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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7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코 7,14-23
마음의 작동원리를 알면 무슨 죄에서든 벗어날 수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만 우리를 더럽힐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오염의 원천이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있을 때 성수가 계속 더러워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원인을 밖에서 찾았습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수가 항아리에서 줄어들자 그 안에 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엎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가지에서 옻칠이 벗겨지며 성수를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나를 더럽히는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람에게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욕망이 시작됩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악의도 그렇고 불륜을 저지르거나 남의 것을 탐내고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그렇습니다.
위 여러 우리를 더럽히는 죄들은 ‘내가 ~을 하고 싶다’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 나의 마음에서 모든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단순해집니다. 모든 죄의 원인인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마음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마음의 작동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 45화에 최면으로 금연을 하게 된 사례가 나옵니다.
이남현 씨는 담배를 17년 정도 피웠습니다. 지금은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 없었는데 최면으로 금연 성공 5년 차가 됩니다.
편안히 눈을 감고 왼쪽 손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 담배 피울 때의 장소, 느낌, 상황들을 다 담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담습니다.
싫어하는 사람, 무서운 것, 혐오스러운 것들을 담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오른손에 있는 이미지를 왼손에 있는 이미지에 마구 섞어 비벼줍니다.
내가 싫어하는 이미지가 담배 속으로 다 스며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 부정적인 이미지와 섞인 담배의 이미지를 가슴속으로 깊게 밀어 넣어줍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효과가 더욱 좋다고 합니다.
이남현 씨는 마음의 작동원리를 이용하여 금연을 한 사례입니다.
마음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동안 마음이 담배가 행복한 것이라 믿고 바라고
사랑해왔습니다.
머리는 그저 마음을 따를 뿐입니다.
머리로 아무리 담배에서 벗어나려 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바로 마음이 담배가 행복이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바라지도 사랑하지도 않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남현 씨는 최면으로 그렇게 담배에 안 좋은 이미지를 가미함으로써 담배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마음이 믿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계속 가슴에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니 담배를 만났을 때 이전보다 덜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끊기가 쉬워집니다.
마음의 작동원리만 알면 못 할 게 없는 것입니다.
최면이어도 담배를 끊으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앨라배마에서 자란 한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약 15년 전, 학교의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불량배가 싸움을 걸어오더니 주먹으로 때려 그를 기절시켰습니다.
이 소년은 정신을 차린 뒤, 그 불량배를 죽이겠다며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22구경 권총을 집어 들고 그 불량배를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 불량배가 사정권에 들어왔고, 소년이 권총을 쏘기만 하면 그 불량배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지금 방아쇠를 당기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러고는 마음속에 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판가름 날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감옥에 가는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뚜렷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감옥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고통은 복수를 하겠다는 기대감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결국 그는 목표물을 바꿔 나무에 총을 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미식축구와 야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보 잭슨(Bo Jackson)입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감옥을 연상함으로써 받는
고통이 복수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소년을 죽이는 만족감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훨씬 더 강력했다고 토로했습니다.
마음의 초점을 바꾸고 고통과 기쁨 중에서 하나를 결정함으로써 이 소년은 미래가 없을 뻔했던 삶 대신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성공적인 운동선수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마음은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희망하게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꾸려면 행복의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행복의 기준은 정체성에서 옵니다.
개는 네 발로 걷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고 사람은 두 발로 걷는 게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두 발로 걷는 개도 있고 네발로 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망은 자신이 누구냐고 믿는 정체성에서 그 정체성에 있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바라는 마음입니다.
욕망으로 사람이 타락하기도 하고 거룩해지기도 합니다.
피조물은 좋은 것을 욕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창조자와 하나가 되었다고 믿을 때 죄가 아닌 사랑이 행복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마치 아이였다가 갑자기 부모가 된 사람처럼.
보 잭슨은 감옥에 있는 것보다 밖에 있는 것이 더 행복이라고 여겼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고 하늘 나라에 사는 존재라고 믿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7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코 7,14-23
<승려과 술꾼>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가면 그 절간이 술집이 된다."
생각할수록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말인 듯 합니다.
우리가 매순간 내쉬는 "숨"과 연결시키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숨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숨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한 맑은 영혼이 들이마시는 숨은 그 자체로 영혼의 양식이 되며, 내뱉는 숨결은 그 자체로 감미로운 기도가 됩니다.
이런 숨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숨을 쉬는 사람이며, 매 순간 성령을 들이마시는 사람이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반대로 성령을 거슬러 살아가는 한 영혼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은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호흡일 따름입니다.
거기에 과도한 권력욕이나 극단적인 이기심이 더해지면 그 숨결은 그야말로 죽음의 숨결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숨을 쉬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끊임없는 자기 버림, 자기 봉헌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숨을 통해 우리 육체 안에서는 매 순간 생명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진정한 숨은 기도입니다.
진정한 숨은 하느님께 대한 지속적인 봉헌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숨에 대한 의식과 통제는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므로 보다 자주 자신의 숨결을 의식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매순간의 호흡을 기도화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내쉬는 날숨은 나를 비우고 죽이는 숨입니다.
들이키는 숨은 하느님의 영과 생명을 수용하는 숨입니다.
이런 들숨과 날숨의 반복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나날이 성령 안에서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의 숨, 성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강론>
(2024. 2. 7. 수)
(마르 7,14-23)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ㄴ-15).”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마르 7,18ㄴ-19ㄱ).”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ㄴ-23).”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선한 것이다.
2) 죄는 ‘내가’ 짓는 것이다. 남 탓이나 외부 탓을 하지 마라.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도 없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 가운데에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창조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짓게 만든 사탄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사탄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원래 천사였는데 스스로 타락해서 사탄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죄인으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죄를 짓도록 유혹한 존재입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 자신이 지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에게 그 유혹의 책임을 물으셨습니다(창세 3,14-15).
아담과 하와에게는 죄의 책임을 물으셨고(창세 3,16-19).
사람 안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말씀에 대해서, “사람도, 사람의 마음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왜 사람 안에서(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오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람도, 사람의 마음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본래 선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어떻게 생긴 것인가?
모릅니다. ‘악’과 ‘죄’의 기원은 아직도 미스터리(신비)에 속한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안에는 ‘악한 것들’만 있는가?
아닙니다. ‘선한 것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악한 것들’보다 ‘선한 것들’이 더 많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5).”
뜻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마음의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것을 내놓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된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자유의지’는 선한 사람이 될 것인지, 악한 사람이 될 것인지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내 의지가 내 생각대로(바람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18-25ㄱ).”
위대한 사도인 바오로 사도마저도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라고 고백할 정도로,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승리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싸움에서 선이 승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갈등과 싸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죄는 ‘내가’ 짓는 것이다.” 라는 말은,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다.” 라는 말과 짝을 이룹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내가 하는 회개의 공로는 ‘나의 것’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하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저앉아 있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처음부터 죄를 안 짓는 것이 더 좋은 일이지만,
죄를 지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는 것도 훌륭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