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대녀와 함께 떠났던 여행수기 입니다.
울 대녀가 써서 한국 도로 공사 에서 공모한 여행수기에 당선된 글..^ ^
사진과 함께 자세히 보시려면 레이디 경항 1월호 별책 부록을 참조 하삼..^ ^
올 한해 허락하신 은총에 감사 찬미 올리며..
여름, 초록의 기억
하루
까마득한 기억 너머의 그 날처럼
무더위의 막바지, 아줌마 셋이 덜컥 길을 나섰다. 아이들이 좀 컸다 싶어 용기가 생긴 것인지, 부부와 자녀라는 모양새가 이제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인지. 그렇게 나서고 보니 피서와는 좀 달랐다. 그것은 여행이었다.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것.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것. 까마득한 기억 너머의 그 날처럼, 스물이 눈부시던 그 날처럼, 마음 맞는 친구끼리 길로 나선 거였다.
다만 그 날과 달라진 것이 있자면 뒷좌석에 앉아 재재거리는 세 명의 아이들.
시간을 거슬러 길을 달리다.
피서철이라 정체를 각오하고 나섰지만 서울을 빠져나오고 나니 의외로 길은 수월했다. 대학 시절 고향인 마산에 가기 위해 연휴나 명절 때면 열 시간이 넘게 길바닥에 서 있었던 걸 떠올리니 피서철의 한가로운 도로가 수상쩍을 지경이었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비롯해, 천안-논산간 민자 고속도로 등 도로망이 많이 확충된 덕분인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 여행을 위해 장만한 MP3를 자동차 오디오 장치에 연결하고 볼륨을 높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들국화, 김광석 그리고 안치환. 친구들과의 여행만큼이나 오래된 기억 속의 노래들이 흘러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선 모양인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기도 하고 노래를 못 부른다고 타박을 주기도 했다.
시간을 거꾸로, 한참을 돌아가 하나 둘 셋! 찰칵!
그렇게 달리다 어느새 산내 분기점.
대전-통영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벌써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덕유산, 지리산 등 이름만으로 기가 눌리는 고봉들이 줄이어 다가온다. 살진 초록이 뭉글거리는 한여름의 산이 하나같이 넉넉하고 푸근하기만 하다. 당장에 달려가 어린애처럼 그 품에 대고 낯을 부비고 싶다. 하지만 초록의 향연에 연이어 탄성을 내지르는 건 어른들일 뿐이고, 또래끼리 모인 아이들은 그저 휴게소만을 기다린다. 덕분에 두 개 걸러 하나씩 휴게소에 들러 주전부리를 해가며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벌써 오후 5시. 다섯 시간이면 될 길을 한참 더 걸려 도착했지만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십 년을, 이십년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그 정도면 짧은 시간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 서울에서 하동까지
-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비룡분기점과 산내분기점을 거쳐 대전·진주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그리고 진주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하동 I.C로 나온다.
맑은 물 깊은 산, 하동
하동에 들어서자 이내 평사리 최참판댁, 밤색 관광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아니 허구의 세계 속 공간이지만, 마치 잊고 있던 고향을 만난 듯 그저 반갑다. 최서희, 어쩌면 그녀의 도도한 옷자락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마저 갖게 된다. 그래서일까 하동 섬진강, 지명조차 다감하다.
다 왔다는 안도감과 이제 시작이라는 기대감이 교차하며 구례 방면을 향해 19번 국도로 들어서자 이내 섬진강. 줄곧 틀어두었던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열었다.
우수수, 길 양편의 가로수들이 이마를 맞대고 바람에 시원하게 흔들린다. 앞으로는 지리산 자락이 준엄한 듯, 고독한 듯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그리고 그 모두를 품어 안고 길러내는 섬진강이 초록으로 출렁인다. 아무리 그리운 음악이라고, 신명나는 가락이라고 바람 소리만 할까. 음악도 끄고 수다도 접어 둔 채 그저 오감을 열고 강을 따라 달리자 긴 여정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하동 섬진강 푸른 물줄기
*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 하동 I.C를 빠져나와 구례 방면으로 19번 국도를 타면 섬진강을 옆으로 끼고 달리는 강변 드라이브 코스가 펼쳐진다. 하동에서 구례까지 19번 국도 상에는 평사리 민속마을, 고소성 군립공원, 화개장터, 쌍계사, 불일폭포 등 볼거리가 많다. 그리고 구례에 도착한 후 지리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구례 화엄사, 노고단, 지리산 온천 등이 인접해있다. 또, 화개장터 앞이나 하동읍내에서 다리로 섬진강을 건너면 861번 지방도로를 만나는데, 19번 국도와 나란히 강 건너를 달리는 861번 도로 쪽의 앙증맞은 풍광도 일품이다.
하동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 경상도의 남해, 통영, 고성과 전라남도의 여수, 순천 그리고 전라북도의 남원, 전주 등이 모두 한두 시간 거리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에 면해 있어 노고단, 피아골, 청학동 등도 가깝다.
초록의 벌판, 악양벌
오후 햇살에 잔물결 부서지는 섬진강에 넋을 놓으며 달린 지 이십 여 분, 연두빛 벌판이 물결처럼 펼쳐진다. 19번 국도 하나를 사이에 둔 초록의 물결, 어느 쪽이 강이고 어느 쪽이 벌인지 분간할 수 없이 똑 같이 푸르고 싱그럽다. 그리고 따뜻하다. 평사리를 먹여 살려온 악양벌이다. 최참판 댁의 영화를 있게 한 그 비옥한 토지다. 자그마치 55만평의 광대한 땅이다.
격동의 구한말, 수많은 영욕을 지켜본 드넓은 평야 앞에 숙연해진다. 어디 그 시절만 그랬으랴, 소설 속에서만 그랬으랴.
초록의 평원, 악양벌
하지만 드라마 토지 세트장인 최참판댁으로 향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그만 흥취가 깨어진다. 휴가철이라는 걸 도무지 실감할 수 없던 한가로운 도로와는 달리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과 눈에 익은 노점들의 모습 때문이다. 하지만 내친 길이라 차에서 내려서자 회색빛 시멘트 바닥에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이다.
소설 ‘토지’를 알기엔 한참 어린 아이들이지만 드라마 덕분으로 ‘토지’에 대해 제법 아는척을 해가며 언덕바지를 오르자 최참판 댁을 비롯해 김훈장댁, 김평산네, 막딸네 등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 돌담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최참판 댁을 비롯해 초가가 18채, 장터 상가가 11채에다 물레방아까지 갖추었으니 제법 마을의 모양새다. 또 세트장 앞에는 집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등장인물들의 사진을 첨부한 안내판이 붙어 있어 아이들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허구의 공간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인위적으로 조성된 마을 풍경은, 훼손된 고향처럼 생경스럽기만 했다.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정경
- 사진출처 : 인터넷 사이트 김휴림의 여행편지 -
최서희 역을 맡은 여배우의 사진 앞에서 수선을 떠는 아이들을 이끌고 최참판 댁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생경스런 풍경과는 달리 고택의 정취가 그대로였다. 옛집의 모양새에 신기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과 한참을 머물다 집을 나서기 위해 소슬 대문 앞에 섰다. 그러자 다시 악양벌판.
도로를 달리며 바라보았던 그 넓은 벌이 젖줄인 섬진강을 옆으로 끼고 지리산 준봉들을 뒤로 거느린 채 발 아래 펼쳐졌다. 땅을 소유하겠다는 최서희의 집념은 오만함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토지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고단한 허리 굽혀 거친 손길로 수확을 갈구하는 농부의 마음. 소슬 대문 앞에 서서 발 아래로 토지를 내려다보는 고고한 양반님네의 그 마음. 악양벌과 소슬 대문 사이의 먼 거리 만큼이나 아득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 남해고속도로 하동 I.C를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구레 방면으로 약 20분 거리
* 토지 : 박경리 作, 최참판 일가를 비롯해 하동 평사리 사람들이 겪어내는 격동의 구한말을 통해 삶과 역사를 그려낸 장대한 대하소설. 드라마로도 두 번 제작되었다.
고요에 잠기다
악양벌을 뒤로 하고 강변을 달린 지 10여분, 쌍계사 진입로에 다다랐다.
초입의 화개 장터는 예상대로 오일장의 정취는 간 데 없고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끌벅적한 풍물장터의 풍경 그대로였다. 화개장터를 지나쳐 길을 한 굽이 돌자 쌍계사 벚꽃길. 봄이면 상춘객들이 벚꽃보다 많아진다는 그 길에도 역시 녹음이 한창이다. 어느새 수긋해진 햇살 아래 진초록으로 어두워진 초록의 터널을 지나 쌍계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쌍계사 경내에 있는 옛집이라, 그 한 마디에 별다른 정보도 없이 덜컥 예약한 숙소였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청량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오 분여를 걷자 쌍계사 대웅전을 코 앞에 두고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 옆구리로 조그마한 샛길이 보인다. 도무지 집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숙소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서야 찾아 들어서자 울창한 수풀이다. 고개를 들어보아도 하늘 구경을 하기 쉽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오 분을 걸었을까, 무성한 수풀 사이로 처마가 보인다.
삐걱,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우람한 잎을 벋은 파초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초록으로 암팡진 바나나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리자 단아한 옛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쌍계별장
창호지 바른 창문과 고운 미소
쌍계별장은 본래 도원암이라는 암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사연인지 40년 전부터 숙소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옛집과 딱 어울리는 노부부가 터를 지키고 있다.
네 채의 아담한 기와집이 ㅁ자 모양으로 들어서 있는데 하나 같이 100년을 훌쩍 넘긴 건물들로 못을 하나도 박지 않고 지은 것들이다. 창문이며 방문에는 창호지가 발라져 있고, 집 뒤로 돌아가면 군불을 때는 아궁이가 겨울을 잔뜩 벼르고 있다. 주인 할아버지에게 묻자 겨울이면 나무로 불을 땐다고 한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 앞 툇마루에 앉아 고개를 들자 서까래가 나란하다. 절로 터지는 한숨을 가만 내쉬며 조금 눈길을 내리자 기와 지붕이 선한 곡선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고요가 내리기 시작한다.
*쌍계별장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번지. (055) 883 1665
- 기와집 4채에 총 6개의 방이 있으며, 숙박비는 4~5만원으로 방에 따라 다르다. 취사 시설이 따로 없기 때문에 취사를 원할 경우 휴대용 가스버너 등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 하지만, 미리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겨울철에는 미리 예약을 하면 찬바람을 가르고 산을 올라 군불 지핀 방에서 얼른 몸을 녹일 수 있다고 한다. 또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쌍계별장을 찾는 손님에게는 차 한 잔 대접하는 것이 이 집 인심이라고 하니 하동을 찾게 되면 꼭 한 번 들를 것을 권하고 싶다.
이틀
비가, 내리다.
어스름 새벽녘에 눈을 떴다. 아니, 눈이 떠졌다.
빗소리, 빗소리였다. 아이들이야 천지를 모르고 잠에 빠져 있는 채였지만 어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 없이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모처럼의 여행지에서, 그것도 여름 여행지에서의 난데없는 비라면 불평부터 터져 나올 만도 하건 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언어가 끼어들 자리가 거기에는 없었다.
댓돌에 떨어지는 빗소리, 흙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 파초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풀잎에 맺히는 빗소리. 서른의 중턱을 넘어서는 여인네들의 마음에 떨어지는 빗소리. 빗소리.
인터넷을 뒤지고 여행책자를 살펴보며 둘째 날 섬진강을 낱낱이 탐색하리라 작심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그런 계획 쯤 무위로 돌아가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아니, 그런 계획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쌍계별장 내 다원
툇마루에 그렇게 얼마를 앉아 있었을까. 주인 할아버지가 다가와 차 한 잔을 권했다. 쌍계별장 주인이 직접 지었다는 하얀 목조 건물이 있는데, 게 바로 차를 마시는 곳이라고 했다. 다원 바로 옆에 졸졸 흐르는 물이 불일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란다. 잦아든 빗줄기에 몸을 맡긴 채 종종걸음으로 차 방에 들어서니 소박한 다기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카세트 레코더까지 갖춰져 있다. 그리고 격자무니 하얀 창 너머로는 오래된 야생 차밭이 싱그럽다. 더 멀리로는 지리산이 보인다. 불일폭포에서 흘러내린다는 물을 받아 하동산 녹차를 우려내어 차를 마신다. 고요와, 고요만큼 맑은 차와 그리고 조금쯤 소박해진 마음과.
불일폭포에서 흘러내려온 맑디 맑은 물
* 우리나라에서 녹차로 유명한 곳은 경남 하동과 전남 보성.
평지에서 자라는 보성 녹차와는 달리 하동 녹차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는 성질로 옮겨 심으면 죽어버린다. 전국 최대의 야생 녹차 군락이 있는 지리산이 바로 하동과 인접해 있으니 하동 녹차는 야생의 그것이라 한다. 이런 하동 녹차의 성질 때문에 예전에 하동 여자들은 시집을 갈 때, 정절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녹차씨를 가져갔다고 한다.
정겨운 이름, 섬진강 기차 마을
어느새 비가 그쳤다. 툇마루에 양철 소반을 펼쳐 놓고 늦은 아침을 먹은 다음, 차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할머니의 배웅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다.
보통은 19번 국도가 섬진강 드라이브 코스라고 추천하지만, 주인 할아버지가 강 건너 길이 더 아담하고 좋다고 귀뜸 해주셨다. 남도대교가 없었을 때는 줄나룻배를 이용해 섬진강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조그마한 다리가 괜스리 밉살맞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식점이 즐비한 19번 국도변과는 달리 호젓한 강변길에 마음은 다시 넉넉해진다. 섬진강 기차 마을을 기대하며 구례를 향했다.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까만 목조 건물의 가정역.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강변의 풍경이 이곳이 상류임을 실감하게 한다. 물이 그리 깊지 않은 모양인지 강을 가로질러 징검다리까지 놓여 있다.
대여소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돌고 나니 다시 시장기가 몰려온다. 물놀이가 고팠던 아이들은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강물로 뛰어든다. 재첩을 잡는다고 수선을 떨지만 별 소득은 없다. 바지를 둥둥 걷고 물속을 뒤지던 할머니 한 분의 말씀을 들으니, 예전에는 그릇으로 퍼담으면 온통 재첩이었지만 아젠 전 같지 않다고 한다. 자연산 재첩 라면에 대한 부푼 꿈을 접고 패트 병에 담아온 불일 폭포 물로 라면을 끓인다. 섬진강 맑은 물을 가리키며 음식물 쓰레기 남기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참인데 기우였다. 라면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기차 시간 허둥지둥 증기 기차를 타고 곡성역으로 향했다.
곡성역 플랫폼
섬진강을 따라 이십 여분을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차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도로보다 이 미터 정도 높은 곳에 있는 철길이라 강이 한 눈에 바라보인다. 어디 강 뿐이랴. 강 건너 산이며, 지금을 지나 어제며. 느릿느릿 덜컹 덜컹 달리는 증기 기차에 앉아 다시 한 번 훌쩍, 오래 전의 시간으로 향한다. 곡성역에 다다르자 옛 역사가 시간을 거슬러 왔음을 더욱 실감케 한다. 목조 지붕을 얹은 플랫폼과 증기기관차. 그리고 앙증맞은 연못이며 산책로가 정겹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쌍계사 초입을 지나쳐 하동읍 쪽으로 달렸다. 쌍계별장 주인 할머니가 추천한 진짜 원조 재첩국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강변에 늘어선 그 많은 재첩국 집을 제치고 하동교육청 앞에 있는 식당이라니, 왠지 내키지 않았지만 현지인의 추천을 믿기로 했다. 이름 하여 동흥식당, 외관도 이름만큼이나 평범하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고 수저가 한두 번 오가자 이 집의 명성이 사실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10여가지의 맛깔스런 밑반찬에 시원한 재첩국과 갓 지은 듯한 쌀밥이 남도 음식 못지 않다. 흔히들 경상도 음식을 타박하곤 하는데, 그럴 때 대표 선수로 나설 만한 솜씨다.
* 섬진강 기차마을
- 가는 길 : 하동 I.C를 기점으로 보면,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구례에서 순천 방면 18번 국도, 그리고 선변리 삼거리에서 다시 곡성방면으로 17번 국도를 타면 된다. 가정역과 곡성역에 도착하기 전, 17번 국도와 18번 국도가 다시 만나는 삼거리의 압록 유원지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곳으로 풍부한 수량과 탁 트인 전망이 장관이다. 흔히 구례에서 압록 유원지까지 가는 17번 국도길이 섬진강 드라이브 코스 중 최고라고 한다. 하동 I.C에서 구례까지 약 40분, 다시 구례에서 곡성역까지 약 40분이 소요된다.
서울에서 기차마을로 곧 바로 내려간다면, 호남고속도로 전주 I.C로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남원을 거쳐 곡성까지 올 수 있다. 이 경우 전주에서 곡성까지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 전남 곡성군에서 1998년 전라선 개량화 공사로 폐선이 된 섬진강변 철로를 리모델링해 60명을 태울 수 있는 관광용 증기기관차로 구 곡성역에서 가정역 구간을 운행한다. 객차는 창이 투명하게 설계돼 있어 섬진강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증기기관차는 평일(곡성역 출발 시간 - 오전 11시, 오후 2시 // 가정역에서는 곡성역 출발 40분 후에 탑승 가능) 2회, 주말(곡성역 출발 시간오전 9시 반,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4시)에는 4차례 운행한다. 왕복 이용요금은 어른 5000원, 청소년과 경로우대자 4500원, 어린이 4000원이며 20명 이상 단체는 10% 할인된다.
또 곡성역에 있는 기차마을에는 1933년 지어진 옛 곡성역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시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전시용 증기기관 열차, 물놀이장, 철로자전거(이용 요금 1대당 4인 이내 1인당 2000원)등이 전시돼 있다.
- 문의 : 곡성역 (061) 362 7788 http://www.gstrain.co.kr/
* 동흥식당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 221-31 (055) 884 2257
- 재첩백반 1인분 5000원, 재첩 부침개 1인분 5000원
- 하동 I.C에서 19번 도로를 타고 하동읍 방면으로 달리다 하동 송림 맞은편 하동 교육청을 찾으면 된다.
사흘
공룡이 잠든 땅, 고성.
공룡 박물관에 공룡 발자국이라니, 조악하기 그지 없을 테지만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했다. 통영을 가기 위해 어차피 지나쳐야 할 곳이니 잠시 들른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쌍계별장 할아버지가 일러주신 대로 고속도로 대신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로 들어선다.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빠르겠다 싶어 둘러가는 길이 좀 초조하게 느껴졌는데, 시절을 잊게 하는 섬마을의 고요한 풍광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곳곳에 우거진 대나무숲과 붉은 열정의 백일홍이 바다를 배경으로 멋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1시간 30분에 걸친 남해 일주. 그리고 드디어 삼천포-창선 대교에 다다랐다.
삼천포- 창선대교는 남해와 사천을 잇는 6개의 연륙교이다. 창선대교, 단항교, 창선교, 늑도교, 초양교, 삼천포대교가 조그마한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바다를 건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올망졸망 섬들과 그 모두를 품어 안은 다도해가 퍽퍽하기만 한 우리네 마음까지 부드럽게 달래준다.
다리를 건너 20여분, 드디어 상족암 군립공원이다.
우선 공룡박물관부터 들르기로 했다. 대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꽤 가파른 언덕바지를 올라서자 다시 다사로운 남녘의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를 건너며 보았던 섬들이 여기서도 변함없이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웠고, 거친 산맥들도 바다의 위무 앞에 부드럽게 허리를 굽히고 누웠다. 햇볕이 제법 뜨겁고 바람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바다 앞임에랴. 한여름의 무더위를 잠시 잊어본다.
그러나 역시 아이들에겐 바다의 정취보다 입구에 세워진 티라노사우르스 모형이다. 아이들의 재촉으로 서둘러 들어선 박물관은 세 개 층에 걸쳐 총 5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공룡 모형은 물론이고 공룡알부터 발자국까지 다양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공룡의 달리는 속도를 실감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비롯해 공룡 및 공룡 시대에 대해 체계적으로 안내해놓은 장치들은 꽤 성의 있다. 층 영상실에서는 공룡 시대를 소재로 한 30분짜리 다큐멘타리가 상영되고 있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아 후일을 기약하고 박물관 관람을 마쳤다.
바다를 끼고 도는 산길을 따라 다시 10여분. 바닷가에 드문 드문 공룡 발자국이 찍혀 있는 상족암에 이르렀다. 시커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닷가는 남해라기보다는 얼핏 동해를 연상시키는 광활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바위 위로 드문 드문, 정말로 억겁의 세월을 이겨낸 공룡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공룡 발자국이라고 하면 사람이 들어가 누워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것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아주 앙증맞았다. 공룡이라니, 아이들의 흥밋거리로만 생각했는데 자신의 존재를 실증하겠다는 듯 버티고 있는 발자국을 보니 새삼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공룡발자국이 찍힌 암반
-사진출처:http://blog.naver.com/ixkim.do-
또한 상족암 해안에는 공룡발자국 뿐만 아니라 촛대바위, 병풍바위 등 기암절벽이 바다와 함께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층암단애로 이루어진 바닷가를 따라 가면 해식동굴 탐사도 가능하다. 아이들은 동굴 탐사를 하겠다고 졸라대지만, 달아 공원 노을에 대한 추억이 더 간절해 그만 돌아섰다.
* 고성 공룡 박물관
-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85번지 (055) 670 2825
- 홈페이지 http://www.goseong.go.kr/dino
- 남해 고속도로 사천 I.C에서 삼천포 방면으로 직진(20여분)후 남일대 해수욕장 방면으 로 좌회전. 고성으로 진입하면 표지판이 많아 찾는데 어려움이 없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하동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로 간 다음, 남해 일주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다. 그리고 삼천포-창선대교를 건너 1010번 지방도로를 타면 이내 고성군 하이면 상족암이다.
- 관람료 : 어른 3000원, 어린이 1500원이며 30인 이상 단체는 할인 받을 수 있다.
- 관람시간 :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이며 동절기는 오후 5시 폐관한다. 또, 명절 당일과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남해 최고의 미항, 통영
상족암을 나서 1010번 지방도로를 타고 바닷길을 달린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숨바꼭질을 하는 섬과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에 마음을 한껏 적신다. 그리고 고성읍내를 거쳐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에 이르렀다.
과연 그 말은 과장이 아니다. 유난히 하얀 건물이 많아서일까, 하늘도 더없이 푸르다. 갯내를 잔뜩 머금은 바람을 따라 통영항에 도착하니 바다를 빼곡히 메운 고깃배들 또한 정겹다.
아줌마들의 여행길에 쇼핑이 빠질까. 유명한 통영 멸치를 찾아 통영항 앞에 있는 중앙시장을 둘러보았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멸치들이 크기에 맞게 종이 상자에 담겨 좌판에 즐비했다. 하나 먹어보라고 권하는 손길에 새침을 떨며 맛을 보았더니 비리지도 않을뿐더러 감칠맛이 좋다. 하나씩 사들었다가 떠오르는 얼굴들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 두세 통씩 사고 만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로 끝낼 수 있을까. 여기저기 자판에 싱싱한 해산물이 풍성하다. 아이 주먹만한 소라를 두 봉지 넉넉하게 사서 아이스박스에 챙겨 담는다. 마지막 날 밤, 소라를 삶아 술 한 잔 기울이면 또 멋진 추억의 한 장면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통영에 왔으니 무얼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을 뒤진 걸로도 모자라 통영으로 시집간 친구가 있다는 사람에게까지 물어 찾아간 21년 전통의 한일김밥이 바로 인근 김밥거리에 있다. 비닐에 김밥과 오징어·어묵 무침, 무김치를 따로 따로 싼 다음 하얀 종이에 다시 포장해서 주는 것을 보니 원조 충무 김밥이라는 간판 문구에 믿음이 간다. 아침에 먹고 남은 밥으로 싼 주먹밥으로 점심을 때운 아이들이 시장기를 호소했지만, 충무 김밥을 포장한 다음 서둘러 차를 몰았다. 달아공원의 일몰, 그 시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통영 가는 길 - 대전~통영 고속도로는 현재 사천 I.C.까지만 개통된 상태. 따라서 사천 I.C로 빠져나와서 33번 국도를 타고 고성까지, 그리고 다시 14번 국 도를 타고 통영으로 들어가야 한다.
* 한일김밥 - 통영시 중앙동 문화마당 앞 김밥거리, (055) 645 2647, 1인분 3000원
저무는 것에 대한 애닲은 마음
통영 제일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산양일주로를 따라 이십 분. 구비 구비 산길을 돌 때마다 저무는 해가 얼굴을 숨겼다 나타났다 우리를 재촉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 분 남짓의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해가 수면에 아슬아슬 턱을 걸치고 있는 참이다. 그리고 뒤를 돌자 동편에서는 흐릿하지만 분명, 달이다. 아직 채 기세가 꺾이지 않은 해와 달이 마주 보고 있는 장관에 아이들도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신기하게 여긴다.
주섬주섬 자리를 깔고 앉아 충무김밥을 꺼냈다. 알싸한 깍두기에 오징어무침. 찰진 김밥을 먹으며 석양을 바라본다. 느릿느릿,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늑장을 부리는 것 같았던 해가 어느새 수면 아래로 풍덩 빠져든다. 그러자 붉그레하던 바다가 보랏빛으로 변한다. 맞은편 잿빛 하늘에선 달이 하얗게 얼굴을 내민다.
통영 달아 공원에서 바라본 노을
매점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 한 잔을 후식 삼아 달을 등지고 저무는 해를 향해 앉았다. 달 구경 하는 곳이라고 이름까지 달아공원이라고는 하지만, 떠오르는 첫 달보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크기만 하다. 애닲은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난데없는 오카리나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진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바라보니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어부의 노래를 오카리나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 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빛에 물들어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 놓고
고기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는 그 곳
아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졌다. 연주자는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고 일행이 일어나 연주자를 소개하는데, 유명한 나무 오카리나 제작자라고 한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양인지 고개를 드는 법도 없이 ‘섬집 아이’가 뒤를 잇는다.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 그 노래에 취한 것일까 어느새 바다가 검게 잠든다. 한낮의 기색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그 연주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아 어부의 노래 오카리나, 라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의 글이 검색되었다. 사진도 함께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 사진 뒤편에는 내 모습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덧글을 달고 다시 인터넷 서핑. 이번엔 연주자의 블로그가 검색되었다. 나무 오카리나 제작자 고광일씨였다.
고광일씨가 제작한 흑단나무 오카리나
-사진 출처: 인터넷 사이트 나무소리 -
나무 오카리나와 인디언 플룻을 수제로 제작하는 고광일 씨는 달아 공원에 오카리나 카페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석양과 월출과 단아한 음악과, 사람들.
상상 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언젠가, 언젠가 달아공원에서 다시 듣게 될 오카리나 연주를 기대하며 고광일 씨의 연주를 내 블로그에 오롯이 옮겼다.
* 산양일주로 - 꿈의 60리라 불리는 통영 산양일주로는 다도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23KM 구간의 드라이브 코스. 통영대교 옆 102번 도로를 타고 산양 일주로를 달리면 달아공원을 거쳐 충무마리나리조트 앞까지 다다른다.
* 나무 오카리나는 흑단나무, 단풍나무, 장미나무 등을 재료로 세심한 과정을 거쳐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데, 흔히 아는 도자기 오카리나와는 또 다른 음색이다. 나무 오카리나 제작자 고광일 씨의 홈페이지에 가면 직접 연주를 감상 할 수 있다.
www.woodenocarina.com
월광의 바다
피로를 푸는데 목욕보다 좋은 게 있을까. 통영 마리나 리조트 사우나에 가면 탕 안에서 바다가 보인다는 말을 듣고는 마리나 리조트로 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탕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여탕과는 달리 남탕에만 수건이나 비누를 비치한다고 여자들의 원성을 사던 목욕탕이, 이제는 위치로 차별을 하나 싶어 씁쓸하다. 괜히 속은 기분에 투덜거리며 나와 산책로가 있다는 리조트 뒤편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리나리조트 뒤 산책로에서 바라본 월광
교교한 달빛이 바다를 비추고 있다. 별빛조차 숨을 죽이는 휘엉청한 달빛이 검은 하늘 한가운데에 도도하게 박혀 있고, 그 아래 검은 바다 위로 수줍은 달그림자가 하얗게 몸을 떨고 있다.
눈부신 햇살의 바다, 붉은 석양의 바다. 그리고 하얀 달빛의 검은 바다. 고작 하루라는 시간 동안에도 바다는 얼마나 다채롭게 제 모습을 바꾸는지. 바뀌는 듯 하면서도 또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 그대로인 바다.
목책을 두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달아 공원에서 들었던 노래들을 나지막이 부른다. 반주도 없이, 술 한 잔 걸치지 않아도, 절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달빛에 취한다더니, 참말 그렇다. 처얼썩, 바위를 치는 파도 소리에 취기가 더 오른다. 가슴이 홧홧하고 두근거린다.
* 충무 마리나 리조트
- 경남 통영시 도남2동 645번지. (055) 643-8000
- 남해를 조망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해양 리조트. 총 272개의 객실과 부대시설.
- 사우나 : 오전 6시~ 오후 9시. 이용요금은 1인당 5000원
나흘
햇빛 쏟아지는, 물결 쏟아지는.
마지막 날 아침.
아쉬운 마음으로 행장을 꾸려 놓고 지리산 10경 중 제 7경이라는 불일폭포로 향했다. 왕복 세 시간이라는 말에 아이들의 투정이 지레 두려워 포기할까 망설이다 마침내 길을 잡았다.
불일폭포로 가려면 쌍계사 경내를 지나야 하는데, 마침 공사 중이라 고찰의 정취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폭포로 향하는 길 초입의 반달곰 경고 표지판은 이곳이 깊은 산중임을 실감하게 했다.
반달곰을 만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성큼성큼 산길을 오르는 아이들. 날랜 걸음이 예사롭지 않다. 쳐지는 건 오히려 어른들 쪽이다. 그렇게 한 시간 반 남짓. 지칠 만할 때 널찍한 평지가 나타난다. 불일 평전이다. 그리고 평전의 안쪽으로 오두막이 한 채 들어앉았다. 바로 불일휴게소다. 설악이 그렇듯이, 산중의 난데없는 저자거리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기 십상인데 불일휴게소는 오히려 정취를 더 해준다.
불일 평전의 소망탑
흙벽에 이엉을 얹은 옛집 앞에 키 큰 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마당 한가운데 키 큰 나무 아래에 과자며 음료수 몇 개가 얌전히 놓여 있다. 그나마도 무인 판매다. 흰 수염 늘어뜨린 주인장의 미소 또한 신비롭다. 막걸리며 파전도 함께 팔고 있지만, 어디서도 눈살 찌푸리게 할 술판은 없다. 초가집 옆으로는 깨끗한 약수터가 있고, 그 뒤로는 누구의 비원인지 돌탑들이 옹종 하게 모여 있다. 달디 단 약수로 목을 축이고 조그만 연못을 지나쳐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법 험한 길이지만,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모두 힘을
내어 본다.
그리고 숨이 가빠올 무렵, 폭포 소리가 들려온다. 계곡물이든 시냇물이든, 물가가 가까워진다는 징조도 없이 벼락 같이 물줄기가 터져 내린다. 소리만 그런 게 아니다. 폭포 소리를 따라 좁은 소로를 돌아 들어가니 불일 폭포다.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까지 나무가 울창하다. 좁다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카메라로 다 잡을 수 없는 긴 물줄기다. 무려 62미터에 달한다. 그 길고도 거센 물줄기가 떨어져 내려 고인 곳이 바로 용추못과 학못이다. 푸른 잎 몇 장, 햇살 한 조각, 깊은 물 위를 떠돈다.
* 쌍계사
- 서기 840년 신라 문성왕 때 창건되었다. 처음엔 옥천사라고 불렀으나 같은 이름의 사찰이 또 있어 혼란을 일으킨다 해서 헌강왕 때 쌍계사로 개명했다.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623년 조선 인종 때 복구·중수된 것이다.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쓴 국보 제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초록의 기억을 간직하고
하동 I.C를 타고 곧장 고속도로를 타면 좀 빠를 수 있겠지만, 섬진강이 아쉬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쌍계사 초입에서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 족으로 달린다. 남도대교 건너 편의 아담한 길도 좋지만 19번 국도의 우거진 나무 사이를 달리는 것도 또한 일품이다. 섬진강을 따라 한참을 달려 다시 남원. 춘향의 고향이라는 말에 아이들도 고개를 기웃거린다. 광한루를 들를 여유가 없어 길을 재촉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무논의 초록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국도를 택하길 잘했다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리고 다시 전주를 거쳐 호남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고속도로를 타자마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곯아떨어진다. 지치지도 않는다고 감탄을 하였더니 여행의 흥분으로 버틴 거였나 보다. 차 안에는 조용한 음악 소리만 들린다.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와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그저 조용히, 달린다.
스물 남짓의 기억으로 돌아가 깔깔대기도 하고 우수에 잠기기도 하면서 보면 나흘간. 이제 어둠이 내린 검은 도로를 따라 달리면 다시 일상이다. 주민등록증에 선명하게 찍힌 숫자들처럼 에누리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빛바랜 스물의 기억이 그러하듯이 추억은 봄날의 햇살처럼 빛나리라. 남루한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문득 초록의 기억이 눈부시게 빛나리라. 그렇게, 그렇게 기억되리라.
* 하동에서 서울까지
- 고속도로 운행을 즐기지 않는 운전자라면, 하동에서 남원까지 19번 국도를 타고 다시 남원에서 전주 I.C까지 17번 국도를 타는 코스를 권한다. 섬진강 드라이브길 만큼 눈에 띄는 풍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호젓한 국도를 따라 남도의 삶을 엿보며 달릴 수 있다. 전주 I.C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탄 다음, 시간이 촉박하다면 천안-논산 민자 고속도로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제한 속도가 110KM이며 거의 직선으로 천안과 논산 간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도로이용료는 9000원으로 조금 비싼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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