던 나에게 그것은 한줄기 구원의 빛 이었다. 젊은 날 땀 흘려 노력한 열매. 보람되고 안정된 노후를 위하여 꼭 필요한 행운의 길라잡이! 연금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껴 보았다. 또 나에게는 은인자중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 혹한의 계절을 잘 이겨내고 마당가에 하얀 면사포를 쓰고 있는 신부의 고아한 모습처럼 목련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 소담한 눈송이 같은 꽃잎이 난 분분 난 분분 떨어지고, 작은 나무 천리향의 꽃향기는 온 집안을 그윽함으로 채우고 있다. 키가 크나 작으나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생경스럽게 보인다. 몇 년간 채 느끼지 못했던 다사로운 내 음에 살며시 눈을 감아 본다. 우울했던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떨어졌던 자신감도 되 살아 나고 있다. 딸아이는 내년이면 대학을 간다.
막 다른 골목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연금은 파란불의 신호등이 되어 방향을 알려 주었다. 아득하기만 하던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기분이 이런 것이리라. 매월 25일이면 방앗간에서 갓 찧어온 알곡을 확인 하듯이 흐뭇한 표정으로 연금통장을 바라보던 남편의 즐거움을 다시 돌려주어야겠다. 그이와의 채무기간 만료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시간, 정녕 이 고마움 잊지 않고 몇 배로 갚아 주리라 다짐하여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자까지 합하여...
첫댓글 감상 잘 하고갑니다선생님. 입상을 축하 드립니다.
수년전 친정 오라버니가 퇴직무렵 이런 고민을 한적 있었습니다.
저희 두 내외가 정말 강하게 권하여 백프로 연금으로 돌렸습니다.
지금 올케가 저희를 고마워합니다. 제가 한 일중 잘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축하 드립니다. 생활속의 생생한 체험 감상 잘 햇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