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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 (67편)*
* 홍씨 가문의 세손(世孫) 제거 시도 * 사도세자 를 제거한 후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의 권력은 정점에 달해 나라가 사실상 그들 형제의 손아귀에 있다싶이했다.
홍인한은 세손 이산이 즉위한 후 사도세자의 복수가 두려워 세손 제거에 나섰다.
영조는 82세가 되면서 세손 이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며,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대신들을 모았다.
그때 세손은 이미 24세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영조가 세손에게 정치를 알게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자, 좌의정 홍인한이 나섰다.
세손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國事)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겨?)
이 무슨 망발(妄發)인가?
이 말은 세손(世孫)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조가 화를 내며 대리청정의 명을 승지에게 받아 쓰도록 하자 홍인한은 승지의 앞을 가로막고 앉아서 전교를 받아 쓰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하교(下敎)를 들을 수 없게 방해했다.
이미 팍삭 늙은 영조(英祖)는 권신들에게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세손은 영조 옆에 묵묵히 앉아서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 의 모든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마음속에 인(刃)을 품고 있었겠지?)
결국 영조(英祖)는 옥새를 몰래 세손궁으로 옮겨놓고 홍인한을 파직시켜 버렸다.
그러나 노론들은 세손(世孫)이 왕위를 잇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해를 다했다.
이러한 홍인한의 행동이나 노론들의 세손(世孫) 즉위 방해기도는 그 자체가 역모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영조 (英祖)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노론들은 못 되게 굴었다.
영조가 늙어서 힘을 못 쓰자 🐕 같은 노론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다음 왕(王)을 정하려 했던 것이다.
(노론! 너희들 이리로 좀 오시게나~)
이렇게 노론(老論)들의 모함과 방해에 세손(世孫)이 공포에 떨고 있을 무렵, 세손편에 선 인물들이 홍국영, 정민시 등 세손궁의 소수 신료들과 홍씨 집안의 전횡(專橫)에 분노하는 일부 강직한 선비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영조가 83세로 세상을 떴고, 정조(正祖)가 25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영조는 좀 더 일찍 정조 (正祖)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거나 선위할 수 있었으나, 영조는 끝까지 버티었다.
자신이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사건을 손자인 정조(正祖)가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를 관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조(正祖)는 대리청정 (代理聽政)한 지 두 달만에 영조에게 중대한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청천벽력 (靑天霹靂) 이었다
차마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말들이 실려 있으니,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를 몽땅 지워 없애자는 상소였다.
이 말을 하는 세손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마음 나도 알아요~ㅠㅠ)
조선 왕실 400년 역사상 1년치를 통째로 없애자는 상소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영조 (英祖)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를 없애도록 했고, 대신 정조(正祖)의 상소문을 사고에 간직해 두도록 했다.
이로 인해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으며, 이는 앞으로 닥칠 피바람을 예고 하는 것이었다.
(승정원 일기) 영조(英祖) 말년에는 국정이 문란했고, 척신들과 권신들이 발호(跋扈)했다.
영조가 왕을 너무 오래 해먹어서 정치 자체가 지겨운 데다, 팍삭 늙어서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조(英祖)가 사랑하던 사도세자의 친누나 화완옹주를 궁에 들어와 살도록 했을 때 정후겸(鄭厚謙)이란 인물이 양자로 뽑혀 들어왔다.
영조 45년이 되자 정후겸을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이 인간이 설치게 되었다.
당시 정후겸(鄭厚謙)은 겨우 스물 한 살 이었는데 권세가 막강했고,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 홍익한, 김상로와 같이 협력했으나 결국 정조(正祖) 즉위 후 사사되었다.
오죽하면 스물 한 살짜리 정후겸에게 사도세자의 외숙인 홍인한이 로비를 해서 호조판서가 될 정도였으니 영조(英祖)도 볼장 다 본 것 이었다.
영조(英祖)가 나이가 많이 들어 골골하게 되자 세손은 영조의 병 수발을 위하여 직접 을 펴 놓고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조(正祖)가 나중에 의서를 쓸 정도로 의학에 조예가 깊어진 것은 영조(英祖)의 병 수발을 들면서 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세손(世孫)의 병 수발은 영조가 죽기까지 11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 명의(名醫) 이헌길(李獻吉) *
18세기 말 영조(英祖) 때 조선에 역질이 크게 돌아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죽었다.
역질은 마마라고도 (홍역, 천연두) 불렸는데 당시에는 바이러스로 발병하는 천연두에 대한 연구도 없었고, 마땅한 처방도 없었으므로 병에 걸리면 속수무책 으로 죽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마마(媽媽)는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마마가 걸린 환자는 도성 밖으로 쫓겨났고, 살던 집은 태워버려 도성 곳곳에서 집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에 가득 찰 정도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제주도에서만 2만여 명이 죽었을 정도로 마마(媽媽)가 맹위를 떨쳤다.
이때 왕실의 후손으로 의원인 이헌길이 백성들의 병을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병에 걸리면 의원을 찾기보다 무당이나 성황당을 찾아 굿을 하든지 빌었다.
더구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비싼 약재를 구입하거나 의원을 부를 돈이 없었다.
이헌길(李獻吉)도 바이러스를 알 턱이 없었으나,홍역에 대한 대중요법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오홀~대단한데)
그의 처방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건지자 그가 움직이는 곳이면 사람들이 떼거리로 따라다니는 바람에 이헌길(李獻吉)의 뒤에는 뿌연 먼지가 피어올라, 사람들은 먼지 구름만 보고서도 이헌길(李獻吉)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살린 사람 중에 저명한 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이 있다.
정약용 (丁若鏞)은 어렸을 때 마마(媽媽)에 걸렸다가 이헌길에게 치료받고 완쾌하여 나중에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중환(李重煥)이 조선의 팔도에 대해 쓴 지리책이다
사대부가 살기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청담 이중환(李重煥)은 성호 이익의 재종손으로 남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빌어먹을, 지금까지 어떤 인물에 대해 쓰려면 꼭 그 집안의 배경을 밝혀야 하고, 그 배경이라는 것이 '어느 당파에 속해 있는가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중환(李重煥)의 집안도 남인이었기 때문에 이중환 (李重煥)은 목호룡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집권 노론의 탄압을 받아 여러차례 유배생활을 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우한 처지를 당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일찌감치 관로의 뜻을 접은 이중환(李重煥)은 조선의 국토 곳곳을 누비면서 산수(山水)와 생리(生利), 인심(人心)을 관찰하여 1751년 황산강 가의 팔괘정에서 를 저술했다.
(팔괘정) 는 사민총론, 팔도총론, 북거총론, 총론 등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민총론 (四民總論)'에서는 사농공상 (士農工商)의 유래,
사대부의 역할,
살 만한 곳에 관한 내용을, '팔도총론'에서는 전국 팔도의 지형과 역사, 사람들의 생활 모습 등을 설명하며 자연환경과 사람의 생활 사이의 관계를 찾으려고 했다.
총론 에서는 살기 좋은 곳의 조건들을 설명했고, '총론'에서는 사대부에 대한 생각을 담아 양반들이 하찮게 여겼던 상업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단순한 지리서가 아닌
조선의 역사, 사회, 문화, 국방, 외교, 지리, 물산 등 전분야를 망라하는 실학 사상을 담은 인문지리서라 할 수 있으며,
그동안 군현별로 쓰여진 백과사전식 지지(地志)에서 우리나라를 총체적으로 다룬 새로운 지리지(地理志)의 효시 (嚆矢)라고 볼 수 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68편)*
역적(逆賊)의 아들, 왕(王)이 되다
*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헌신 *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이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10세에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고,
16세가 된 1750년에 첫째 아들 의소세손 을 낳았다.
그러나 의소세손이 태어난 지 2년 만에 요절해 그 명을 다했고, 그해 가을 또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정조 이산(李祘)이다.
영조(英祖)가 사도세자를 폐서인(廢庶人)시켜 평민으로 만들자, 세자빈 홍씨는 28세의 나이에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사도세자가 복위되면서 그녀 역시 세자빈 신분을 되찾아 궁궐로 돌아왔다.
이제 홍씨에게 남은 희망은 오로지 아들을 잘 키워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시아버지 영조(英祖)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홍씨는 궁궐로 다시 돌아간 뒤, 시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이런 감사의 말을 전했다.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입니다."
(그런게야? 진짜루?ㅠㅠ)
며느리가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 생각했던 영조(英祖)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았다."
내가 너를 볼 마음이 편치 않고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고맙구나."
영조(英祖)는 며느리 홍씨의 효행을 칭찬하고 표창을 내렸다.
이궁~ 아들을 죽여놓고 퍽이나 마음 편하겠다!
홍씨는 자신을 낮추어 시아버지의 신임을 얻었으니 ' 권력을 위해 남편을 버리고 친정만을 염려한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물러설 때와 자신을 낮춰야 할 때를 분명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현명한 처신이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은 뒤,
세손인 이산(李祘)이 영조와 살게 되면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아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때 혜경궁 홍씨는 혹시라도 어린 아들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기라도 하면 영조 눈밖에 날까봐
어린 아들을 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렸다고 한다.강인한 여성...바로 혜경궁 홍씨였다.
* 과인은 사도세자 의 아들이다 *
궁궐로 돌아간 이산(李祘)은 10년이 넘게 동궁 수업을 받으면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일은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시집살이 하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라고 하듯이 이산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 앞에서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했다.
그리고 드디어 왕(王)이 된 그 날!25세의 이산(李祘)은 그동안 마음속으로 품었던 말을 선언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실록 -
당시 노론 대신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10년 넘게 세손 수업을 받으며,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말을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으니,
아마 왕의 이 한마디는 곧 '노론 이놈들! 다 죽여버리겠다.'라고 들렸을지 모른다.
정조(正祖)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사도세자를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사당인 경모궁을 조성했다.
경모궁(景慕宮)은 오늘날 서울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아쉽게도 사당은 전해지지 않고, 그 터를 기리는 석단만 남아있다.
그런데 어째서 경모궁이 서울대 병원 자리에 있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정조가 거주하는 창경궁과 마주해 보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향한 아들 정조의 뜨거운 효심이 느껴진다.
*호학군주 정조(正祖)의 등극*
이산(李祘) 정조는 1776년 25세로 왕위에 올라 24년간을 재위한 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개혁을 지향한 호학군주로서 조선 왕조에서 밥 값을 제대로 한 왕 서열에서 세종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만하다.
(제가 좋아하는 왕이어유~~ㅎㅎ)
조선 왕조사상 가장 지적이었던 두 왕은 책을 하도 많이 읽는 바람에 둘 다 눈을 버릴 정도였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정도가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 괜찮은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영.정조시대에는 백성들이 편안히 잘 먹고 잘 살았을까?
꿈 같은 얘기이다.
조선 중기 이후 썩어버린 조정에서는 권력을 잡은 당파들이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채 서로 죽고 죽이는 모함질에 바빴고, 지방 수령들은 백성들의 고혈(膏血) 을 짜내어 자기 배를 채우기에 정신이 없었다.
가뭄 때마다 굶어죽은 자가 길바닥에 가득했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유리걸식(流離乞食)에 나서거나 자청하여 노비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초적(草賊)이 되었다.
요대목에서 초적(草賊) 에대하여 잠깐!!
초적(草賊)은
그대로 풀이하면 풀숲에 숨어 지내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주로 한국 중세와 근세 사료에서 정식 군대가 아닌 민란 세력이나 도적 떼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초적이 갖는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적은 평범한 농민들이 가혹한 수탈, 기근, 또는 정치적 혼란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 산이나 섬으로 숨어들면서 형성되었습니다.
단순히 재물을 탐하는 일반적인 강도와는 달리,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생존을 도모하는 유망민(流亡民)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초적이 창궐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진성여왕 때의 '원종과 애노의 난'이 있으며, 이들 중 규모가 커진 세력이 견훤이나 궁예 같은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고려 시대: 무신정권기 급격한 수탈에 저항하며 운광, 명학소의 망이·망소이 등이 초적의 형태로 활동했습니다.
조선 시대: 명종 대의 임꺽정이 대표적입니다.
황해도 일대의 갈대밭(구월산 등)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기에 전형적인 초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화적(火賊)' 및 '수적(水賊)'과의 차이*
초적: 산이나 들풀 사이에 숨어 지내는 무리.
화적: 주로 밤에 불을 지르고 민가를 습격하는 무리.
수적: 강이나 바다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무리.
초적은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민생고가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병리 현상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때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의적'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국가 기록(실록 등)에서는 엄격히 소탕해야 할 반란군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그나마 영. 정조시대에는 구휼이 자주 있어 좀 나은 편에 들었지만,백성들의 생활은 짐승들의 생활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정조(正祖)는 재위기간 동안 조선 왕조사상 가장 많은 암행어사를 파견한 임금이었다.
재위 24년간 60회에 걸쳐 암행어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대략 5개월에 한 명씩 파견한 셈이다.
특히 정조(正祖) 는 측근 신하들을 암행어사나 지방관 으로 보내 백성들의 생활상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하여 새로운 개혁방안을 강구토록 했다.
다음은 암행어사로 나갔던 정약용의 <적성촌의 한 집에서>라는 시로 그 시대농촌의 참상을 가늠해보자!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처럼 누웠는데 겨울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드러났다.
묵은 재에 눈 덮인 아궁이는 차갑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스며든다.
집안의 물건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두 팔아도 7~8전이 안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는 헝겊으로 발라 막고 무너앉은 시렁대 새끼줄로 얽어맸네.
놋수저는 이미 이정에게 빼앗기고 무쇠 솥은 이웃 부자가 빼앗아갔네
검푸르고 해진 무명이불 한 채뿐인데 부부유별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구나.
어깨 팔뚝 드러난 적삼 입은 어린 것들 한번도 바지 버선 못 입었으리.
다섯 살 큰 아이는 기병으로 올라 있고
세 살 작은 애도 군적에 올라 있네.
두 아이 군포로 500전을 바치고 나니 죽기나 바랄 뿐 옷이 무슨 소용이랴
이것이 조선 백성들의 평균 삶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이 시로 표현한 위의 동네는 그나마 괜찮은 지방관이 다스리는 지역이었고, 탐관오리가 지방관인 지역은 그 참상이 말로 다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잘 살고 잘 먹었던 인간들은 전 인구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양반계층 뿐이었다
그러니 정조의 개혁이 미완으로 끝났음이 아쉬울 수 밖에...
가슴아픈 사연들이 발생하였으나~~~
